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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鈴木 裕
게임 내에서 차가 폭발하고 리셋되는 틈에 분명 다른 친구들보다 운전을 더 잘하는 사람이 친구들에게 추월당했다면 그 게임은 잘못 만들어진 것이다.
한때
세가를 대표했던
일본의
게임 개발자. 체감형 게임과 3D 게임의 아버지라고 평가받는다. 2020년 현재는 YS.NET의 대표를 맡고 있다.2. 인생
2.1. 게임 개발자가 되다
1958년 6월 10일, 일본 이와테현 카마이시시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시절 미술과 음악, 서예 등 예체능 활동과 학업에 전념했고, 오카야마대학 전자물리학과에 진학한 후에는 밴드 기타리스트 활동을 포함한 각종 스포츠와 레저를 즐겼다. 사실 그의 유년기(60년대~70년대 초반)는 게임이 아예 없던 시대였다. 이 시기의 스즈키는 게임 제작자가 아니라 크리에이터로서 필요한 다양한 감성을 키웠다. 자동차나 오토바이 운전에서 얻을 수 있는 스피드 감각, 밴드 활동을 통한 음악적 감각, 미술과 서예 활동을 통한 미적 감각 등은 향후 그의 작품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스즈키는 1977년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보았고, 같은 시기인 70년대 중반 1세대 전자 게임인 퐁(PONG) 등을 통해 게임이라는 문화를 만났다. 애플 컴퓨터 속에서 돌아가는 다양한 게임을 보며 감명을 받은 스즈키는 게임이야말로 현대 전자기술이 보여줄 수 있는 정점이라는 생각을 했고, 자연스레 프로그래밍에 빠져든다. 이윽고 1982년, 대학을 졸업한 스즈키는 프로그래머로 세가에 입사하게 된다.
세가에 입사한 스즈키는 1984년, 챔피언 복싱이라는 작품을 통해 게임 개발에 처음 참여하게 된다. 챔피언 복싱은 세가 최초의 가정용 콘솔 SG-1000으로 발매되었고, 이후 아케이드로도 이식된다. 사실 스즈키는 게임을 딱히 즐기거나 잘 하는 편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대학 시절에 친구들과 게임센터에 가면 항상 지기만 했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기존의 게임 개발자들이 눈치채지 못했던 비디오 게임이 가진 단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합리성[1]과 사실성[2]의 부재였다. 입사 당시 회사에서 페라리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건방진 신입사원으로 유명세를 떨칠 정도로[3] 레이싱에 심취해 있었던 스즈키는 자신이 경험한 스포츠카와 오토바이의 속도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레이싱 게임을 제작하길 원했고, 이를 위해 행온의 기획서를 들고 세가 경영진을 찾아갔다.
2.2. AM2를 만들다
행온의 모습. |
스즈키가 기획한 행온은 아케이드용 오토바이 레이싱 게임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기존에 발매된 게임들처럼 스틱과 버튼으로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바이크를 연상시키는 탑승 기구 위에 올라타서 몸을 기울여 가며 운전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아케이드 게임이라면 모니터와 조이패드밖에 없었던 시절, 스즈키의 아이디어는 너무나도 혁명적이었고 위험했다. 당연히 수많은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그러나 체감형 게임에 대한 스즈키의 열정은 대단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세가 경영진으로부터 개발 허가를 받는 데 성공한 그는 본격적인 행온 개발에 들어갔다. 참고할 만한 자료 하나 없는 새하얀 눈밭 같은 기로에서, 스즈키는 프로그래밍과 음악, 하드웨어 제작, 테스트, 사업 분야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총괄하며 행온 제작을 주도했다. 몸을 기울이면 와이어가 끊어지거나 브레이크가 고장나고 스프링이 나가는 등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업사와 오토바이 제작사를 뛰어다녔고, 사실적인 운전음을 내기 위해 실제 바이크 엔진을 기기에 달려는 시도까지 했다. (물론 이는 배기가스 문제로 인해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게임 센터에 기기를 팔 때 스페어 부품까지 패키지 형태로 끼워 주는 등의 사업 모델도 스스로 구상했다. 무엇이 최선인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경험하며 세계 최초의 체감형 게임을 만들어나갔다.
마침내 1985년 7월에 발매된 세계 최초의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 행온은 일본과 전세계 아케이드 센터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스즈키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여있는 이 게임은 평소 게임을 많이 접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납득하며 즐길 수 있었고, 게이머들에게는 새로운 방식의 재미를 선사했다. 그리고 비디오 게임은 단순히 모니터 앞에 앉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플레이하는 활동적인 놀이 문화가 되었다. 입사 2년 차가 조금 지난 젊은 프로듀서와 10여명의 스태프, 그리고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만들어낸 성과로서는 놀랄 만큼의 성공이었다. 이전에 없던 역동적이고 체감적인 게임에 전세계 게이머들은 환호했고, 세가는 아케이드 게임 시장의 선구자 타이틀을 얻었다.
행온의 대단함은 93년 혼다에서 이리지마리 소이치로가 세가 부사장으로 부임하며 또 증명되는데, 당시 이리지마리는 혼다 연구소에서 온로드 바이크로는 프레디 스펜서만이 할 수 있었다는 드리프트 주행을 실현하기 위해 강성을 30%까지 높였음에도 실패했다가[4] 오락실에서 행온을 보고 미래 바이크의 모습을 보았다고 하며 입사 후 '행온을 만든 녀석'을 찾아내자 매우 반가워했다고 한다.
스즈키가 행온을 개발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세가 경영진은 행온의 성공으로 그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고 세가는 그를 필두로 세가의 기술력을 집결시킨 최고의 팀을 만들게 된다. AM2는 그렇게 해서 창설되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AM2의 야자수. |
AM2의 정식 명칭은 AM R&D DEP.T#2, 즉 제2 어뮤즈먼트 연구 개발부로 아케이드 게임 시장을 주 목표로 삼았으며,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력으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아케이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80년대 AM2는 스페이스 해리어 (1985), 아웃런 (1986) 애프터 버너 2 (1987), 파워 드리프트 (1988), 갤럭시 포스 (1989), G-LOC (1990) 등 다양한 체감형 아케이드 게임들을 차례로 출시하며 전설을 써내려갔다. 스즈키는 특히 누구보다 빠른 개발 속도, 그리고 빈틈없는 완성도로 유명했다. 일례로 스페이스 해리어는 게임 개발 완료까지 불과 2개월, 세가의 아케이드 게임 제작 기준과 캐비닛 컨트롤 등을 맞추는 데 4개월. 총 반년 만에 제작되었다. 제작 인원도 행온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명확한 방향성과 과감한 개발 전략으로 세가 경영진들이 기대하던 것 이상의 결과물을 내놓았고 수많은 아케이드 게임에 삽입된 SEGA 로고와 AM2 마크는 고품질 게임의 상징이 되었다. 세가는 일본 아케이드 업계 전체의 1/3 가량을 독식하였다.
2.3. 3D 게임시대를 열다
G-LOC의 개발을 완료한 1990년, 세가가 3D 게임을 위한 기판을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즈키는 학생 시절부터 꿈꿔 온 본격적인 3D 게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물론 90년 이전에도 3D 게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 3D 게임이라면 다수의 2D 이미지에 스프라이트 기법을 적용하여 여러 층의 화면을 하나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폴리곤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고 사실감을 준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었고, 실제로 AM2가 제작한 수많은 체감형 게임들에도 이러한 제작 기법이 사용되었다. 폴리곤을 활용한 3D 게임은 1983년 출시된 최초의 3D게임 아이 로봇 이후 소수가 나왔으나, 하드웨어적 능력 부족으로 인해 다수의 폴리곤을 한 화면에서 부드럽게 처리하지 못함에 따라 3D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본격적으로 3D 기판을 이용한 폴리곤 게임에 뛰어든 스즈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게임을 만들기에 90년대 초반 당시 게임업계의 기술 수준은 너무나도 수준이 떨어졌다. 세가에서 만든 첫 번째 3D 기판은 1프레임 당 300개의 삼각형 폴리곤만을 지원하는 수준이었고, 이 정도로는 도저히 사실적인 게임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스즈키는 하드웨어 칩 설계부터 손을 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사용되는 3D 컴퓨터 기술을 응용하기 위해 비행기 제조사 록히드 마틴과 제휴를 맺고 기판을 제작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게임 개발을 위해 비행 업계의 기술까지 사용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최첨단 기술을 모아 제작한 기판이 바로 MODEL1이다. 이를 기반으로 스즈키는 폴리곤을 활용한 세가의 첫 3D 게임 버추어 레이싱을 제작했다.
버추어 레이싱의 ‘버추어’ 는 ‘사실상의’, 혹은 ‘거의 …과 다름없는’ 이라는 뜻의 영어단어 ‘Virtual’ 에서 마지막 글자 ‘L’ 을 뺀 것으로, 스즈키가 늘 꿈꿔왔던 실제와 같은 가상 현실을 의미한다. 당초 버추어 레이싱은 MODEL1 기판의 성능 실험용으로 제작되었으나 내부 평이 너무 좋아 아케이드로 상용화 되었고, 당시 가격으로 40만 엔을 호가하는 16:9 와이드비전 16인치 모니터와 공기압을 이용한 부스, 세미 7단 기어를 사용하는 등 최고급 사양으로 출시되어 아케이드게임의 전반적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버추어 레이싱은 최대 8대의 기기를 연동해 즐기는 후속작 버추어 포뮬러 등으로 발전했다.
2.4. 버추어 파이터의 탄생
아케이드 게임 업계에서 더 이상의 적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히트작을 출시한 스즈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바로 스트리트 파이터 2였다. 버추어 레이싱이 출시된 92년, 전세계 아케이드 게임센터는 1991년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 2에 이어서 그 후속작인 스트리트 파이터 2 대쉬로 난리가 났었다. 일본의 수많은 게이머들이 기기에 줄을 서 있었고, 대전격투 특유의 높은 회전율로 인해 금방금방 동전이 쌓였다. 버추어 레이싱 역시 많은 팬들을 양산했지만, 시대의 대세는 대전격투였고 메이저 개발사부터 소규모 개발사까지 매달 수십 개의 대전격투게임이 나왔다. 그러나 그 중 살아남은 것은 용호의 권 시리즈나 아랑전설 시리즈같은 극히 일부분이었으며, 그마저도 스트리트 파이터 2의 높은 벽을 넘은 작품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은 스트리트 파이터 2의 아류작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었다.여기서 스즈키는 3D 대전격투게임을 만들어보자는 발상을 한다. 버추어 레이싱에서 얻은 3D 폴리곤 기술을 살린 대전격투게임을 만들면 스트리트 파이터 2와는 다른 매력으로 승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막 2D 대전격투게임도 붐이 일어난 시기에 3D로 대전격투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상당히 무모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우선 각면체로 이루어진 텍스처로 기본 골격을 만들고 곡선의 플롯 쉐이딩과 폴리곤으로 인간의 형태를 완성시킨다음 그 인간의 움직임과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을 하나의 화면에서 구현한다는 것은 중노동이 필요한 작업인데다 기술적으로도 비용이 많이 들었다. 때문에 3D 폴리곤 격투게임을 만든다는 그의 말에 세가 본사를 포함한 주변에서 수 많은 만류가 있었다. 당시 게임업계에서는 3D로 제작된 스포츠 게임이면 몰라도 3D 대전격투게임을 만든 회사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5] 스즈키는 이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수 많은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3D로 살아 있는 인간을 만들고 싶었던 스즈키는 완강했으며, 수많은 시도와 설득을 통해 세가 경영진에게 개발비 정도는 뽑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심는데 성공. 결국 1년이라는 시간내에 만들고 1년 내에 못 만들면 파기한다는 조건으로 3D 대전격투게임 프로젝트 버추어 파이터의 개발이 시작되었다.
버추어 파이터에서 스즈키는 스트리트 파이터 2와는 다른 방향의 격투를 구현하고 싶었다. 그는 이전부터 ‘게임이 갖춰야 할 첫 번째 요소는 생생한 현실감’ 이라고 생각했으며, 대전격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인간이 공중을 날고 장풍을 쏘는 황당한 만화영화가 아니라, 현실 속 중국 무술이나 길거리 싸움, 복싱과 유도 등의 격투기를 재현하고 싶었다. 이에 그는 중국 소림사와 미국 특수부대 등을 찾아가 직접 무술을 배우고,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철저히 연구했다. 상대의 공격에 얻어맞을 때의 기분을 알기 위해 동료 개발자로 하여금 자신을 때리라고 지시했으며, 나중에는 AM2 동료 제작자들에게도 무술을 배우도록 시켰다. 개발자들의 몸에 생긴 멍 자국이 늘어날수록 게임이 점점 더 사실성을 띠어 갔다는 당시 AM2 개발실 풍경 묘사는, 게임 제작자가 해당 게임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즐겨야만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그의 좌우명을 확실히 대변해준다.
버추어 파이터의 개발을 위해서 스즈키는 GPU 평행구조 도입 등을 통해 MODEL1 기판의 하드웨어적 환경도 대폭 개선했다. 버추어 레이싱에 사용되었던 기술 수준에서는 캐릭터와 배경 등에 사용되는 수많은 폴리곤들을 초당 30프레임의 부드러운 동작으로 계산해 나타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스즈키는 이러한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프로그래밍 최적화와 하드웨어의 발전 양쪽에서 연구하여 마침내 두 캐릭터의 부드러운 대전 장면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1993년 12월, 세계 최초의 3D 대전격투게임인 버추어 파이터가 게임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2.5. 쉔무 시리즈
버추어 레이싱, 버추어 파이터, 버추어 스트라이커, 버추어 캅 등 다양한 3D 게임 개발로 이름을 날리던 스즈키는 이번엔 기존 게임과 다른 종류의 게임을 만들고자 했다. 그것은 F.R.E.E (Full Reactive Eyes Entertainment)라는 이름의, 현재의 오픈월드와 비슷한 개념의 게임이었다. GTA 시리즈처럼 주인공 캐릭터가 자유롭게 도시를 돌아다니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게임을 개발하고 싶었던 것이다.처음에는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의 주인공 아키라 유키를 주인공으로 한 RPG 게임으로 구상했으나, 중간에 이 계획을 갈아엎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다.
스즈키는 F.R.E.E 라는 명칭에 걸맞게 자유도를 중시했다. 플레이어는 주인공 하즈키 료를 움직여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으며, 게임센터에 들어가 세가의 고전 게임들을 즐길 수 있었고, 돈이 필요하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이런 자유도에 맞는 세밀한 디테일[6]과 넓은 도시를 구축하느라 게임의 개발비는 70억엔에 달했다.
스타 개발자의 이름과 많은 개발비, 그리고 높은 퀄리티 등을 내세워 세가는 쉔무를 드림캐스트의 대표 게임 중 하나로 광고했고, 실제로 1편인 쉔무 1장 요코스카는 1999년 발매 이후 120만장이 팔리며 나름 성공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쉔무 2는 전작의 8분의 1 수준인 15만장을 겨우 넘기는 것으로 참패했고 후속작도 나오지 못했다.
이런 결과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쉔무는 원래 세가 새턴으로 나올 게임이었으나 세가 새턴이 생각보다 빠르게 망하자 세가는 차세대 게임기인 드림캐스트로 서둘러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개발 중에 있었던 쉔무 역시 새턴이 아닌 드림캐스트로 플랫폼을 옮겨야 했고, 자연히 차세대기의 성능에 맞추느라 게임을 대폭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림캐스트 역시 2001년 3월, 출시 2년 5개월만에 생산을 중지하면서 2001년 10월 발매된 쉔무 2는 콘솔의 수명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출시되었다.[7] 세가의 게임들이 Xbox로 대량 이주하는 과정에서 쉔무 시리즈도 2편이 북미와 유럽에서 XBOX로 발매되었지만 수명을 약간 연장시킬 뿐이었다.
또 한 가지 실패 이유는, 높은 자유도를 내세웠지만 생각보다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NPC 하나하나에까지 배경 설정이 있는 등의 굉장한 디테일은 분명 있었지만, 넓은 세계를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다는 오픈월드 RPG의 장점은 기존 JRPG의 특징인 '자유도가 낮은 대신 매력적인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다.' 라는 것과는 분명 차별되는 요소여야 했다.[8] 서양의 경우 1980년대의 울티마 4에서부터 이미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엔딩이 결정되는 등의 폭넓은 자유도가 있는 게임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쉔무 1편이 나온 이후 불과 1년만에 Grand Theft Auto III가 발매되었다.[9]
발매 직후에는 일본에서도 작품성을 인정받아 상도 받는 등 나름 흥행했지만, 콘솔이 망하고, 지나치게 많은 개발비를 들이고도 그것을 환수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예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스즈키 유는 여전히 쉔무 시리즈를 포기하지 않았고, 쉔무 2 이후 나오지 못한 스토리를 한번에 풀기 위해 쉔무 온라인을 기획하는가 하면, 후속작인 쉔무 3를 킥스타터를 동원해 완성시키거나 쉔무 1~2의 스토리를 애니화시키는 등 본인의 라이프워크로 삼고 있다. 물론 쉔무는 스즈키의 발언에 의하면 아직 스토리의 반절도 진행하지 못했을 정도로 장황한 스케일이지만, 그에 비해 지금까지 낸 작품들은 성과가 영 좋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마니아 중에 마니아들만 아는, 가끔씩 얼굴 비추는 오와콘으로 취급되는 상태.
3. 근황
2003에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 (AIAS)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스즈키 유는 게임 업계에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되었지만, 쉔무 온라인 등의 발매가 취소되며 개발자로서의 행보는 침체기에 접어든다. 2008년에는 YS NET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대표이사로 취임한다. 2010년에는 쉔무 외전인 '쉔무 거리' 를 핸드폰 게임으로 발매하지만 별 반향은 얻지 못했고 1년여만에 서비스를 종료한다.쉔무 2가 발매된 지 14년 뒤인 2015년, 쉔무 3의 제작이 발표되었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엄청난 돈을 모으는 데도 성공했다. PC판과 PS4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며, 발매일은 2018년 하반기 정도라고. 다만 개발 과정에서 공개된 트레일러 영상의 질이 너무 낮고, 트레일러 공개 전까지 소통부족이라는 소리를 듣는데다 발매일도 2019년으로 연기되는 등, 불안요소가 있다.
결국 2019년 11월 19일, 쉔무 3가 발매되었다. 발매 후 평가는 팬들이 아니면, 심지어 팬들에게조차도 실망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실패작이 되었다.
2022년에는 스페이스 해리어의 정신적 후속작으로 보이는 '에어 트위스터'를 애플 아케이드로 출시. 모바일 게임이란 점을 감안해도 과거 관련작들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묻혔다.
[1]
레이싱 게임
행온에서는 당시
폴 포지션같은 레이싱 게임에 무의식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차 폭발 등의 비현실적 시스템을 없애고 오로지 플레이어의 운전 기술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도록 했고, 2D 그래픽을 사용한 슈팅게임
애프터 버너 2에서는 멀리 있는 대상을 쉽게 맞출 수 있도록 자동 미사일 조준 시스템을 도입하여 '3D 슈팅은 어려워서 성공하지 못한다'는 편견을 깼다. 알고 보면 굉장히 심플한 방법이지만, 이전까지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해결책이었다.
[2]
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페라리 F355 챌린지를 개발할 때는 프로 카레이서들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사실감을 극대화시키고 중력 값과 페달 사용법 등의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본인의
페라리 F355를 포함한 페라리를 십수 대씩 빌려가며 실험을 하는 등 게임 이상의 사실감을 연출하기 위해 애썼다.
[3]
신입이 페라리를 타고다녔다는 점에서 알수있듯 스즈키 유는 대단히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가 이후 게임 개발에 큰 영향을 끼친 수많은 스포츠와 레저를 즐길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유복한 가정 환경 때문이다.
[4]
훗날 강성을 300%까지 높이고서야 드리프트가 가능하게 되었다.
[5]
사실 3D 대전격투게임이 스즈키만의 독창적인 발상은 아니다. 라이벌 회사인
남코의 관계자도 당사에서 1992년 경에 3D 대전격투게임 기획안이 나왔지만 무산된 바 있었다고 밝혔다. 이 기획안은 버추어 파이터가 세상에 공개되자 재발굴되어 <
철권>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된다.
[6]
가정집을 방문해서 서랍을 열면 수저나 집기가 있기까지 했다.
[7]
물론 드림캐스트 생산 종료 이후 3개월만에 나온
소닉 어드벤처 2와 같은 사례가 있긴 하지만, 소닉은
메가드라이브 시절부터 세가의 간판 캐릭터였다. 지지층의 규모가 달랐던 것이다.
[8]
쉔무는 기획 상 16장에 달하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쉔무3가 나올때까지 기승전결의 '승'에 겨우 들어섰을 정도로 스토리 전개가 지지부진 했던데다 쓸데없이 자세한 디테일 때문에 NPC들과의 대화하거나 특정 장소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게임 속에서 시간이 흐르는 시스템 상 스토리에 도움이 안되는 엑스트라와 대화하다 시간을 다 까먹어서 진행이 안될때도 많았다. 무엇보다 쉔무1은 버추어 파이터 같은 격투 시스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잘한 액션은
QTE로 때운데다 전투도 적었기에 플레이어를 실망시켰다.(1을 피드백해서 2에서는 전투가 늘었다)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게이머들에게는 이것이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는지, 현재까지 쉔무의 지지도는 오히려 서양에서 좀 더 높은 편이다.
쉔무 시리즈 항목의 닐 드럭만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등의 서양 인사들이 이 게임을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