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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건안성의 위치 |
1. 개요
建安城
요동 지방에 있었던 고구려의 옛 성으로 현 중국 랴오닝성 잉커우시 가이저우시(盖州市)에 위치하고 있다.
요동성이나 안시성, 비사성, 부여성, 책성 같이 특징적인 성들에 비하면 그렇게 유명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요동성처럼 엄청나게 거대한 성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요동성 다음가는 중요한 요충지였고 따라서 지방장관인 건안욕살의 치소였다.[1]
2. 역사
사서로는 612년( 영양왕 23년) 수양제가 침공한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이 개시될 때 행군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격적인 기록은 당태종이 친정한 제1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기록되어 있다.
신성(新城), 건안(建安),
주필(駐蹕)에서의 세 차례 큰 싸움에서
우리의 군대와
당나라의
병사 중에 전사자가 많았으며, 말들도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말했다. “만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나에게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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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상}}}{{{#!wiki style="text-align:right"
구당서와 《 신당서》에는 자세히 기록되어있지는 않으나 삼국사기에 건안성 전투가 언급된다. 위 기록에 언급된 것을 참고하면 이 전투 역시 주필산 전투, 그리고 안시성 전투에 버금갈 정도로 대군을 동원한 중요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당군이 안시성에서 고구려군에게 가로막혔을 때 안시성을 우회하여 오골성을 공격한 후 평양성을 직공하자는 강하왕 이도종의 간언을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주둔한 고구려의 10만 대군 때문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건안성이 고구려의 중추지였음을, 이 두 전투에서 고구려가 주요 성들을 잘 지켜냈음을 알 수 있다.
건안성은 또한 영주도독 장검이 이끄는 이민족 부대의 공격과 비사성을 함락한 장량의 평양도행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평양도행군이 당나라 본군과 보조를 맞춰 고구려 영내로 진입하는것을 막아냈다. 645년 4월, 장검의 이민족 부대는 요하 하류에서 도하하여 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군에게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건안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자치통감에는 645년 7월에는 장량의 평양도행군이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건안성의 고구려군에게 오히려 반격당하여 군사를 많이 잃고 가까스로 막아낸 기록이 있다.
이렇게 건안성이 당군의 주요 부대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요동방어선이 구축된 천산산맥[2]을 중심으로 당군을 막으려는 고구려의 계획이 성공하는 데 큰 보탬이 된다. 실제로 당군 본대가 안시성 전투에 애를 먹는 8월 중순, 오골성을 먼저 공격하자는 고구려측의 배반자 고연수의 제안을 당태종이 수용하지 못하고 결국 철군한 이유가 신성과 건안성에 위치하며 당군의 진격로를 끊임없이 위협한 10만의 고구려군 때문이었음이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다.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멸망한 후, 서기 677년에는 당이 나당전쟁에서 신라군에 의해 쫓겨난 웅진도독부를 이곳에 설치하고 백제 멸망때 당으로 강제 이주당한 백제 유민들을 이곳에서 통치했다. 하지만 이 웅진도독부는 얼마 안가 서기 700년즈음해서 대조영이 이끄는 발해 혹은 발해건국세력의 공격에 의해 사실상[3] 소멸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 유민 고흠덕(高欽德), 고원망(高遠望) 부자의 묘지명에 따르면 고흠덕 가문은 고흠덕의 증조부인 고원(高瑗)대부터[4] 건안욕살을 세습한 가문이라고 한다.이에 고흠덕의 할아버지인 고회(高懷) 또한 건안욕살이었고 고흠덕의 아버지인 고천(高千) 대에 당나라에 투항했다고 추정되는데 고흠덕은 677년에 태어나 733년에, 고원망은 697년에 태어나 740년에 죽었으므로 고흠덕 부자는 완전한 유민 세대에 해당한다. 여담으로 묘지명에서 고흠덕 가문은 상나라의 충신 비간의 후손을 자처했다.
[1]
확실히 건안욕살의 치소였단 기록이 남은 건 아니지만 고구려 유민 고흠덕, 고원망 부자의 기록에 고구려의 건안주도독에 대한 기사가 있고 이에 대응할 만한 직책은 건안욕살밖에 없다. 이 직책이 서부욕살에도 대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애매한 게 요동성에도 또한 욕살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다.
[2]
千山山脈.
신장 위구르 자치구 및
우즈베키스탄 근처에 있는 천산산맥(天山山脈)과는 다른 산맥이다.
중국어 발음으로는 아예 음운에서도 구분되는데 요동의 천산산맥은 첸산(Qiān Shān)으로, 위구르 및 우즈베키스탄 근처의 천산산맥은 톈산(Tian Shan)으로 발음한다.
[3]
725년 당현종대의 기록을 보면 이후로도 '백제대방군왕'이라는 직책이 남아있긴 했다. 이것이 웅진도독겸 대방군왕
부여경과 동일인물인지 대체 어떤 역할이였을지는 미스테리하지만.
[4]
즉 고원망의 고조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