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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 북부에 있는 자치주이며 판노니아 평원 남부에 위치한다. 주도인 노비사드는 세르비아 제2의 도시이다.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자치주는 이곳과 코소보 및 메토히야 두 곳이다. 그러나 ' 코소보 및 메토히야 자치주'는 명목상 세르비아의 자치주일 뿐 실제로는 코소보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민족적 다양성이 풍부한 곳으로, 26개 민족이 거주하며, 6개 언어가 공용어이다. 주요 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이 2/3을 차지하며, 헝가리인은 13%이다.
헝가리인이 자치주 최대 소수민족이긴 하지만, 헝가리인만을 위해 만들어진 자치주는 아니다. 그외에도 루신인, 크로아티아인,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인, 롬인, 체코인 및 기타 옛 유고슬라브 출신 민족[1]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한다. 이들 여러 소수민족의 언어도 사용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 쓰이는 루신어는 판노니아 루신어로 카르파티아 루신어와는 문자표기, 표현이 약간 다르다.
보이보디나란 공국, 더 정확히 말하면 voivodeship을 의미한다. 명칭의 기원은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이 일대에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선포한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안 보이보디나)에 기원한다. Voivode는 공작 또는 군사령관을 의미하는 슬라브어로 폴란드를 비롯한 서슬라브어 계통으로는 Wojewoda, 세르비아를 비롯한 남슬라브어 계통으로는 Vojvoda라 한다. 오늘날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보이보다(공작)의 통치를 받지 않음에도 여전히 기원적 명칭인 보이보디나를 사용한다. 즉 지명에 사용된 일반명사가 고유명사화되었다 할 수 있다.
2. 상징
문장 | 주기[2] |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3개의 역사적인 지역이 모여 성립되었다. 세 지역은 자치주 서부의 버치커(Bachka), 동부의 바나트(Banat) 남부의 시르미아(Syrmia, 또는 Srem, Sremska)이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문장은 위 세 지역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상단에 위치한 버치카 지역의 문장은 토가를 두르고 칼과 성서를 들고 있는 사도 바오로이다. 우상단에 위치한 칼을 들고 있는 사자는 바나트의 문장이다. 바나트 지역은 1차 대전 이후 인종 분포에 따라 세르비아인이 주류인 서쪽은 유고슬라비아[3]에, 루마니아인이 주류인 동쪽은 루마니아에 분할되었다. 바나트의 문장은 루마니아의 국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단의 나무 옆에 앉아있는 숫사슴은 시르미아 지역의 문장이다. 앞의 두 지역이 헝가리 왕국의 강역이었는데 반해, 시르미아 지역은 유고슬라비아 성립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강역이었다.[4]
아래의 두번째 문장은 비교적 최근에 채택되었다. 1848년 헝가리 혁명에서 헝가리 왕국에 대항하여 세르비아-보이보디나 공국의 독립을 선포할 때 당시의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이 채택한 도안과 문장을 참고하여 이를 토대로 고안되었다. 합스부르크령 보이보디나 공국이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직접적인 기원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전통문장'이라 불린다. 위의 세지방으로 구성된 문장과도 병행하여 함께 사용되고 있다.
국기는 삼색기와 국기 중앙의 세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삼색기는 세르비아의 삼색기 배색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중앙의 세 개의 별은 보이보디나를 이루는 세 지방을 상징한다.
3. 지역구분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크게 다음의 세 개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서부의 바치카 지역(Bačka, 위 지도의 노란색), 동부의 바나트 지역(Banat, 지도의 주황색), 그리고 남부의 스렘 지역(Srem, 지도의 녹색)이 보이보디나를 이루고 있다.
먼저 서부의 바치카[5]와 동부의 바나트는 옛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패전국인 헝가리가 트리아농 조약으로 영토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할양할 때에 바치 주의 남부 지역을 넘겨주었다. 바치 주의 나머지 북부는 헝가리의 키슈쿤 지역과 합쳐져 바치-키슈쿤 주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보이보디나에 속해있는 바치카 지역 중에서도 수보티차 시를 중심으로 한 헝가리와의 접경지역에 헝가리계 주민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헝가리계 외에도 유고슬라비아 건국 이전부터 살고있던 슬로바키아인, 판노니아 루신인, 남슬라브일파인 부녜브치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바나트 지역은 서부는 세르비아인이 주류이고 동부는 루마니아인이 주류인 지역이었다. 바나트의 아주 일부만이 헝가리에 잔류했고 세게드 및 세게드시가 속해있는 촌그라드 주에 흡수되었다. 나머지 바나트의 서부는 유고슬라비아에게, 동부는 루마니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세르비아령 바나트라 할 수 있는 바나트 서부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상당한 루마니아계가 거주하고 있다. 바나트 지역에는 세르비아계와 루마니아계 외에도 독일계를 비롯해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했다. 이중에서 독일계는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시기를 거치며 대부분 독일 본국으로 재이주했다.
남부의 스렘[6] 지역은 헝가리 왕국의 주는 아니고 헝가리 왕국의 동군연합으로 성 이슈트반 왕관령을 구성했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주였다. 스렘 지역은 크로아티아 왕국의 강역이었지만 서부지역은 크로아티아인이 다수였고 동부는 세르비아인이 다수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때부터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까지, 스렘 지역의 귀속과 관할은 크로아티아 측과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 측을 계속 번갈아 오갔다. 이 지역을 두고 양 측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2차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에 점령됐을 때에는 스렘 전 지역이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편입되었다. 추축국의 강점기간 동안 스렘 지역은 공산주의 파르티잔이 활발히 전개되는 무장투쟁의 주요 거점이기도 했다. 이때 크로아티아 공산당과 보이보디나 지역 공산당 사이에서 또 다시 스렘 지역의 저항운동 지도와 관할을 두고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당중앙은 중재에 나섰고 보이보디나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2차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사회주의 연방으로 재건될 때에 스렘 지역은 대략적인 민족분포에 따라서 동서로 분할되어 각각 크로아티아와 보이보디나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지리한 양측의 갈등이 일단락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갈등의 불씨가 유고 연방 해체 당시 다시 한 번 타오르게 되었다. 분할 이후에도 크로아티아에 편입된 스렘 지역에는 여전히 상당한 세르비아계가 거주하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에 크로아티아령 서부 스렘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가 '서부 스렘 자치주'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에 합류하여 크로아티아 정부와 대립하기도 했다. 서부 스렘 지역은 모국이라 할 수 있는 세르비아와 직접 접경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크로아티아 정부가 크라이나 공화국을 제압하고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한 이후에도 1998년까지 버티면서 존속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크로아티아 영토로 복귀하였다.
이 밖에도 보이보디나에는
4. 역사
본래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나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에 압박을 느낀 세르비아인들이 피난을 오게되면서부터 세르비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1459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르비아가 완전히 멸망하면서 피난 온 세르비아인들이 증가해 세르비아인이 다수인 지역이 되었다.[7]헝가리 왕국은 세르비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하면서 오스만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는데, 도나우강을 건너 국경 지역을 약탈하는 오스만 제국 정복 전쟁 특유의 비정규병이 매우 큰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의 지배를 피해 국경 너머 헝가리로 이주해온 세르비아 유민들을 환영했다. 세르비아 유민들은 헝가리 남부 국경 근처에 정착하여 헝가리 왕국의 대 투르크 전쟁의 선봉에 섰다. 중세 시기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 유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전에 맞서 헝가리의 국경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세르비아 기마 전사조직인 '구사르'(Gusar)가 훗날 경기병의 대명사가 되는 그 유명한 후사르의 기원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이 패배하여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헝가리 왕국은 붕괴당했다. 헝가리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페르디난트 1세와 동부 에르데이 출신 귀족 서포여이 야노시의 분쟁이 벌어졌고, 보이보디나 지역에서는 권력의 공백을 틈타 요반 네다드(Јован Ненад 1492~1527)라는 인물이 나타나 세르비아인의 독립 국가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서포여이 야노시의 선봉을 제압한 네다드는 1527년 세르비아인의 황제를 자칭했으나 에르데이 지방군이 본격적으로 파견되자 대패했고 목숨까지 잃었다. 오늘날 세르비아 사학계에서는 네다드를 보이보디나의 실질적인 창시자로 평가하고 있다.
헝가리 왕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가 차지했으나 헝가리 왕국 영토 대부분은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해 오스만 헝가리로 편입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피해 보이보디나로 피난을 떠난 세르비아 유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4.1. 근대
헝가리 왕국이 붕괴된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과 신성 동맹은 사투 끝에 1683년 2차 빈 포위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수비에서 반격에 나선 합스부르크 제국은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 왕국 전체를 획득했으나 특히 국경 지대인 남부 지역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전후복구를 위해 18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여러 민족[10]이 이주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불가리아인도 흘러들어왔다. 특히, 독일인이 매우 많이 이주했는데, 이는 전후복구를 겸사하여 독립의식이 강한 헝가리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당시의 대규모 이주민 정착은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인종적 다양성의 기원이 되었다.
보이보디나 공국 문서 참조.
4.2. 2차 세계 대전 및 전후
||<-4><tablealign=center> 보이보디나의 민족 구성 ||
(1910년) | (1953년) | ||
''' 세르비아인 '''
|
510,186명 |
''' 세르비아인 '''
|
865,538명 |
''' 헝가리인 '''
|
424,555명 |
''' 헝가리인 '''
|
435,179명 |
''' 독일인 '''
|
323,779명 |
''' 크로아티아인 '''
|
127,027명 |
''' 루마니아인 '''
|
75,223명 |
''' 슬로바키아인 '''
|
71,153명 |
''' 슬로바키아인 '''
|
56,689명 |
''' 루마니아인 '''
|
57,218명 |
''' 크로아티아인 '''
|
34,089명 |
''' 몬테네그로인 '''
|
30,516명 |
''' 류신인 '''
|
13,479명 |
''' 류신인 '''
|
23,038명 |
''' 기타 '''
|
72,804명 |
''' 마케도니아인 '''
|
11,622명 |
''' 기타 '''
|
78,254명 | ||
총계 | 1,521,983명 | 총계 | 1,699,545명 |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보이보디나 지역의 민족 구성은 세르비아계 33.8%(51만명), 헝가리계 28.1%(42만명), 그리고 독일계는 21.4%(32만명)으로 세르비아와 헝가리계에 이은 보이보디나 제3의 민족이었다. 이외에 크로아티아계, 슬로바키아계, 루마니아계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11]
보이보디나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 왕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 되었지만,[12] 다민족 국가이면서 세르비아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태생부터 불안정했다. 유고슬라비아 왕정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붕괴하기까지 보이보디나 지역이 민족자치를 고려한 행정구역으로 설립되는 일은 없었다.
1941년, 소련 침공을 눈앞에두고 히틀러의 변덕으로 인해 나치 독일과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극심한 내부분열에 시달리던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만에 붕괴되고 추축군이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점령했다. 나치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하여 괴뢰 국을 세우거나 헝가리, 불가리아, 이탈리아 등에 영토를 넘겼다.
보이보디나 지역은 역사적으로 세 개 지역(버치카, 바나트, 시르미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치 점령 기간 동안 이 강역을 따라 삼분할 되었다. 서부의 버치카 지역은 헝가리 왕국에 합병되었고, 역사적으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강역이었던 시르미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편입되었다. 동부의 세르비아령 바나트는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 군정 지역의 자치주인 바나트 자치주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한편,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보이보디나 지방의 독일인들은 악마와 손을 잡고 말았다. 전쟁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외국인과 재외 독일인을 대상으로 무장친위대를 창설하고 있던 나치독일은 근 30만에 달하는 보이보디나 독일인을 대상으로 무장친위대 가입을 독려 또는 징집했다. 1941년 말, 보이보디나 독일인을 근간으로, 제7 SS 의용 산악사단이 창설 되었다. 사단의 명칭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웅인 사부아 공자 외젠의 이름을 따 프린츠 오이겐이라 명명 되었다.[13] 무장친위대 사단 중 기병, 산악 사단은 주로 대파르티잔 전선에 투입 되었는데, 프린츠 오이겐 사단은 크로아티아 및 독일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에서 활동 중인 티토의 빨치산 토벌임무를 맡게 되었다. 2차 대전의 파르티잔 전선이 다 그렇듯, 프린츠 오이겐 사단 장병들은 빨치산 토벌작전과정에서 보이보디나 지역의 빨치산 전투원과 민간인들[14]을 대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유고슬라비아 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리고 곧, 존경하는 영웅의 이름 아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대가를 치르게 된다.
이후 냉전의 끝무렵, 유고 내전을 거치고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한 지금까지도,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세르비아의 영토로 남아있다.
5. 인구
보이보디나의 민족 구성 (2011년) | |
''' 세르비아인 '''
|
1,289,635명 |
''' 헝가리인 '''
|
251,136명 |
''' 슬로바키아인 '''
|
50,321명 |
''' 크로아티아인 '''
|
47,033명 |
''' 루마니아인 '''
|
25,411명 |
''' 몬테네그로인 '''
|
22,141명 |
''' 부녜브치인 '''
|
16,469명 |
''' 류신인 '''
|
13,928명 |
''' 기타 '''
|
215,736명 |
총계 | 1,931,809명[16] |
2차 세계대전과 동구권 붕괴 및 유고 내전 등의 큰 사건들을 거치면서 보이보디나 지역의 민족 구성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우선 2차 대전 이전에는 지역 내에서 세르비아인과 헝가리인에 이어 제3의 민족이었던 보이보디나 독일인이 유고에서 추방되며 없어진 점이 있다. 또한 세르비아계 주민은 꾸준히 그 비중이 증가하였다. 세르비아계 주민은 1910년에는 지역 인구의 1/3 가량을 차지했으나 그 비중이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반면 헝가리계는 비중에서 꾸준히 감소하다가 냉전과 유고 내전을 거치면서 그 비중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보이보디나 내 크로아티아인과 부녜브치인의 인구구성 변화도 눈여겨 볼만하다. 부녜브치인은 세르보-크로아트어의 하위분파 방언인 부녜브치어를 사용하며 주로 로마 가톨릭 신자이다. 보이보디나 내에 거주하는 크로아티아인과 부녜브치인 대부분이 같은 조상과 기원을 공유하고 원래 동질적인 사회공동체에서 유래하고 있다.[17] 그럼에도 오늘날에 와서는 민족 정체성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위 지도에 표기되진 않았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스스로를 그냥 유고슬라브인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민족집단 중 기타에는 스스로를 '보이보디나인'(10,154명), 미응답(55,016명), 미상(23,774명) 등으로 밝힌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2차 대전 이후부터 보이보디나에는 유고슬라비아 각지에서 온 민족들이 이주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오늘날 보이보디나에는 슬로베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마케도니아인, 보슈냐크인, 고라인과 같은 구 유고연방 출신의 남슬라브계는 물론 알바니아계도 거주하고 있다.
1% 넘게 차지하는 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66.76%), 헝가리인(13%), 슬로바키아인(2.6%), 크로아티아인(2.43%), 집시(2.19%), 루마니아인(1.32%), 몬테네그로인(1.15%)이 있다. 주요 종교는 2002년 기준으로 정교회 68.97%, 가톨릭(로마 가톨릭 및 동방 가톨릭 교회) 19.11%, 프로테스탄트 3.55% 등이다.
6. 경제
관련 문서: 세르비아/경제보이보디나 자치주는 판노니아 분지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하여있다. 비옥한 평야지대에 더하여 다뉴브 강 및 다뉴브 강의 주요지류인 티서강, 사바강 등이 합류하는 지점이라 수자원도 풍부하여 농업에 유리한 환경이다. 유고슬라비아 건국 이전 헝가리 왕국 시절에서부터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1차 대전 직후에는 보이보디나를 점령한 유고슬라비아[18]가 헝가리로 곡물유출을 차단하면서 헝가리가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보이보디나 지역은 여전히 세르비아의 곡창지대이다.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코소보를 제외한 세르비아 전체와 대비하여 인구와 면적에서 약 27% 정도를 차지한다. 하지만 농업생산량에서의 비중은 세르비아 전체 대비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농업 이외 분야의 산업 발달도 활발한 편이다.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수도인 베오그라드와도 인접하여 있으며, 무엇보다도 세르비아의 주요교역대상인 EU 및 서방국가들로 향하는 관문이어서 입지적인 조건이 우수한 편이다. 이밖에도 교육이나 교통 등의 인프라도 잘 갖춰진 편이다. 수도 베오그라드 정도를 제외한 다뉴브 강 이남의 세르비아 중남부 지역에서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발달하는데 비하여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는 상대적으로 자본집약적인 산업이 발달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부품, 섬유 및 석유화학, 정유, 금융, ICT 산업에 외국인투자가 활발하다. 주요 외국인투자는 인접한 서방국가들이나 미국 등이 있다. 특히 2010년에는 보이보디나 ICT 클러스터가 조성되어 세르비아의 첨단 및 통신 기술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이 밖에도 건설, 제약, 금속가공 등의 산업이 발달해있다.
7. 스포츠
보이보디나 자치주를 연고로 하는 스포츠팀으로 축구 구단 FK 보이보디나가 있다.세계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하나인 니콜라 요키치가 이 지역의 솜보르 출신이다.
8. 행정구역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37개의 지자체와 8개의 시로 구성되어있다. 지자체는 7개의 구(Okrug)로 묶여 있다. 구는 단순한 지역구분에 가깝고 별다른 기능이나 권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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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10. 관련문서
[1]
마케도니아인,
몬테네그로인,
알바니아인 및 기타 등등
[2]
2번째 주기는
2016년에 채택되었으며, 문장은 2번째 주기와 같이 채택되고 있다.
[3]
현재 세르비아
[4]
헝가리 왕국은 11세기부터 크로아티아 왕국과
동군연합이었고 이후에도
합스부르크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 큰 문제가 없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시르미아 지방은 세르비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동쪽 지역은 보이보디나에, 서쪽 지역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어 편입 되었다. 두 곳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소속되어있을 때도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 시기와 마찬가지로 큰 문제가 없었지만, 오늘날
크림반도 사태와 같이 연방이 해체되고
크로아티아가 독립하자 크로아티아령 서부 시르미아 지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합류했었다.
[5]
헝가리어: 바치(Bács)
[6]
크로아티아어: Srijem(스리옘),
헝가리어: Szerém(세렘).
[7]
출처: 두샨 바타코비치 外, 정근재 역, 『세르비아 역사』, (선인, 2001), p 131~p 133
[8]
단 바나트 지역은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탈환했다.
[9]
오늘날 세르비아 센타(Сента). 헝가리어로는 젠터(Zenta).
[10]
독일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테니아인 등.
[11]
루마니아계의 경우는 유고슬라비아왕국과 루마니아 왕국간에 바나트를 분할한 이후 상호간에 인구 이동이 있어 그 수가 줄어들었다.
[12]
보이보디나가 세르비아의 영토에 편입 되기 전 당시 세르비아는 북쪽으로 수도인
베오그라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변경 지대 영토와 맞닿아 있었다.
[13]
정작 외젠은
이탈리아인으로의 정체성을 가졌으며
독일어는 잘 못했다.
[14]
주로 세르비아계, 또는 나치에 비협조적인 독일계도 포함해서
[15]
이스트라 반도,
이탈리아령 달마티아 등
[16]
출처:
(PDF 다운로드 주의)
[17]
이들의 조상 및 기원은 16세기 경에
달마티아에서 보이보디나에 이주한 연도를 보면 대충 짐작이 가능하겠지만 당연하게도(?) 오스만제국을 피해서 헝가리 왕국으로 온 피난민들이었다. 가톨릭 신도들이다.
[18]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