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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12:15:51

마르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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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으나 하산도 잠깐동안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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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제4대 칼리파
مروان بن الحكم بن أبي العاص بن أمية | 마르완 이븐 알하캄 이븐 아비 알아스 이븐 우마위야
제호 한국어 마르완 이븐 알하캄 이븐 아비 알아스 이븐 우마위야
아랍어 مروان بن الحكم بن أبي العاص بن أمية
영어 Marwan ibn al-Hakam ibn Abi al-As ibn Umayya
출생 623년 또는 626년
사망 685년 4월 또는 5월 (향년 58~62세)
존호 칼리파
재위 기간 684년 6월 ~ 685년 4월 또는 5월

1. 개요2. 생애
2.1. 우스만의 측근2.2. 무아위야 1세의 부관2.3. 2차 피트나2.4. 칼리파 마르완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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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마이야 왕조 제4대 칼리파. 무너져가던 왕조를 재건하고 이븐 주바이르를 성공적으로 물리쳤다.

2. 생애

2.1. 우스만의 측근

623년 또는 626년 메카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메카를 지배하던 쿠라이시 부족의 선두 부족인 바누 우마이야 부족 출신인 알하킴 빈 아빌-아쉬였다. 어머니는 메카의 남서부 지역인 티하마 일대를 지배한 바누 키나 부족 출신의 파티나 빈 알카마였다. 644년부터 656년까지 3대 칼리파를 맡은 우스만에게 기용되어 이프리키야(북아프리카 중부)에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해 상당한 공적을 세웠으며, 이때 얻은 전리품을 메디나의 토지와 건물에 투자했다. 불확실한 날짜에 파르스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메디나로 귀환한 뒤 칼리파의 서기장이 되었다.

656년 초, 이집트의 쿠파의 반란군이 메디나로 진군하여 우스만에게 토지 몰수 정책과 친족 우대 정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는 우스만에게 이들을 강경 진압하라고 요청했지만, 우스만은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이집트에서 온 이들과 협의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던 중 우스만이 이집트 총독 압둘라 빈 사이드에게 보낸 "반란군을 강경 진압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입수했다. 그들은 곧바로 메디나로 돌아가 그해 6월 우스만의 거주지를 포위했다. 우스만은 자신이 그런 편지를 보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편지는 그가 칼리파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이집트 총독에게 보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우스만은 추종자들에게 이집트 반군과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이를 듣지 않고 우스만을 끝까지 지키다가 목에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머니 파티마가 "아들은 이미 죽었다"며 폭도들을 막아선 덕분에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 후 우스만은 피살되었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4대 칼리파로 즉위했지만, 우스만을 살해한 자들을 강하게 처벌하지 않아서 논란이 일었다. 그는 알리가 암살 배후라고 확신하고, 656년 말 알리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에게 가담했다. 656년 12월 낙타 전투에서 패배한 뒤 알리에게 항복하여 용서를 받은 뒤 역시 알리에게 충성을 거부한 시리아 총독 무아위야 1세가 다스리는 샴으로 떠났다.

2.2. 무아위야 1세의 부관

657년 무아위야에게 가담한 그는 시핀 전투 때 알리군과 맞섰다. 전투는 점차 알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무아위야가 쿠란을 창끝에 매달고 쿠란 구절을 낭송하며 "알라의 이름으로 화해하자"라고 요구하는 걸 알리가 받아들인 덕분에 무승부로 끝났다. 그러나 이후의 협상은 양자간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이뤄지지 못했고, 전쟁은 재개되었다. 그러던 중 661년 1월 29일 알리와 무아위야를 모두 거부한 카와리즈파가 무아위야와 알리의 암살을 동시에 추진했다. 무아위야는 암살을 모면했지만 알리는 암살당했다. 그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가 차기 칼리파가 되었지만, 무아위야의 공세와 지지자들의 이탈 등을 견디지 못하고 무아위야와 협약을 맺고 칼리프 직위를 넘겼다. 무아위야는 661년 7월이나 9월에 쿠파에 입성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창건했다.

그는 무아위야 1세 치하에서 동아라비아 총독을 맡았고, 661년부터 668년까지 메디나를 다스렸다. 그러나 668년 돌연 무아위야에게 해임되었다. 이에 다마스쿠스로 가서 자신을 해임한 이유를 따지자, 무아위야는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다.
1. 바스라 총독 직에서 해임된 압둘라 빈 아미르의 재산 몰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2. 지야드 빈 아비히를 무아위야의 의형제로 삼는 것에 반대했다.
3. 무아위야의 딸 람라가 집안에서 무아위야를 돕게 해주지 않았다.

670년, 하산 이븐 알리가 사망했다. 그는 하산이 예언자 모스크에 묻힌 무함마드, 아부 바크르, 우마르와 함께 묻히는 걸 반대했다. 이에 하산의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와 바니 하심 부족은 하산을 예언자 모스크 건너편에 있는 알 바키 묘지에 안장했다. 그렇지만 그는 장례식에 참여하여 하산을 "훌륭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674년 재차 메디나 총독으로 임명되어 677년까지 정무를 수행했다. 676년 아들 야지드 1세를 차대 칼리파로 지명하기로 한 무아위야의 결정을 마지못해 수락했지만, 우스만의 또다른 아들 사이드가 이 결정에 반대하는 걸 조용히 격려했다. 무아위야는 그런 그를 거슬러해 677년 당시 이슬람 제국의 극동쪽 영토였던 호라산 사령관으로 전출시켰다.

2.3. 2차 피트나

680년 무아위야 1세가 사망하고 야지드 1세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히자즈 공동체가 야지드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칼리파의 혈통을 지닌 후세인 이븐 알리,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 압둘라 빈 우마르도 충성을 거부했다. 그는 하산과 압둘라 이븐 주바이르를 가장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고 메디나 총독 알 왈리드 빈 우트바에게 두 사람이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하라고 권고했다. 이슬람 역사가 알 타바리에 따르면, 후세인은 왈리드의 부름을 받고 회의에 참석한 뒤 충성 맹세를 즉각 하는 건 거절했지만, 나중에 공개적으로 충성할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왈리드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그는 후세인이 약속을 어길 거라고 여기고 왈리드에게 하산이 충성할 때까지 구금하고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왈리드는 후세인을 지지하는 이들의 증오를 살 생각이 없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후 후세인은 지지자들을 규합하기 위해 쿠파로 떠났다가 680년 10월 10일 야지드를 따르는 무리의 습격으로 일가족 및 측근들과 함께 피살당했다.( 카르발라 참극) 이븐 주바이르는 왈리드의 부름을 피하고 메카로 떠나 있었는데, 후세인이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지지자들을 카바 주변으로 모아 야지드 1세에 반기를 들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야지드 1세가 주바이르에게 협상을 요청하는 사절을 보냈을 때, 그는 주바이르에게 복종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비밀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다.

683년 메디나 사람들이 바누 우마이야 부족을 공격하자, 그들은 마르완 집 주변으로 피신했다. 마르완은 포위를 풀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도움을 요청했고, 야지드는 즉시 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토벌대가 오기 전에 마르완과 추종자들은 메디나에서 추방되었고, 곧 토벌대와 합세했다. 이후 알하라 전투에서 기병대를 이끌어 승리에 일조했고, 메디나를 공략한 뒤 주바이르가 은신한 메카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683년 11월 야지드 1세가 돌연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리아로 후퇴했다. 이후 주바이르는 자신을 칼리파라고 선언하고 이집트, 이라크, 예멘을 포함한 대부분의 영역을 장악했다. 마르완과 바누 우마이야의 구성원들은 다시 메디나에서 추방되었다.

우마이야 왕조 지지자들은 야지드 1세의 장남 무아위야 2세를 새 칼리파로 선출했으나, 그마저 684년 3월에 사망했다. 팔레스타인, 히스, 킨나스린을 포함한 수많은 총독들이 주바이르에게 귀순했으며, 그 역시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주바이르에게 귀순하려 했다. 이때 이라크에서 이븐 주바이르에게 축출되어 다마스쿠스로 피신한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가 그를 찾아와서 칼리파로 선출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우바이둘라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고 자비야에서 우마이야 지지자들을 결집하여 회동을 열었다.

바누 칼브의 부족장이자 야지드 1세의 사촌이자 매부였던 하산 빈 말리크는 야지드 1세의 또다른 아들 칼리드를 새 칼리파로 밀어붙였지만, 시리아 원로들은 이븐 주바이르와 내통한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젊은이를 따를 수는 없다며 반대하였다. 40일 간의 회의 끝에 결국 경험이 많은 마르완이 마르완 1세로서 칼리파로 선포되었다. 다만 하산의 입장도 반영하여 마르완의 후계자는 칼리드, 다시 그 후계자는 아므르 빈 사이드로 정해졌고 바누 칼브는 여러 경제/정치적 특권을 보장받았다.

2.4. 칼리파 마르완 1세

우바이둘라와 시리아 원로들의 지지 덕분에 칼리파에 올랐지만, 그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웠다. 다마스쿠스 총독 앗 다하크가 군대를 모아 다마스쿠스 남쪽 미르즈 앗 사파르에 진영을 세웠고, 홈스, 킨나스린 등지의 카이스 부족과 팔레스타인의 주다암 부족도 다하크에게 병력을 보냈다. 그는 바누 칼브를 중심으로 킨다와 가산 부족들을 포섭하여 군대를 조직한 뒤 이들과 맞서러 진군하다가, 적이 마르즈 앗 사파르 평원에 집결하느라 다마스쿠스 수비를 게을리 한 틈을 타 다마스쿠스로 진격, 가산 부족에 속한 인사의 내통으로 도시를 장악했다. 이후 적이 돌아오기 전에 왕실 금고를 접수한 뒤 도시를 나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다마스쿠스로 달려오던 앗 다히크와 마르즈 라히트에서 대치했다.

당시 그의 군대는 적에 비해 절반도 안 되었지만, 금고에서 얻어낸 재화를 마구 풀어서 적군을 자기 편으로 회유했다. 그 결과 전투 당일에 다수의 적군이 전투 도중에 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혼란이 일어났고, 그는 이 때를 틈타 적 수뇌부를 집중 공격해 알 다히크를 주살하고 대다수 적병을 흡수했다. 이에 힘스의 카흐탄 족이 그에게 귀순하면서 세력이 강해졌다. 한편 카이스 족은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수파르 빈 알 하리스 알 킬라비의 지휘하에 알 자지라 지역에 있는 알 카르키시야 요새를 점령한 뒤 저항을 이어갔다.

그 후 684년 7월이나 8월에 다마스쿠스에서 정식으로 칼리파로 취임한 그는 야지드 1세의 미망인이자 칼리드의 어머니인 움 하심 파히타와 결혼하면서 이전의 칼리파 왕족이었던 수피안 일족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는 바누 칼브 출신의 아히야 빈 카이스를 수르타(경찰 또는 보안군)의 수장으로 임명했으며, 궁전 관리자로 아부 살 알 아스와드를 선임했다. 다만 그의 지위는 시리아에서만 인정받았고, 다른 지역은 여전히 주바이르를 따랐다. 만약 주바이르가 시리아로 당장 쳐들어갔다면 당해내기 어려웠겠지만, 그는 이라크에서 봉기를 일으킨 카와리즈파를 토벌하는 데 전념하느라 그 쪽에 신경쓰지 못했다. 마르완은 이 기회를 틈타 영역 확장을 노리기로 하고, 각지에 군대를 보내 하나둘씩 제압했다.

685년 2월 또는 3월, 그는 당시 이집트로 진군하여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푸스타타의 주요 부족들의 도움에 힘입어 이집트를 장악했다. 주바이르를 지지했던 이집트 총독 압두라흐만 빈 우트바는 축출되었고, 그의 아들 압둘 아지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또한 암르 빈 사이드가 이끄는 친 마르완 군대는 무샤브 빈 주바이르가 이끄는 적군을 상대로 팔레스타인에서 격파했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확보에 성공한 뒤, 여세를 몰아 히자즈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가 파견한 군대는 메디나 동쪽 아르라바자에서 패퇴했다. 또한 그는 아들 무함마드에게 유프라테스 강 계곡의 중부 지역에 있는 카이스 부족 토벌 임무를 맡겼으며, 685년 초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가 이끄는 군대를 파견해 주바이르로부터 이라크를 탈환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렇듯 반격 작전을 착실히 수행하던 685년 4월 또는 5월, 그는 돌연 사망했다. 대부분의 이슬람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마스쿠스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반면 알 마스디는 그가 티베리아스 호수 인근의 에쉬 신나브라에 있는 겨울 숙영지에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이븐 사드 알 와키디와 같은 초기 이슬람 역사가들은 마르완이 칼리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자 이에 분노한 칼리드의 어머니이자 그의 아내 움 하심 파히타가 그가 잠든 사이에 베개로 질식시켜 죽였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대다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역사가 보즈워스는 그가 샴 땅을 강타한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마르완은 685년 이집트에서 샴으로 돌아가기 전에 작년에 자비야 회의에서 도출된 합의를 파기하고 아들 아브드 알 말리크와 아브드 알 아지즈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이전에 지명된 후계자 칼리드는 이에 반대하지 않았고, 아브드는 아버지 사후 칼리파가 되었다. 이후 세습 계승은 우마이야 칼리파의 관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