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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바 롯데 마린즈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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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무라 요시노부 | 아라마키 아츠시 | 오노 쇼이치 | 사카이 카츠지 | 오노 쇼이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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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모토 리츠오 | 코야마 마사아키 | 츠마시마 요시로 | 코야마 마사아키 | 사카이 카츠지 | |
<rowcolor=#ffffff> 1970~1971 | 1972 | 1973 | 1974 | 1975~1982 | |
키타루 마사아키 | 나리타 후미오 | 키타루 마사아키 | 나리타 후미오 | 무라타 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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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타니 노리히로 | 후카자와 요시오 | 무라타 쵸지 | 코미야마 사토루 | 이라부 히데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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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카와 카즈미 | 코미야마 사토루 | 쿠로키 토모히로 | 네이선 민치 | 시미즈 나오유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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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보 야스토모 | 시미즈 나오유키 | 코바야시 히로유키 | 시미즈 나오유키 | 나루세 요시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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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쿠이 히데아키 | 이시카와 아유무 | 후타키 코타 | 이시카와 아유무 | 오지마 카즈야 |
성명 | 코야마 마사아키 (小山正明) |
출신지 | 일본 효고현 아카시시 |
생년월일 | 1934년 7월 28일 ([age(1934-07-28)]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효고 현립 다카사고 고등학교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투우타 |
소속팀 |
오사카-한신 타이거스 (1953~1963) 도쿄-롯데 오리온즈 (1964~1972) 타이요 훼일즈 (1973) |
1962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 ||||
곤도 히로시 ( 주니치 드래곤즈) |
→ |
코야마 마사아키 ( 한신 타이거스) |
→ |
이토 요시아키 ( 요미우리 자이언츠) |
1. 개요
전직 일본 프로야구 선수이자 지도자, 해설가이며, 현역 시절 정밀 기계[1]라 불릴 만큼 우수한 제구력을 가진 투수였다.프로 통산 320승으로 역대 3위[2]이고 290경기 완투로 5위 기록을 갖고 있다.
또한 넓은 마음 씀씀이와 선후배 동료들을 먼저 배려하는 훌륭한 인격자로 지금까지도 일본 야구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이기도 하다.
2. 현역 시절
2.1. 한신 타이거스
다카사고 고교 3학년 때 대학으로 진학할 것을 권유하던 아버지를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설득하여 오사카 타이거즈(당시 팀명)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계약금 없이 월봉 5천엔의 배팅볼 투수로 입단했다.[3] 배팅볼 투수로 활동하면서 후지무라 후미오, 가네다 마사야스 등 주력 타자들이 고야마가 자신들 맘에 드는 공을 잘 던진다며 단골로 그를 지명했고, 타자들의 요구에 따라 배팅볼을 던지면서 면도날 같은 제구력을 몸에 익히며 입단 첫해인 1953년에 정식 선수로 등록되어 그 해 5승을 거두었다.
이듬해인 1954년엔 11승을 거두며 한신의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고, 이후 1958~1960년엔 3시즌 연속 20승 이상[4]을 달성했다. 그리고 1962년 시즌 센트럴 리그 기록인 5시합 연속 완봉승
이렇듯 한신 마운드에서 맹 활약한 고야마였지만 구단 측에서 "두 명의 영웅은 양립할 수 없다" 라는 식의 얘기가 나오는 등 1963년 시즌 초부터 고야마가 한신에서 방출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후지모토 사다요시 감독이 무라야마 미노루는 팀에 남기고 코야마 자신은 다른 팀으로 보내려 한다는 의향을 알게 되면서[8] 고야마는 한신에 대한 애정이 식어 버렸다. 결국 에이스급 투수를 원하던 도쿄 오리온즈와 강타자가 필요했던 한신의 상황과 맞물려 고야마는 도쿄의 슬러거이던 야마우치 카즈히로[9]와 이른바 세기의 맞 트레이드로 도쿄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당시 도쿄의 구단주이던 나가타 마사이치가 한신 측에 직접 고야마를 원한다고 요청했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인 고야마는 망설임 없이 도쿄로 이적했다.[10]
2.2. 도쿄/롯데 오리온즈
1964년 시즌부터 고시엔 구장보다 규모가 훨씬 좁고 친 타자적인 도쿄 스타디움을 홈 구장으로 쓰게 된 고야마였지만, 한신 시절 장착한 팜볼[11] 을 주무기로 하는 맞춰잡는 피칭으로 시즌 30승을[12] 거두며 다승왕을 차지했고 1965~1966년에 2년 연속 20승[13]을 올렸다. 1966년 10월 4일, 대 니시테츠 라이온즈 전에 선발 등판하여 고야마는 87구, 니시테츠의 투수 이나오 가즈히사는 75구로 완투하며 총 162구로 최소 투구수 시합이라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70년 시즌 16승으로 롯데[14]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였고, 일본 프로야구 사상 유일하게 센트럴, 퍼시픽 양대리그에서 각각 100승을 거둔 투수[15]가 되었다. 1971년 7월 3일, 대 토에이 플라이어즈 경기에서 코야마 자신이 결승 적시 2루타를 치고 완투승을 거두면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4번째로 개인 통산 300승을 기록했다.
2.3. 타이요 훼일즈
1972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이듬해인 1973년 타이요의 투수 코치로 취임했지만, 시즌 도중 감독이던 아오타 노보루[16]의 요청으로 현역에 복귀하여 코치 겸 선수로 뛰며 4승을 거두었고, 시즌 종료 후 고야마는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21시즌 동안 856경기 등판, 320승 232패, 평균자책 2.45, 탈삼진 3159개의 통산 성적을 남겼다.
3. 은퇴 이후
2017년 7월 3일, 도쿄 돔에서 열린 닛폰햄 파이터즈 vs 세이부 라이온즈 경기 전 시구 행사에 초대된 장훈과 코야마[17]
현역에서 물러난 고야마는 친정팀인 한신 타이거스의 투수 코치(1974~1975, 1982~1983, 1998)를 시작으로 세이부 라이온즈(1990~199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1993~1994) 등에서 수석 및 투수 코치를 역임했다. 세이부 코치 시절에는 2년 연속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제일에 공헌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아사히 방송, 선 텔레비전의 해설가, 데일리 스포츠의 평론가로 활동했다.
2017년 시즌을 끝으로 선 텔레비전 전속 해설가에서 물러났고, 이후로는 프리랜서 해설가와 평론가로 일하고 있다. 80대 후반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소싯적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인지 여전히 노익장을 과시하며 야구계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4. 여담
- 평소 힘들이지 않고 편안하게 던지는 투구폼으로, 마운드에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온 몸을 내던질 듯 전력 투구하던 팀 동료 무라야마 미노루와 자주 비교되었다.
- 위에도 얘기했듯 정밀 기계라 불릴 정도로 예리한 제구력의 소유자였지만, 직구의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코야마 자신이 "느긋하게 던지는데 공이 휙 하고 날아오니 타자들도 당황하더라"고 자랑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같은 시기 팀 메이트이자 한신의 주전 유격수이던 요시다 요시오는 고야마의 제구력에 대하여 "그가 컨디션이 좋다 싶으면 그 날은 내야수들이 한가하기 그지 없었다", "바늘 구멍도 뚫을 것 같았다" 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 한신 소속이던 1962년 9월 6일, 가와사키 구장의 외야 센터에서 캐치볼로 어깨를 풀다가 실수로 공을 잘못 던졌는데, 이 공이 좌측에서 캐치볼 중이던 3루수 미야케 히데시의 왼쪽 눈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이로 인해 홍채가 분리되어 왼쪽 눈 시력이 1.5에서 0.1로 떨어지면서 부등시가 된 미야케는 예전의 실력을 되찾지 못하고 1967년 은퇴하고 말았다.
-
도쿄 오리온즈 시절 선수단 기숙사에 혼자 살면서도 훈련에 매진하여 팀 동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967년 입단한 투수
무라타 쵸지는 자신의 실력만 과신하고 훈련은 등한시 하며
도박에 빠져 방탕하게 살던 중, 어느 날 밤새
마작을 하고 새벽에 기숙사로 돌아오다가
조깅을 나온 고야마에게 발각되자 자기 방으로 내뺐는데 그 뒤 고야마는 무라타를 불러 "너 같이 능력 있는 놈이 그렇게 쓸데없는 짓 하고 돌아다니면 못써! 네 녀석의 재능을 썩힐 셈이냐?"라고 따끔하게 충고하였다. 선배의 한 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 무라타는 마음을 바로 먹고 죽을 각오로 야구에만 몰두하면서
노안을 자랑하는에이스급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무라타는 2022년 11월 11일 자택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매일 현역 선수 못지 않은 강력한 트레이닝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며 살았다. -
1966년 도쿄에 입단한 투수 키타루 마사아키[18]가 프로 3년차인 1968년 어깨 부상으로 1승도 못 거두고 실의에 빠져 야수 전향도 생각하고 있던 차에, 고야마가 선배로서 구단 측에 "그 녀석(키타루)만큼 투수로서 재능 있는 선수도 없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직언했다. 덕분에 키타루는 다시 투수로 부활하여 1969년 시즌 15승, 1970~1971년 시즌엔 2년 연속 20승을 거두었고 1970년엔 21승 10패, 평균자책 2.53의 뛰어난 성적으로 팀을
퍼시픽 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리그
MVP를 수상했다.[19] 1971년 다승왕(24승)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고, 비록 고질병인 허리 통증 때문에 29살 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지만 코야마 덕분에 현역 생활을 8년 더 연장하여 도쿄-롯데에서만 11시즌을 뛰며 통산 112승을 기록했다.[20]
사실 아무리 고야마가 대 투수였다 해도 베테랑 선수로서는 젊은 선수가 성장하여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겠지만, 고야마는 자신의 밥그릇 보다 선후배 동료들의 재능을 무엇보다 아끼는 훌륭한 인품의 선수였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일화라고 볼 수 있다. - 고야마를 한신에서 직접 영입한 도쿄 오리온즈의 구단주였던 나가타 마사이치가 만년에 다이에이 영화사가 경영난으로 무너지고 지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고야마가 그를 위해 문병을 왔고, 감격한 나가타는 "난 지금 가난하고 병들었지만 자네 같은 친구가 있어 정말 행복하다" 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5. 관련 문서
[1]
이후 후배 투수인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키타벳푸 마나부도 같은 별명을 얻었다.
[2]
1위는 400승의
가네다 마사이치, 2위는 350승의
요네다 테츠야
[3]
같은 시기
다이요쇼치쿠 로빈스의 입단 테스트에도 응시했지만, 당시 로빈스는 다이요와 쇼치쿠의 구단 합병으로 인해 선수가 너무 많아서 고야마의 실력과 상관 없이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한다.
[4]
58년 20선발승, 60년 21선발승(최다 선발승)
[5]
더불어 1958년, 1962년에 한 시즌 무사사구 시합 10번을 기록했다. 이 또한 센트럴 리그 기록이다.
[6]
이 기록은 2006년
후지카와 큐지가 갱신했다.
[7]
1962년 일본시리즈에서 한신은 1,2차전 홈경기에서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4번타자
장훈이 이끌던
토에이 플라이어즈에 승리를 거뒀으나 3차전 무승부 이후 4~7차전을 내리 내주며 일본 제일 등극에는 실패했다. 토에이는 창단 후 첫 우승이었으며 44년이 흐른
2006년 일본시리즈까지 일본 제일과 연을 맺지 못하였다.
[8]
그 해 시즌 후 송년회에서 후지모토는 고야마에게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 라고 했지만 후지모토의 말은
입바른 소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고야마는 한 소리 퍼붓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고 한다...
[9]
배드볼 히터로 유명한 강타자였다. 타격 이론에 관해서는 일본 야구계에선 탑급이었고, 평소 타격을 지도할 때 온갖 손짓 발짓까지 동원하여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는 스타일이었다.
[10]
이 때
경마 광 팬이자 마주(馬主)였던 나가타 구단주가 고야마의 이적을 크게 반기며
경마용
말을 선물하겠다고 하자, 고야마는 "
경마는 취미도 없고 집에 말을 키울 장소도 없다"라며 사양했다. 그래서 나가타는 고야마에게 말 대신 외제 승용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11]
평소 고야마에게 강한 모습을 보였던
오 사다하루를 공략하기 위해 팜볼을 익혔다고 한다. 팜볼을 구사하던 초기에는 시즌 성적이 하락하기도 했지만 오를 시즌 내내 0홈런으로 묶는 소득을 올렸고, 도쿄로 이적한 후엔 자신의 결정구로 온전히 잘 활용했다.
[12]
26선발승으로 68년 미나가와 무쓰오와 역대 퍼시픽리그 최다 선발승 타이
[13]
66년에는 선발로만 20승
[14]
1969년부터
롯데 오리온즈로 팀명 변경.
[15]
고야마는 센트럴 리그에서 180승, 퍼시픽 리그에서 140승을 기록했다.
[16]
단일리그 말기와 양대리그 초창기의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던 강타자로, 18시즌 통산 1827안타, 265홈런, 1034타점, 155도루, 타율 .278의 뛰어난 성적과 수위타자 1회, 홈런왕 5회, 타점왕 2회 수상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은퇴 후 한신, 한큐, 타이요, 교진 등에서 코치를 역임했고 1972년 시즌 도중
타이요 훼일즈의 감독에 부임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1973년을 끝으로 물러났다. 이후엔 야구 해설가로 활동하다 1997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3세.
[17]
이 날은 닛폰햄의 1962년
일본시리즈 우승(
도에이 플라이어즈 시절)을 추억하는 이벤트가 벌어졌으며, 당시 상대 팀인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 고야마가 시구자로 초청되었고 도에이 중심 타자였던 장훈이 시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고야마는 마운드에서 한참 높게 빠지는 볼을 던지고는 "포수까지 꽤 멀구만, 그래도 갔으니 다행이다" 라는 소감을 남겼고, 크게 헛스윙 한 장훈은 "아직 (방망이를)확실히 휘두를 수 있으니 나도 참 대견하다" 라고 웃으면서 답했다고.
[18]
木樽正明. 이름인 마사아키의 한자가 고야마와 같다.
[19]
그런데 그 해
토에이의
장훈은 당시 역대 시즌 최고 타율인 0.383에 34홈런, 100타점 이란 출중한 성적을 올렸고, 장훈의 팀 메이트
카네다 토메히로(
카네다 마사이치의 동생) 또한 24승 16패, 평균자책 2.71로 뛰어난 기록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장훈과 카네다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키타루가 MVP를 탈 수 있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다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해 롯데가 리그 우승을 했다는 점에서 추가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기타루의 팀 동료이자 같이 원투펀치를 구축한 나리타 후미오도 그해 25승 으로 다승왕을 획득했지만 키타루에게 MVP를 넘겨줬는데, 다승왕이긴 했어도 평균자책이 3.25로 다소 높았던 게 원인이었던 듯 하다.
[20]
키타루는 은퇴 이후
롯데 오리온즈의 투수 코치와 2군 감독, 스카우트 부장으로 근무한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 편성부에 소속되어 육성군 투수 코치로 일했다. 2011~2013년엔 JEF동일본 경식야구단 수석 코치를 역임하고 2014년 부터는 모교인 조시상업고교 야구부 수석 코치로 재임하면서 조시 시의 행정 어드바이저로 지역 초, 중학교 및 리틀야구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