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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14:04:52

대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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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531a2> 발해 11대 국왕
大彝震 | 대이진
시호 불명[1]
연호 함화(咸和)
성씨 대(大)
이진(彝震)
황자 대창휘(大昌輝), 대명준(大明俊), 대선성(大先晟)[2], 대연광(大延廣), 대지악(大之萼)
아버지 대신덕(大新德)
생몰연도 ?[3] ~ 857년 2월
재위기간 830년 10월 ~ 857년 2월(26년 4개월)

1. 소개2. 《신당서》 기록3. 《 요사》 기록4. 업적5. 사후6. 가족 관계7. 연표8. 둘러보기

[clearfix]

1. 소개

발해의 제11대 가독부이자 군주. 선왕 대인수의 손자인데 아버지 대신덕이 요절했기에 그가 왕위에 올랐다. 즉위하기 전 칭호는 동궁이 아닌 권지국무(權知國務)였는데 조선 시대로 비유하면 세자로 책봉받지 않은 채 대군인 상태에서 왕위에 오른 것과 같다.

2. 《신당서》 기록

선왕 대인수의 아들 대신덕(大新德)이 일찍 죽은 탓에 손자 대이진(大彛震)이 즉위하여 연호를 함화(咸和)로 고쳤다. 다음해(831년) 조서를 내려 관작을 계승케 하였다. 당문종(文宗) 때까지 모두 12번 내조하였고, 회창(會昌) 연간(841~846년)에 모두 4번을 사신을 보냈다.

3. 요사》 기록

12대 대이진은 존호를 참칭하고[僭號] 연호를 개정하여[改元] 그 격에 걸맞는 궁궐을 세웠으니, 5경 15부 62주를 이뤄 '요동성국(遼東盛國)'으로 불렸다.
十有二世至彝震, 僭號改元, 擬建宮闕, 有五京·十五府·六十二州, 爲遼東盛國.
《요사》 권38 지8 지리지2 동경요양부
발해의 지방 제도가 5경 15부 62주로 확립된 시점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 보통은 선왕 때로 보는 것이 통설인데, 《요사》에는 대이진의 업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 기록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요사》의 편찬과정이 워낙 부실하고 오류도 많아 그 신빙성을 높게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로, 그 내용을 교차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사료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이진이 12대로 기록된 것은 인용문 앞 부분에서 걸걸중상을 초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특이한 점으로는 대이진이 '참호개원(僭號改元)'을 했다는 부분인데, 발해는 그 이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왔으므로 개원은 별 의미가 없는 표현이나, 존호를 참칭했다는 것은 '황제'를 직접 자칭했다는 의미가 된다.

금석문을 통해 살펴보면 발해는 문왕 때 임금을 '황상(皇上)'이라고 존칭한 것과 간왕의 부인을 순목황후라고 표기한 사례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황제격 표현을 사용하는 와중에도 발해의 임금은 동일한 금석문에서 '문왕(文王)'·'간왕(簡王)'으로 명기하고 있기에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이진 이후로는 중국측 기록에서 발해왕들의 시호가 전혀 알려지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당나라의 혼란으로 외교가 어려워지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 해석하지만, 대이진 이후로도 대건황 대현석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이 왔음을 기록한 것이 버젓이 남아있기에 대이진과 대건황의 시호만 콕집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요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이를 선왕 이전의 발해왕들은 외왕내제를 하다가, 대이진이 즉위한 이후에 대외적으로 황제를 직접 칭하면서 대이진의 칭제를 부정시한 당나라 사람들이 일부러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나,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긴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한 이를 적극적으로 채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4]

4. 업적

할아버지인 대인수가 마련해놓은 기틀 아래 발해의 전성기를 유지했다고 평가되는 왕이지만 다른 발해 왕들과 마찬가지로 기록이 별로 없다.

아들 대명준을 832년, 836년, 837년 3차례에 걸쳐 수십 명의 신하들과 함께 당나라에 파견하였으며 또 다른 아들 대선성, 대연광, 대지악 등도 833년, 839년, 846년에 각각 당나라에 파견하여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였다. 이 중 대연광의 방문 기록은 엔닌의 《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사신단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등주를 거쳐 발해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발해의 주요 교역 루트를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문득 듣건대 “며칠 전에 발해 왕자가 이곳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칙사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떠났다.”고 하였다.
입당구법순례행기》, 839년 3월 28일, 신라원에서 입하 공양을 마련하다

한편 중앙 집권적인 행정 제도의 확립에 노력하였고, 군사 기구를 발전시켜 모병제에 의한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리고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좌·우삼군(左右三軍), 120사(司)를 설치했다.

5. 사후

상술한 것과 같이 대이진부터 발해의 가독부들은 시호가 전해지지 않는데, 간혹 대이진의 시호를 화왕(和王) 등으로 표기하는 사례가 있다. 이는 20세기에 등장한 《 환단고기》류의 위서들에서 근거한 것이라 실제 대이진의 시호였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대이진에게는 대창휘(大昌輝), 대명준(大明俊) 등 여러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이진 시기에 왕자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파견된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가 대이진의 아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대이진의 아들이 한 명은 있었을 것이다. 특히 《문원영화(文苑英華)》 <발해서>에는 왕자 대창휘라는 인명과 별개로 부왕(副王, 발해에서 태자를 부르던 호칭)이 등장하므로 대이진의 태자는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왕위를 승계한 건 이들이 아니라 동생인 대건황이었다. 이에 정변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6. 가족 관계

7. 연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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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이진 이후의 발해 국왕들은 시호를 알 수 없다. 위서인 환단고기에서는 장종 화황제(莊宗和皇帝)라고 나오기 때문에 중문 위키백과 등지에서 ‘화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2] 구당서에는 대선성으로, 《책부원귀》에는 대광성(大光晟)으로 나온다. 先과 光의 자형이 비슷하므로 어느 한쪽이 오기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중에 편찬된 책부원귀가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3] 사신으로 간 아들들의 존재를 생각하면 생년이 800년대 이후로는 어렵다. [4] 참고로 서하 경종이 황제를 자칭하자, 송나라에서는 서하를 더이상 서하국이나 하국 등으로 부르지 않고 경종의 이름인 '원호(元昊)'로 지칭해버린 사례가 있다. 이후 송이 서하에 세폐를 제공하는 대신 서하는 송에 칭신하기로 하는 외왕내제 조공책봉관계를 복원하면서, 다시 서하 또는 하국으로 부르게 되었다. [5] 강왕 이후 어느 시점에서 전통적인 <이호예병형공>에서 주나라 6관체제인 <천지춘하추동> 형식으로 변경된 것으로 확인되는 중요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