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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비전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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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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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정휘 |
2대 이영민 |
3대 이유형 |
4대 김화집 |
5대 김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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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배종호 |
7대 김용식 |
8대 주영광 |
9대 김성간 |
10대 김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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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김규환 |
12대 민병대 |
13대 정남식 |
14대 김용식 |
15대 민병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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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주영광 |
17대 김용식 |
18대 김규환 |
19대 민병대 |
20대 김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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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박규정 |
22대 민병대 |
23대 박일갑 |
24대 김규환 |
25대 정남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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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대 한창화 |
27대 안종수 |
28대 장경환 |
29대 박일갑 |
30대 김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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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 강준영 |
32대 한홍기 |
33대 홍덕영 |
34대 박병석 |
35대 함흥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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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민병대 |
37대 문정식 |
38대 최영근 |
39대 함흥철 |
40대 문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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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대 최정민 |
42대 김정남 |
43대 함흥철 |
44대 장경환 |
45대 김정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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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대 최은택 |
47대 조윤옥 |
48대 박종환 |
49대 문정식 |
50대 김정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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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대 박종환 |
52대 이회택 |
53대 이차만 |
54대 박종환 |
55대 고재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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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전임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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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이름 |
이영민 李榮敏|Lee Youngm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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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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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5년 12월 1일 | |
경상북도 예천군 | ||
사망 | 1954년 8월 12일 (향년 48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 ||
학력 |
계성중학교 (전학)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졸업) |
|
직업 |
육상 선수 (400m / 은퇴) 축구 선수 (센터 하프[1], 중앙 공격수 / 은퇴) 야구 선수 ( 투수, 외야수, 포수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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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타 | 우투우타 | |
소속 | <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선수 |
조선 축구단 (1927~1928)[2] 연우구락부 축구단 (1929) 식산은행 야구단 (1929~1936) 경성 야구 지역대표팀 (1932~1936) 계림 축구단 (1932) 경성축구단 (1933~?) 조선 야구 국가대표팀 (1946) |
감독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94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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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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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오른쪽)과 베이브 루스(왼쪽)[4] |
선수 시절에는 야구, 축구, 육상 등 다양한 종목에서 이름을 날린 대한민국 체육계의 원조 레전드, 스포츠 행정가로써도 야구와 축구 쪽 모두 활약하며 종목 발전에 힘쓴 인물이다. 야구는 물론이고 축구에서도 맹활약했던 일대기를 한 매체에서 보도한 적이 있다.
체육계에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대구 계성중학교 → 배재고등보통학교로 스카우트. 이때의 스카우트는 대한민국 스포츠 최초의 사례다.
- 1927년, 1928년 전조선축구대회 우승 (연희전문학교)[6]
- 1928년 전조선육상경기대회 5관왕 및 400m 경기 신기록 경신.(54.6초)
- 1928년 경성운동장 개장 최초의 홈런 보유자.
- 1933년 경성축구단 창단 멤버. 1935년 천황배 JFA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
- 1933년 일본 도시대항야구 준우승 (전경성), 1934년 일본 야구 올스타팀 차출.
- 1948 런던 올림픽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축구 대표팀의 메이저 대회 올림픽 첫 8강 진출.
고교 야구에서 종합 타격 1위를 차지한 선수에게 매 해 수여되는 이영민 타격상은 바로 이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2. 생애
2.1. 만능 스포츠맨
1905년 12월 1일 경상북도[7]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이영회(李榮會)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북도 대구부 신정(新町)[8] 214번지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10세에 사립 희원학교에 입학하여 1919년 15세의 나이로 졸업한 후, 9월 1일 대구 계성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야구뿐 아니라 축구, 육상 선수로도 활약했는데 1923년, 백기주[9]와 함께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서울 배재고보로 스카웃되어서[10] 전학을 가게 된 이영민은 그 해 6월 육상대회인 "경인역전 경주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더니, 5년 뒤 연희전문학교 4학년 시절엔 조선 육상 경기 대회에서 200m, 400m, 400m 계주, 800m 계주, 1,600m 계주 무려 다섯 종목을 우승[11], 특히 400m 경기에서 54초 6의 조선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2. 야구계에서의 활약
이렇듯 모든 종목에서 최고의 재능이 있었던 그였지만, 그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야구였다. 1924년 조선 중학 선발팀에 뽑혀 일본 다카라즈카(寶塚) 초청전에도 출전했고 1928년 6월 8일 연희전문학교 - 경성의학전문학교[12] 간의 경기에서는 경성운동장 개장 이후 아시아인 최초로 112m짜리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13] 1929년에 연전을 졸업한 뒤 식산은행 야구단에 입단하면서 성인무대에 오르게 된 이영민은 일본의 전국적인 야구대항전인 흑사자기 도시대항야구에서 전경성팀이[14] 출전권을 5년 연속으로 따내는 데에도 크게 공헌했다. 특히 1933년에는 도시대항야구 준우승을 이끌면서 일본 야구계에서도 인정을 받아 1934년 메이저 리그 올스타를 상대하게 될 일본 야구 올스타에 조선인으로서 유일하게 선정되었다.1934년 요미우리 신문이 주최한 메이저 리그 올스타와 일본 올스타 간의 대결에서 일본 대표팀 14인에 Eibin Lee라는 이름으로 선발되기도 했으나 대타 대수비로 머물렀다. 이 선출이 단순한 생색내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수 있겠으나, 이영민이 이렇게 백업이 되었던 이유는 당시 이영민의 주 포지션인 중견수에서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일본 교포 지미 호리오(Jimmy Horio) 가 귀국하여 뒤늦게 참가한 것과, 식민지 선수로서의 차별이 주 이유였다. 성적 자체는 일본올스타 11경기 중 5경기 출장 6타석 5타수 1안타 2삼진 1볼넷을 기록했고 이영민은 일본인 코칭스태프의 기용에 크게 반발하여 결국 중도 귀국하고 말았다. 여담이지만, 이 올스타전에 뽑힌 일본 대표팀 선수들 중 일부는 훗날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비롯해 1936년 일본야구리그 창단 주축 멤버가 되었기 때문에 [15] 당시 코칭 스태프의 지시에 그대로 순응했더라면, 일본프로야구의 첫 한국인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8.15 광복 이후에는 1946년에 열린 4도시 대항대회와 조-미 친선야구대회에서도 선수로 출전했다. 저 대회들을 마지막으로 선수가 아닌 행정가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는데, 대한야구협회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48 런던 올림픽 때는 현지 조사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1950년에는 일본에서 열린 세계 논프로야구 회의에 한국 대표로 출석했고, 타계하기 직전까지는 대한야구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2.3. 축구계에서의 활약
축구에도 소질이 있어서 1923년에는 배재고보와 동경유학생팀과의 친선 경기에서 수비수로 출전한 적이 있다. 1924년 배재고보 선수로 제 5회 전조선 축구대회에서 공격수로 출전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김용식, 채금석 등이 그 시절 함께 뛰던 팀 동료이었다고 한다. 1930년 경평전에서도 공격수로 출전하여 1차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는 등 활약을 선보이며 평양 대표팀을 압살하는데 일조한다. 1933년 경평축구 정기전에 경성축구단 감독으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이후 조선축구협회 창립 이사를 지냈고, 해방 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 감독에 선임된 바 있다.1948 런던 올림픽 당시 이영민은 조선야구협회 시찰단 자격으로 참가를 했었다. 그런데 출발 3일 전 대한민국 최초의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던 박정휘가 출국 금지를 당하게 되자, 엉겹결에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이영민이 만능 스포츠맨이라 축구에도 꽤 조예가 깊은 편이긴 했지만 대회를 1달도 안남기고 주 종목으로 활동했던 야구 대신 축구 감독을 맡게된 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이영민 체제의 대표팀은 8월 2일에 멕시코와의 첫번째 경기에서 5:3으로 승리를 거두어 8강에 진출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 비록 8강에서 스웨덴을 만나서 12:0으로 완패당하여 8강에서 탈락했지만[16] 이는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올림픽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였다.
참고로 멕시코전의 5:3 승리는 FIFA가 공인하는 당시 A매치 메이저 대회[17] 본선에서 한국이 처음으로 5골 이상 넣은 경기였고[18] 이 날 1경기 2골을 기록한 정국진은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조재진, 이천수가 멀티골을 기록하기 전까지 올림픽, 월드컵 통틀어 한 경기 멀티 골을 기록한 유일한 대한민국 선수였다.
2.4. 막장 사생활
그가 불세출의 스포츠 스타였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딱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바로 여자 관계가 제법 지저분했다는 것이다.[19]
호쾌하고 붙임성이 좋으며 술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이영민은 젊은 시절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기생집에 드나들었다. 여기까지라면 그래도 그리 흠이라 할 수 없겠지만, 문제는 결혼한 뒤에도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는 것. 본처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정구 선수로 이름을 날리던 이보배(李寶培)[20][21]로, 본처와의 사이에 셋째 아들 이인섭(李麟燮)[22]을 비롯해 4남 1녀를 두는 등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영민은 계속해서 기생집을 찾았으며, 심지어는 그 곳에서 만난 여러 기생들을 자신의 첩으로 들이기까지 했다고 한다.[23]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영민은 당연히 자신의 가정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그게 원인이 되어 결국 1941년에 본처와 이혼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둘째 부인을 들였으나 둘째 부인도 곧 집을 떠났고, 마지막으로 이진희(李辰姬)라는 여성과 재혼했다.
2.5. 최후
한편, 가족들 중에서는 이영민의 셋째 아들인 이인섭이 이런 아버지를 증오했고 아버지 이영민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근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 생모 이보배씨는 행방불명되었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배재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의 악기를 훔친 죄로 퇴학당했고 이후 감화원에 보내져 1954년 3월 1일에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지만, 아버지와 양어머니의 학대가 두려워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전전하다가 불량배인 조용호(趙龍鎬)[24]와 이재식(李在植)[25]을 알게 되었다.이에 1954년 8월 11일 저녁 8시, 이미 삐뚤어질대로 삐둘어진 이인섭은 이 두 명의 불량배와 "우리 집에 가서 물건을 훔쳐다 팔아 그 돈으로 하숙비나 내자"고 제안해 자신의 인도하에 이튿날인 8월 12일 새벽 3시 자택에 침입해 아버지의 돈을 노린 강도 행각을 벌였다. 이 때 이영민은 자신의 집에 들어온 이들을 막기 위해 야구방망이를 들고 몸싸움을 벌이다가 그들 중 한 명인 조용호가 쏜 총에 맞아 향년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이인섭은 바깥에서 망을 봤기에 아버지를 쏘는 현장을 보지 못했고, 나중에서야 그걸 알게 되었지만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지도 못했다고 회고했다. 참고로 총은 조용호가 어느 집에서 훔친 것이었다고 한다.
며칠 못 가서 3명 모두 경찰에 체포됐다. 재판 끝에 조용호는 무기징역, 이인섭은 6년형, 이재식은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일각에서는 이 일을 두고 전부 자업자득일 뿐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26], 그가 한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야구 선수였고, 이후에도 대한민국 야구 발전의 기틀을 잡기 위해 노력한 행정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참고로 이 일이 와전되어 퍼진 바람에 '돈 때문에 자신 아버지까지 쏴 죽인 패륜아'라는 자극적인 내용의 기사가 유력 언론에 실렸다고 한다. 또한, 2006년 주간야구의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사건 당사자인 이영민의 3남은 비록 직접 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부린 객기가 아버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는 사실을 끝없이 자책했다.
당시 언론에게 엄청난 보도가 되면서 부담을 가진 이영민의 전처와 다른 식구들은 한동안 숨어서 지내다가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인섭이 1960년에 출소할 당시에는 모두 이민을 떠나서 연락도 되지 않았고, 이인섭 스스로도 연락할 생각을 하지 않으며 홀로 포장마차에서 막노동, 나이트클럽 근무 같은 여러 일을 하며 살아 가다가 1970년에 결혼한 후 영등포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출소 후 이인섭은 수소문 끝에 망우리에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았다고 한다.
참고로 미국에 있는 형제들은 모두 이인섭을 죽은 사람처럼 취급하여 망우리에 있던 이영민의 무덤을 대한민국에서는 돌볼 사람이 없다며 1994년에 시신을 화장하고 무덤도 없애 버렸다고 한다. 당연히 이인섭은 아무 연락도 받지 못했지만, 섭섭하면서도 가서 따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중랑구 망우리공원의 묘터에 비석이 남아 있다. 대한야구협회가 세운 것으로 사각의 육중한 모습이 마치 생전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망우리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올라가면 유명인사사진벽이 나오고 우측으로 15분 정도 가면 최학송 묘소 지나 우측으로 내려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3. 이영민 타격상
자세한 내용은 이영민 타격상 문서 참고하십시오.이영민의 타계 이후 대한야구협회는 1956년에 임시 임원총회를 열고, 고 이영민을 기리기 위해 고교급 선수권 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타자에게 이영민의 이름을 딴 특별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이 바로 이영민 타격상이다.
4. 여담
- 신장이 당시 기준으로도 작은 편인 160cm에 불과했는데도 각종 운동에 능했다.
- 1925년 연전 - 숭전( 숭실전문학교) 정기전에서 운동선수들끼리 꾸린 농구팀을 만들어 참가한 적이 있다. 이영민이 농구선수로서도 활약했다는 정보는 여기서 와전된 이야기. 다만, 공식적인 창단이라 보긴 어렵다.
- 1928년 전일본 야구대항전 (일본 도시대항야구) 타격왕이라는 정보는 날조다. 1929년에 식산은행에 입단했는데 1928년 대회에서 타격왕은커녕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
- 1936년에 흑사자기 우승을 이끌었다고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정확히는 흑사자기 본선인 일본 도시대항야구대회의 조선 지역 예선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전경성은 조선 예선을 밥먹듯이 우승했고 심지어 1933년에는 본선인 도시대항야구의 준우승까지 이끌었는데 왜 특출나지도 않는 1936년 성적이 부각되고 있는지는 의문. 참고로 1936년에 전경성은 도시대항야구 1라운드에서 바로 탈락했다.
- 1934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인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팀의 감독인 미야케 다이스케가 이영민을 영입하기 위해 직접 경성으로 찾아오기까지 했으나 이영민이 거절했다고 한다.
[1]
수비형 미드필더
[2]
1927년 조선 축구단과 전일본 대회 디펜딩 챔피언 리조(鯉城) 축구단의 경기에 차출된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1928년 전조선육상경기대회 (조선체육대회 육상)의 계주 종목에 조선 축구단도 참여하였는데 대표로 참가한 4명 중 한 명이 이영민이다.
[3]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이영민을 확인할 수 있다.
[4]
1934년 일본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팀과 전(全)일본 선발팀 경기에 차출된 이영민이 베이브루스와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일본
도쿄돔에 있는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서 보관하고 있다.
[5]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역대 집행부 참조.
[6]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전조선축구대회의 전문부가 폐지되어 이 시기엔 전문학교들도 청년부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외에도 4회의 준우승과 2회의 전문부 우승, 1924년
배재고보 시절 중등부를 우승하는 등 선수 시절 내내 대회를 휩쓸었다.
1929년 연우구락부 결승 라인업
1931년 전연(연전 올스타) 결승 라인업
1932년 계림 축구단 결승 라인업
[7]
칠곡군 또는
예천군으로 추정.
[8]
現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9]
이영민보다 2살 어린 1년 후배로 이영민과 함께 만능 스포츠맨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영민이 400m 기록보유자라면 백기주는 100m, 200m의 1인자였다. 이영민과 함께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와세다대학에 진학한 뒤, 유학생 대표팀의 선발투수로 활약해
일본 철도국 팀에 완투승을 거두는 활약을 했다. 축구에서도 이영민과 경성축구단의 창립 멤버로 함께 들어가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성동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역임했으며, 아들 백대삼은 1982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프로야구 심판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백대삼의 처남이
장효조이다.
[10]
이는 한국 스포츠 최초의 스카웃이라고 한다.
[11]
이 중 연전 소속으로는 두 개인 종목을 우승했고 세 개의 계주 종목들은 조선 축구단 소속으로 우승했다.
[12]
서울대 의대의 전신.
[13]
관련 문헌으로 살펴보면 이전에도 홈런으로 득점한 경우가 있긴 했지만, 이것은 일반 홈런이 아닌
인사이드 파크 호텔이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경성운동장 개장 최초로 되어 있었고 그렇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1927년 5월 20일 1년전 일본투어를 돌던 미국
니그로리그 브룩클린 로얄 자이언츠가 경성운동장에서 식산은행과 경기를 펼쳤는데 자이언츠의 케디가 8회말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다고 하는 기사가 분명히 남아있다. 게다가 이영민의 경성운동장에서의 첫 홈런이 6월 8일에 나온 것도 아니다. 5월 7일 제 2회 구락부 연맹전 대 전휘문(全徽文)전에서 전배재(全培材)의 선수로 나와 8회말에 좌월(= 인사이드 파크 홈런이 아닌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을 기록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가 남아있다. 12일에도 대 전중앙(全中央)전에서 홈런을 쳤고, 대회 후 본루타상(= 홈런상)도 수상하였고, 이때 부상으로 받은 방망이로 6월 8일에 홈런을 쳤다고 동아일보 기사에도 실려있다. 두 대회 모두 경성운동장에서 열렸고 심지어 개최 주체도 5월 대회와 6월 대회 모두 동아일보로 동일한데 왜 당시 동아일보가 6월 8일 경기 후에 그 홈런을 최초라고 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이때의 동아일보의 최초 홈런 규정은 명쾌한 의문 해소 없이 지금까지 한국야구사 등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14]
일본 도시대항야구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경성의 야구선수들로 꾸린 올스타팀이라 보면 된다. 식산은행 야구단 선수들도 주축이 되었다.
[15]
요미우리 신문 주최 친선경기라는 점과
사와무라 에이지 때문에 요미우리 창단 멤버로 와전되기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투수 사와무라, 스타르핀 등이 요미우리 팀의 창단멤버였을 뿐 타자는 오히려 거인 소속이 없었다. 당시 현역 생활 나이가 짧았기 때문에 30 근처였던 선수 중에는 프로에 이르지 못하고 코칭스태프로 전직한 경우도 있었다. 당장 주전 중견수 호리오와 에이스 타자 1루수 야마시타 미노루는 한큐의 창단 멤버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
[16]
이후 스웨덴은 이 대회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주요 선수로는
AC 밀란의 레전드인
군나르 노르달.
[17]
올림픽, FIFA 월드컵, 그리고 6대륙의 대륙선수권
[18]
참고로 92년부터 U-23으로 바뀐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피지를 상대로 8:0으로 승리하며 메이저 대회 본선 최다골 승리라는 기록도 경신했다.
[19]
이 말은 어느 정도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고 봐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이고 당시엔 축첩이 불법이 아니었고 흔했던 시대였다. 그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해선 안 될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거나 한 건 아니고 여자랑 술을 좀 많이 좋아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20]
이보배의
집은 상당히
부자였는데, 구한말에
인삼 등을 취급하면서 무역업으로 떼돈을 번 서대문 부자 이지성의 딸이었다.
[21]
1954년 10월 5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이보배는 이인섭의 계모로 나온다.
[22]
이혼 당시 만 5살이었다.
[23]
물론 상술했듯이, 이 당시 축첩은 불법 행위는 아니었다.
[24]
일명 조용오(趙龍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도 어렸을 때 가출했다. 4명의 형제가 있었다. 무학이며 8세 때 가출, 상경해 고아원을 전전하고 여기저기서 점원, 음식점 심부름으로 생계를 이었다.
[25]
6.25 전쟁 때 부모님이 별세해 고아가 되었고 줄곧
경기도
안성군에 있던 이모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국민학교까지는 졸업했다. 이후 상경해서는 불량배와 어울렸다.
[26]
사실 자업자득 수준을 넘어, 아예 그를 한국 야구의 레전드로 취급하는 것부터가 옳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