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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발해 제12대 국왕 大虔晃 | 대건황 |
|
시호 | 불명 |
작위 | 발해: 안풍현 개국공(安豊縣 開國公), 당:은청광록대부 검교비서감 홀한주도독 발해국왕(858) |
직위 | 중대친공(中臺親公), 대내상 겸 전중령(大內相 兼 殿中令) |
성씨 | 대(大) |
휘 | 건황(虔晃) |
출생 | 790년대 후반[1] |
사망 | 871년 (향년 70대) |
재위기간 | 857년 2월 ~ 871년 (14년) |
황자 혹은 황손 | 대현석(大玄錫) |
[clearfix]
1. 소개
발해의 제12대 가독부이자 군주. 대이진의 동생이다.2. 업적
14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일본과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 외에는 그가 내치를 어떻게 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외의 기록으로는 아래와 같다.871년에 대건황이 죽었으며 대현석이 즉위하였다.3. 권신?
밑의 의문 항목과 연관되어 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함화 11년 중대성 첩사본>"에는 문서를 작성한 신하들의 이름과 직위가 적혀 있는데 그 중 대건황은 공작위를 가지고 중대친공, 대내상, 전중령 직위를 가지고 있다. 직위를 해석하면:- 중대친공: 발해 중대성(중서성)의 종친 공작을 뜻하는 것으로 추정.
- 대내상: 발해 정당성(상서성)의 수장.
- 전중령: 전중시의 벼슬.
즉 안풍현의 공작에 발해 3성 6부 중 2성에 모두 이름을 걸친 데다가 궁전 내 사무를 관리하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명예직일 수도 있지만 대건황이 형, 대이진의 재위 11년 즈음엔 이미 상당한 권력을 지녔었음을 알 수 있다.
4. 의문
대이진이 죽고나서 아들들이 왕위에 올라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동생 대건황이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서 의문을 남긴다. 물론 대이진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아들이 한 둘은 아닐테고 당장 대이진의 기록에 나오는 아들만 봐도 4명이며 사신으로 갔다는 것은 장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 10대 후반~20대 초반일테고 대이진이 죽었을 때는 대략 30대 초반~40대 후반일 것이다. 우연하게 전부 죽었다 하더라도 손자가 없었을까? 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왕위 계보상 의문점을 토대로 추측할 뿐이다. 일각에서는 이로 인해 정변이 있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추측하기도 한다.대건황 즉위 45년 전인 812년에 있었던 정왕~ 희왕 시기 석연치 않은 승계 과정을 대건황이 참고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 사신으로 갈만큼 장성한 아들이 있었음 (정왕-대연진, 대이진-대지악 등)
- 동생이 권신으로서 있다가 왕위 승계 (희왕-권지국무, 대건황-중대친공)
- 고사에 따라 즉위함 (희왕-기록상에는 어떤 고사를 언급한건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음)
5. 사후
아들 대현석이 왕위를 승계하였다. 재위 당시 사용한 연호가 대정(大定)이고, 안왕(安王)이라는 시호가 있다는 설이 있지만 기록된 책이 위서인 《 환단고기》라서 인정받지 못한다.6. 신당서 기록
대이진이 죽으니, 아우 대건황(大虔晃)이 왕위에 올랐다.
7. 연표
- 857년 2월, 대이진이 죽고 권지국무이자 동생인 대건황이 즉위하였다.
- 858년, 정당성 좌윤 오효신 등 104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고 달력인 <장경선명력경>을 주었다.
- 860년, 이거정 등 105명을 일본에 사신으로 보냈다.
- 868년, 정건장의 묘지를 조성하였고 < 돈황문서>(敦煌文書)를 만들도록 하였다.
- 871년, 대건황이 죽고 아들 대현석이 즉위하였다.
[1]
형인 대이진이 790년대 후반 이전으로 추정되므로 그보다 나이가 어리기에 790년대 후반 이후 정도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