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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문성렬(文聖烈) |
자 / 호 | 승렬(承烈) / 우운(憂雲) |
본관 | 남평 문씨[2] |
출생 | 1869년 6월 7일 |
충청도
태안군 남면 몽대리 (現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우운길 13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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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0년 12월 25일 (향년 71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 와킨 카운티 맨티카 | |
묘소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맨티카 파크 뷰 공동묘지[4] |
상훈 |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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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고 해외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1869년 6월 7일 충청도 태안군 남면 몽대리(現 충청남도 태안군 남면 몽산리)에서 아버지 문상도(文常道)와 어머니 순흥 안씨[5] 사이에서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문양목은 25세 되던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운동에 참여한다. 잡혀있는 동학군 동료들을 구하는 작전에 참여하는 등 활동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같이 참여했던 아내 김해 김씨[6]가 죽고 본인도 죽을 뻔하는 피해를 입는다.
이후 동학 농민 혁명이 진압되자 숨어지내다가 1903년 경기도 인천부에서 서당 교사로 있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미국인이 사탕수수농장의 노동자를 모집하자 이에 응하여 하와이로 건너간다. 사탕수수농장에서 자금을 모은 뒤 1906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간 다음 장경(張景)· 백일규(白一圭) 등과 함께 1907년 3월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그해 10월 중앙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대동보국회의 기관지인 《대동공보》를 발행하는 대동공보사 사장 겸 발행인, 대동공보 주필 등도 겸임하면서 한인 동포들을 대상으로 국권 회복 운동을 고취시키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1908년 3월, 더럼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은 정당하다는 망언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동보국회는 미주 한인들의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와 함께 문양목을 포함한 특사 4명[7]을 파견하여 해명과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스티븐스가 이를 거절하여 격분한 특사들이 스티븐스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튿날인 3월 23일 전명운과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사살하자, 대동보국회는 재판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이때 문양목은 판사전권위원에 임명되어 두 사람의 재판 후원 및 후원 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 등을 담당하면서 공판과정을 '독립재판(獨立裁判)'으로 규정하고 무죄를 호소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같은 해 7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박용만이 한인 군사학교의 설립 및 재미 한인단체의 통합 논의를 목적으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를 개최하려 하자 이를 적극 후원하였으며, 1909년 그가 네브래스카 주에 한인 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학생들에게 입교를 권유하는 등 사관 양성을 통한 항일무장투쟁론을 적극 지지했다.
1910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출판사 대동신서관(大同新書館)을 설립하고 같은 해 2월 이승만이 1904년 한성감옥에서 저술한 『 독립정신(獨立精神)』을 출판하였으며, 같은 달 10일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에 흡수·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 총무에 당선되었고, 이듬해인 1911년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당선되어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군인양성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독립군 기지 개척과 해외 한인의 통합기관을 조직하고자 시베리아와 만주 지역에 지방총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1911년 4월 박용만이 저술한 『국민개병설(國民皆兵說)』을 출판하였고, 1912년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로 선임되고 그해 6월 박용만이 저술한 『군인수지(軍人須知)』를 발간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이후 그는 대한인국민회의 중견 간부를 계속 역임하였고, 1924년에는 각국 노동자 단체에 가입하고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며 미주 한인들의 대표를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뒤에는 캘리포니아 주 관내의 샌프란시스코, 스탁턴(Stockton), 리들리(Reedley) 등의 도시를 옮겨다니며 한약방, 클리닝 샵(cleaning shop:청소업체), 김 브라더스 농장, 세탁소 등을 경영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동안에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면서도 조금 회복이 되면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결국 1940년 12월 25일 캘리포니아 주 샌 와킨 카운티(San Joaquin County) 맨티카(Manteca)에서 뇌출혈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참고 자료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18~2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