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사드 (세르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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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르비아의 제2의 도시이자,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주도이다. 인구는 2011년 기준 약 28만이다.수도 베오그라드에서는 서북쪽으로 70km 떨어져 있고, 도나우강을 끼고 있는 점[1]에서 공통점이 있다.
2. 언어 표기
세르비아어 | Нови Сад |
헝가리어 | Újvidék |
크로아티아어 | Novi Sad |
독일어 | Neusatz |
슬로바키아어 | Nový Sad |
3. 역사
베오그라드(신기두눔), 니시(나이수스), 코스틀라크(비미나키움), 스렘스카미트로비차( 시르미움), 부다페스트(아퀸쿰), 소피아(세르디카) 등과 같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있었던 주변 도시와는 다르게 역사는 그리 긴 편이 아니다. 본래 헝가리 왕국 남부의 슬라브족 취락이 있었으며, 모하치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오스만 헝가리에 속했다가 대튀르크 전쟁이 진행되면서 오스트리아가 점령하였다. 아직 대튀르크 전쟁이 진행중이었던 1694년 세르비아인 상인들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도시로 인정받았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의 주요 군사 거점으로 합스부르크 헝가리의 일부였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세르비아 공국이 독립하면서 세르비아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 세르비아 해방 운동의 중심지로 세르비아의 아테네라는 별명이 있기도 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트리아농 조약에 의거하여 세르비아 왕국에 귀속되었다. 1941년부터 3년간 다시 헝가리에 귀속되기도 했다. 이 때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 SS 대장[2]의 헝가리군에 의해 4000명이 희생당한 노비사드 학살이 일어났다.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반환되었다. 1960년에 노비사드 대학교가 개교했다.
4. 인구
1961년에 시행된 인구조사에서 10만을 돌파하였다. 1999년에는 여러 번에 걸쳐 나토의 폭격을 당하였으나 2002년 인구조사에서 20만을 돌파하였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만 해도 헝가리인이 인구의 40%를 차지했고 세르비아인은 35%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대다수의 시민이 정교회 신자인 세르비아인이다.[3] 다만 현재 세르비아의 제2의 도시라는 입지와 달리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한미한 어촌에 불과해 인구가 많지는 않았다. 1910년 마지막으로 시행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인구조사 당시 인구수는 33,089명이었다. 100년 사이에 급속한 성장을 이룬 셈.
5. 기타
농업 관련으로 매년 5월 열리는 노비사드 박람회(Новосадски сајам)가 유명하다.6. 출신 인물
- 요시프 옐라치치[4], 1801년, 오스트리아 제국군 크로아티아인 장군
- 슬라비사 요카노비치, 1968년, 축구선수
- 모니카 셀레스, 1973년, 테니스 선수
- 라자르 베셀리노비치, 1986년, 축구선수
- 고이코 카차르, 1987년, 축구선수
- 미야트 가치노비치, 1995년, 축구선수
- 블라디미르 실라지, 축구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