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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샹클리 체제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빌 샹클리/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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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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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 현재
초대
바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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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맥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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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왓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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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
애시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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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맥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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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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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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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대
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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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대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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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샹클리
( 샹클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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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대
페이즐리
( 페이즐리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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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대
페이건
( 페이건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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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달글리시
( 달글리시 체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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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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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
( 모란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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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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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네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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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스
( 에반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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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반스&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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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울리에
( 울리에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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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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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니테스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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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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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지슨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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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글리시 체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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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롯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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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풀 FC
샹클리 체제
[[빌 샹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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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대 감독
빌 샹클리
<colbgcolor=#d00027><colcolor=#fff> 감독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빌 샹클리 / 제10대 감독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밥 페이즐리 (수석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조 페이건 (코치)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루벤 베넷 (피지컬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로니 모란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존 베니슨 (유스 코치)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톰 손더스 (분석 코치, 스카우트)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제프 트웬티맨 (스카우트)
주장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로니 모란 / 제27대 주장 (1959~1960)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딕 화이트 / 제28대 주장 (1960~1961)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론 예이츠 / 제29대 주장 (1961~1970)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토미 스미스 / 제30대 주장 (1970~1973)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엠린 휴즈 / 제31대 주장 (1973~1979)
계약 기간 1959년 12월 1일 ~ 1974년 7월 12일
(15년 8개월/ 5337일)
계약 종료 (은퇴로 인한 자진 사임)
연봉 미상
전술 스타일 패스 & 무브를 활용한 공격 축구
3-2-4-1, 3-3-3-1, 4-4-2[1] 포메이션
┗ 유기적인 패스플레이와 움직임 강조
┗ 강한 압박 수비
┗ 빠른 측면 공격
┗ 유연한 투톱 활용
역대 전적 783경기 407승 198무 178패 (승률 51.9%)
우승 경력 1961-62 풋볼 리그 세컨드 디비전 (우승)
1963-64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64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64-65 FA컵 (우승)
1965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65-66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66 FA 채리티 실드 (우승)
1972-73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72-73 UEFA컵 (우승)
1973-74 FA컵 (우승)

1. 개요2. 감독 선임 과정3. 연혁
3.1. 1959-60 시즌3.2. 1960-61 시즌3.3. 1961-62 시즌3.4. 1962-63 시즌3.5. 1963-64 시즌3.6. 1964-65 시즌3.7. 1965-66 시즌3.8. 1966-67 시즌3.9. 1967-68 시즌3.10. 1968-69 시즌3.11. 1969-70 시즌3.12. 1970-71 시즌3.13. 1971-72 시즌3.14. 1972-73 시즌3.15. 1973-74 시즌
4. 공격 포인트 순위5. 시즌별 주요 성적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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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버풀 FC의 제10대 감독 빌 샹클리 체제를 정리한 문서.

2. 감독 선임 과정

돈 웰시 감독 체제에서 2부 리그로 강등된 이후 리버풀은 오랜 기간 암흑기를 겪고 있었고, 필 테일러 감독 체제로 들어와서도 팀은 승격에 약간 못미치는 성적을 웃돌고 있었다. 그리고 1959-60 시즌, 시즌 초반부터 부진이 이어졌고 10월 동안 단 한 경기도 승리하지 못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11월 초, 링컨 시티에게 4-2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테일러 감독이 경질되었고, 이후 밥 페이즐리가 임시 감독을 맡는 동안 리버풀의 T.V. 윌리엄스 회장은 허더즈필드 타운 FC의 감독 빌 샹클리에게 리버풀의 감독직을 제안하게 되었다.

당시 샹클리는 리빌딩 자금을 주지 않고 주축 선수들을 팔려고 하는 허더즈필드의 보드진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결국 1959년 11월, 허더즈필드의 야망 부족에 숨이 막히던 샹클리는 리버풀의 감독직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렇게 1959년 12월 1일, 샹클리가 안필드로 입성했다.

3. 연혁

3.1. 1959-60 시즌

1959년 12월 1일, 빌 샹클리가 안필드에 도착했을 때, 리버풀은 5년 동안 2부 리그를 전전하고 있었고 팀은 관리 부족으로 인한 열약한 환경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샹클리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독직에 취임하자 마자 리버풀을 세계 최강 '무적의 요새'로 만드리라고 다짐했다. 그는 서포터들과 즉각적으로 유대감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리버풀에서 빠르게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보드진으로부터 구단 운영에 관한 강력한 권한을 부여해주기를 요구했고, 선수 선발권을 비롯해 '매니저'로서의 온전한 의사결정권을 넘겨받아 팀을 개혁하기 시작했다.[2] 특히 그는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루벤 베넷과 같은 기존 리버풀의 코칭 스태프들과 빠르게 관계를 맺었고 샹클리와 코치진들은 곧바로 서로와 클럽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샹클리는 부임 첫 날에 기존의 코치진들[3]을 불러놓고 자신은 자신만의 코치들을 데려오지 않고 기존 코치들과 클럽을 이끌 것임을 선언했고, 서로와 클럽에 대한 충성심으로 서로 강하게 유대하며 협력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다. 기존 코치진들은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플랜을 가지고 온 샹클리에게 기쁜 마음으로 헌신했고, 이후 샹클리와 코치진들은 안필드 내의 축구화 보관 창고인 ' 부트 룸(Boot Room)'을 개조하여 비 공식 코칭 스태프 회의실로 활용하며 전술, 운영, 코칭, 팀 관리 등 클럽을 위한 무수한 논의들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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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우드 훈련장에서의 샹클리

샹클리는 먼저 경기장과 훈련장 개보수에 나섰다. 당시 홈 구장이었던 안필드는 필드 잔디에 물을 줄 시설을 갖추지 못했을 정도였고 훈련장이었던 멜우드 또한 관리가 안되어 난장판인 상태였다. 샹클리는 안필드 보수를 위해 구단에 3,000 파운드의 투자를 요구했고 멜우드 부지를 개척하고 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한 개발 플랜을 구상했다. 이 뿐 아니라 샹클리는 구단의 전반적인 운영 시스템 또한 개조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세부적인 팀의 규율부터 정립해나갔다. 그의 아래에서 팀의 기강과 시스템이 잡혀나갔고 샹클리가 도입하고 페이즐리, 페이건, 베넷이 다듬은 훈련 시스템이 완성되어 나갔다. 샹클리는 선수들이 기존에 도로를 달리며 러닝 훈련을 주로 했던 것에 개탄하며, 선수들이 워밍업 운동이나 재활을 위한 특별한 운동 외에는 공을 이용한 잔디 훈련만을 하도록 훈련 방식을 전환시켰다. 샹클리의 훈련은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룹별로 운동 루틴을 나눠놓고 세션 당 구체적인 시간과 동작을 설정하는 등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스쿼트와 같은 개인 운동을 거쳐 사이클링 등의 유산소 운동을 진행한 뒤 공을 사용한 기능 운동으로 넘어가는, 실질적인 현대식 훈련 과정의 도입이기도 했다. 샹클리는 회복 과정에서도 체계적인 방식을 지시했는데, 그는 선수들에게 경기 후 훈련장으로 이동하여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기 전에, 경기장에서 옷을 갈아입도록 지시하여 적절한 쿨 다운 타임을 만드는 등[4], 선수단의 부상 방지와 회복 훈련에도 애를 썼다. 또한 그는 팀이 모든 경기에서 조건에 맞는 최적의 상태를 유지한 채 플레이할 수 있도록 경기장 상태에 맞는 축구화 스터드를 골라가며 장비 관리에도 힘썼다. 여기에 가장 핵심적으로 샹클리는 전술 훈련에 많은 힘을 쏟았는데, 그는 5인조 스몰 코트 훈련을 강조하며 본인만의 '패스 앤 무브' 전술 시스템에 선수들을 맞춰나가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또한 그는 선수들에게 실전과 같은 훈련을 강조하면서, 운에 맡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세심한 디테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관점에서 팀의 모든 전략을 재정립해나갔다.

리버풀은 이러한 샹클리와 클럽 스태프들의 노력으로 1959-60 시즌에 전반기 부진을 반등시키며 놀라운 상승 가도를 보여줬고, 결국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쳤다. FA컵에서도 탈락하고 리그에서도 승격에는 실패했지만, 샹클리 체제에서 리버풀은 가능성을 엿보았고, 클럽의 많은 부분들에 혁신이 시작된 시즌이었다. 특히 이 시즌 샹클리 부임 이후 이안 캘러한과 크리스 라울러가 리버풀 리저브에서 1군팀으로 진입하였다.

3.2. 1960-61 시즌

1960년대에 들어와 샹클리는 본격적으로 스쿼드 리빌딩과 전술 개발에 힘을 쏟았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는 엄격히 포지션이 지켜지는 지역 방어 수비를 대세적으로 따르고 있었고, 샹클리는 이러한 전술을 빠른 측면 윙어와 공격진의 유기적인 공략으로 부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당대 리그에서 더블을 달성한 토트넘 홋스퍼 FC와 최고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이 사용하던 W-M 포메이션(3-2-2-3)[5]에 기반한 전략이었다. 샹클리는 W-M 포메이션에 자신의 패스 앤 무브를 결합한 공격 축구를 팀에 이식하기 위해 노력했고, 선수 영입과 방출을 통해 팀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1960년 여름 이적 시장에서 중앙 미드필더 고든 밀른과 오른쪽 윙 케빈 루이스, 공격수 알프 애로우스미스가 영입되어 전력이 강화되었고, 다수의 선수들이 방출되어 스쿼드에 활력이 돌았다.

샹클리는 공격진에 로저 헌트, 앨런 에이코트, 지미 멜리아, 이안 캘러한, 케빈 루이스, 알프 애로우스미스, 수비진에 게리 번, 로니 모란을 주축으로 팀을 융화시키길 원했으나, 시즌 초반의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러나 9월 이후 팀의 조직력이 올라가면서 리그 순위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특히 리그 9라운드부터는 리그 14경기 무패를 달리면서 상위권으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시즌 후반기에 힘이 빠지며, 아쉬운 무승부와 패배가 이어졌고 결국 다시 리그 3위로 시즌을 마감, 승격에는 다시금 실패했다. FA컵과 리그컵에서도 각각 4라운드와 3라운드에서 일찍 탈락했다. 그러나 해당 시즌 리버풀은 점차 팀의 경기력을 우상향시켰고, 팀의 리빌딩이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샹클리 체제에서의 희망은 계속되었다.

3.3. 1961-62 시즌

1961년 리버풀은 전설적인 베테랑 빌리 리델을 떠나보내고 구단 역사에 남을만한 리빌딩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샹클리는 여전히 팀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고 모든 포지션에서 혁신적인 스쿼드 리빌딩을 구상 중에 있었다. 그는 클럽의 잠재력을 발휘하고 좋은 선수들을 데려오기 위해 클럽의 보드진을 어렵게 설득해야했다. 하지만 당시에 자금이 넉넉치 못했던 리버풀은 번번히 좋은 선수들을 놓쳐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 샹클리는 리버풀에서 함께 할 중요한 협력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회계사 출신의 에릭 소이어. 샹클리가 역설한 투자에 중요성으로 인하여 리버풀의 회장 존 무어스는 1961년 소이어를 팀 디렉터로 합류시켰고, 소이어가 구단에 합류한 뒤 리버풀은 본격적으로 재정을 관리하며 좋은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게 되었다. 소이어 또한 리버풀을 영국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겠다는 샹클리의 비전에 공감했고 샹클리와 소이어는 곧장 걸출한 영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1961년 여름, 구단 회의에서 샹클리가 스코틀랜드에서 두 명의 선수를 영입할 것을 주장했을 때, 대부분의 보드진들은 부정적인 반응이었지만 소이어가 힘을 실어 영입을 추진할 수 있었다. 바로 그 두 명이 리버풀의 60년대 중추가 되게 되는 론 예이츠와 이안 세인트 존이었다.

샹클리는 영입되자 마자 주장에 임명된 센터백 론 예이츠, 로저 헌트의 짝으로 점찍어진 공격수 이안 세인트 존를 비롯하여, 이 시즌 유스에서 후에 특급 조커로 활약하게 되는 바비 그레이엄을 발굴하여 서서히 팀을 강력하게 꾸려나갔다. 그리고 대망의 1961-62 시즌에 들어서 리버풀은 리그 개막 6연승을 질주, 개막 후 11경기 10승 1무로 리그를 독주하더니 특히 안필드에서 무패행진을 달리는 엄청난 페이스로 리그 선두를 달리기 시작했다. 리버풀은 여유롭게 리그 레이스를 달리며 일찍이 승격의 꿈을 현실화시켰고, 로저 헌트의 리그 41골에 힘입어 42경기 27승 8무 7패를 기록. 마침내 2부 리그를 우승하며 8년만에 1부 리그로 야심찬 승격을 달성한다. 해당 시즌 FA컵에서는 5라운드에서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와의 재경기를 2번이나 펼치는 끈질긴 승부 끝에 탈락했다.

이 시즌은 본격적으로 샹클리호가 암흑기의 유산을 던져내고 잉글랜드 축구에 자신들의 이름을 알린 기념비적인 시즌이 되었으며, '리델풀'이라고 불렸을만큼 절대적인 영향력을 보여줬던 레전드 빌리 리델의 시대에서 붉은 제국 시대로 넘어가는 시작점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특히 헌트와 세인트 존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투톱라인이 위용을 떨치기 시작한 첫 시즌이었으며, 예이츠를 주축으로 수비진의 퀄리티 또한 상당히 올라가 실질적으로 강력한 전력이 구축되었다.

3.4. 1962-63 시즌

1962년에는 센터백 토미 스미스가 리저브팀에서 발굴되어 1군에 진입하였다. 또한 딕 화이트와 같은 노장들이 팀을 떠나며 계속해서 팀의 리빌딩이 진행되었다. 샹클리는 계속해서 W-M 포메이션(3-2-2-3)에 기반하여 로저 헌트-이안 세인트 존-이안 캘러한-지미 멜리아-앨런 에이코트로 이어지는 공격진 5인방과 후방의 게리 번-로니 모란-론 예이츠-크리스 라울러-고든 밀른으로 구축된 후방 5인방으로 팀을 다져 1부 무대에 도전에 나섰다.

그러나 해당 시즌 출발부터 리버풀은 리그에서 순항하지 못했고 승점을 다소 잃으며 불안하게 레이스를 펼쳤다. 초반 15경기에서 8패로 하위권으로 팀이 처지며 어려움을 겪자, 샹클리는 즉각 왼쪽 측면 미드필더 윌리 스티븐슨을 영입하였고, 중반기부터는 헌트의 득점력이 함께 폭발하며 리그 9연승을 질주, 5위권으로 순위를 끌어올렸으나 리그 마지막 9경기에서 6패를 당하며 순위가 추락했고 결국 17승 10무 15패의 리그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승격 첫 시즌임을 생각하면 괜찮은 성적이었고, 또한 이 시즌 FA컵에선 4강에 올라 레스터 시티에게 아쉬운 석패를 당하며 컵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구가했다. 또한 시즌 후반 토미 로렌스가 주전 골키퍼로 떠오르는 등 스쿼드 멤버의 성장 면에서도 나름의 수확을 챙긴 시즌이었다.

3.5. 1963-64 시즌

1부 리그에서의 적응을 마친 샹클리호는 케빈 루이스를 떠나 보내고 대체자로 왼쪽 윙어인 피터 톰슨을 영입해 더 단단한 전력을 구축했다. 이어진 1963-64 시즌, 샹클리의 리버풀은 개막 후 4경기 동안 2패를 당하며 아쉽게 승점을 잃는 등 좋지 못한 시작을 했지만, 10라운드 에버튼과의 머지사이드 더비에서 2-1로 승리하며 1950년 이후 첫 로컬 더비 승리에 성공한 뒤, 계속해서 좋은 경기력으로 연승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후 시즌 후반까지 리버풀의 상승세는 이어졌고 결국 42경기 26승 5무 11패를 기록, 리버풀은 2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승점 4점 차로 따돌리고 17년 만에 6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FA컵에서는 6라운드까지 올랐으나 스완지 타운에 석패하여 탈락했다.

이 시즌의 우승으로 인해 리버풀은 유러피언 컵 출전권을 획득했고, 다음 시즌 클럽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해당 시즌은 리버풀이 암흑기를 종결하고 다시금 리그 왕좌에 오른 기념비적인 시즌이며, 리버풀의 대표 응원가인 You'll Never Walk Alone이 처음으로 안필드에서 불려진 시즌이기도 하다. 암흑기를 극복하고 잉글랜드 최강의 위치에 복귀한 팀의 호성적에 의해 안필드에 많은 관중들이 들어찼고, 응원석에서는 대중 가요가 응원가로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또 교통의 발달로 원정 응원이 시작되자 리버풀 특유의 열광적인 팬덤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3.6. 1964-65 시즌

아스날에서 제프 스트롱을 영입하며 팀의 전력을 보강한 샹클리는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출전한 FA 채리티 실드에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2-2로 비기며 공동 우승을 차지한 뒤, 클럽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이자 최초의 유러피언 컵 출전에 나섰다. 리버풀은 1964년 8월 17일, KR 레이캬비크와의 1라운드 경기에서 5-0으로 승리하며 화려하게 유럽 무대에 데뷔했고, 이후 이어진 레이캬비크와의 1라운드 2차전에서 6-1로 승리, 여유있게 2라운드로 진출했다. 2라운드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는데, 샹클리가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 리버풀의 유니폼 상하의를 모두 붉은색으로 통일시킨 것이었다. 상하의 올-레드의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첫 경기에서 리버풀은 RSC 안데를레흐트를 3-0으로 격파했고 이어진 2차전에서도 1-0으로 승리하며 8강전에 진출했다. 이후 치러진 FC 쾰른과의 4강전은 1차전 원정 0-0 무승부, 2차전 홈 0-0 무승부로 재경기에 돌입했다. 이어진 중립 경기장 재경기에서도 2-2로 비긴 양 팀은 당시 규정에 따라 동전 던지기로 4강 진출자를 결정했다. 결국 행운을 등에 업은 리버풀은 4강에 진출해 인터 밀란과 격돌하게 되었다.

당시 인테르는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이끌며 산드로 마촐라, 자친토 파케티, 마리오 코르소 등 호화로운 선수단을 가지고 있던 명실 상부 세계 최고의 팀이자 대회 디펜딩 챔피언이었다.[6] 그러나 샹클리의 리버풀은 1965년 5월 4일, 4강 1차전에서 헌트, 캘러한, 세인트 존의 연속 득점에 힘입어 그런 인테르를 상대로 3-1의 충격적인 승리를 거뒀다. 2차전 원정에서는 3-0으로 패배하며 아쉽게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고 말았지만, 유럽 무대에 처음 등장한 리버풀이 세계 최고의 클럽[7]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끈질긴 승부를 벌였다는 사실은 리버풀의 팬들을 고무시켰고, 축구계에 리버풀의 이름을 당당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해당 시즌 유러피언 컵 토너먼트는 향후 붉은 제국이라 불리며 유럽을 지배하게 되는 유구한 리버풀 유럽 대항전 역사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당 시즌 리버풀은 리그에서 초반에 흔들리며 디펜딩 챔피언 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시즌 중반에 다시 팀을 다잡아 14경기 무패를 질주하며 순위를 올리긴 했으나 다시 후반기에 많은 일정 소화로 인해 지친 모습을 보이며 4연패를 기록하는 등, 결국 7위의 순위로 리그를 마감했다.

하지만 FA컵에서는 이전 시즌들과 다르게 집중력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8강에서 레스터 시티를 잡고 준결승에 진출, 첼시 FC를 만나 톰슨과 스티븐슨의 골로 2-0 승리를 거둬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대망의 결승전에선 리즈 유나이티드와 격돌하여 정규 시간 내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연장전에서 헌트와 세인트 존의 연속 득점이 나오며 10만 관중이 밀집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구단 역사상 최초의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이 시즌 리버풀은 리그에서는 부진했으나 유럽 무대와 FA컵에서 굉장한 성과를 올리며 붉은 제국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또한 이 시즌에 샹클리는 이전까지 사용하던 W-M 포메이션에서 벗어나 4-2-4에 가까운 4-4-2 기반의 포백 전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FA컵 결승에서는 이 4백 전술의 우수함이 증명되며 우승을 차지했다. 후에 조 페이건이 평하길 이 시즌 등장한 전술이 리버풀 최초의 진정한 '백 포(Back Four)' 시스템이었으며, 론 예이츠- 토미 스미스의 강력한 센터백 라인이 등장을 알렸다.[8]

3.7. 1965-66 시즌

1965년 여름에 리버풀은 상하의 올-레드의 유니폼을 정식으로 채택했고, 로니 모란이 은퇴하여 코치진으로 합류한 가운데, 스쿼드가 완성단계에 들어섰다고 판단한 샹클리는 큰 보강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이 때 로이 에반스가 리저브 팀에서 1군으로 합류했다.

전 시즌 FA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한 FA 채리티 실드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격돌하여 2-2로 무승부를 기록해 공동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이 시즌 리버풀은 기존 선수들의 기량이 무르익으며 리그에서 좋은 레이스를 펼쳤고, 시즌 초반에 약간의 흔들림이 있었으나 늘 그랬듯이 중후반 부에 경기력이 더 올라오며 우승 경쟁을 펼쳤다. 당시 리그 라이벌은 직전 시즌 FA컵 결승에서 격돌했던 리즈 유나이티드였는데, 결국 리버풀이 26승 9무 7패로 1위를 차지하며 2위 리즈를 승점 6점 차로 따돌리며 샹클리 체제에서의 두 번째이자 통산 7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로저 헌트는 리그에서 29득점을 달성하여 득점왕을 차지해 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자리매김했고, 이어진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에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주축 공격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FA컵에서는 일찍이 3라운드에서 첼시를 만나 2-1로 석패했으나, 이 시즌 샹클리호는 FA컵 우승 자격으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진출했다. 1라운드에서 난적 유벤투스를 만났으나 안필드에서 2-0 완승을 거둔 리버풀은 합산 스코어 2-1로 2차전에 진출했고 이후 차례로 스탕다르 리에주], 부다페스트 혼베드 FC, 셀틱 FC를 꺾고 사상 첫 유럽 대항전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 상대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66년 5월 5일에 펼쳐진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헌트의 득점으로 승부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으나, 아쉽게 결승에서 실점을 허용해 2-1로 준우승에 머물렀다.[9]

3.8. 1966-67 시즌

1966년에 샹클리는 그동안 중원에 주축으로 활약을 펼쳤단 고든 밀른을 블랙풀로 떠나보내고 큰 보강 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리버풀은 FA 채리티 실드에서 숙적 에버튼을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며 기분 좋게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리버풀은 시즌 초반부터 리그에서 너무 많은 무승부를 거두며 승점 쌓기에 실패했고 중반 이후 겨울에 엠린 휴즈가 팀에 합류하여 반등을 노려 리그 선두권으로 치고 나갔으나, 마지막 11경기에서 단 2승만을 거두는 부진으로 19승 13무 10패를 기록, 리그 5위에 머물렀다. FA컵에서는 5라운드에서 에버튼에게 일격을 맞으며 탈락했다.

야심차게 다시 타이틀을 노린 유러피언 컵에서는 1라운드에서 루마니아의 FC 페트롤룰 플로이에슈티와 치열한 승부 끝에 2라운드로 진출하여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AFC 아약스를 만났다. 자신만만하게 경기를 준비했으나 1차전 결과는 원정에서의 5-1 대패. 이후 안필드에서 샹클리는 역전을 공언했으나 헌트의 멀티골에도 불구하고 2-2로 비겨 탈락하고 말았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3시즌 연속 트로피 행진을 끝내고 무관의 시즌을 보내고 말았다.

3.9. 1967-68 시즌

샹클리는 1967년 팀 내 새로운 스카우트 시스템[10]을 개발하였고 골키퍼 레이 클레멘스를 영입하며 후방의 힘을 더해 새롭게 시즌을 시작했다. 리버풀은 이 시즌 나름 괜찮은 리그 레이스를 펼쳤고 리그에서만 25골을 뽑아낸 헌트의 활약에 힘입어 시즌 내내 상위권에 머무르며 우승 경쟁을 펼쳤지만, 결정적으로 시즌 중후반 중위권 팀들에게 발목을 잡히며 맨체스터 시티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뒤져 22승 11무 9패로 3위를 차지했다. 겨울 이적 시장에서 윌리 스티븐슨이 팀을 떠나기도 했다.

FA컵에서는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과 6라운드 재경기 끝에 석패하여 탈락했고, 리그컵에서도 볼튼 원더러스에게 패해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 시즌 리버풀은 인터-시티 페어스컵에도 처음 출전했는데, 3라운드에서 헝가리의 페렌츠바로시 TC에게 패배해 탈락했다. 리버풀은 헌트의 시즌 30득점 활약에도 불구하고 2시즌 연속으로 아쉬움을 남기며 무관의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3.10. 1968-69 시즌

샹클리는 윙어 브라이언 홀을 영입하면서 공격진 강화를 꾀했고 절치부심하여 시즌을 시작했다. 이후 리버풀은 지난 시즌보다 확연하게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우승 경쟁을 펼쳤고 준수한 리그 레이스를 이어갔다. 그러나 헌트의 득점력이 이전 시즌들과 다르게 저하되며 리그 13골에 그쳤고, 결정적으로 리그 마지막 4경기에서 3무 1패를 기록하며 갑작스럽게 주저앉아 결국 25승 11무 6패를 기록하며 리그 유나이티드에게 5점차로 뒤진 2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리그컵에서는 아스날에게 탈락했으며, FA컵에서는 레스터 시티에게 탈락하며 국내 대회에서 모두 아쉬움을 남겼고, 다시 진출한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는 1라운드부터 아틀레틱 클루브를 만나 동전 던지기 룰에 의해 불운하게 탈락했다. 샹클리의 리버풀은 1966년 리그 우승을 마지막으로 3시즌 연속으로 무관을 차지하게 됨과 동시에 유럽 대항전 우승의 꿈에 목마른 채로 60년대 후반을 보내게 되었다. 추가로 이 시즌 겨울에 알프 애로우스미스가 이적하고 왼쪽 풀백 알렉 린제이가 영입되었다.

3.11. 1969-70 시즌

헌트의 득점력이 저하되기 시작했고, 수비진들의 노쇠화도 더불어 진행되고 있었기에 샹클리는 본격적으로 스쿼드 리빌딩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더군다나 그동안 수비를 책임지며 12시즌 간 333경기에 나섰던 레프트 백 게리 번이 1969년 여름에 은퇴를 결정했다. 이에 샹클리는 1969년 브리스톨에서 센터백 레리 로이드를 영입하며 수진에 활력을 더했다. 이 시즌 리버풀은 바비 그레이엄이 공격진의 주축으로 떠올라 시즌 초반 리그 9경기 무패를 달리며 기분좋게 시즌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즌 중반에 진입하며 패배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겨울 이적 시장에서 팀 레전드 공격수 헌트가 이적한 뒤로 계속해서 리버풀은 안정적인 연승가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결국, 20승 11무 11패로 샹클리호는 또 한 번 리그 우승에서 멀어진 5위를 기록해 좋지 못한 시즌을 보내고 말았다.

리그컵에서는 맨체스터 시티에게 일찍이 패배해 탈락했고, FA컵에서도 왓포드에게 일격을 맞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또 다시 출전한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는 비토리아 FC에게 탈락했다. 해당 시즌 4시즌 연속 무관의 늪에 빠지며 리그에서도 우승 경쟁을 펼치지 못한 샹클리는 번과 헌트까지 떠나보내면서 리빌딩을 거치는 바람에 동시에 좋지 못한 성적표를 받아들게 되었다. 그래도 이안 세인트 존, 론 예이츠, 토미 로렌스 등 노장 선수들 대신 레이 클레멘스, 레리 로이드, 알렉 린제이 등의 젊은 선수들이 대거 기용되면서 힘겹지만 새로운 시작을 알린 시즌이 되었다.

3.12. 1970-71 시즌

1970년대가 시작되자 샹클리는 팀의 완전 리빌딩을 선언하고 젊은 선수들의 대거 기용과 더불어 스쿼드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제프 스트롱을 비롯한 노장들이 팀을 떠났고, 젊은 스트라이커 존 토샥이 클럽 레코드딜로 합류함과 동시 윙어 스티브 하이웨이[11]가 영입되어 평균 연령 22세에 달하는 매우 젊은 팀이 만들어졌다. 새로운 선수들과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리버풀의 스쿼드는 다소간 적응기를 거쳐야 했으나, 계속해서 조직력을 갖춰가며 우상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샹클리호는 리그에서 17승 17무 8패로 너무 많은 무승부를 거두며 리그 5위에 다시 그치고 말았다.

리그컵에서는 스윈던 타운에 일격을 맞으며 일찍이 탈락하고 말았지만 이 시즌 FA컵에서는 샹클리가 다시금 강력한 모습을 보여줬다. 샹클리호는 스완지, 사우스햄튼, 토트넘을 연달아 꺾고, 4강전에서 숙명의 지역 라이벌 에버튼과 격돌했다. 샹클리의 리버풀은 이른 시간 에버튼에게 실점을 허용했으나 이후 동점골과 브라이언 홀의 역전골이 터지며 오랜만에 FA컵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다. 1965년 이후 처음으로 진출한 결승전에서 리버풀은 아스날을 만났다. 승부는 정규 시간 내에 가려지지 못했고, 연장전에 돌입한 리버풀은 하이웨이의 선제골로 앞서가는 듯 했으나 101분과 111분에 연달아 실점하며 우승을 목전에 두고 트로피를 잃고 말았다.
파일:shankluliverpool.jpg
리버풀 시민들 속에 서있는 샹클리[12]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는 4라운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꺾는 저력을 보여주며 준결승에 올랐으나 리즈 유나이티드를 만나 패배하는 바람에 결승 진출에 또 다시 실패했다. 해당 시즌 리버풀은 계속해서 무관의 시기를 이어갔고, 리그에서도 우승 경쟁을 펼치지 못했으나 FA컵 결승과 유럽 대항전 준결승에 진출하며 새롭게 리빌딩되는 팀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시즌을 보냈다. 특히 샹클리는 이 시즌 FA컵 결승에서 패배한 후 10만명이 넘는 리버풀 팬들 앞에서 연설을 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당시 샹클리는 "내가 리버풀에 온 이후로 나는 안필드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팬들을 위해 경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고 말해왔습니다."라는 상징적인 명언을 던지며 팀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팬들 앞에서 공언하기도 했다. 당당하게 팬들 앞에서 승리를 공언하고 자신감을 내비치는 샹클리의 행동에 의해 당시 무관의 시기가 이어지고 있었음에도 샹클리에 대한 팬들의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또한 FA컵 결승 직전에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FC로부터 케빈 키건이 영입되었고 리저브팀에서 촉망받는 유망주 필 톰슨이 실력을 다지며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더 높였다.

3.13. 1971-72 시즌

직전 시즌이 끝나기 전 20세 공격수 케빈 키건 안필드로 입성했고, 토미 로렌스와 이안 세인트 존이 팀을 떠나며 샹클리는 리버풀의 리빌딩 작업에 방점을 찍었다. 키건은 당초 캘러한의 대체자로 여겨졌으나, 샹클리는 그를 토샥과 최전방 투톱에 배치하여 헌트-세인트 존의 전설적인 투톱라인을 대체하고자 했다. 키건은 안필드에 입성하자마자 굉장한 활약을 펼치며 공격진에 활기를 더했고, 토샥과의 빅 앤 스몰 조합은 팀의 상승 가도를 이끌기 충분했다. 샹클리호는 FA 채리티 실드에서 레스터 시티에게 패배하여 우승을 놓쳤으나, 리그에 들어서서 시즌 중반 이후 5연승과 8연승을 기록하며 더비 카운티,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시티와 치열한 우승경쟁을 펼쳤다. 그러나 시즌 후반부 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브라이언 클러프가 이끌던 더비 카운티와의 41라운드 단두대매치에서 0-1로 지며 덜미를 잡혔고, 더비가 리그 라운드를 모두 치르고 리즈와 리버풀이 1경기씩을 남겨둔 가운데 울버햄튼이 리즈를 2-1로 잡아주며 리버풀은 아스날과의 원정 최종전에서 승리하면 더비를 제치고 극적 우승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최종전 후반 43분 토샥의 득점이 취소되며 리버풀은 아스날과 0-0 무승부를 기록, 결국 더비에게 1점차로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샹클리호는 컵위너스컵에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해 탈락하고, FA컵은 리즈에게, 리그컵은 웨스트햄에게 모두 조기 탈락하며 해당 시즌까지 6시즌 연속 무관에 그쳤다. 그러나 이 시즌, 키건과 토샥의 활약상이 빛났으며, 18세의 톰슨이 데뷔하며 수비진의 리빌딩이 완성되어 본격적으로 본궤도에 팀이 오를 준비가 완료되었다.

3.14. 1972-73 시즌

1972년 여름, 샹클리는 피터 코맥을 영입함과 동시에 이 선수를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라고 언급하며 리빌딩의 완성을 선언했다. 스쿼드의 경기력에 자신감을 느낀 샹클리는 1972-73 시즌 성공을 자신하였고, 이 시즌에 샹클리는 선수들의 마음 속에 우승에 대한 의심을 제거하고 상대팀들을 압박하기 위해 'THIS IS ANFIELD' 라는 문구가 적힌 유명한 명판을 안필드 입장 터널에 설치한다. 샹클리는 이 명패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누구를 위해 뛰고 있는지, 그리고 상대방이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으며, 그리고 이어진 1972-73 시즌 샹클리호는 리그에서 토샥-키건 투톱 듀오에 힘입어 우승을 향한 레이스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2년 12월 30일까지 리버풀은 홈 21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2020년 3월, 후배 리버풀 감독 위르겐 클롭이 자신의 리버풀 팀을 이끌고 홈 22연승을 거두기 전까지 잉글랜드 1부 리그 역사상 최장 기록이었다.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리버풀의 스쿼드는 연승가도를 질주하며 재능을 꽃피우기 시작했고, 리버풀은 아스날과 리즈를 따돌리며 25승 10무 7패를 기록, 7년만에 다시 잉글랜드 리그 챔피언에 복귀했다. 통산 8번째 리그 우승이자 샹클리의 세 번째 리그 우승이었다. 토샥과 키건은 각각 리그 13골을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공격진으로 떠올랐다.

FA컵과 리그컵에서는 각각 맨체스터 시티와 토트넘에게 발목을 잡혀 준결승까지 오르지 못하고 탈락했으나 1970년대에 새로 발족된 UEFA컵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다시 한번 최고의 전력을 다진 샹클리는 계속해서 아쉽게 떨어져왔던 유럽 대항전을 차지하겠다는 열망을 불태웠고 리버풀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AEK 아테네 FC, BFC 디나모, 디나모 드레스덴을 차례로 꺾고 준결승까지 단숨에 진출했다. 준결승 상대는 토트넘이었고, 리버풀은 홈에서의 1차전 승리에 힘입어 오랜만에 다시금 유럽 대항전 결승전 진출을 이뤄냈다.

1973년 5월 10일, 안필드에서 열린 결승 1차전 상대는 당대 분데스리가 최강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리버풀은 전반전부터 키건이 2골을 뽑아내며 여유있게 경기를 지배했고 로이드의 후반 쐐기골이 터지며 3-0으로 멀리 달아났다. 독일에서 펼쳐진 5월 23일 결승 2차전에서는 유프 하인케스가 멀티골을 터트려 경기에서 뒤졌으나 끝까지 추가 실점을 막아내 총합 스코어 3-2로 그토록 바래왔던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을 맛보게 되었다. 이 시즌 샹클리의 리버풀은 영국 국적[13]의 클럽이 같은 시즌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모두 차지한 더블을 달성한 첫 사례로 남았다. 이러한 명예에 힘입어 샹클리는 1973년 잉글랜드 리그 올해의 감독상도 수상했다. 키건은 모든 대회를 통틀어 시즌 22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자원으로 자리매김했고, 샹클리는 다시금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며 완전히 탈바꿈한 리버풀을 지휘해 붉은 제국의 주춧돌을 쌓았다.
파일:1002886.jpg
1973년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샹클리

3.15. 1973-74 시즌

자신이 리빌딩했던 1960년대의 리버풀을 재차 리빌딩하여 1970년대 다시 한 번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을 만든 샹클리는 피터 톰슨을 떠나보내고 지미 케이스를 영입하며 마지막으로 스쿼드를 재정비했다. 샹클리는 직전 시즌 리그 우승으로 FA 채리티 실드 출전권을 가지고 있었으나 선수들의 부상 우려와 일정을 이유로 참가를 거부했고, 1973-74 시즌은 리그 첫 경기에서 시작되었다. 리버풀은 디펜딩 챔피언답게 리그 레이스를 안정적으로 잘 이끌어 갔으나, 리그 마지막 8경기에서 힘이 빠지며 단 1승만을 거두고 5무 2패를 기록하여 22승 13무 7패로 시즌을 마쳐 리즈에게 아쉽게 다시 우승을 내주었다.

샹클리호는 오랜만에 진출한 유러피언 컵에서는 세르비아의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에게 덜미를 잡혀 2라운드에서 탈락했고, 리그 컵에서는 울버햄튼을 만나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FA컵에서는 절치부심하여 돈캐스터, 칼라일, 입스위치, 브리스톨, 레스터를 연달아 꺾고 결승전에 진출하여 통산 2번째 우승을 노릴 수 있게 되었다. 1974년 5월 4일에 펼쳐진 결승전의 상대는 뉴캐슬 유나이티드. 리버풀은 키건의 멀티골과 하이웨이의 골에 의해 3-0 대승을 거두고 사상 두 번째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직전 시즌의 더블에 힘입어 또 한 번 우승 가도를 달리며 자신이 재구축한 스쿼드의 우수함을 증명한 샹클리는 약 15년 동안 팀을 이끌며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마지막 시즌 FA컵 우승 당시 60세가 된 상태였다. FA컵 결승전이 끝난 후 라커룸으로 돌아왔을 때 샹클리는 은퇴를 결심하였고, 그의 아내 네시 샹클리가 1년 더 일찍 은퇴하기를 바랬기에 샹클리는 예년부터 보드진에게 은퇴를 언급해왔던지라 보드진도 그를 더 붙잡을 수 없었다. 샹클리는 유러피언 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는 통한의 아쉬움이 있었으나 그간 리버풀에서의 자랑스러운 업적에 만족하며 결국 1974년 7월 12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가 만든 강력한 스쿼드는 그의 수석코치이자 후임자인 밥 페이즐리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파일:external/i.telegraph.co.uk/1974-liv-shakly_1371165i.jpg
1974년 채리티 실드 당시의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과 샹클리

이후, 샹클리는 1974년 채리티 실드에서 비공식적인 일일감독을 맡아 승부차기 승리를 거둔 것을 끝으로 명예롭게 축구에서의 커리어를 끝냈다. 그리고 리버풀은 샹클리가 닦아놓은 클럽의 위대한 기반을 이어받은 페이즐리 감독 휘하에서 비원의 유로피언 컵 우승을 달성하면서 사실상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재패하는 최절정의 전성기를 달리게 된다.

파일:한시적 넘겨주기 아이콘.svg   밥 페이즐리 체제에 대한 내용은 리버풀 FC/페이즐리 체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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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4. 공격 포인트 순위

5. 시즌별 주요 성적

파일:리버풀 FC 로고.svg
빌 샹클리의 시즌별 주요 성적
시즌 리그 FA EFL CS UCL UEL CWC IFC 감독
1959-60 시즌 2부 3위
( 1)
4R - - - - - - 필 테일러

빌 샹클리
1960-61 시즌 2부 3위
( = )
4R 3R - - - - - 빌 샹클리
1961-62 시즌 2부 우승
(4회)
5R - - - - - -
1962-63 시즌 8위 4강 - - - - - -
1963-64 시즌 우승
(6회)
8강 - - - - - -
1964-65 시즌 7위
( 6)
우승
(1회)
- 우승
(1회)
4강 - - -
1965-66 시즌 우승
(7회)
3R - 우승
(3회)
- - 준우승 -
1966-67 시즌 5위
( 4)
5R - 우승
(2회)
2R - -
1967-68 시즌 3위
( 2)
8강 2R - - - - 3R
1968-69 시즌 2위
( 1)
5R 4R - - - - 1R
1969-70 시즌 5위
( 3)
8강 3R - - - - 2R
1970-71 시즌 5위
( = )
준우승 3R - - - - 4강
1971-72 시즌 3위
( 2)
4R 4R 준우승 - - 2R -
1972-73 시즌 우승
(8회)
4R 5R - - 우승
(1회)
- -
1973-74 시즌 2위
( 1)
우승
(2회)
5R - 2R - - -

6. 평가

파일:Legendary Managers of LFC.jpg
리버풀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명장들[14]
파일:JS52327271.jpg
빌 샹클리는 언제나 위대한 축구 감독 그 이상이었다. 그는 축구계의 무함마드 알리였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단아였다. 그의 언사는 예상치 못하는, 흠잡을 수 없는 시였다. 그는 리버풀을 혁명 지도자처럼 이끌었고, 대의를 위해서 그의 선수들을 축구 선수로서뿐만 아니라 전사들로서 지시했고, 팬들에게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제임스 코빗
이제 60년대 이전의 낡고 황폐했던 클럽은 찾아볼 수 없다. 샹클리는 잉글랜드 2부 리그의 수렁에 빠져있던 팀을 건져내 그들을 유럽 대륙 최고의 위치로 이끌었다. 그는 팀을 3번의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팀에 첫 FA컵과 첫 UEFA컵 우승컵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이 은색 트로피들은 이야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글렌벅 출신의 이 남자가 보여준 가장 큰 영향력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는 리버풀의 아이디어를 창조했다. 이는 그가 머지사이드에 도착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개념은 아직도 클럽 전체를 관통한다. 샹클리는 팬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들이 '골문으로 공을 빨아들이게 하는 것'에 대해 말했고, 관중들이 마치 경기장에 뛰는 것 처럼 느끼게 했다. 샹클리는 리버풀 클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아이콘이다.
리버풀 태생의 전 축구선수 토니 에반스

빌 샹클리는 이견이 없는 명실상부 리버풀 구단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꼽힌다. 샹클리는 1950년대 2부 리그의 수렁에 빠져있던 팀에 부임하여 강력한 리더십으로 리버풀을 1부 리그 승격으로 이끌었고, 이후 승격 두 번째 시즌에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종식시키는 입지전적의 위업을 쌓았다. 또한 그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컵 대회 우승인 FA컵 우승을 이끌었고, 구단 역사상 첫 유럽 대항전[15]에 진출하여 리버풀을 실질적으로 유럽 무대에 알렸으며[16], 이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유럽 대항전 우승[17]과 잉글랜드 구단 최초의 리그-유럽 대항전 더블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샹클리는 이러한 대회 우승 커리어와 성적만으로 평가될 수 없는 감독이다. 사실 우승 경력으로는 샹클리의 후임인 밥 페이즐리가 구단 역사상 가장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닌 샹클리가 리버풀 팬들의 가장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이유는, 샹클리가 리버풀의 모든 영광을 가능케한 토대와 기반을 마련했던 '구단의 아버지' 격 감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샹클리가 구단에 남긴 유산들은 구단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력은 사실상 현대까지도 이어내려오고 있다.

먼저, 샹클리는 부임과 동시에 보드진에게 '매니저'로서 발휘할 수 있는 대다수의 권한[18]을 요구하여 강력한 운영권을 갖춘 뒤, 열약한 상태에 처해있던 리버풀의 홈 구장인 안필드와 당시 훈련장이었던 멜우드를 정비하여 리버풀이 제대로된 경기와 훈련을 소화할 수 있도록 구단의 인프라를 혁신했으며, 선수들이 입는 복장과 경기에서 사용하는 경기 장비 등 클럽 내 모든 운영 요소를 재정비했다. 그의 첫 부임 당시 리버풀은 잔디에 물을 주는 시설이 없었을 정도로 노화된 구장과 관리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채 방치된 훈련장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그는 적극적인 보드진의 투자를 끌어오며 안필드를 리버풀의 요새로, 멜우드를 리버풀 역사의 산실로 탈바꿈시켰다. 이후 리버풀의 상징과도 같은 올 레드 색상의 홈 유니폼 또한 상대에서 위압감을 보여주기 위해 샹클리가 고안해낸 것인데, 실제로 샹클리는 운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철학 하에 처음으로 경기장 잔디 상태에 따라 다른 축구화 스터드를 사용하게 하는 등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구단의 디테일을 손 본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최초로 구단에 현대적인 훈련시스템을 도입했다. 샹클리 이전에 구단의 훈련은 대부분 단순히 도로를 내달리는 수준의 훈련에 지나지 않았으나, 샹클리는 체계적으로 나눠진 세션과 선수들의 상태에 알맞는 루틴, 공을 가지고 하는 기능적인 훈련들을 중시했다. 특히 5대5 스몰 코트 게임을 통한 좁은 공간에서의 패스워크 훈련을 구단에 도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샹클리는 훈련 이후의 회복 과정에서도 과학적인 이론을 동원하여 신체의 온도를 떨어트려 부상을 방지하는 방식을 사용했다.[19] 즉, 샹클리는 구단에 있어 감독이라는 위치를 공고히하며 클럽 내 모든 현대적인 인프라의 초석을 다졌을 뿐 아니라 리버풀의 경기 운영과 훈련 체계에 있어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 인물인 것이다.

또한 샹클리는 특유의 '패스 앤 무브먼트' 철학을 기초로한 공격적인 축구를 리버풀에 도입해 리버풀이 특유의 다이나믹한 축구를 구사할 수 있도록 만든 리버풀 전술의 선구가격 인물이기도 했다. 샹클리는 선수들의 패스와 움직임을 통한 빠르고 공격적인 축구를 팀에 도입했고, 이에 리버풀은 좌우 측면에 빠른 윙어들과 공격진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포워드들을 활용하며 당대 최고의 공격 전략을 구사하는 클럽 중 하나로 올라설 수 있었다. 또한 상대를 기다리지 않고 압박을 가하는 형태의 수비를 사용하여 압박 축구를 최초로 리버풀에 도입한 감독이기도 했다. 여기에 더하여 샹클리는 선수들을 아들처럼[20] 돌보는 인간적인 면모의 덕장이면서도, 승부의 세계 앞에서는 냉정함과 비범함을 발휘해 팀의 성공을 위해 칼을 뽑을 수 있는 승부사 기질의 감독이어서 스쿼드의 리빌딩에도 장점을 발휘했다. 이에 샹클리 체제가 장기간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리버풀은 샹클리 휘하에서 트렌드에 맞는 전술 변화[21]와 리빌딩을 통해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1970년대 실질적인 전성기를 연속해 맞이할 수 있었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그는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루벤 베넷, 로니 머랜, 톰 손더스 등의 당시 리버풀 코칭 스태프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조직적인 코칭 사단을 구축함으로서 구단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샹클리와 코치진들은 안필드 내의 축구화 보관 창고인 부트 룸(Boot Room)을 개조하여 비 공식 코칭 스태프 회의실로 활용하며 전술, 운영, 코칭, 팀 관리 등 클럽을 위한 무수한 논의들을 진행했고 구단 내 모든 사항들을 공유했는데, 이는 감독이 바뀌어도 구단의 시스템이 유지되는 '리버풀 웨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67년 클럽의 스카우팅 시스템을 새로 혁신하여 재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그가 남긴 유명한 유산의 한 부분.[22] 결국 구단의 전성기를 만든 코칭 시스템 전반의 초석을 샹클리가 세운 것이다. 실제로 이 샹클리의 코칭 시스템은 리버풀이 현대적인 클럽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는데에 절대적인 영향을 줬다. 또한 실질적으로 그의 시스템과 그가 만든 ' 부트 룸' 아래 7-80년대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을 지배한 리버풀의 전성기인 붉은 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샹클리가 구단 내 최고의 아이콘인 이유는 그가 단순히 리버풀의 인프라와 시스템을 개보수한 감독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샹클리가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명문 클럽'으로서 리버풀의 정체성을 만들어 냈기 때문. 그는 리버풀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리버풀을 공략불가능한 요새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이상이라는 것을 공언했고, 리버풀이라는 구단의 목표 의식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놓았다. 대표적으로, 위에도 언급하였듯이 그는 리버풀의 유니폼 컬러를 상하의와 양말까지 전부 붉은색으로 바꿨으며, 드레싱 룸에서 그라운드로 들어가는 입구마다 ‘This is Anfield’ 문구가 적힌 현판을 걸어두게 만들었다.[23] 그는 항상 리버풀은 최고가 되어야 하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길 원했다. 단순히 '잘 돌아가는 구단'을 넘어 선수들에게 강력한 동기부여와 더불어 위닝 멘탈리티를 심어주며 '확실히 이기는 구단'을 만들어낸 것. 결국 그의 바람대로 리버풀은 그의 지휘 아래 세 차례의 리그 우승과 구단의 첫 FA컵 및 첫 유럽 대항전 우승을 달성했고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뻗어나게 되었다. 결국 2부 리그를 전전하던 클럽을 완벽히 리빌딩하여 명문 클럽으로서의 기틀을 확립한 샹클리의 도약기에 힘입어 리버풀은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쉬로 이어지는 긴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버풀은 단순한 클럽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관(institution)이다. 그리고 내 목표는 사람들을 클럽과 팀에 가까워지게 하고 그들이 클럽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아내들은 남편의 유골을 안필드에 가져다 놓고 작은 기도를 한 뒤 경기장에 뿌리기에 이르렀다. 난 그들에게 "당신들에겐 언제나 환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십여 명씩 찾아왔다. 한 어린 소년이 그의 직장에서 죽자 어느 일요일엔 50명의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그의 유골을 스탠드에 뿌리기 위해 안필드로 왔다.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만 리버풀을 지지하는게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리버풀을 지지한다. 이것이 진짜 리버풀의 스토리이다. 이것이 아마도 리버풀이 그토록 훌륭한 이유일 것이다. 이 사실에 위선은 없다. 이것은 정말 진실된 이야기이다.
빌 샹클리

또 한가지 샹클리가 구단에 남긴 위대한 영향은 바로 서포터즈와의 관계에 있다. 샹클리는 감독 경력 내내 팬들의 중요성을 구단에 피력해왔다. 그는 자신이 경기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늘 강조했으며, 팬들은 팀에 정말 중요한 존재기 때문에 감독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해야만 한다고 자주 말해왔다. 일례로 샹클리는 트로피 퍼레이드 중에 팬들이 던진 머플러를 경찰이 막아서자 소중한 것을 막지말라며 머플러를 회수해 두를 정도로 서포터들과 소통에 노력했다. 그는 팬들의 편지에 직접 타자를 쳐서 답장하는 것은 물론, 경기 전에 경기장에서 자주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그는 공개적으로 팀의 변화와 이전 경기들에 대한 견해를 팬들에게 직접 설명하곤했다. 이에 리버풀 팬들은 그와 그의 팀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주었고 샹클리와 리버풀은 서포터들과 특별한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었다. 1971년의 FA컵 결승전에서 패배한 뒤 샹클리가 세인트 조지 홀의 계단에 서서 10만명이 넘는 리버풀 팬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했는데 이 당시에 피터 로빈슨 구단 사무총장이 "샹클리가 팬들에게 머시 터널[24]을 통해 행진하고 버킨헤드[25]를 약탈하라고 하면 진짜로 팬들은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 샹클리로부터 시작된 리버풀과 팬들의 특별한 유대감은 현대로까지 이어졌다. 샹클리 이후 리버풀은 압도적인 로컬 팬 베이스의 힘을 가진 구단이 되었고 현재에도 리버풀은 팬들의 열광적인 응원과 구단을 위한 절대적인 지지로 유명한데, 지금까지도 구단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You'll Never Walk Alone 정신이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현 리버풀의 모토라고 볼 수 있는 이 YNWA 정신의 실질적인 시초가 빌 샹클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빌 샹클리는 리버풀의 경기장과 훈련장 및 모든 인프라에 초석을 마련한 인물일 뿐 아니라, 구단 내 운영과 코칭 시스템의 근본을 다졌고, 현대적인 전술과 전략을 도입해 팀의 첫 번째 전성기를 이끌며 팀에게 최초의 국내 컵 우승 및 유럽 대항전 우승을 가져다 주었으며, 팬들과의 단단한 유대관계를 구축해 구단을 지탱하는 문화까지도 만들어낸 입지전적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리버풀에서 만들어낸 모든 유산들은 현대까지도 구단과 축구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26], 특히 리버풀에게는 실로 구단 그 자체와도 같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모두가 함께 노력할 때 위대한 구단이 탄생한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리버풀의 정체성 그 자체인 감독.
[1] 1964-65 시즌 이후 [2] 당시에는 구단 내 선수 선발 위원회가 따로 설치되어 있어, 선수 선발권이 감독에게 없는 경우가 있었다. 리버풀도 샹클리 시대 이전까지는 선수 선발 위원회가 출전 선수를 결정했다. [3] 페이즐리, 페이건, 베넷 [4] 이러한 방식은 당시 구단의 물리치료사직을 겸임하던 밥 페이즐리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실제로 후에 이러한 쿨 다운 타임을 통해서 시즌 관리에 굉장한 이득을 얻었다고 당시 코치진들이 증언하기도 했다. [5] 샹클리는 3-3-4라고 명명했다. [6] 당시 인테르는 1962-63, 1964-65, 1965-66 시즌 세리에 A를 연속으로 우승함과 더불어 1963-64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을 달성했고, 1963-64 유러피언 컵 우승 당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버티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기도 했었다. 1960년대의 인테르의 별명이 그 유명한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였을 정도. [7] 인테르는 리버풀을 꺾고 올라가 1964-65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 상대는 에우제비우가 이끄는 벤피카였다. [8] 예이츠가 최후방을 맡고 스미스가 조금 더 전진하여 볼을 뿌리는 형태의 센터백 조합이었다. [9] 샹클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샹클리와 페이즐리는 유럽 대항전에서 대륙 팀들을 상대하는 방법과 전술 및 경기 운영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10] 샹클리는 감독 커리어 첫 클럽이었던 칼라일에서부터 지도해온 제자 선수였던 제프 트웬티먼을 리버풀에서도 영입하여 지도하고 있었는데, 트웬티먼이 은퇴하자 그를 수석 스카우터로 고용하였고, 트웬티먼은 샹클리 사단의 눈이 되어 후에 케빈 키건, 필 닐, 앨런 한센, 이안 러시 등의 전설적인 선수들을 발굴하게 된다. [11] 샹클리가 당시 리빌딩을 위해 영입한 선수들은 대부분 하위 리그나 하위권에 있는 클럽들에서 넘어 왔다. 그야말로 샹클리의 발굴력과 샹클리 휘하 스카우트진의 안목을 증명할 수 있는 대목. 심지어 후에 클럽 최고의 레전드 반열에 오르는 하이웨이의 경우 논-프로 리그에서 발굴되었다. [12] 양 팔을 번쩍 든 이 자세가 빌 샹클리의 트레이드 마크 자세. 안필드에 있는 그의 동상도 이 자세로 만들어졌다. [13] 잉글랜드 구단 뿐 아닌 스코틀랜드 구단 포함 [14] 좌측부터 차례로 빌 샹클리, 밥 페이즐리, 조 페이건, 케니 달글리시, 라파엘 베니테스, 위르겐 클롭 감독이 자리해 있으며, 모두 리버풀 소속으로 유럽 대항전 우승을 일궈낸 인물들이다. 해당 배너는 리버풀의 홈 구장 안필드의 스피언 콥 스탠드에 대형 플래그로 자주 등장한다. [15] 1964-65 시즌 유러피언컵 [16] 당대 유럽 최고의 팀이었던 인터 밀란과 처음 진출한 유러피언컵 준결승에서 격돌해 명경기를 펼치며 리버풀의 이름을 유럽에 처음 써내렸다. [17] 1972-73 UEFA컵 [18] 대표적인 것이 선수 선발권이다. 당시에는 구단 내 선수 선발 위원회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어 감독이 출전 선수를 정할 수 없었다. 사실상 샹클리 이후부터 리버풀의 감독직은 강력한 지위를 갖췄다. [19] 당시에는 경기 이후 즉시 버스를 타고 훈련장으로 가서 훈련장에서 탈의 후 샤워를 하고 식사를 하는 방식이었는데, 땀에 젖은 채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몸에 무리를 줄수 있기 때문에 안필드 경기장 내에서 탈의를 하고 땀을 식히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이렇게 옷을 갈아입은 후 몸의 온도를 낮추고 이동하는 방식에 의해 실제로 상당히 부상 관리가 잘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쿨다운 방식은 당시 물리치료사직을 겸임했던 밥 페이즐리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20] 실제로 선수들을 아들(son)이라는 단어로 불렀다. [21] 초창기엔 W-M 포메이션의 3백 전략을 쓰다가 1960년대 중반, 국가대표팀 경기들에서 전술 트렌드를 읽어 4백의 4-4-2로 포메이션을 전환했다. [22] 1970년대 리버풀은 이 스카우팅 시스템을 활용하여 하부 리그나 하위 팀에 숨어있던 원석들을 발견해 유럽을 재패하는 스쿼드를 만들어낸다. 케빈 키건, 필 닐 등이 좋은 예. [23] 두 사안 모두 상대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함이었다고 밝혔다. [24] 리버풀과 버킨헤드를 연결하는 수중 터널 [25] 리버풀과 수중 터널을 통해 연결된 강 건너 편의 도시 [26] 리버풀 역사 뿐 아니라 축구사에서도 굵직한 존재감을 가진 감독이다. 2013년 ESPN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10, 2019년 프랑스 풋볼지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10, 2013년 월드 사커지 선정 역사상 최고의 감독 TOP 20에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