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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 밀러/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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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생과 성장기3. 대학 시절4. NBA 커리어5. 플레이오프 경력
5.1. 19905.2. 19915.3. 19925.4. 19935.5. 19945.6. 19955.7. 19965.8. 19975.9. 19985.10. 19995.11. 20005.12. 20025.13. 20035.1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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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레전드 레지 밀러의 생애와 선수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출생과 성장기

레지 밀러는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라는 곳에서 태어났다.[1] 태어났을 당시 엉덩이뼈 쪽이 기형이어서 4살때까지 보조기를 차야했다. 보조기를 뗀 후에는 농구의 매력에 빠져 늘 1살 누나인 셰릴과 1대1 시합을 했다고. 참고로 밀러의 형 대럴은 메이저리그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서 포수로 뛰었고, 여동생인 타미는 배구선수, 그리고 그의 누나 셰릴은 미국 여자농구 전설의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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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릴 밀러는 신장 188cm의 센터로 고등학교 시절 한 경기에서 105점을 넣은 기록도 있으며[2] 여자농구 명문 USC에서 뛰었고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미국 여자농구 금메달리스트이며, 농구 독립리그인 USBL(남자리그)에 여자선수로서 드래프트 지명을 받는 등 1990년대를 대표하는 여자농구 스타이자, 여자농구 올타임 베스트 플레이어에도 10위권 내에 들 명예의 전당에 올라있는 여자 농구의 전설.[3]

누나와 키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임에도 레지는 장애로 신체조건이 불리했던데다, 누나와 1대1 시합을 하면 아무리 돌파를 잘 해도 쫓아온 누나에게 블록 슛을 먹었는데 하도 당하다 보니 누나를 1대 1로 상대할 때 멀리서 최대한 빠른 타이밍에 슛을 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다는 생각에 잡자마자 바로 던지는 광속의 릴리스 타이밍을 유지하는 슈팅폼을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슈팅폼은 정석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슈팅 후 양팔이 크로스되는 특이한 모션으로, 다른 선수보다 공에 스핀이 별로 안 들어간다. 릴리스가 매우 빨라서 팔꿈치가 펴지는 것과 동시에 공이 날아가며, 슬로우 모션으로 보지 않으면 손목 스냅이 잘 안 보인다. 그런 퀵릴리스에 특화된 폼에 근육이 잘 붙지 않던 체질 때문에 한창 마이클 조던의 영향으로 힘과 기술을 고루 갖춘 스윙맨들이 등장하던 무렵 역으로 드리블링이나 몸싸움을 이용한 포스트업 기술을 익히기보다는 경기 내내 오프 더 볼 무브로 주야장천 뛰어다니다 중요한 순간 갑툭튀해 3점 슛을 넣는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사실 셰릴 밀러가 워낙에 전설이라 대학 시절과 프로 초기까지는 그녀의 명성이 레지를 압도했다. 이 때문에 UCLA시절에 아직 거물이 아니었던 레지를 조롱하기 위해 원정팀 관중들이 다 같이 "셰~릴! 셰~릴!"을 연호하기도 했다고 한다. NCAA 토너먼트 32강이 최고성적이던 밀러는 대학시절 내내 누나와 비교되며 폄훼됐으며, 이는 그가 NBA에서 스타급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이어졌다.

물론 현재는 레지가 훨씬 더 유명하다. 셰릴 본인도 "예전에는 레지가 제 동생으로 알려졌는데 언제부턴가 내가 레지 누나로 알려졌다"고 할 정도. 물론 워낙 동생 사랑이 유명한 분이라 뿌듯하게 말했다. 선수레벨로 따지면 셰릴은 조던이나 매직급이지만, 여자농구 자체가 남자농구에 비해 넘사벽으로 안 유명하고 돈도 적게 받기 때문에(WNBA 최고 수익을 올리는 연봉이 20만 달러가 안된다. NBA 최소연봉에도 못 미치는 수치) 여자농구의 레전드라도 극소수의 몇 명 아니면 미국 대중들도 모른다. 심지어 밀러의 시절에는 WNBA조차 출범하기 전이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아마추어 경력만으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밀러는 많이들 안다. 게다가 셰릴은 대학 졸업 후 해외의 여러 여자농구 리그에서 지명을 받고, 심지어 남자농구 하부리그인 USBL에서도 지명을 받았던 선수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프로진출을 포기하고 방송인[4]과 지도자 생활을 오가고 있다.

여담으로 비슷한 테크 (WNBA출범 이전 세대로 뛰어난 아마추어 선수->부상->방송인)를 탄 이가 바로 터너 스포츠의 사이드라인 리포트로 유명한 도리스 버크. 버크는 거물들 인터뷰할 때는 셰릴 밀러, 고 크렉 세이거, 데이비드 알드리지 아니면 이 분이 나올 정도로 나름 유명한 인물이며 NBA 2K 시리즈에도 나왔다.

3. 대학 시절

리버사이드 폴리테크닉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농구 명문인 UCLA에 입학했다.[5] 당시 UCLA는 1975년 전국대회 우승 후 트로피를 더 이상 들지 못했고, 1983년 토너먼트 진출 후 오리건 주립대학교, 워싱턴 대학교, 애리조나 대학교 등 후발주자의 상승으로 침체된 모습이었으나, 월트 해저드(1942~2011) 감독[6]의 가르침을 받고 2학년 때인 1984-85 시즌에 팀을 NIT 결승까지 가서 우베 블랍[7], 스티브 알포드 등이 포진한 인디애나 대학교를 65-62로 꺾어 트로피를 땄고, 4학년 때인 1986-87 시즌에 후배 푸 리차드슨 등과 함께 PAC-8(현 PAC-12)지구 정규시즌 우승으로 4년만에 NCAA 전국대회에 진출시켜 32강까지 갔다. 이 시기 카림 압둘자바에 이어 학교 통산득점 2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대학 재학 동안 1986년 UPI 선정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 올 PAC-8 퍼스트 팀 2회(1986, 1987) 등에 뽑혔고, 졸업 후 NBA드래프트를 신청했다.

4. NBA 커리어

레지 밀러는 1987년 드래프트에서 데이비드 로빈슨, 아몬 길리엄, 데니스 홉슨, 레지 윌리엄스, 스카티 피펜, 케니 스미스, 케빈 존슨, 올덴 폴리니스, 데릭 매키, 호레이스 그랜트에 이어 전체 11순위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 지명된다. 많은 인디애나 팬들은 인디애나에서 태어났고 인디애나 대학을 나온 홈타운 보이[8]인 슈팅 가드 스티브 알포드의 지명을 기대했기 때문에 밀러가 지명되자 심한 야유를 보냈고, 201cm 88kg라는 밀러의 깡마른 체격은 거친 NBA에서 살아남기엔 불안해보였기에 더욱 반발이 심했다. 그러나 페이서스의 선택이 옳았음은 곧 증명되었다. 레지 밀러는 18년 동안 페이서스에 헌신하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반면, 알포드는 2라운드 26위로 지명되어 4시즌간 백업선수로 이런저런 팀을 전전하다 은퇴했기 때문이다.[9]

루키 시즌 밀러는 슈팅가드 존 롱의 백업으로 뛰었으며, 2년차부터 스타팅 멤버가 되어 은퇴할 때까지 계속 주전으로만 출전했다.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1976년부터 1986년까지 플레이오프에 2번 밖에 진출하지 못한 약체였으나, 밀러가 3년차 되던 해인 1989년부터 은퇴 시즌인 2004년까지 딱 한번(1996년)을 제외한 전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을 달성하며 오늘날까지 가지고 있는 '꾸준한 강팀' 이미지를 구축하게 된다. 이 시기 동안 컨퍼런스 파이널 5회, 파이널에 1회 진출했는데 결국 우승하지는 못했고 이는 밀러의 커리어에 가장 큰 한으로 남은 부분. 패트릭 유잉 뉴욕 닉스에게 2번, 샤킬 오닐과 앤퍼니 하더웨이의 올랜도 매직에게 한번, 마이클 조던 시카고 불스에게 한번,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의 L.A.레이커스에게 한번, 배드 보이즈 2기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한번 가로막혔고 그 중 7차전까지 가서 진게 3번, 6차전에서 진게 3번이다.

레지 밀러는 NBA역사상 최초로 3점슈터로서 스타가 된 인물이다.[10][11] 79~80시즌부터 NBA에 도입된 3점 슛 제도는 초창기만 해도 3점 슛 제도를 먼저 실시한 ABA에서 뛴 선수가 아니라면 매우 생소한 룰이었고 기존 제도에 익숙했던 선수들이 농구의 절대 명제중 하나인 골대 가까이서 쏴라라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에 그다지 중요한 옵션이 아니었다. 레지 밀러의 2년차 시즌인 88~89시즌에야 뉴욕 닉스가 최초로 팀 합계 1000개 이상을 시도하는 파격적인 전략을 시도하기 전까지 8년간 NBA 팀 평균 3점 슛 시도는 연간 300회 내외였다.(지금은 팀 평균 3점 슛 시도는 1700회 가까이 되며, 전문 슈터들은 한시즌에 500회 이상은 던지며, 스테판 커리는 400개를 성공시킨 적도 있다.)

그리고 그때부터 레지 밀러는 매년 300개 이상의 3점을 던지는 3점 전문슈터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3점 슈터로 평균득점 18~20점대를 기록하며 스타플레이어로 부상한다.

18년에 걸친 그의 커리어 통산 성적은 평균 18.2점 3.0리바운드 3.0어시스트, FG 47.1% 3P 39.5% FT 88.8%. 시즌 커리어 하이도 평균 24.6점(1989년)으로 꾸준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고득점을 올리던 선수는 아니었다. 개인상 수상 실적도 전혀 없고 All-NBA 3rd팀에 3번. 올스타에 다섯번 선정된게 고작이다.[12][13] 한때 3점 슛 시도/성공개수 NBA통산 1위였다가 이것도 레이 앨런에게 기록이 경신되면서 2위로 내려갔다. 이때문에 스탯과 수상실적을 위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과대평가된 선수'로 불리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14]

밀러가 역대 최고의 슈터 중 하나이자 레전드인 이유는 몇가지가 있는데, 일단 가장 큰 이유는 플레이의 임팩트이다. 정규 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 특히 강했으며[15][16], 긴장감이 높고 중요한 순간일수록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자주 보여주었다. 정규 시즌보다 플레이오프에서, 1/2/3쿼터보다 4쿼터에서, 점수차가 많이 나는 게임보다 시소게임에서 더 높은 집중력을 보여주었던 진정한 에이스. 어쩌다 몇번 그러면 그냥 뽀록인가보다 하겠지만 유명한 4쿼터에만 25점 넣어 역전승, 8.9초 동안 8점 넣어 역전승을 위시한 다수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다보니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이자 플레이오프 명장면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으며 동명의 맥주 광고에서 따온 밀러 타임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일전에 NBA감독을 대상으로 클러치 슛을 맡길만한 선수를 설문조사하였을 때 대부분의 감독들이 ''역전승하는데 2점이 필요하면 마이클 조던에게, 3점이 필요하면 레지 밀러에게 슛을 맡기겠다''라고 답하였을 정도로 승부처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승부근성과 투지, 리더십은 동 시기의 마이클 조던에 비견될만 했으며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인디애나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팀 리더로서 한결같은 헌신을 보여주며 명예롭게 은퇴한 점 또한 높이 평가받는다.

5. 플레이오프 경력

5.1. 1990

레지의 첫 번째 플옵 진출,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3전 전패로 탈락했다.

5.2. 1991

1990/91시즌 도중에 감독이 Dick Versace에서 밥 힐[17]로 변경되는 와중에도 플옵 진출. 1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2승을 연달아 거두면서 선전했으나, 이후 3연패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며 탈락했다.

5.3. 1992

2년 연속 보스턴을 1라운드에서 만났지만 3연패로 광탈했다.

5.4. 1993

1라운드 뉴욕 닉스에게 1승 3패로 탈락했고, 이로 인해 밥 힐 감독이 경질되었다.

5.5. 1994

Miller Time
1라운드에서 올랜도 매직, 2라운드에서 애틀랜타 호크스를 연달아 격파하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와 맞붙게 된 페이서스. 시리즈는 2-2 타이를 이룬 상황에서 5차전은 뉴욕 홈구장인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렸다. 당시 페이서스는 3쿼터까지 58-70으로 크게 뒤지고 있었고, 이때까지 밀러는 겨우 14점을 기록하고 있었다. 바짝 기가 살은 광팬 스파이크 리는 코트사이드에서 레지 밀러에게 "니가 3점 빼고 할줄 아는 게 뭐가 있냐? 니한테 연봉 처먹이는 인디애나도 참 한심하지"라며 트래쉬 토크를 시전했었는데, 어지간하면 반응하지 않고 이때도 참으려고 했던 레지 밀러는 스파이크 아재의 도발에 제대로 빡쳐버려, 스파이크 리에게 손가락 4개를 펴보이면서 Choke Sign(목조르는 시늉)을 보낸다. 즉 '계속 그래봐, 4쿼터에 님 좆될거임'이란 뜻.[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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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닉스는 4쿼터에 35-16으로 털리면서 밀러의 말은 현실이 됐고, 그 35점 중 25점을 밀러가 혼자 넣었다.[19] 그리고 경기 후 인터뷰에서 "스파이크 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What about Spike Lee?)라는 질문에 "스파이크 누구라고요?"(Spike who?)라고 디스했다.

밀러의 이 경기 성적은 39점 6어시스트, FG 14/26 3P 6/11 FT 5/6. 4쿼터 25점은 역대 플레이오프 4쿼터 최다 득점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20]


하지만 이 시리즈 자체는 나머지 두 경기를 모두 패배하면서 NBA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했다. 후술할 타이슨 면회 사건도 이거때문.

5.6. 1995

1라운드에서 애틀랜타 호크스를 꺾었고, 94년 드라마를 썼던 닉스와 2라운드에서 다시 붙었다. 경기장은 역시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1차전에서 페이서스는 게임 종료까지 단 16.9초를 남기고 99-105로 6점 뒤지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역전이 나올 수가 없는 상황에서 밀러는 인바운드 패스를 받자마자 3점을 넣고, 다음 포제션 닉스의 인바운드 패스를 스틸하자마자 다시 3점을 넣고, 닉스 자유투 2개가 실패한 뒤 리바운드를 잡고 파울을 당해 자유투 2개를 넣었다. 총 8점을 넣어 107-105로 역전시키는 동안 걸린 시간은 8.9초. 밀러는 31득점 5리바운드 4어시스트 4스틸, FG 7-18 3P 3-7 FT 14-15를 기록했다.

이 퍼포먼스는 일명 밀러 타임으로 불리는 밀러의 대표적인 퍼포먼스였으며, 이후 트레이시 맥그레이디가 2004년 12월 9일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정규 시즌 경기에서 33초 동안 13점을 몰아 넣으며 역전승을 이끌어낸 "티맥 타임"과 함께 한 명의 선수가 역전을 만들어낸 가장 쇼킹한 경기로 꼽힌다.[21][22] 그 당시 경기 장면을 보면 다 이긴 경기를 8초만에 날려먹어 벙쪄있는 팻 라일리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 시리즈에서 역시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으로 뉴욕 닉스를 꺾고 [23] 전년도의 복수를 한 인디애나였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샤킬 오닐 앤퍼니 하더웨이가 버티는 올랜도 매직에게 3-4로 패배한다.

5.7. 1996

밀러는 시즌 종료 단 5게임을 남겨두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와의 경기에서 수비수와 충돌, 눈 주위 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는다. 에이스를 잃은 페이서스는 애틀랜타 호크스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2-2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게 되었고, 안되겠다 싶었는지 밀러는 5차전에 부상을 무릅쓰고 안면 보호대를 찬채 출전을 강행했다. 그러나 29점을 올린 밀러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팀은 87-89로 패배하여 1라운드에서 탈락한다.

5.8. 1997

감독 래리 브라운과의 불화로 포인트가드 마크 잭슨이 덴버 너게츠로 트레이드되고 레지 밀러에 이은 팀의 2옵션이었던 센터 릭 스미츠가 부상으로 단 30경기밖에 출장을 못하는 등 로스터에 큰 균열이 생긴 해. 이로써 페이서스는 8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라는 수모를 겪는다.

5.9. 1998

너는 여기서 은퇴하는거야, 마이클 조던
- 레지 밀러, 라스트 댄스 8화
전년도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래리 브라운이 물러나고, 신임 감독으로 래리 버드가 임명된다. 동시에 마크 잭슨이 복귀하고 스몰 포워드로 크리스 멀린을 영입, 릭 스미츠(C), 데일 데이비스(F), 크리스 멀린(F), 레지 밀러(G), 마크 잭슨(G), 백업 멤버로 트래비스 베스트, 제일런 로즈, 안토니오 데이비스가 버티는 끈끈한 라인업을 구축하게 된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2라운드에서 뉴욕 닉스를 차례로 꺾고 좋은 우승 기회를 잡은 페이서스. 밀러는 닉스와의 4차전에서 종료 5초전 동점 3점을 꽂아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 가고, 총 38점을 득점하며 팀의 승리를 이끈다. 이 경기도 뉴욕 홈에서 열린 경기였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가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먼의 불스 왕조 시대였다. 시카고 불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벌인 인디애나는 7차전에서 시종일관 접전을 펼쳤으나, 결국 83-88로 분패하고 만다. 이 시리즈 4차전에서 밀러의 종료 0.7초전 역전 3점 슛이 나왔다.

마이클 조던의 1차 복귀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스를 7차전 까지 이끈 유일한 팀이 페이서스였다. 그만큼 팀 전력이 좋았고 밀러 입장에서도 상당히 아쉬운 시즌이였다. 물론 2000년 파이널 준우승도 있지만 당시 인디애나 전력보다 97/98 시즌 전력이 훨씬 좋았고, 30초반의 나이였기에 체력적으로 우세했을 것이며 무엇보다 지배자 마이클 조던을 넘었다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던의 6번의 우승 시즌 중에서 7차전까지 끌고 간 것은 1991-92의 뉴욕 닉스와 1997-98의 인디애나 페이서스 두 팀뿐이다. 이 시리즈는 마이클 조던의 신화를 무너뜨릴 뻔 했던 시리즈로 1992-93 파이널의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 선즈와 함께 가장 자주 언급된다.

5.10. 1999

1라운드 밀워키 벅스, 2라운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상대로 7연승을 거두며 무패로 컨파까지 진출했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피차 지긋지긋한 뉴욕 닉스에게 4-2로 패배.

5.11. 2000

작년의 데자뷰인듯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를 만난다. 심지어 1라운드와 2라운드 상대도 각각 밀워키와 필라델피아로 동일. 각각 3승 2패, 4승 2패로 힘겹게 올라왔지만 이번에는 인디애나의 승리였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날아다니며 1999년의 복수를 한 밀러와 페이서스는 4승 2패로 NBA 파이널에 진출한다.

그런데 하필 상대가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의 레이커스 왕조이며 오닐의 최전성기 시즌이었다. 시리즈의 분수령이 된 4차전에서 연장전 끝에 118-120으로 패배한 인디애나는 2-4로 반지를 내주게 된다. 그리고 이 때가 90년대 페이서스 전성기를 이끈 라인업의 마지막 해였다. 래리 버드는 등부상 때문에 감독직 수행을 계속 하는 게 무리였고, 릭 스미츠와 크리스 멀린은 은퇴 직전이었으며 밀러도 이미 35세를 넘기고 있었다.

2001년부터 리빌딩에 들어간 페이서스는 레지 밀러와 제일런 로즈를 제외한 주전이 모두 빠졌고 2003년까지 3년 연속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탈락하게 된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저메인 오닐, 론 아테스트, 자말 틴슬리 등이 점차 성장해 나가며 다시 성적이 점차 상승하게 된다.

5.12. 2002

8시드로 플레이오프에 힘겹게 진출했고 1시드 뉴저지를 만나서 업셋을 할 했다. 마지막 게임에서 리차드 제퍼슨이 자유투를 놓친 후 40피트 3점 슛으로 게임을 오버타임으로 보낸뒤에, 첫번째 오버타임에서도 끝나기 직전에 드라이브인 후 덩크에 성공함으로 두번째 오버타임으로 보냈다. 물론 그 다음에는 방전했는지 한골도 성공시키지 못하며 시리즈에서 패했다. 물론 마지막 쿼터가 아쉽지만 클러치에 강한 밀러의 강심장을 보여준 시리즈.

5.13. 2003

2003년 아이제아 토마스에서 릭 칼라일로 감독이 바뀐 페이서스는 61승 21패로 NBA 정규 시즌 1위를 찍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다시 진출하지만, 배드 보이즈 2기로 불리는 천시 빌럽스 - 테이션 프린스 - 라쉬드 월러스 - 벤 월러스 - 리처드 해밀턴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2-4로 패한다.

5.14. 2004

39세가 된 레지 밀러는 올해가 마지막 해임을 밝힌다. 그러나 이미 동부 No.1 센터로 성장한 저메인 오닐과 리그 최고의 수비형 SF 론 아테스트 등이 버티고 있는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컨텐더 팀으로서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밀러가 우승을 노려볼 수 있는 마지막 좋은 기회. 그러나 시즌 초반에 론 아테스트의 관중 폭행 사건이 터지면서[29] 팀 주전 5명 중 3명(론 아테스트, 저메인 오닐, 스티븐 잭슨)이 출장정지를 당한다. 아테스트는 73경기(즉 시즌 전 경기), 오닐은 15경기, 잭슨은 30경기. 시즌 초반에 벌어진 일이라 그야말로 우승은 커녕 플레이오프 진출도 못할 판에 나머지 주전 2명인 틴슬리와 포스터는 부상까지 당한다. 릭 칼라일 감독은 10년 전에나 쓰던 39세의 노장 레지 밀러를 공격 1 옵션으로 쓰는 오래된 전술을 다시 꺼내 들었고, 레지 밀러는 인디애나에 다시 돌아온 데일 데이비스와 함께 망한 팀을 추스려 44승 38패의 성적으로 동부 컨퍼런스 6위를 기록, 팀을 플레이오프에 끌어 올린다.

이 시기의 레지 밀러는 평균 20득점을 기록하며, 3월 18일에는 코비 브라이언트의 레이커스를 상대로 39점을 넣는 등 전성기때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30]

그리고 인디애나 페이서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애틀란틱 디비전 1위팀 보스턴 셀틱스를 꺾었으나, 전년도에 만났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게 2승4패로 패해 2라운드에서 탈락한다. 특히 2004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69-67로 뒤지고 있는 와중에 동점을 만들 수 있던 역공 레이업이 번개처럼 달려온 테이션 프린스에게 블락당했고[31], 이후 리처드 해밀턴의 역공이 동점을 만듦으로써 결국 오버타임에서 쓰린 패배와 파이널 진출 좌절을 맛보고 말았다. 레지 밀러의 마지막 경기였던 2005년 5월 19일, 콘세코 필드하우스에서 열린 시리즈 6차전에서 그는 4-8 3점 슛을 포함 11-16 필드골을 넣으며 27점을 기록한다. 승부가 결정되고 경기 종료 15초가 남은 상황에서 레지 밀러는 교체되어 벤치로 들어갔고, 디트로이트 감독이자 전 인디애나 감독이었던 래리 브라운은 추가 타임아웃을 불러 레지 밀러의 명예로운 은퇴를 기념할 수 있도록 했다. 당시 홈관중들, 동료, 코치, 상대팀 디트로이트 선수들 모두 퇴장하는 전설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격려를 보내주었으며,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밀러 본인이 얘기한 "사회 초년생이 한 가정의 가장이 되기까지의 농구인생"이 마무리 되었다.


그의 마지막 경기에서 관중들은 모두 기립, 'Thank you Reggie'라고 써 있는 노란색 플래카드를 치켜들었고 코트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제히 박수를 보냈으며 많은 인디애나 팬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순간을 NBA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레지 밀러가 전성기에 활약하던 당시에는 그를 폄하하거나 싫어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대부분 존경 모드로 바뀌었다는 것을 보면 사람에게 끝맺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90년대에 밀러라면 치를 떨었던 숙적 중의 숙적, 스파이크 리와 뉴욕 닉스 관중들은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뉴욕닉스와의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밀러에게 일제히 박수를 보내며 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훈훈한 광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넷플릭스에서 메타 월드 피스와 디트로이트 홈구장 대난동 사건이 '말하지 못한 이야기'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의 한 편으로 제작되었다. 밀러의 분량은 많지는 않으나 은퇴하는 순간까지 페이서스의 왕이었던 그의 현역 시절 마지막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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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곳에서 태어난 또 다른 스포츠 스타 중에서는 본즈 부자가 있다. [2] 여담으로 이날 밀러는 자신의 경기에서 40점을 넣고 좋아하는 중이었다. 아버지와 같이 차를 타고 집에 가던중 아버지가 "너 몇 점이나 넣었니?" 라고 물어서 자신있게 "40점이요" 라고 말했는데 아버지가 웃더니, "누나는 몇 점이나 넣었게?" 라고 물은 뒤 그 점수가 공개되자 망연자실했다는 이야기를 직접 한 적이 있다. [3] 어린 시절이라 남녀 체격 차이가 크지 않고 셰릴 본인도 여자임에도 큰 체격에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고 있는데다 워낙 실력이 넘사벽이라 남녀할 것 없이 동네에서 다 쳐바르고 다녔다고 한다. 이를 이용해 원정을 다니며 소소한 사기를 치기도 했는데, 여자가 끼어 있다는 걸 보고 과소평가한 상대와 돈을 걸고 내기농구를 한 다음 상대를 박살내고는 돈을 싹쓸이해가곤 했다고. [4] 경기 전/후 레지와 인터뷰를 직접 진행하고 인터뷰 끝에는 꼭 레지에게 뽀뽀를 해줬다. [5] 그런데 정작 누나인 셰릴은 라이벌 USC를 다녔다. [6] 델라웨어 주 윌밍턴 출신. 청소년 시절 메릴랜드 주 이스턴의 모턴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오버룩 고등학교로 전학간 뒤 농구부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1961년 UCLA 진학 후 존 우든 감독의 지도 하에 게일 굿리치와 함께 1964년 NCAA 전국대회 때 결승전에서 듀크 대학교를 꺾고 첫 우승을 달성하여 왕조의 초석을 다졌다. 이에 따라 동년도 NBA 드래프트 때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테리토리얼 픽으로 뽑힌 후, 1974년 은퇴 시까지 10년 동안 6팀을 거쳤으며 1968년 올스타에 뽑혔다. 1972년에는 이슬람교로 개종해 '마흐디 압둘라만'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바 있고, 은퇴 후인 1977년 모교 UCLA에서 운동학 전공 후 1980년 콤프턴 커뮤니티 칼리지 감독을 시초로 1988년까지 챕맨 대학교, UCLA 등 총 3개교를 거쳤다. 이후 친정팀이던 LA 레이커스의 웨스트코스트 지역 스카우터, 특별고문 등을 맡다가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외부 활동을 피한 채 조용히 투병 생활을 해 왔고, 2011년에 건강이 더 악화되어 심장 수술 후 합병증으로 숨졌다. UCLA 측은 그의 등번호 42번을 영구 결번시켰으며, 슬하 4남 중 라시드(1976년생)는 조지 워싱턴 대학교 졸업 후 1998 NBA 드래프트에 신청했다가 탈락했으나 2000년 베니스 고등학교 감독으로 데뷔한 이래 LA 레이커스, 뉴욕 닉스 등지를 돌며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고, 2023 시즌에는 남아공 BAL 팀 케이프타운 타이거즈 감독을 맡았다. 또 다른 자식인 DJ 칼릴(본명 칼릴 압둘라만 해저드, 1973년생)은 힙합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7] 동시기에 활동했던 데틀레프 슈렘프와 같은 독일 출신 NBA 리거였다. [8] 여기엔 팬들의 고향 선수사랑도 있지만, 인디애나가 NBA 최악의 스몰마켓인데다 주변 환경도 별로라 일류 스타급 선수들이 뛰기를 꺼리는 프랜차이즈라서라는 사실이 숨어있다. [9] 그나마 알포드는 1991년 은퇴하자마자 NCAA 디비전 3 소속 맨체스터 대학교 감독을 시초로 지도자의 길을 택한 뒤, 아이오와 대학교, 뉴멕시코 대학교, UCLA, 네바다 대학교 리노 캠퍼스 등지를 거치며 중견 감독으로 명성을 쌓고 있다. [10] 래리 버드의 경우 역대 최고의 슈터 중 한명이지만 당시만 해도 스몰 포워드는 지금보다 훨씬 골밑에서 플레이하는 빈도수가 잦았다. 지금은 한 시즌에 삼점슛 백개를 성공시키는 빅맨도 자주 나오지만, 당시 버드는 한 시즌에 삼점슛 백개를 시도하지도 않은 적이 대부분이었다. [11] 하지만 레지 밀러보다 먼저 3점슈터로서 스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선수가 존재한다. 당시 시애틀 소속의 데일 엘리스로, 밀러의 데뷔 시즌에 nba 역사상 최초로 3점슛 100개 성공을 기록하며 시애틀 삼각편대 중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이듬해에는 47.8%라는 흠좀무한 3점 성공률로 마이클 조던, 칼 말론에 이은 평균득점 3위를 기록하며 올스타에 뽑히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12] 변명하닌 변명을 하자면 레지 밀러는 스티브 스미스와 함께 NBA Open Court에서 마이클 조던과 동부 지구에서 함께 뛰는 고충에 대해서 털어놨다. 뭘해도 조던을 밀어 낼 수 없기에 항상 올스타에서는 항상 두번째 가드 자리를 놓고 대여섯명이 경쟁해야 했고, 올 NBA도 조던자리는 넘사벽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를 나눠야 했다고 한다. [13] 다만 이렇게 보는것이 약간 궁색한 것이 밀러는 세컨드팀도 아닌 서드팀에 세번 선정되던 선수였다. 조던과 매직의 존재가 없더라도 끽해야 세컨팀이 한계였다는 것. 클러치 능력이 뛰어나서 임팩트가 강할뿐 애초에 MVP후보로도 꼽힌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가 커리어 내내 받은 MVP표는 3위표 세장 (98년 두장, 00시즌 한장)인데 세드릭 세발로스나 데럴 암스트롱같은 스타와 거리가 먼 선수들도 커리어 통틀어 한장 정도 받았다는 걸 생각하면 팬들의 인식과 실제 선수로서 위상이 약간 거리가 있는 선수. 사실 진짜 억울한 선수는 바로 클라이드 드렉슬러이다. 밀러는 사실 조던보다 세살이나 어리고 데뷔가 늦어 90년대 중반에 전성기를 맞은 선수지만, 조던보다 한살 많고 1년 선배인 드렉슬러의 커리어는 조던과 완벽히 겹친데다 매직까지 있었다. 드렉슬러는 기량이 80년대 중후반에 슬슬 전성기 레벨로 올라가던 선수인데 매직과 조던은 넘사벽이었다. 심지어 91시즌엔 팀을 리그 전체 1위로 올리고도 세컨팀에 그쳤으며, 30세가 되어서야 매직이 은퇴한 틈을 타 퍼스트팀에 올랐다. [14] 반대로 농구쪽 세이버매트리션들은 밀러를 과소평가의 대명사로 본다. 예를 들어 밀러는 3점 슛과 자유투 시도와 성공을 보정한 야투율인 True Shooting 퍼센트에서 NBA 역대 14위에 올라있는 고효율의 슈터이며, 이런 스탯분석을 통해 추정한 윈쉐어 모듈을 적용할 경우 공격 윈셰어는 역대 10위로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보다도 높은다. 다만 수비에서 많이 까먹는 편. [15] 정규 시즌 평균 득점은 앞서 말했듯 24.6점이 커리어 하이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27점, 29점, 31.3점, 31.5점 등의 평균 득점을 기록했다 [16] 2차 스탯으로 봐도 PER: 18.4 - 19.5, WS/48: 0.176 - 0.180, BPM: 3.5 - 5.0 모든 지표가 정규시즌 대비 상승한다. [17] 샌안토니오 감독 시절 데니스 로드맨에게 '쪼다'라고 까인 그 사람 맞다. [18] 그리고 스파이크 리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그 말을 한 뒤 레지는 자신의 거시기를 잡는데까지 가서 리가 아내한테 굉장히 민망해했다는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19] 그리고 레지는 그 경기에 총 39점을 넣었다. [20] 1위는 87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포인트 가드 슬리피 플로이드가 기록한 29점 [21] 하지만 티맥 타임보다 더 무서운게 티맥 타임은 정규시즌 경기고, 이건 플옵이라는 것. [22] 게다가 닉스는 당시 실점 리그 2위, 페이스 조정한 디펜스 레이팅으론 리그 1위인 리그 최강의 수비팀이었다. 물론 밀러가 세팅된 닉스 수비를 뚫은 건 아니라 기습적으로 3점 두개+자유투를 넣은 거긴 하지만 대단한 건 부인할 수가 없다. [23] 운명의 장난인지 전 시즌과 똑같은 구도로 7차전이 뉴욕에서 열렸으며, 마지막 몇초를 남겨두고 페이서스가 근소한 리드를 잡은것도 동일했으며, 닉스의 마지막 슛을 에이스 센터 패트릭 유잉이 한것도 똑같았다. 다만 차이는 94년에는 유잉이 스탁스가 놓친 골밑 슛을 풋백 덩크로 꽂아넣으며 역전에 성공해 극적으로 닉스가 승리를 거뒀으나, 95년에는 유잉이 특유의 큼직한 스텝을 밟고 레이업을 했으나 림을 돌아나오는 바람에 졌다는 것. 덩크 정도를 제외하면 레이업이 가장 성공률이 높은 슛이란 걸 감안하면 이 장면도 유잉의 수많은 불운를 상징한다고 할수 있다. [24] 승수 차이는 2승 차이였지만, 해당 팀의 평균득점과 실점을 기반으로 해서 계산한 예상 승수(Pythagorean Winning Percentage)는 98페이서스가 59승, 00 페이서스는 54승이었다. 물론 가비지 타임과 같은 컨퍼런스 라이벌들의 전력 등 여러 변수가 있으므로 백프로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참고용. 예상 승수 외에도 98시즌의 센트럴 디비전의 전력이 00시즌보다 더 강했기 때문에 00페이서스가 승수를 쌓기 더 유리한 상황이었다. 같은 디비전 팀들과 경기수가 더 많기 때문. 98시즌의 경우 절대강자 시카고 불스 외에도 전체 디비전 팀의 평균 승수가 44승이었으나, 00시즌에는 일단 시카고가 몰락했고, 토론토, 밀워키, 밀워키가 전력이 올랐으나 클리블랜드, 애틀란타가 전력이 내려가면서 평균승수는 38승으로 떨어졌다. 동부 전체적으로도 플레이오프 진출팀들의 평균 승수가 51.1승에서 48.1승으로 하락했다. [25] 사실 플레이오프에서 위력을 보면 00페이서스의 칼이 더 날카롭다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00페이서스는 노장들이 기량이 하락하고 젊은 선수들의 실력이 올라오면서 공격수치가 더 좋아진 것인데, 수비가 빡세지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로스터 전체적으로 공격력이 좋은 것보다 에이스급들의 싸움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다. 일례로 98시즌 당시 유타 재즈는 오펜스레이팅 1위/평균득점 3위인 강력한 공격팀이었고 불스는 오펜스레이팅 9위/평균득점 9위에 불과했지만 파이널에서 맞붙었을 때 에이스대결에서 불스가 완승하면서 공격수치가 더 높게 나왔다. 페이서스는 98년에 에이스 밀러의 기량이 더 뛰어났었고, 무엇보다 수비가 00스쿼드보다 더 강한 팀이었기에 플레이오프에서 살아남는데는 98스쿼드가 훨씬 유리했다. 만약 페이서스가 98파이널에 올라갔다면 재즈 입장에서는 빅맨 트리오, 특히 피지컬한 데이비스 형제를 상대해야하는 칼 말론보다는 비교적 수비가 약한 가드라인을 상대할 스탁턴-호너섹이 더 활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26] 실제 형제는 아니다. [27] 66년생 스미츠, 68년생 안토니오 데이비스, 69년생 데일 데이비스는 90년대 후반~00년대 초반에 기량이 절정이었으며, 실제로 이 부근에 나란히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스미츠는 98년, 데일 데이비스는 00년, 안토니오 데이비스는 01년. 안토니오와 데일은 출장시간을 나눠먹어야 했기에 올스타 선정이 늦었지만, 이 둘이 번갈아 나오던 시절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28] 다른 것은 몰라도 00레이커스를 상대하기엔 98년팀이 훨씬 유리했다. 골밑 수비력이 훨씬 더 강했으며, 이 팀의 약점은 빅라인업에 베테랑들이 주축이라 느리다는 것이었는데 레이커스는 하프코트 위주의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쓰는데다가 꽤 느린 팀이었다. 주전 PG 론 하퍼와 PF AC 그린은 둘 다 노장이었고, 글렌 라이스도 전성기가 살짝 지난 베테랑에 샤킬 오닐은 젊지만 워낙 거대해서 느린 편이었다. 즉 페이서스의 약점을 공략할 만한 무기가 전혀 없었다. [29] 이 사건으로 론 아테스트에게는 밀러의 은퇴 시즌을 망친 놈이라는 좋지 않은 수식어가 붙게 되었다. [30] 비슷한 시기 코비 브라이언트의 인터뷰를 보면 가장 막기 어려웠던 선수는? 이라는 질문에 '레지 밀러'라고 답한 적도 있다. [31] NBA 역대급 블락슛을 논할 때 꼭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