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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9:02:51

삼미 슈퍼스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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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현대그룹 삼청태현(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2군 | 키움 히어로즈
역사 정보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파일:KBO 한국시리즈 트로피.svg
구단 역사 역대 시즌 실업 현대 연고 이전
1994년 한국시리즈 1996년 한국시리즈 1998년 한국시리즈 (V1) 2000년 한국시리즈 (V2) 2003년 한국시리즈 (V3) 2004년 한국시리즈 (V4)
역대 감독 역대 주장 역대 1차 지명 선수 사건 사고 암흑기
세부 정보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재계 라이벌 시리즈
경기장 숭의야구장(1996~1999) 수원종합운동장 야구장(2000~2007) 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 원당 야구장(제2 홈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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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년 참가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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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75~1992).png 파일:삼미 슈퍼스타즈 엠블럼.pn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1982~1988).svg
롯데 자이언츠 삼미 슈퍼스타즈[1] 삼성 라이온즈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파일:MBC 청룡 엠블럼(1982~1985).png 파일:OB 베어스 엠블럼.svg
해태 타이거즈[2] MBC 청룡[3] OB 베어스[4]
[1]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現 키움 히어로즈의 전신
[2] 現 KIA 타이거즈
[3] 現 LG 트윈스
[4] 現 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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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미 슈퍼스타즈 엠블럼.png
삼미 슈퍼스타즈
Sammi Superstars
창단 1982년 2월 5일
매각 1985년 5월 1일[1]
모기업 삼미그룹
법인명 (주)삼미슈퍼스타즈
연고지 인천광역시 (1982~1985)
홈구장 숭의야구장 (1982~1985)
춘천공설운동장 야구장 (1982~1985)[2]
구단명 변천 삼미 슈퍼스타즈 (1982~1985)
청보 핀토스 (1985~1987)
태평양 돌핀스 (1988~1995)
현대 유니콘스 (1996~2007)

1. 개요2. 구단 BI3. 구단 창단과 매각
3.1. 만년 꼴찌의 대명사
4. 팬덤5. 마스코트6. 기타7. 주요 선수 및 코칭 스태프8. 역대 성적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한국프로야구 소속 구단으로 최초의 인천 연고 구단이다. 연고지는 인천직할시[3]. KBO 리그의 원년 6개 구단 중에서 가장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곳이고 세 시즌 반이라는 짧은 역사를 보내면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초라한 성적으로 기록되지만 컬트적 인기를 구가했던 구단이기도 하다.[4]

1982년에 창단해서 1985년 여름 풍한방직에 매각되어 이후 청보 핀토스로 구단명을 변경했다. 홈구장도 인천에 있었고 실질적인 연고지는 인천이었으나 당시만 해도 인천, 경기, 강원 지역의 광역 연고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홈구장이던 도원야구장의 보수 공사 관계로[5] 1982년 창단 첫 홈경기 개막전도 춘천에서 열렸으며[6], 이후에도 제2 연고지로서 춘천 경기가 계속 있었다.[7]

모기업 삼미그룹은 무역, 해운, 광업, 특수강 등이 주 종목으로, 프로야구의 홍보 효과를 누릴 만한 소비재 분야 계열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8] 구단 운영을 통해 시너지를 낼 만한 요소가 없었지만, 당시 30대였던 김현철 회장이 스포츠를 좋아했고, 미국 유학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광팬이어서 메이저 리그가 미국의 국민 스포츠로 자리잡은 것과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그 지역사회의 저명 인사가 되어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걸 목격했으며 프로야구의 발전 가능성과 당시 KBO 사무총장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야구팀을 창단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야구계에선 인천- 경기- 강원 지역연고팀으로 강원도가 고향인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에 접근했으나 거부당하였다.[9][10] 이후 급하게 대타를 찾는 와중에 삼미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냅다 뛰어든 것이다. 다른 기업을 낀 창단이 여의치 않아 5개팀으로라도 준비하려는 찰나에 KBO 첫 총회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참가 의사를 밝혔다.

팀명은 악의 무리로부터 지구를 지키는 절대무적의 슈퍼 히어로 슈퍼맨에서 따온 슈퍼스타즈인데, 놀랍게도 당시 삼미는 슈퍼맨 원작자의 허가를 받지 않고 슈퍼맨 캐릭터를 갖다쓴 것도 모자라서 가슴에 슈퍼스타즈 엠블럼까지 딱 박아버렸다.[11] 여성형 마스코트이자 치어리더로 써먹은 원더우먼도 마찬가지다.

21세기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슈퍼맨의 원작 저작권을 소유한 DC 코믹스로부터 베른 협약 위반 및 저작권 무단 도용 및 편집 혐의로 고소를 먹어도 충분할 일이지만, 이 당시는 아직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희박했기에 슈퍼맨과 원더우먼을 막 써먹을 수 있었다.[12] 당시는 여자가 피켓을 들고 나오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에 슈퍼맨과 동급 내지는 동료로 인식되는 원더우먼이 대신 참석한 것이다.[13]

파일:삼미슈퍼스타즈창단.jpg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1982년 2월 5일 인천 신포동 인천상공회의소 강당에서[14] 23명의 슈퍼맨이 참석한 가운데 인천 최초의 프로야구단 삼미 슈퍼스타즈의 창단식이 열렸다.

2. 구단 BI

삼미 슈퍼스타즈의 엠블럼 및 심볼 마크
파일:삼미 슈퍼스타즈 엠블럼.png 파일:삼미 슈퍼스타즈 심볼(1982~1985).png
엠블럼 심볼 마크

3. 구단 창단과 매각

우여곡절 끝에 삼미그룹이 한국야구의 발상지인 인천을 연고로 하는 프로야구단을 창단하자 인천의 야구 팬들은 엄청난 기대를 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야구를 받아들인 도시로서 해방 직후 4대도시 대항 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인천군 야구팀[15], 인천고등학교 야구부, 동산고등학교 야구부 등 인천에 연고를 둔 야구팀들이 전국의 야구계를 평정했던 만큼 삼미 야구단이 오래 전부터 쌓아올렸던 인천야구의 영광을 프로야구 무대에서 세워줄 것이라고 다수의 팬들이 기대했다.

그런데 그 기대는 그저 한낱 꿈에 불과했다. 막상 팀을 꾸려보니 기대치보다 훨씬 못 미치는 이름값의 선수들만 모이게 됐다. 삼미는 원년 6개 구단들 중에서 유일하게 국가대표가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선수층이 양적·질적으로 빈약했다. 불과 14명의 초미니 선수단으로 출범한 해태 타이거즈는 양적으로 다소 부족했을지라도 질적으로는 호화군단에 가까웠다. 실업야구 홈런왕 김봉연을 비롯해 김성한, 김용남, 김종모, 김준환 등 호남 출신의 스타급 선수들이 해태에서 뭉친 반면 삼미는 이들의 네임밸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선수들로만 꾸려졌다.

물론 인천 출신 선수 중에 국가대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인천 출신 국가대표 스타로 투수 임호균 포수 김진우가 있었기에 삼미가 이 둘을 어떻게든 데려오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에 하필이면 대한민국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린 탓에 임호균과 김진우 영입에 실패했다. 임호균과 김진우는 당시 국가대표팀에 차출됐고 프로에 입단한 선수는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기에 삼미가 데려올 수 없었다. 결국 임호균과 김진우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직후인 1983년에 입단하게 된다.[16]

국가대표 스타 선수가 팀 내에 전혀 없는 상황에서 팀의 명칭이 '슈퍼스타즈'로 정해졌다. 이를 두고 일부 팬들과 언론은 "슈퍼스타가 한 명도 없는데 무슨 슈퍼스타즈냐?"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물론 박현식 초대 감독도 이 조롱을 알고 있었기에 삼미 창단식 때 현장을 찾은 기자들에게 "우리 팀은 모두가 슈퍼스타입니다."라는 변명을 한 적이 있다. 영화 <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이 대목이 언급되는데 훈련장에서 팀명 확정 소식을 들은 박현식 감독이 "이름부터 글러먹었어. 슈퍼스타즈가 뭐냐... 스타 하나 없는 슈퍼스타즈가 말이나 돼?"라고 말하더니 정작 창단식에서는 "우리 팀 선수는 전부 슈퍼스타"라고 얘기했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한숨을 쉰다.

어쨌든 인천 팬들의 열화와 같은 기대 속에서 1982년 3월 28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창단 첫 공식 경기에서 삼미는 인호봉의 3실점 완투와 양승관의 3타수 2안타 2타점의 활약으로 당대 최강팀이자 우승 후보 0순위 팀으로 분류됐던 삼성 라이온즈를 5:3으로 이기며 첫 승리를 기록했다. 예상치 못한 삼미의 첫 승 소식에 인천 팬들은 당연히 광분했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이 승리 이후 삼미가 이기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웠고 이후에는 전력의 한계를 드러내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원년 우승팀인 OB 베어스에게는 시즌 16차례의 맞대결에서 전패했고 삼성과 MBC에게 각각 2승 14패, 롯데에게 5승 11패, 해태에게 6승 10패를 당하는 바람에[17] 시즌 전기/후기리그 통합 성적이 고작 15승 65패 (승률 0.188)에 불과했다. 0.188이라는 수치는 역대 프로야구 단일 시즌 최저 승률으로 남아 있다. 더 심각한 기록도 있는데 후기리그 성적이 심각하게 처참했다. 1982년 후기리그 삼미의 성적은 무려 5승 35패 승률 0.125다. 이는 기별 승률 중에서 단연 최저 기록이다.

삼미가 이토록 처참한 성적을 거둔 이유는 국가대표의 부재 외에도 심각할 정도로 부실했던 투수진에 있었다. 다른 팀에는 박철순(OB), 하기룡(MBC), 권영호, 이선희, 황규봉(이상 삼성), 노상수(롯데) 등 1~2점대 ERA와 15승을 넘나드는 에이스가 한 명 이상 있었고 심지어 해태는 투수난 속에도 김성한이 타자와 투수를 겸하면서 10승을 올려주는 투혼을 발휘했다. 그러나 원년 삼미에서는 가장 잘 던진 투수 오문현(102이닝)의 ERA가 4.85에 육박할 정도로[18] 투수 풀이 처참했다. 그 외에도 규정이닝을 넘긴 김재현, 감사용, 인호봉, 김동철은 모두 ERA 6~7점대를 기록하며 무너지고 말았다. 그나마 조흥운, 양승관, 금광옥 등이 포진한 타선의 공격력은 괜찮아서 점수를 낼 때는 제때제때 뽑아냈지만 마운드도 이렇게 약한데다 수비까지 약하니 4~5점차로 이기고 있다가도 역전패당하는 경기가 허다했다.

투수들의 부진은 급기야 대역전패의 참사를 내고 말았다. 1982년 4월 25일 춘천야구장에서 열린 OB전이 문제의 대참사 경기였는데 경기 초반 8:0으로 크게 앞서던 삼미는 야금야금 점수를 내주더니 11:12로 대역전패를 당했다. 하필이면 김현철 구단주가 춘천에서 이 경기를 직관했고 크게 낙심한 김 구단주가 박 감독의 퇴진 문제를 거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4월 27일 박현식 초대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퇴진했고 이후 이선덕 코치가 감독대행이 되어 팀을 이끌었지만 이미 연패를 거듭하면서 사기도 가라앉고, 조급한 나머지 같은 일이 반복되고, 그러다보니 선수들 사이의 불화도 불거졌고, 이런 상황이었으니 연패의 늪에서 벗어나기란 지난했다.

여기에 3월 개막 이후 3개월여 동안 메인 홈구장인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경기를 치르지 못하고[19] 춘천야구장을 비롯해 전국의 야구장을 유랑극단처럼 돌며 홈경기를 치른 점도 성적 하락의 원인이 됐다. 삼미는 인천·경기·강원 연고팀이었지만 당시 연고지 내에 인천야구장과 춘천야구장을 빼고는 프로야구 경기를 열 수 있는 야구장이 없었고 그 인천야구장마저 공사판으로 전락하면서 별 수 없이 전국을 유랑한 것이다.[20]

1982년 삼미가 원년팀 OB에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16전 전패를 기록하는 등 상위권과 하위권의 전력차가 크게 나자 KBO는 결단을 내렸다. 해외동포 선수들의 한국프로야구 입단을 조기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애초 1985년부터 시행할 방침이었지만 전력균형을 위해 1983년으로 앞당겼다. 이에 삼미는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91승 84패를 거둔 "일본에서 온 너구리" 장명부와 1982년 2군 웨스턴 리그 타율 2위(0.339)에 오른 이영구를 영입했다. 여기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임호균, 김진우, 정구선, 이선웅 등이 가세하면서 전력이 탄탄해졌다. 또 박현식 초대 감독과 함께 인천야구의 대부이며 맹장인 김진영 인하대 감독을 사령탑에 올리는 등 일련의 움직임은 재창단에 방불케 했다. 다만 이때 너무 많은 선수를 수급한 것의 여파로 해외 전지훈련 비용까지 다 써버려서 비닐 하우스를 지어 국내 전지훈련을 하게 되었다.

예외적으로 프로야구 출범 이듬해인 1983 시즌에 427이닝 30승 16패 6세이브라는 야구 역사상 다시 없을 괴력을 발휘한 장명부와 임호균의 활약으로 전후기 2위씩 차지하는 등의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에는 전후기 1위 두 팀만 한국시리즈 티켓을 가져가는 제도라 삼미는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전기리그에서 시즌의 1/5 가량 남은 무렵 2위 해태에 2.5 경기차로 앞서있어 삼미의 전기리그 우승이 유력해보였지만 김진영 감독이 청룡과의 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고 머리로 주심의 배를 들이받고 유니폼 상의를 풀어헤친 채 폭언을 퍼붓고 급기야 백스톱 그물 뒤에서 경기 속개를 종용하는 이기역 심판위원장의 넥타이를 잡아 끌다가 드롭킥을 선사하는 추태를 벌이다 퇴장당하는 사태로 구속당하는 사건[21]이 일어나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결국 해태와의 광주 3연전을 모두 패해 2위로 내려간 것이 뼈아팠다.[22] 이후 이재환 수석코치 - 이선덕 투수코치 - 박현식 고문 순으로 감독대행이 바뀌면서 성적은 더 떨어진다. 중간에 백인천 MBC 청룡 감독 겸 선수가 플레잉코치로 이적해왔으나 소득은 없었다. 더구나 백인천은 간통 사건에 휘말려 불명예스럽게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해부터 장명부가 혹사의 여파로 무너지자 삼미는 다시 부동의 약팀으로 돌아가버렸다. 거기다 장명부는 감독 이상으로 팀을 좌지우지 했다. 투수 육성은 그렇다고 해도 트레이드, 전지훈련 까지 깊숙이 개입하면서 삼미의 장명부가 아니라 장명부의 삼미가 된 것이다. 1983년 10월 27일 삼미는 이 해 12승을 올린 임호균을 롯데로 보내고 박정후(투수), 김정수(1루수), 권두조(유격수), 우경하(외야수)를 받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전력강화를 위해서 센터 라인을 강화해야 한다는 장명부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임호균의 공백은 박정후, 신태중, 정성만으로 메우겠다는 복안이었지만 1984년 시즌에 이들이 거둔 성적은 14승 27패에 그쳤다. 여기에 장명부 또한 전년도 30승에 따른 1억 원 보너스를 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84시즌은 태업성 플레이를 했다는 설이 돌 정도로 부진했고[23] 13승 20패 7세이브로 추락했다. 필드에 나서기도 전에 내부 싸움에 지친 삼미는 전 후기리그 에서 다시 꼴찌로 추락했다.

1985년은 더 비참했다. 삼미는 그 해 3월 30일 구덕 야구장에서 직전 연도 한국시리즈 우승팀 롯데 자이언츠와 개막전을 치렀는데 이 경기를 무려 5:1로 이기며 돌풍을 예고했다. 이 때만 해도 1983년의 돌풍을 재현할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특히 이날 승리는 직전 시즌 프로야구 정규시즌 MVP이자 한국시리즈 4승을 홀로 독식했던 슈퍼 에이스 최동원을 상대로 거둔 것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하지만 다음 날인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무려 한 달간 단 1승도 추가하지 못하고 18경기를 연속으로 내리 지는 바람에 프로아구 사상 최다 연패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기간 동안 삼미전을 승리의 보증수표로 여긴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들이 앞다투어 등판해 삼미의 고전, 연패가 더욱 길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여담으로 이 기록은 절대로 깨지지 못할 듯했으나 한화 이글스가 35년 뒤 2020년 5월 22일부터 6월 12일까지의 18연패를 기록하며 타이기록이 나오긴 했다.[24]


길고 길었던 연패는 시즌 20번째 경기였던 4월 30일 인천 MBC전에서 멈추게 된다. 이날 삼미는 당시 에이스 최계훈이 9이닝 무실점 완봉으로 호투하고 팀의 최고 스타였던 양승관이 8회말 만루에서 MBC의 에이스 하기룡을 상대로 싹쓸이 3타점 3루타를 터뜨리며 4:0의 승리를 거뒀다. 이날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은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도 한 듯 모든 팬들이 만세를 부르며 승리의 기쁨에 취했다.

하지만 삼미가 어렵게 연패를 탈출하던 그 순간 역설적이게도 슈퍼스타즈 야구단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슈퍼스타즈 구단주였던 김현철 삼미그룹 회장은 4월 30일 저녁 서울 모처에서 슈퍼스타즈 야구단을 라면 제조업체인 청보식품에 넘기는 내용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삼미는 구단의 부채 60억원을 청보식품에 넘기는 조건으로 구단 지분을 매각했다. 이 소식은 연패 탈출 바로 다음 날인 5월 1일에 공개됐는데 언론에는 구단 매각대금이 70억원으로 언급됐다. 구단 매각 사유는 모기업인 삼미그룹의 경영난과 야구단의 성적 부진에 따른 그룹 이미지의 악화였다.

김현철 회장은 야구단 지분 매각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뒤 아쉬움의 눈물을 펑펑 쏟았다고 전해진다. 미국 유학 시절 바라본 프로야구단 운영의 순기능과 구단주가 된 기업인들의 모습을 롤모델로 삼으며 한국프로야구의 원년 참여 구단으로 야심차게 나섰지만 그룹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야구단을 팔아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슬프고 아쉬웠기 때문이다.

사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매각설은 1984년 하반기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삼미그룹의 주력 업종이었던 해운 사업이 제2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휘청거리면서 그룹 전체의 경영난도 심화됐고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슈퍼스타즈 야구단 매각이 거론됐다. 삼미그룹의 야구단 매각설이 언론에 공개될 때마다 그룹과 구단은 극구 부인했지만 실제 그룹 살림은 야구단을 팔지 않고서는 장기 생존을 보장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빠졌다. 결국 1985년 초부터 야구단 매각을 본격적으로 추진했고 이 이야기가 김현철 회장의 경기고등학교 선배인 김정우 풍한방직 사장의 귀에 들어가면서 김정우 사장이 야구단 인수에 직접 나서게 됐다. 김정우 사장은 "절친한 고교 후배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선배가 도와줘야 하지 않겠느냐"며 나섰다고 한다.

1985년 5월 1일부터 6월 28일까지 삼미그룹과 청보식품은 슈퍼스타즈 야구단을 공동으로 운영했고 6월 29일부터 청보식품이 단독 운영하는 청보 핀토스로 탈바꿈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이름으로 열린 마지막 경기는 1985년 6월 21일에 인천공설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롯데와의 대결이었는데 이날 삼미는 6:16으로 대패하면서 마지막까지 약체로서의 이미지를 남긴 채 3년 6개월 만에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야구단 운영법인은 구단 지분 매각 후 '삼미항업'으로 변경하여 사실상 휴면법인 상태로 있다가 1993년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3.1. 만년 꼴찌의 대명사

인천시민이 기대한 슈퍼맨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을 만나면 백전백패, 하늘을 날면 청룡에게 물리고 산에 가면 호랑이, 들에 가면 사자에게 물리는 게 무슨 슈퍼맨인가.
OBS <불타는 그라운드>
[25]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약팀으로, 해태 타이거즈와 함께[26] 리그 창설 시기 매우 불안정했던 KBO 리그의 전력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줬던 팀이다.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시작된 인천 연고팀은 1990년대 초까지 KBO 리그를 대표하는 약체팀으로 꼽혔는데 그 중에도 삼미는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약팀으로 평가된다. 그 다음가는 백인천 시절 롯데마저도 1982년 삼미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중계진들마저도 "이게 동네야구지 프로야구냐", "여전히 수준 이하의 경기를 보여주고 있다", "삼미 아니면 웃을 일이 없다" 등의 악담을 대놓고 늘어놓을 지경이었다.

아래의 기록은 삼미 슈퍼스타즈가 KBO 리그 역사에 눈물로(?) 써내려간 기록들이다.

1982년에는 통합성적 15승 65패(전기리그 10승 30패, 후기리그 5승 35패)를 기록하며 한국프로야구 사상 전무후무1할 승률(승률 0.188)[31] 유일무이특정 구단 상대 전패(OB 베어스전 16전 전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다른 기록은 몰라도 21세기의 KBO 리그 환경에서는 최저 승률 기록을 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44경기 체제에서 1할 8푼 8리 미만의 승률을 기록하려면 산술적으로 27승 이하의 승리를 거둬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KBO 리그 구단 사상 시즌 100패를 찍은 팀은 없다. 현대야구 최악의 시즌을 보낸 2002년의 롯데나 2020년의 한화도 시즌 100패는 안 했다.

2018 시즌 중에 LG 트윈스 두산 베어스에게 15전 전패를 하면서 삼미에 이은 두번째 대기록을 달성할 뻔 했지만, 마지막 16차전에서 차우찬의 역투로 LG가 승리하면서 여전히 유일무이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1985년 3월 31일부터 4월 29일까지 무려 18연패(連敗)[32]를 기록했다.

김은식의 저서에 따르면 선수단 등록에 필요한 최소 엔트리를 못 채워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선수단 모집을 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사회인 야구 뛰는 사람들이 1군 프로야구 선수로 낙점받았다는 소리. 이는 선수 풀이 좁았던 것도 있지만, 이 때는 운동선수 그 자체를 직업으로 삼는 프로와 달리 야구단을 운영할 여건이 되는 수준의 기업 내지는 은행에서 안정적인 직장인 신분으로 선수를 할 수 있는 실업야구가 더 높게 평가받고 있었던 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대 야구는 워낙에 환경이 좋아져서 프로 선수가 FA로 수억 ~ 수십억을 벌면 그것으로 은퇴 이후에도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당시에는 프로야구가 갓 출범한 직후기 때문에 선수 생활 은퇴 후에도 사원 신분으로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으며 고위 임원까지도 노릴 수 있는 실업야구가 훨씬 안정적이었다. 다만 이 부분은 어느 정도는 걸러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실제 창단 멤버 중 일반인 출신은 단 1명도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수 1명이 아쉬운 판에 들어왔던 선수를 내치기도 했다. 심석종고[33] 시절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투수 이하룡이 훈련 태도 불성실을 이유로 원년 시즌 개막 전 바로 퇴출당했을 정도. 비슷한 의미에서 감사용[34]도 삼미 슈퍼스타즈 소속이었다.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자면, 우선 외부 요인으로 인해 시즌 내내 자팀 연고지에서 제대로 된 홈경기를 치르지 못했던 것이 컸다. 창단 당시부터 삼미의 홈구장은 인천 숭의야구장이었지만, 야간 경기 개최를 위한 조명탑 공사 지연으로 인해 전기리그 동안에는 인천에서 홈경기를 단 한 번도 치르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삼미는 춘천(8경기), 부산(5경기), 대구(4경기)[35], 서울(3경기) 등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홈경기를 치러야 했고[36], 1986 ~ 1990년과 2013 ~ 2022년에 있었던 2연전 일정도 애교로 보일 정도의 극악의 일정을 보내야 했다. 그나마 후기리그 개막 이후인 1982년 7월 17일부터 마침내 인천에서 홈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되었지만, 하필이면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 경기장으로 숭의야구장이 낙점되면서 그 해 9월 한 달 내내 또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한국프로야구 초창기는 해당 연고지 지역 고등학교 출신 선수를 인원수 제한 없이 무한정 선발할 수 있었기에 당시 프로야구 선수단은 지역 올스타 팀이나 마찬가지였다. 삼미의 명목상 연고지는 인천·경기도·강원도·이북5도였지만, 팀을 꾸릴 만한 기량을 갖춘 임팩트 있는 선수는 오로지 인천의 학교들에서만 배출됐기에 주축은 결국 자연히 인천 출신 선수들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1970 ~ 1980년대 인천의 고교야구 팜은 암흑기였기에 팀이 잘 되려야 잘 될 수가 없었다. 화려한 이름값을 자랑하던 서울의 MBC나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온 대구의 삼성, 인원 수는 적어도 개개인의 기량만큼은 가히 국가대표급이었던 호남의 해태와 비교하면 인천의 삼미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수준이었다.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인천팀의 팜은 정말 처참하기 짝이 없었는데, 선수단의 핵심이 되는 인천고와 동산고의 당시 성적은 영 신통치 못했고[37] 이 두 학교를 뒷받침할 만한 지역의 학교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제물포고는 프로 원년인 1982년에야 창단됐고... 경기도의 경우 심석종고(현 심석고. 1987년 해체.)가 유일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만년 약체였으며, 이후 한동안 경기도 고교야구를 양분했던 유신고와 부천고는 프로야구 출범 이후인 1984년과 1985년에 야구부가 각각 창단됐다. 춘천고, 강릉고, 원주고 등 강원권의 고교들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애초에 선수가 나올 수 있는 팜 자체가 얇고 부실한 가운데에서 선수를 뽑는 데는 한계가 뚜렷했으니 팀이 처음부터 잘 굴러갈 수가 없었던 것.

결국 지역 간 전력 불균형으로 인해 팀간 생각보다 전력차가 심하게 나자 전력 평준화를 위해 KBO는 리그 2년차인 1983년부터 사실상의 외국인 선수 제도인 재일동포 선수 제도를 도입한다. 삼미는 이 제도를 통해 장명부와 이영구를 영입해서 1983 시즌 한때 선두권에 올랐고, 전후기 통합 순위 3위에 오를 정도로 전력이 좋아졌다. 사실 이 제도도 일본 내, 그것도 토종 일본인 선수가 아니라 재일동포 선수에 한했기에 인력풀 자체는 지금의 외국인 선수 제도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자연히 선수층도 얇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삼미는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최초로 허용한 구단이기도 한데, 1982년 6월 12일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오대석에게 KBO 리그 1호 사이클링 히트를, 7월 21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김일권에게 KBO 리그 1호 단독 홈스틸을 허용했고 1984년 5월 5일에는 해태 타이거즈의 방수원에게 KBO 리그 1호 노히트 노런의 제물이 되었다.

4. 팬덤

2000년대에는 박민규의 소설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38]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패전처리 투수[39] 감사용의 일화를 각색한 영화 ' 슈퍼스타 감사용'으로 인해 팬덤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삼미 시절부터의 팬은 문학성이 끝내주는 경우가 많다. 야구의 추억을 연재한 김은식[40]이나 인천 출신으로 인천 야구에 대한 책을 여러편 적은 고 이종남 기자 같은 널리 알려진 인물들 말고도, 인터넷상으로도 삼미에 대해서 글을 써놓은 문서들을 보면 유달리 필력들이 좋다.

5. 마스코트

파일:삼미 슈퍼스타즈 마스코트.jpg
파일:external/www.gasengi.com/b6f143e6b882a220e7e675028ffef544_y8vtga3zKp6OFMFWp.jpg
좌측부터 호랑이, , 원더우먼, 청룡, 거인, 사..자?.

팀의 심볼로 다른 팀이 동물이나 상징 로고를 그려넣는 것과 달리 삼미는 "배트를 든 슈퍼맨"을 선택했다. 마침 영화 슈퍼맨이 전세계적으로 대흥행할 때였고, 비단 극장과 인연이 없더라도 만화영화 슈퍼 특공대가 한창 방영되었을 때라 창단 당시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했었다.[41] 지금 보면 난리가 날 일이지만, 당시 한국은 세계저작권협약과 베른 협약 미가입국이었기 때문에 축구팀 포항제철 돌핀스가 아예 팀 이름을 일본 만화영화 캐릭터 이름에서 따온 아톰즈로 이름을 바꾸는 촌극조차 용인될 정도로 저작권 개념이 정착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이 베른 협약에 가입한 이후인 2022년 올스타전때 삼청태현의 마스코트들 중 유일하게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서울 히어로즈 구단의 마스코트인 턱돌이가 슈퍼히어로를 모티브로 했으니(슈퍼 히어로의 상징인 망토를 걸친 이미지도 있다) 어떤 면에서 인연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6. 기타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024년 7월 11일 방영분에서 삼미 슈퍼스타즈의 일대기가 다루어졌다. 삼미 출신이었던 감사용, 김무관, 양승관이 방송에 관계자로 출연해 인터뷰도 했다. 또한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지상렬은 연고지인 인천광역시 출신이면서[45] 삼미 슈퍼스타즈 어린이 회원이기도 했고, 아직도 인천 연고팀을 꾸준히 응원하고 있는 야구팬이기도 했기 때문에 중간중간 구단과 소속 인물들에 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대부분 정확하게 맞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46] 유일하게 이춘근이라는 등번호 40번을 단 타자만은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 사람은 정식 선수가 아니라 선수가 부족해서 할 수 없이 출전한 타자 코치였다.

7. 주요 선수 및 코칭 스태프

8.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rowcolor=#373a3c,#212121> 연도 정규시즌 순위 최종 순위 팀이름 경기수 승률
1982 6위/6팀[47] <colbgcolor=#0066b3> 6위 삼미 슈퍼스타즈 80 15 0 65 0.188
1983 3위/6팀[48][49] 3위 100 52 1 47 0.525
1984 6위/6팀[50] 6위 100 38 3 59 0.392
1985 6위/6팀[51] 6위 55 15 0 40 0.273
이후 역사는 청보 핀토스로.

9. 둘러보기

파일:KBO 리그 아이콘(1982~2012).svg 삼청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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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1982년 2월 ~ 1985년 5월
1985년 5월 ~ 1987년 10월
파일:태평양 돌핀스 엠블럼(1994~1995).svg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
1987년 10월 ~ 1995년 9월
1995년 9월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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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동년 6월 21일까지는 삼미 슈퍼스타즈 명의로 리그에 참여했다. [2] 현재의 KBS춘천방송총국 춘천 센트럴타워 푸르지오 아파트 자리에 있었으며, 의암 야구장과는 다른 곳이다. [3] 삼미 구단이 있던 시절 인천의 행정구역명은 직할시였다. 인천이 광역시로 개칭된 것은 삼미의 손자뻘 팀인 태평양 돌핀스가 마지막 시즌을 시작하기 직전인 1995년 3월이다. [4] 비인기 구단은 결코 아니었다. 김용희 김인식 등 KBO 리그 초창기에 활약했던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삼미 홈경기가 열린 도원야구장에는 형편 없는 구단 성적과 무관하게 늘 홈 관중 수가 많았단다. 비록 성적은 끔찍했지만 부산광역시와 함께 '구도'(야구의 도시)를 자부하는 항구도시 인천의 야구 열기를 반영한 모습. [5] 당시 도원야구장은 1982년 9월 한국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 경기장으로 쓰였다. 이 때문에 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도원야구장에서 첫 홈경기를 치른 것은 그 해 7월 17일이었다. [6] 4월 4일 롯데 자이언츠 전. [7] 태평양 돌핀스 현대 유니콘스의 제2 홈구장이던 수원 야구장은 1989년에 개장했다. 고로 1988년까지 인천 연고팀의 제2 홈구장은 춘천이었다. [8] 1982년 부산의 대명목재를 인수하면서 대명목재 소유의 유나백화점도 인수해 유통업에도 진출하긴 했다. 본사였던 서울 삼일빌딩 지하에도 매장을 운영했지만 결국 지방 향토 백화점 브랜드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고 이를 해결하려 이태원동에 세웠던 비바백화점은 슈퍼스타즈 야구단을 매각하고도 한참 뒤인 1991년에야 문을 열었으나, 1994년에 백화점 건물을 삼성 방계기업 (주)보광(現 휘닉스중앙)으로 넘겨 사업을 접었다. 해당 건물은 보광그룹 때 사무용으로 개조된 후 1999년에 삼성그룹 계열사 제일기획이 구매했다. [9] 당시 정주영 회장은 대한체육회장을 겸하고 있었고, 자연히 모든 현대그룹 계열사는 1988 서울 올림픽의 준비에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래서 부담을 표시하며 자연스럽게 발을 뺀 것. [10] 정주영 회장도 물론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으나, 야구만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그룹 전체가 야구와 인연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실업야구 시절 제일은행과 한일은행 야구단을 사들여 현대건설 야구단을 창단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무산됐고, 현대 피닉스를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14년 뒤 현대그룹은 이 구단의 후계 구단을 운영하게 되었다. [11] 원작의 슈퍼맨은 푸른색 전신 타이즈에 붉은색 삼각 팬티를 덧입은 복장이지만, 어찌된 일인지 삼미의 마스코트가 된 슈퍼맨은 푸른색 팬티만 입은 채 붉은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실제로 경기장에 등장한 슈퍼맨 마스코트는 붉은색 전신 타이즈만 입고 복면을 쓴 채 녹색 망토를 걸치고 등장했다. [12] 비슷한 시기 한국프로축구에는 일본 만화 주인공 아톰을 마스코트로 내세운 포항제철 아톰즈라는 축구팀도 있었으나, 1996년 베른 협약 가입 이후 여러 문제에 휘말려 오늘날의 포항 스틸러스로 개명하게 된다. [13] 이후로 공식적인 자리(ex: KBO 올스타전에서의 역대 구단 마스코트 모임 같은)에서는 저작권 문제로 인하여 삼미의 마스코트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졌다. [14]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 신포역 근처에 현재도 건물이 남아 있다. 이 당시에는 상공회의소 외에도 경기은행의 본점이 이 건물에 있었다. 물론 지금 이 건물에는 상공회의소도 없고 은행도 없다. [15] 2015년부터 SK 와이번스- SSG 랜더스가 일요일 홈경기 유니폼으로 착용하는 '인천 유니폼'의 원본이 이 팀의 유니폼이었다. [16] 인천야구 골수팬들은 1982년에 임호균과 김진우만 데려왔어도 삼미의 대굴욕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금도 얘기하고 다닌다. [17] 삼미의 원년 팀별 상대 전적을 보면 OB, 삼성, MBC에게만 일방적으로 털렸을 뿐 의외로 롯데와 해태에게는 선전했다. 동네북이었던 삼미에게 5패와 6패를 먹은 롯데와 해태는 나란히 중하위권으로 떨어지게 된다. [18] 특히 오문현은 연고 구단인 삼성에 입단하지 못하고 실업야구에 남아 있다가 시즌 도중 삼미에 합류해 7월 말에 첫 등판을 했던 투수였다.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규정 이닝을 채웠을 정도로 많이 던졌던 것. [19]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보조구장으로 인천구장이 결정되면서 야간 조명탑 공사 등을 위해 보수 작업이 이뤄지면서 인천에서 홈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20] 경기도를 대표하는 야구장인 수원야구장이 문을 연 것은 삼미의 손자뻘 구단 태평양 돌핀스가 있던 시절인 1989년이다. [21] 일설에 의하면 전두환 대통령이 TV로 이 경기를 보면서 혀를 끌끌차자 아랫사람들이 나섰다고 하나 아직도 분명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22] 1차전과 3차전은 장명부가 모두 무너졌고, 2차전은 시즌 두 번째로 투수로 등판한 김성한을 공략하지 못해 패했다. [23] 당장 400이닝 이상을 던졌으니 몸이 멀쩡할 수가 없었다. [24] 다만, 삼미의 경우 프로 원년이기에 해당 부분을 감안해야된다. 한화의 경우, 현대야구의 분업화가 이뤄진 시점에서 해당 기록을 작성한 것 자체가 이미 불명예 기록인 상황. 오죽하면 당시 전 삼미 선수가 이 기록은 분업화나 전문성이 부족한 그 당시에 작성될 기록이지 현대 야구에서 이런 기록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오히려 걱정할 정도. [25] 나오진 않았지만 거인에게도 짓밟혔다. [26] 이쪽은 워낙에 20세기 성적이 훌륭해서 묻히지만 창단 당시 아예 백업도 제대로 없을 정도로 뎁스가 막장이었다. [27] 2020년 한화 이글스에 의해 깨질 뻔했으나 타이기록으로 남았다. [28] 2003년 롯데가 KIA전 상대 18연패, 2018년 LG가 두산전 상대 17연패를 당하면서 특정팀 상대 최다 연패 기록은 갱신됐다. [29] LG는 시즌 전패를 달성할 뻔 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차우찬의 134구 투혼으로 17연패를 끊어냈다. 이로써 단일 시즌 전패는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30] 2023년 삼성 라이온즈가 이 기록을 재현해낼 기세였다. [31] 이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저승률은 1999년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0할대 승률로 경신한다. 당시 시즌 승률은 0.067. 물론 여자프로농구에서 부천 하나원큐가 0할 0푼 0리 승률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부정 행각에 대한 징계 차원으로 준 것이라 기록에는 집계되지 않는다. 1899년에 메이저리그에서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라는 팀이 20승 134패(승률 .130)로 최하위를 차지한 적이 있다. 단, 이때는 한 구단주가 두 구단을 운영할 수있는 신디게이트 방식이 허용되던 때라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와 세인트루이스 퍼펙토스를 같이 운영하던 구단주가 우승가능성이 더 많아보이던 세인트루이스에다 클리블랜드의 주축선수들을 다 넘겨버린거라 가능했다. 이 당시 사이 영도 세인트루이스로 이적. 그리고 이 시즌이 끝나고 신디게이트 경영은 금지되었고, 클리블랜드 스파이더스는 해체를 했다. 그 외에도 메이저리그 기록으로 인정되는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 팀 루이빌 커널스가 승률 1889년에 27승 111패로 승률 .196을 기록한 적이 있다. 여담으로, SBS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인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삼미 슈퍼스타즈 편에 게스트로 출연한 지상렬은 이 승률을 두고 "은행 금리보다 더 낮은 승률"이라고 표현했다. [32] 이 국내 프로스포츠 최장 연패 역시 1999년에 대구 동양 오리온스가 두 배 가까이 되는 32연패를 기록하며 갈아치웠다. 이후 2008~2009년 V리그에서 수원 KEPCO 45가 지난 시즌 포함 시 27연패로 삼미의 기록을 3위로 끌어내렸다. 2020년 6월 한화이글스가 18연패 타이기록을 기록했다. [33] 남양주시 화도읍 소재 심석고등학교. 의외로 1975년부터 1987년까지 야구부를 운영한 이력이 있다. [34] 사실 감사용은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의 영향 때문에 일반인 비선수 출신으로 아는 사람이 많으나, 엄연히 학생 때부터 야구를 배운 전문 선수였다. 단지 전문대 졸업 후 실업팀의 콜을 받지 못해 직장인 야구팀(오늘날의 사회인 야구)에 몸담았을 뿐. 축구로 치면 주제 무리뉴 안드레 빌라스보아스가 비선수 출신 감독으로 오해받는 것과 마찬가지다. [35] 그 중 2경기는 원래 주인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한 더블헤더였다! [36] 물론 이건 비단 삼미 한 팀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당시에는 프로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없다시피 했던 터라 모든 팀들이 일부 홈 경기를 전국 순회 형식으로 치렀다. 단적인 예로 박철순이 연승 행진을 22연승에서 마감한 롯데와의 잠실 경기는 롯데가 홈팀 자격이었다. [37] 프로야구 초창기 리그를 장식했던 스타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고교를 졸업한 이들인데, 동산고는 1977년 청룡기 준우승에 그쳤고, 인천고도 1979년 황금사자기와 봉황대기 준우승에 머물렀다. 나머지 해들에는 4강에도 올라와보지도 못하고 광탈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38] 안타깝게도 표절작임이 밝혀졌다. [39] 물론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었던 프로야구 초창기엔 패전처리 투수는 엄밀히 말해 존재하지 않았다. 인원이 적었던데다가 선발, 중간, 마무리라는 분업 체계가 희박했던 시절이었으니. [40] 유년 시절 인천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 덕에 KBS N 스포츠에서 제작한 스포츠 다큐 인천야구의 추억에서 스토리 텔러의 역할을 맡았다. [41] 게다가 삼미의 여성 마스코트는 원더우먼이었다. 이벤트가 열리면 다른 팀들은 동물옷을 입고 나오는데 삼미만 늘씬한 미인 언니가 나와서 주목을 받았다. [42] 팀 전체로 보면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허술한 전력을 갖췄지만 일부 선수 중에는 개개인의 능력이 매우 출중한 선수도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고교와 대학 시절 최고타자 소리를 들었던 양승관. [43] 그나마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 덕분에 인지도는 있는 편이다. 삼미보다 역사가 더 짧고 성적도 처참했던 청보 핀토스는 인지도가 정말 낮다. [44] 결국 인호봉은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2021년 12월 18일에 별세했다. [45] 어렸을 때 살던 집이 도원구장 바로 옆이었다고 한다. [46] 또한 지상렬은 2000년대 MBC 히스토리 후라는 프로그램에서 삼미 슈퍼스타즈를 다루었을 당시에도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터뷰하면서 어린이 회원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삼미 슈퍼스타즈 기념 타월을 직접 인증하기도 했다. [47] 전기 6위, 후기 6위 [48] 전기 2위, 후기 공동 2위 [49] 물론 다들 알다시피 한 선수가 거의 다 만들었다. [50] 전기 6위, 후기 6위 [51] 전기 6위, 후기부터는 청보 핀토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