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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 姓 望 族
1. 개요
渤海國, 去燕京・女眞所都皆千五百里, 以石累城足, 東並海. 其王舊以大爲姓, 右姓曰: 高・張・楊・竇・烏・李, 不過數種. 部曲・奴婢無姓者, 皆從其主.
발해국은 연경, 여진의 수도에서 1,500리 떨어져 있고, 돌을 쌓아 성을 지어서 동쪽으로는 바다와 나란히 하였다. 그 왕은 예전에 대(大)를 성으로 하였다. 우성(右姓)이 고(高) ・ 장(張) ・ 양(楊) ・ 두(竇) ・ 오(烏) ・ 이(李)로 몇 종(種)에 불과하다. 부곡(部曲) ・ 노비(奴婢)로 성이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을 따른다.
《송막기문(1156)》
발해국은 연경, 여진의 수도에서 1,500리 떨어져 있고, 돌을 쌓아 성을 지어서 동쪽으로는 바다와 나란히 하였다. 그 왕은 예전에 대(大)를 성으로 하였다. 우성(右姓)이 고(高) ・ 장(張) ・ 양(楊) ・ 두(竇) ・ 오(烏) ・ 이(李)로 몇 종(種)에 불과하다. 부곡(部曲) ・ 노비(奴婢)로 성이 없는 자는 모두 그 주인의 성을 따른다.
《송막기문(1156)》
발해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6개의 귀족 가문을 나타내는 용어. 송막기문의 기록을 따라서 우성망족이라고 하는데 왜 우(右)자가 쓰인 지는 불명.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는 오른쪽을 왼쪽보다 높이는 풍조가 있었으니 '높은 집안'이라는 의미로 그랬을 수도 있고, 송막기문이 편찬될 무렵에는 한창 여진족의 금나라(1115~1234)가 흥기하던 시대였으며 금나라가 수도로 삼고 있던 상경회령부(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서 보면, 대부분 이미 거란족의 요나라 시대 때 요양 지역으로 이치된 이들 '우성망족' 가문은 금나라 옥좌의 오른쪽[1]에 해당되므로 그렇게 불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망족(望族)은 그냥 '명망 있는 집안'이라는 뜻으로 조선 시대까지도 쓰였던 말이며 특별히 발해만의 용어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기록에 따르면 왕족인 대씨(大氏)를 제외한 고씨(高氏), 장씨(張氏), 양씨(楊氏), 두씨(竇氏)[2], 오씨(烏氏), 이씨(李氏)가 대귀족 집단을 형성하여 발해의 외교, 군사,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들 외에도 49개 성씨를 가진 일반귀족집단이 있었는데 이 중에는 특이하게도 부여의 국성[3]이자 백제의 대성팔족이었던 해씨(解氏)가 있었다. 하지만 문왕 시기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해비응(解臂鷹)과 대이진 시기 유학생인 해초경(解楚卿) 이외에는 기록이 없다.[4]
2. 종류
2.1. 고씨(高氏)
우성망족 중 필두로 고구려의 국성이었다. 발해의 기록이 부족하여 확언할 순 없지만 고구려 왕족 출신으로서 대조영에게 협력했거나 대조영이 발해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고구려 왕족 출신의 여인과 혼인하면서-고구려의 왕족인 고씨와 발해의 왕족인 대씨의 혼인을 추친하면서 고씨가 우성망족에 들어갔을 개연성은 있다. 또는 왕족이 아니지만 고씨를 사성 받은 귀족 가문 출신일 수도 있다. 고씨는 나무위키에 기록된 발해의 인물들 중에서 대씨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으며 훗날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고모한(高模翰): 발해말인 인선왕, 고려초인 태조 시기의 인물로 발해 멸망 후 고려로 귀순하다가 죄를 지어 원수인 요나라로 귀화한 인물이다.
- 고남신(高南申): 3대 문왕 시기인 772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인물로 발해사보국대장군겸장군현도주자사 겸압아관개국공(渤海使輔國大將軍兼將 軍玄菟州刺史 兼押衙官開國公)에 봉해졌다.
- 고영창(高永昌): 12세기의 인물로 발해부흥운동 중 대발해국을 건국하였으나 5개월 만에 실패한 발해계 인물이다.
- 고청명(高淸明): 11세기의 인물로 발해 유민으로서, 여요전쟁에 참전해 거란군 안의 발해인 부대인 발해군을 지휘하다가 귀주 대첩에서 전사한 인물이다.
2.2. 장씨(張氏)
고구려계 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로 무왕시기 등주전투에서 활약한 장문휴가 있으나 이후에는 문왕 시기, 장선수(張仙壽) 외에는 기록이 부재하여 알 수 없다.- 장문휴(張文休): 2대 무왕 시기의 장군으로 732년, 무왕의 명으로 당의 등주를 쳐서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를 초토화시킨 인물이다.
- 장선수(張仙壽): 3대 문왕 시기인 778년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司賓少令) 관직을 맡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인물로 위의 장문휴와의 관계는 불명이다.
- 장호(張浩): 발해계 금나라 인물. 금사에 기록된 장호열전에 따르면, 본성은 고씨로 동명성왕의 후손이나 증조부가 출사하면서 성을 장씨로 고쳤다.
2.3. 이씨(李氏)
장씨와 더불어 고구려계 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로 이들의 기록은 무왕 시기에 처음 나오며 주로 문관계 사신으로 기록된 편.- 이광현(李光玄) : 10세기의 발해인으로 상업에 종사하여 대부호가 된 도사이다.
- 이거정(李居正): 대이진, 대건황 시기의 인물로 영질대부(英秩大夫) 정당성 춘부경 상중랑장 균곡왕현 개국남(均谷枉縣 開國男)의 지위에 있었다. 860년(대건황 4년) 일본에 사신으로 가 4월 14일에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記)을 전했다.
2.4. 오씨(烏氏)
말갈계 대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로 첫 등장은 무왕 시기 당에 사신으로 간 오차지몽으로 이후 나오는 오씨와 관련성은 불명이다. 이들도 고씨와 더불어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오차지몽(烏借芝夢): 725년, 당에 사신으로 간 인물로 뒤에 몽자가 붙은 것으로 보아 말갈계 인물로 추정된다. 740년 일본에 사신으로 간 발해인 기진몽(已珍蒙)이 그러하다.
- 오소도(烏炤度): 발해 말인 대현석, 대위해, 대인선 시기의 관리이자 재상(宰相). 872년(대현석 2년), 당의 빈공과에 합격했고 34년 후인 906년(대위해 12년), 아들인 오광찬이 빈공과에 합격했지만 신라인 최언위보다 등수가 낮자 당나라 조정에 항의했다.
- 오광찬(烏光贊): 위의 오소도의 아들로 신라인 최언위와의 경쟁에서 졌다.
- 오현명(烏玄明): 10세기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정안국의 2대 왕이다.
- 오소도(烏昭度): 10세기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올야국의 지도자이다.
- 오소경(烏昭慶) : 오소도의 뒤를 이은 올야국의 지도자이지만 오소도와의 관계는 불명. 昭가 돌림자가 맞다면 형제 등의 같은 항렬의 인물이었던 걸로 보인다.
2.5. 양씨(楊氏)
고구려계 귀족으로 추정되는 성씨이며[5] 인지도는 미약하지만 양씨도 고씨, 오씨와 함께 발해부흥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양규 등의 인물이 유명한 고려의 일부 양(楊)씨를 발해의 우성망족 양씨의 후예로 추정하기도 한다.[6]- 양성규(楊成規): 871년(대현석 원년), 정당성 좌윤(政堂省左允) 위군대장군 상진장군(慰軍大將軍上鎭將軍)을 맡으며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 양중원(楊中遠): 876년(대현석 6년), 정당성 공목관(政堂省孔目官)의 관직을 맡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 양상세(楊祥世): 11세기의 인물로 대연림의 발해부흥운동에 투신하여 흥료국의 동경장군(東京將軍)을 맡았다.
- 양태사(楊泰師): 발해의 무관으로 그가 지은 한시 야청도의성이 유명하다.
2.6. 두씨(竇氏)/하씨(賀氏)
여섯 우성망족 중 가장 미스터리한 성씨로 고구려계인지 말갈계인지 알 수 없는 것과 더불어 두씨는 현재 기록된 발해인 중에 없다.그래서 하씨의 오기라고 보는 의견도 유력한데, 실제로 두씨가 아닌 하씨로 본다면 꽤 초기부터 나온다. 만약, 하씨가 맞는다면 거란의 유력집단인 대하(大賀) 씨족 중 일부가 발해 건국 때 합류해서 귀족집단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 하조경(賀祚慶): 무왕 시기인 724년 당에 사신으로 갔다.
- 하복연(賀福延): 841년(함화 12년), 정당성 좌윤(政堂省左允)을 맡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3. 기타 귀족 성씨
4. 발해 멸망 이후
발해 멸망 이후 한국에서 (고구려 왕족 고씨가 아닌 발해귀족 고씨를 포함하여) 후손으로 추정되는 집안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5. 관련 문서
[1]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중국을 비롯해서 모두 "임금은 남면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관념이 있어서 옥좌의 방향은 무조건 남쪽을 향하게 두고, 옥좌에 앉은 금나라 황제의 시야를 중심 기준으로 좌, 우를 구분할 경우 요양은 오른쪽이 된다.
[2]
하(賀)씨의 오기라는 설도 있다.
[3]
부여의 경우 신화나 설화상에선 국성으로 나오긴 하는데 정작 정사상으로 확증된 기록은 없고, 부여 멸망 뒤 왕족 출신 유민들은 부여의 국호에서 따온 여(餘)씨를 썼다.
[4]
발해가
요동을 정복하면서 고구려의
건안성에 이치된
소백제를 흡수했던 것으로 보이는 정황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백제계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실제로 삼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는 해씨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부여나 고구려나 해씨를 쓴 사례가 말 그대로 전무하다.
[5]
말갈계 성씨로 보는 시각도 있다.
[6]
대표적인 예로 안악 양씨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