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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2:36

아베 사다

아베 사다
[ruby(阿, ruby=あ)][ruby(部, ruby=べ)] [ruby(定, ruby=さだ)]
파일:Sada_Abe_portrait.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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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5년 5월 28일
일본 제국 도쿄부 칸다구
(現 도쿄도 치요다구 칸다타마치)
사망 1986년 추정(향년 81세?)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직업 게이샤, 유녀
체포 1936년 5월 20일
범죄 혐의 살인죄
처벌 징역 6년 (미결구금 160일 포함)
1. 개요2. 불행한 어린 시절3. 게이샤, 유녀 시절4. 이시다를 만나다5. 아베 사다 사건6. 사건 이후7. 바람처럼 사라지다8.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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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게이샤, 유녀, 살인범.

2. 불행한 어린 시절

1905년 도쿄 칸다(神田區) 지역에서 에도 시대부터 이어져 온 유서깊은 다다미 상점을 운영하던 유복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는 가사(假死) 상태였고 엄마의 젖이 잘 나오지 않아 돌이 될 때까지 이웃집에서 자랐으며 가족과는 4세가 될 때까지 대화를 하지 못하는 등 태어나는 순간부터 고생했다. 이 때문인지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 아버지와는 제대로 대화 한 번 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52세였을 때 태어난 늦둥이이며 8남매 중 막내였으나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라 그 중 4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항목을 읽어 보면 그녀의 부모부터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치바현 출신인 아버지 시게요시(阿部重吉)는 아베 가문에 입양되어 사업을 도왔고 결국 상속받았는데 경찰 조사에 의하면 "악함이 없는 사람이고 법에 대한 솔선수범이 있는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보고됐으나 일부 지인들은 그를 "다소 자기중심적"이라고 보고했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아베 카츠(阿部カツ)는 기록에 따르면 법적 또는 도덕적 흠이 알려진 바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바람둥이로 알려졌던 오빠 신타로는 결혼 후 부모의 돈을 가지고 가출했다. 언니 테루코도 여러 연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버지는 '딸의 문란함을 벌하기 위해' 라는 명목으로 테루코를 매음굴로 보내는 경악스러운 짓을 저질렀으나 훗날 그녀를 다시 사들여 되찾아왔다. 이는 딸을 유녀로 팔아넘긴 부모 중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1] 테루코의 과거는 아베 가문의 결혼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고 곧 결혼하였다.

아이 여럿을 잃고 살아남은 막내여서였는지 어머니는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자신의 뜻대로 하게 했으며 토키와즈[2] 샤미센을 배우도록 권유했는데 이 두 활동은 모두 고전적인 예술적 노력보다는 게이샤, 때로는 하층계급의 직업인 유녀들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게이샤는 화려한 연예인으로 여겨지는 직업이었고 그녀도 음악 레슨을 위해 학교를 빠지고 화장을 멋지게 하면서 이런 이미지를 추구했으며 타고난 미모까지 더해져 '사가미야[3]의 오사다짱(相模屋のお定ちゃん)'으로 알려져 인근에 평판이 자자했는데 부모가 정규 교육보다는 기녀들처럼 노래와 춤, 샤미센 등을 우선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다니던 소학교의 선생으로부터 여러 차례 주의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렇듯 일찍부터 기녀처럼 키워진 탓인지 겨우 10살이 되던 무렵에 이미 남녀의 정사가 무엇인지를 깨우쳤다고 한다.

고등여학교에 진학했으나 15세가 되던 해 자퇴했고 테루코와 신타로 관련해 가정문제가 더욱 불거지면서 종종 혼자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곧 자신과 비슷한 반항적인 10대들과 어울리게 됐는데 그러던 중 14살 때 이 모임과 함께 외출하다가 지인 중 한 명에게 강간을 당하고 이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망가지고 말았다.[4] 당시 그녀는 2일간이나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고 하며 전후에 출간한 자서전 '아베 사다-사랑의 반생'에서는 '유혹과 흥미와 자만심에 걸려 한 청년의 유혹에 걸려 결국 처녀를 바치고 말았습니다'라고 서술했다. 그녀의 부모는 처음에는 그녀를 옹호하고 지지했지만 그녀는 이때 당한 사건의 충격으로 불량 청소년이 되었다. 본인이 말하기를 "내가 더이상 처녀가 아니라고 생각하니 이런 사실을 숨기고 시집가기도 싫고, 그렇다고 다 털어놓고 시집가기는 더욱 싫다. 더는 아무데도 시집 못 가는 몸이라 생각하니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고. 이 사건 이후 그녀는 불량소녀가 되어 여러 남자들과 복잡하게 관계를 맺는 등 방탕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이런 그녀를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게 도리어 그녀의 심기를 더욱 건드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3. 게이샤, 유녀 시절

그 무렵의 그녀는 집에서 현금을 가지고 나와 불량한 친구들과 함께 아사쿠사 부근에서 놀러 다니고 있었는데 그 금액은 현대의 금액으로 환산하면 10만엔에서 60만엔이라는 큰 액수였다. 이 큰돈을 들고 10명 이상의 불량소년을 데리고 능운각에서 영화를 보고 밤에는 술집에서 놀러다니다가 밤늦게 귀가하는 생활을 1년 동안 계속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호되게 꾸짖고 집에서 문을 닫거나 엄하게 훈육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비행을 멈추지 않았고 어느덧 아사쿠사의 여자 조폭 '작은 벚꽃의 오쵸(小櫻のお蝶)'[5]와도 겨룰 정도가 되어 칸다 지역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이렇게 그녀가 통제 불능 수준이 되자 1922년 보다못한아버지와 오빠는 공모하여 그녀를 요코하마 유곽의 포주 아키바 마사요시(秋葉正義)에게 게이샤로 팔아 버렸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가 아베 사다에게 했던 소리가 '그렇게 남자가 좋으면 창녀로 팔아버린다.(そんなに男が好きなら娼妓に賣ってしまう)'였다. # 그녀의 큰언니인 아베 도쿠는 그녀가 게이샤가 되기를 원했다고 증언했으나 사다 자신은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난잡함에 대한 벌로 그녀를 게이샤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녀에게 게이샤 세계와의 만남은 불만스럽고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게이샤들 사이에서 진정한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과 음악을 배우고 공부하는 견습생 생활이 필요했다.

당시 그녀는 뚜쟁이 아키바에게 요바이를 당했고 아키바를 자신의 뒤를 보호해 주는 배후자로 선택했으며 요코하마와 나가노에서 게이샤로 일하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집이 전소된 아키바를 구하기 위해 선금 1,000엔[6]의 빚을 얻어 도야마의 게이샤에 팔려 아키바 일가를 돌보았는데 잘나가는 게이샤가 됐지만 20살 때 아키바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 관동대지진으로 집을 잃은 게이샤의 주인과 그 일가를 그녀가 부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주인이 다른 여성과 관계를 맺는 등 아키바에게 농락당했다. 게이샤집과의 계약이 아키바에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빚을 갚기 위해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게이샤에서 창녀로 전락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 빚을 갚기 위해 1925년 나가노현 이다시의 '미카와야'라는 가게로 바꾸었고 이이다에서는 불견전 게이샤(不見轉藝者)[7]가 됐는데 당시 '시즈카'라는 이름을 쓰면서 잘나가는 게이샤가 되었지만 매독에 걸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합법적으로 허가된 매춘부처럼 정기적인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녀는 여기서 더 나은 보수를 받는 직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그녀는 이이다의 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차라리 '창기(창녀)가 되는 편이 낫다[8]'고 말하면서 1927년 22세의 나이로 히다로 갔다.

그녀는 히다 대문 거리의 '미소노루(御園樓)'라는 고급 상점의 매음굴에서 엔마루(園丸)라는 이름의 매춘부로 1년여 일했는데 이곳에서 당시의 가장 인기 있는 매춘부 중 한 명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가불금은 당시 2,800엔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당시 '히다 유곽의 연혁'에 따르면 그녀와 거의 같은 시기 히다 유곽의 유곽 평균 가불금은 약 1,500엔, 최고는 '바리'에 있었다는 '바야'의 4,800엔이었다. 따라서 그녀의 가불금은 평균의 2배 가까웠고 유녀로서는 탑 클래스였다. 창백하고 콧날이 곧았다는 그녀의 미모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일이 게이샤에게 주는 보수보다 훨씬 나았는데 의료와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도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곧 이곳에서 트러블 메이커로 명성을 얻었는데 고객들의 돈을 훔치면서 매음굴을 나가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법적인 성매매 시스템이 잘 짜여 있었던지라 곧 추적당했다. 그녀는 이때의 일을 '아베 사다 사건' 후의 예심 신문에서 이렇게 말하했다.
'미소노루'는 당시 오사카에서 일류였습니다. 저는 인기있어서 3장[9]으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는 손님을 상대하는 것이 싫지 않았기 때문에, 포주님의 예쁨을 받아 미소노루에서 재미있게 일했습니다. 1년쯤 지났을 무렵, 어느 회사원 손님이 저를 낙적[10]해 주기로 했는데, 그 사람의 부하 직원도 제 손님임을 알고 낙적 이야기는 망쳐지고, 손님으로부터 용서해 달라고 해서 돈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썩어 있는데 소개업자에게 제의를 받아서 이듬해부터 23살 때, 나고야시 니시구 하에마치에 있는 토쿠에이루(德榮樓)에 빚 2,600엔으로 이사했습니다. 이곳으로 옮길 때 그 포주는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여자를 원했대요. 나는 얼굴이 길고 어느 쪽인가 하면 드세고 말괄량이 같은 여자이며, 소개업자에게 꼭 안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안게 된 것 같습니다.[11] 당시 그 사정을 모르는 저는 포주 우치노에 씨를 마지못해 안고 있어서, "이름 따위는 뭐든지 좋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저는 "내가 포주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포주의 마음에 들도록 해보이겠다"는 생각에 '사다코'라는 게이샤 이름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
파일:kyouguchishinchi139-min.jpg
타이쇼루(大正樓)

이사한 나고야의 토쿠에이루에서는 당시 업주가 '도망가면 네 부모의 재산을 압류해 한꺼번에 빼앗는다'고 말해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2년 정도 일하다가 티푸스를 앓고 싫증이 나서 다시 오사카로 돌아와 송도 유곽의 격이 낮은 도루(都樓)에서 2,000엔 정도의 가불금으로 근무했지만 불편한 손님에 싫증을 느껴 도쿄로 도망가다가 도루에서 찾으러 온 남자에게 잡혀 단바시노야마( 효고현)의 '타이쇼루[12]'에 강제로 팔렸다. 추운 겨울밤에도 밖에 나가 손님을 유치하는 엄청나게 힘든 근무가 기다리고 있었다.[13] 계속해서 하급점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6개월 만에 타이쇼루를 빠져 나온 후에 매춘 허가 제도를 탈출하는 데 성공하고 카페 여급[14] 웨이트리스로 일하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임금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견실해져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오사카의 매음굴에서 고급 창부[15]가 되어 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살던 중 1933년 1월 어머니 아베 카츠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소를 방문하기 위해 도쿄로 갔는데 도쿄에 있는 매춘 시장에 진출했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한 남자의 이 되었다. 1934년 1월 부친이 중병에 걸렸는데 그녀는 아버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열흘 동안 간호했다. 당시 아버지가 그녀에게 한 소리가 '내가 너한테 간호받을 줄은 몰랐어'였다.

1934년 10월 20대 후반이 된 그녀는 당시 일하던 무허가 매음굴을 경찰이 급습하면서 체포되었다. 매음굴 주인의 절친한 친구 가사하라 키노스케가 그녀의 석방을 주선했다. 가사하라는 그녀에게 빚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끌렸고 합의 후 정부(情婦)로 삼았으며 1934년 12월 20일 그녀를 위해 집을 마련하고 소득을 제공했다. 그는 사건 당시 경찰에 이렇게 진술했다.
"그녀는 정말 강했고, 정말 강력한 사람이었어요. 비록 내가 꽤 지쳐있지만, 그녀는 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죠. 우리가 하룻밤에 2번, 3번, 4번 하지 않는 한 그녀는 만족하지 않았어요. 밤새도록 사적인 부분에 손을 대지 않는 한 그녀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몇 주 후에 나는 조금 지쳤어요."
가사하라는 그녀에게 "아내를 버릴 테니, 나와 결혼하자"고 제안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녀는 가사하라에게 "다른 애인을 데려가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가사하라도 거절했다. 이후 이 둘의 관계는 끝났고 가사하라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그녀는 나고야로 떠났다. 당시 가사하라는 그녀에 대해 "그녀는 나쁜 여자입니다. 그녀는 걸레이자 창녀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한 짓이 분명하듯이, 그녀는 남성들이 두려워해야 할 여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가사하라와의 관계가 학대적이었다고 진술하면서 "그는 나를 사랑한 적도 없고 동물처럼 대했다. 그는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마다 나에게 애원하는 그런 남자였다"고 말했다.

4. 이시다를 만나다

1935년 다시 매춘업을 떠나기로 한 그녀는 나고야의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곧 이 식당의 단골 손님인 오미야 고로(大宮五郞)와 연애하게 되었다. 당시 오미야 고로는 정치적 야망을 지닌[16] 나고야시 시의원이자 고등학교 교장이었다. 하녀가 고객들과 성관계를 갖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을 알고 나고야에 싫증을 느낀 그녀는 6월 도쿄로 돌아왔다. 오미야는 도쿄에서 그녀를 만났는데 이전에 매독에 걸린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11월부터 1936년 1월까지 구사쓰 온천 리조트에서 머물게 되었다. 오미야는 그녀에게 지난 1월 "작은 식당을 차림으로써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냐"고 물어보면서 제안했고 "요식업계의 견습생으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고 권고했으며 그녀가 도쿄로 돌아가는 비용을 지불했고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인 동안 아베의 재정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식당을 소유할 것을 제안했다.

오미야 고로는 그녀에게는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했던 남자였다. 당시 오미야는 남자에게 몸을 파는 그녀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며 충고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보다는 그와 어울리게 되면서 낭만적인 자신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그들의 성생활을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관계를 비밀로 유지했는데 부분적으로는 공직에 출마하려는 오미야의 계획 때문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식당에서 고객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녀를 해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매춘업소는 겉으로 '일식 식당'이라는 식으로 간판을 달았기 때문에 진정한 식당을 만들려면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당시 그녀에게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 사람은 오미야였지만 아베 사다 사건이 터지고 중요 참고인으로 구속되어 조사를 받는 불명예를 받은 후 정치의 뜻도 포기하고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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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키치조

1936년 2월 도쿄로 돌아온 그녀는 오미야 고로의 소개[17]로 '다나카 카요'라는 가명으로 1936년 2월 1일 요시다야(吉田屋)라는 음식점의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 가게의 주인이었던 42세[18]의 이시다 키치조(石田吉藏[19])는 장어 전문점에서 견습생으로 시작해 장사를 해 왔는데 1920년 도쿄 나카노에 요시다야를 열었지만 그녀가 그의 식당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부인이 주로 경영하게 되었고 식당을 실제로 운영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바람둥이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시다는 상습적으로 바람을 피웠는데 그녀가 요시다야에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시다 키치조는 아베 사다를 유혹하며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고 이 둘은 불륜 관계가 된다. 그녀의 전 애인이었던 오미야 고로는 아베를 성적으로 만족시킨 적이 없었지만 이시다 키치조는 아베 사다를 완전히 만족시켰다. 4월 중순 이시다와 아베는 식당의 게이샤 중 한 명이 부르는 노래에 맞춰 식당에서 성관계를 시작했다.

1936년 4월 23일, 그들은 식당 바닥에서 하는 성관계를 청산하고 시부야 지역의 찻집[20] 또는 마치아이[21]에서 예정된 성적 만남을 위해 만났다. 이들은 4일 동안 이 곳에서 성관계를 하면서 침대에서 보냈다. 그녀는 나중에 "방을 청소하는 동안에도 (성관계를) 멈추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시다와 그녀는 도쿄 전역의 다양한 찻집과 호텔에서 술을 마시고, 먹고,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는데 짧은 시간 동안만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계획했지만 대신 침대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시다 키치조는 아베 사다와 오랜 시간을 보낸 뒤 1936년 5월 요시다야로 돌아왔을 때 2주간 식당을 비웠다. 그녀는 이시다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시다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의 외모, 태도, 연인으로서의 기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이렇게 성적인 남자를 만난 적이 없다.

2주간의 만남이 끝나자 그녀는 술기운이 돌면서 과음을 시작했는데 이시다에 대한 강박관념이 생겼고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으며 "이시다를 만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고 이시다가 그의 아내와 함께 돌아온다는 생각에 질투가 심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시다 키치조를 살해하기 1주일 전 자신의 살해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극을 보러 가기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이 연극의 제목은 '쓰야 모노가타리 신사쿠'며 게이샤가 연인을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칼로 살해하는 장면이 연출됐는데 그 장면은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그녀는 다음 만남에서 이시다를 칼로 위협하기로 결심했다. 5월 11일 그녀는 옷 일부를 전당포에 맡기고 그 돈으로 식칼을 샀다. 그녀는 나중에 이시다를 만난 것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내가 본 연극에서처럼 부엌칼을 꺼내 그를 위협했다. '키치조, 너는 단지 네가 좋아하는 손님 중 한 명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그 기모노를 입었어. 이 개자식아, 그것 때문에 널 죽일 거야.' 이시다는 깜짝 놀라 약간 물러났지만 모두 기뻐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수기(手記)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시다 키치조에게 끌렸으며 '난생 처음 알게 된 사랑에 애태우게 되어 밤잠을 설치게 되었습니다'라고 적었고 그때까지 만난 남자와는 다르다고 반복해서 말했으며 '나와 그 사람 사이는, 에로책 등에 쓸 수 없는 아름다운 연애인 것입니다. 어떻게 남들이 알 수 있겠어요?'라고 적었다.

5. 아베 사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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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건 이후

1941년에 출소하자마자 가명을 썼는데 처음에는 매우 눈에 띄지 않았으며 한 남자[22] 정부가 되었고 가짜 이름(요시이 마사코)으로 살았다. Y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비밀을 지켰지만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에 의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이바라키현으로, 그 다음에는 사이타마현으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식은 그녀에게 문자 그대로나 은유적으로나 새로운 생명을 가져다 주었으며 은유적으로 일본 사회에서 그녀를 비난하는 세력도 위축됐다. 재밌게도 이 새로운 풍토는 그녀를 희생자로 보는 것에 더 개방적이었고 그녀를 일종의 페미니스트 영웅으로 만들었다. 당시 아베 사다의 존재는 질의 높낮이를 가리지 않고 대중적인 문학 소재가 될 정도로 유명했으며 그녀를 추앙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1947년 7월 모처럼의 '카스토리 잡지' 붐을 타고 기무라 이치로 '쇼와 호색 일대여·정색참회'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이것은 단지 한 편의 소설'이라며 '머리말'에서 예심 조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그녀는 자신의 수기에서 "거짓말 투성이이며 나를 모욕하고, 키치조를 불쌍한 에로 남자로 쓰고 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저자와 출판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가 세상에 완전히 드러나 동거남이 떠났고 무뢰파(無賴派) 작가 오다 사쿠노스케는 그녀를 소재로 한 2편의 이야기를 썼으며 1949년 6월 기사에서는 "아베가 최근에 그녀의 이름이 에로틱한 책의 '산'에서 사용된 후 그녀의 이름을 지우려고 시도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아베 사다는 무뢰파 작가들의 뮤즈같은 존재였다.

1946년에는 작가 사카구치 안고가 그녀를 인터뷰하면서 그녀를 성적인 면과 자유의 권위자로 취급했고 "후세대를 위한 부드럽고 따뜻한 구원의 인물"이라고 불렀다. 1947년 작가 기무라 이치로(金村一郞)는 '아베 사다의 야한 고백'이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은 전국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10만부 이상이 팔렸으며 그녀와의 인터뷰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찰의 취조기록을 토대로 작성됐다.[23]

그녀는 이 책에 대한 응답으로 1948년 출간된 자서전 '아베 사다의 회고록'을 썼다. 1948년 1월 잡지 True Story의 초판은 "세기의 에로그로!"라는 제목과 함께 이전에 미발표된 사건 사진들을 실었다. 첫 공개 당시 '아베 사다 사건 화보'를 실었고 1949년 6월호 '월간독자'는 아베 사다의 어조 변화를 반영해 '거짓 도덕'과 억압의 시대에 자신의 욕망을 따른 '그 시대의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그녀는 인기 잡지에 출연하면서 인터뷰를 하는 것으로 악명을 이용해 돈을 벌었고 1947년부터 극작가 나가타 미키히코의 지도로 ' 쇼와 시대의 여인'라는 순회 단막극에 출연했으며 이후 몇 년간 일본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이 사건을 원작으로 한 연극에 자신 역으로 출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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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도쿄 아사쿠사의 요리점에서 일하던 시절의 아베 사다

1949년에는 이전 애인인 아키바 마사요시[24]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교토에서 게이샤를 하거나 호스티스 혹은 여관에서 일했다. 1952년 그녀는 도쿄 시내에 있는 이나리초에 있는 노동자 계급의 술집 호시키쿠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당시 술집은 그녀의 유명세를 이용해 손님들을 끌어들였고 아베 사다는 이 가게에서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20년 동안은 도쿄 시타야 인근에서 초라하게 생활했으며 1958년 인근 식당협회는 그녀에게 모범사원상을 수여하기도 했고 다이토구의 국제거리에 작은 바 '퀸'을 개점했지만 종업원이 가게의 돈을 가지고 도망쳐 반 년 만에 폐점했다.
1969년 63세의 아베 사다

1967년 62세가 된 그녀는 자신을 지원했던 아키바의 집을 나와 타이토구 류센에 '와타케'라는 주거 겸 점포에서 주먹밥 가게를 시작했다. 간판은 오니기리 가게였는데 샤미센을 연주하는 여성이 하나 있고 카운터에서 술을 마시게 하는 가게였다. 칸다에서 어릴 적 이웃과 사귀었던 아사카 미츠요나 아베 사다에 심취한 무도가 히지카타 타츠미, 유명 스모 선수나 국회의원 등이 단골이었다.

1969년에는 영화 '메이지·타이쇼·쇼와 엽기녀 범죄사'에 출연하기도 했다. 사건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고 "글쎄, 인간 일생에 한 명이지 않을까, 좋아하는 건? 바람기가 좀 있다거나, 좀 좋겠다라고 생각되는 건 있겠죠, 잔뜩. 인간이니까요. 그런데 좋아서 하는 건 혼자..."라는 말을 했다.

7. 바람처럼 사라지다

1971년 1월 이전 그녀는 우에노의 요정 호시키쿠미즈에 스카우트한 시마다 쿠니이치와 아사쿠사 나카미세에서 우연히 만나 치바현 이치하라시의 카츠야마 호텔에서 '교'라는 이름으로 일하고 있었다. 65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성에게 금품을 바치고 마음을 끌었다는 증언도 있다. 1971년 1월 아베 사다의 오랜 단골이었던 시마다는 아사쿠사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아베 사다를 만나게 되었다. 연극에 나가게 된다면서 들떠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6월경에 " 류머티즘을 치료하고 7월 8월이 지나면 돌아온다"는 편지를 남기고 유카타 1장만 가지고 사라졌으며 1974년 "3개월 동안 아사쿠사의 한 지인의 여관에서 지내다 사라졌다"는 증언을 끝으로 그녀의 행방은 완전히 묘연해졌다.

1974년 즈음에 목격담들이 들려오긴 했으나 결정적인 단서들은 없었고 결국 그녀가 이후 얼마나 더 살다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한 여인은 그렇게 마치 애초에 현실세계에 없었던 사람인 것마냥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실종된 후 이시다의 기일에는 발송인 불명의 꽃다발이 전달됐다. 이 꽃다발은 아베 사다가 준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추정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1987년부터 키치조의 묘에 이 꽃다발이 오지 않았던 걸 보아 그쯤 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만약 정말 1986년에 사망한 것이 맞다면 향년 81세였을 것이다.

8. 외부 링크


[1] 애초에 집안의 재력이 돼서 가능했던 일이며 본디 딸을 요시와라 유곽 등의 유녀로 보내는 경우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한번 유곽에 들어가면 빚 때문에 죽을 때까지 못 나왔다. 30세 전후로 나이가 많아지면 은퇴할수 있었으나 갈 곳이 없어 유녀를 관리하거나 호객을 하면서 유녀 견습생을 가르치는 ‘반토신조’ 혹은 ‘야리데바바’ 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나마 저것도 소수였고 대부분은 성병이나 돌팔이에 의한 낙태 등으로 인해 요절해 버려 유녀의 평균 수명은 20대 중후반 정도였다. 사후 시신은 그냥 버려졌는데 이들의 유해를 맡아 주는 절이 '나게코미데라', 즉 '던져넣는 절'이라고 대놓고 불렸을 정도다. [2] 일본 전통 인형극인 조루리에 사용되던 노래 [3] 아베 사다의 부모가 운영한 다다미 상점 이름 [4] 가해자는 게이오기주쿠대학 학생이었다. [5] 정작 아베 사다와 달리 작은 벚꽃의 오쵸는 이제 누군지 잊혔다. [6] 당시에는 훌륭한 집을 지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7] 상대를 선택하지 않고 돈에 따라서 손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싸구려 게이샤 [8] いっそ娼妓になったほうがまし [9] 잘나가는 넘버 쓰리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는 의미 [10] 손님이 유곽에 돈을 내고 유녀를 사는 것. 이렇게 하면 유녀는 유녀 명단에서 빠지고 손님의 아내나 첩이 된다. [11] 여기서 '안다'라는 말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사이라는 것이다. [12] 2019년 철거됐다. [13] 사다는 이곳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곳으로 꼽았다. [14] 이 시대의 카페는 유흥업소에 가까웠으므로 현대의 카페 아르바이트나 직원보다는 다방 종업원을 생각하면 된다. [15] 누옥에 속하지 않고 주인 한 사람 소유로 매춘하는 사람을 말한다. [16] 국회의원이 되려고 했다고 한다. [17] 오미야는 아베 사다와 관계를 계속하면서 갱생하도록 반복해서 설득했으며 그녀에게 '작은 요리집을 시킬 테니, 어딘가에서 요리를 수행하라'고 말해서 일을 시킨 곳이 이시다 키치조가 경영하던 요시다야였다. [18] 1894년생. 아베 사다보다 10살 연상이다. [19] 영화에는 '키치'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마이니치 신문 보도자료에서는 길(吉) 자를 훈독으로 읽은 '이시다 요시조'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20] 흔히 생각하는 차를 파는 곳은 미즈차야( みずちゃや) 정황상 마치아이자야( まちあいぢゃや)다. [21] 오늘날로 따지면 러브호텔에 해당한다. [22] 나중에 'Y'라고만 불렀다. [23] 이 책은 사다 자신이 썼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녀의 경찰 자백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녀를 변태적인 사디스트로 묘사했다. [24] 위에 언급한 아베 사다가 아버지와 오빠에 의해 팔렸을 때 처음 그녀를 산 사람이다. 아베 사다와 헤어진 후 결혼하였고 출소한 사다를 거둬 줄 때 보험 관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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