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대 소아시아 카파도키아의 요충지인 사탈라(Satala, 현재 터키 귀무냐네 주의 켈키트 군에 위치한 사다크 마을)에서 로마 제국과 후신인 동로마 제국이 사산 왕조와 맞붙은 두 번의 전투.2. 서기 298년 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전투
서기 293년, 아르메니아의 왕이었던 나르세스 1세는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바흐람 3세를 폐위하고 사산 왕조의 샤한샤로 등극했다. 그는 찬탈로 인해 불안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 지난날 카루스 황제의 침공으로 빼앗긴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296년, 사산 왕조군은 아르메니아로 침공하여 로마 제국이 아르메니아 왕에 앉혔던 티리다테스 3세를 몰아냈다. 이후 티그리스 강을 건너 북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방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위인 부제 갈레리우스에게 티리다테스 3세를 아르메니아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명령했다.
296년 말이나 297년 초, 갈레리우스는 카라에와 칼리니쿰 사이의 지역에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사산 왕조군과 격돌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었는데도 적에게 공세를 벌이다가 크게 패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뒤늦게 시리아에 도착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티리다테스를 왕으로서 정중하게 대했지만, 갈레리우스에겐 그의 패배에 화가 나서 크게 질책하며 말을 타지 말고 자신이 탄 병거 옆에서 달리게 하는 굴욕을 줬다. 하지만 그는 갈레리우스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하고, 다뉴브 전선의 고트 용병대를 모집한 뒤 다시 시리아로 오도록 하였다. 297년 늦여름, 갈레리우스는 고트 용병대가 포함된 병력 2만 5천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도 2번째 군단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사산 왕조에게 빼앗겼던 영역을 되찾고 갈레리우스의 남쪽 측면을 보호했다.
그런데 297년 7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도미티아누스와 아우렐리우스 아킬레우스가 이집트 속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11월경 알렉산드리아 주조소에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즉위 기념 주화를 발행했다. 보피스쿠스의 '프로부스의 생애'에 따르면, 사산 왕조의 샤한샤 나르세스 1세가 이집트의 반란에 호응하여 시리아를 침공했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 반란 세력과 사산 왕조는 모종의 밀약을 맺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집트 속주는 동방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며 대표적인 밀 생산지였기에, 그곳을 잃는다면 로마 제국의 국력은 심각한 손상을 입을 게 자명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군대를 돌려 이집트로 향했고, 갈레리우스는 아르메니아 전선에 홀로 남겨졌다.
나르세스 1세는 기회를 포착하고 298년 아르메니아로 진격하여 고립된 갈레리우스의 로마군을 섬멸하려 하였다. 갈레리우스는 카파도키아로 퇴각했고, 나르세스 1세는 이들을 추격하여 카파도키아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다 겨울이 찾아오자, 사탈라 인근에 겨울 숙영지를 세우고 이듬해에 있을 군사 작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병력이 페르시아군보다 열세한 상황이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가까운 시일에 복귀할 가망이 없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에게 불리해질 거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겨울의 강추위를 무릅쓰고 기습공격을 하기로 마음먹고, 군대를 극비리에 인솔하여 사산 왕조군의 진영에 접근했다.
고대 역사가 에우트로피우스와 파우스토스에 따르면, 갈레리우스 본인이 농부 복장을 한 채 아르메니아 귀족 2명과 함께 사산 왕조군의 진영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들은 적군 진영 안에 들어가서 태연히 채소를 팔면서 적군의 약점을 파악했다고 한다. 이게 사실일 가능성은 불확실하지만, 갈레리우스가 공격하기 전에 정탐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는 사산 왕조군이 병력만 믿고 완전히 방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어느 겨울 밤에 야습을 감행했다.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산 왕조군은 로마군의 기습공격을 받자 당황하여 삽시간에 무너졌고, 나르세스 1세는 싸우다가 부상당했으며 아내 아르사네와 후궁, 상당량의 보물, 장비, 식량을 남기고는 조랑말만 타고 겨우 탈출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주하는 나르세스 1세를 맹렬히 추격하였다. 그는 페르시아까지 쳐들어가 나르세르 1세를 잡는데는 실패했으나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훗날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이 갈레리우스의 군대에 종군했을때 폐허가 된 바빌론을 목격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내부사정을 고려해서 더 깊숙이 진격하려는 부제를 제지하고, 나르세스 1세에게 사절을 보내 "크테시폰을 돌려줄 테니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위하는 걸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조지아의 이베리아 왕국도 로마의 속국이 되었으며, 티그라노케르트, 사이르드, 마티로폴리스, 발라레사, 목소스, 다우디아, 아르잔 등 티그리스 강 너머의 메소포티미아 상류 지대까지 로마의 영역으로 귀속하는 데 동의하라고 압박했다. 나르세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승낙했고, 사산 왕조는 40여 년간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이 승리로 로마는 빼앗긴 영토를 되찾았으며 어마어마한 양의 전리품을 얻었다. 갈레리우스는 이 승리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테살로니키에 '갈레리우스 개선문'을 건설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고, '페르시쿠스 막시무스(페르시아를 정복한 자)'라는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확고해진다.
3. 서기 530년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의 전투
530년 봄, 사산 왕조군은 메소포타미아를 침략했다가 다라 전투에서 동로마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그들은 캅카스에 자리를 잡고 이베이라를 정복한 뒤 라치카를 습격했다. 동로마군이 그쪽에 집중된 사이, 샤한샤 카바드 1세는 아르메니아 탈환을 노리고 미르-미흐로 장군을 파견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사산 왕조군의 군대는 북부 캅카스 출신의 페르시아인과 사비르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병력 규모는 3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들이 사탈라로 접근하여 성벽 밖에 진을 치자, 시타스와 도로테우스 장군이 이끄는 동로마군이 맞섰다. 시타스는 1,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도시 주변의 언덕에 자리잡았고, 14,000명의 동로마군은 성안에 남았다.다음날, 사산 왕조군은 도시를 포위할 태세를 갖췄다. 이때 시타스는 기병 1,000명과 함께 언덕에서 돌격했다. 그들이 먼지구름을 많이 읠으켰기 때문에, 사산 왕조군은 그들이 주력군이라고 생각하고 진군 방향을 그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도로테우스는 성안에서 출격하여 페르시아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사산 왕조군은 전방과 후방 양쪽에서 공격받았지만, 병력 차이가 많이 났기에 효과적으로 대항했다. 그러던 중 트라키아 출신의 동로마 장군 플로렌티우스가 부하들과 함께 사산 왕조군의 중앙 대열을 파고 들어가 미흐-미흐로의 지휘부를 점령하고 군기를 탈취했다. 플로렌티우스는 곧 전사했지만, 군기를 잃은 사산 왕조군은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그 후 나르세스, 아라티우스, 이사키오스 등 아르메니아 왕족들이 동로마 제국에 망명했고, 볼룸과 파랑기움 등 주요 요새들이 동로마 제국의 수중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