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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5:35:14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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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운데 우상단에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영어약자 LSO를 형상화한 로고가 보인다. 실황연주를 담은 자체 음반레이블의 로고이기도 하다.

1. 개요2. 연혁3. 역대 수석지휘자4. 특징5. 참고 자료

1. 개요

페터 막 지휘의 멘델스존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1960년 녹음)
영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이자, 세계적 기준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명문 악단. 영문 명칭 그대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또는 약칭으로 런던 심포니라고도 부른다.

영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며, 그라모폰지 등의 오케스트라 순위에서 5위 안밖에 드는 세계적으로도 훌륭한 악단이다. 그라모폰지의 자국 버프가 있지만, 기량으로는 세계 정상급 악단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영화음악 등[1]클래식 음악 이외의 영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그 대신 클래식 음악 부분에서는 오히려 런던 필, 필하모니아 등 런던의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전통이나 명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2]

2. 연혁

1904년에 창단되었는데, 아예 새로 결성된 것은 아니고 일종의 흑역사가 있었다. 런던에서 연주회 전문으로 활동하던 퀸즈 홀 관현악단이 모체였는데, 1903년 쯤부터 이 악단의 지휘자였던 헨리 우드(1869~1944)가 단원들한테 다른 악단에서 오브리 뛰거나 레슨 다니는 등의 과외 활동을 금지하는 등 다소 쫀쫀하게 군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이에 꼭지가 돈 50명 가량의 단원들이 단체로 퇴단해 독일 출신인 아돌프 보르스도르프(1854~1923), 토머스 버스비 등을 주축으로 새로운 악단을 따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다. 어찌 보면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슷한 케이스다.

다행히 산업혁명의 본산으로 당대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런던에 연고를 두고 있었던 덕분에 당대의 본좌 지휘자였던 한스 리히터[3]를 초대 상임지휘자로 초빙하면서 창단 초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1906년 리히터와 런던 심포니는 프랑스로 창단 후 첫 해외 연주 여행을 갔다오기도 했다.

1911년 리히터가 시력 악화로 지휘 활동을 접게 되었고, 리히터의 후임으로는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에드워드 엘가가 부임했지만, 전문 지휘자가 아니었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한 시즌을 지휘하고 결별하고 말았다.

당시 머니 파워에서는 어디에 안꿀리던 런던이었는지라, 세 번째 상임지휘자로 거장 아르투르 니키슈를 영입했다. 니키슈는 당시 유럽 최고의 명문 교향악단인 베를린 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니키슈가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도 맡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재임했기 때문이었다. 2년 동안 니키슈는 상임지휘자로서 해외순회 공연과 음반 활동을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에 그가 오래 재임했다면 악단의 역사가 달라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니키슈는 1912년에 악단을 이끌고 미국에 순회 공연을 가는 등 악단의 국내외 지명도를 한층 끌어올렸고[4], 이듬해에는 HMV(현 EMI)에 창단 후 첫 녹음을 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자동적으로 적성국 요인으로 분류되어 강판당했다.

1915년에 토머스 비첨이 급히 땜빵되었으나 악단과의 트러블로 오래지 않아 결별했다.

1919년에는 앨버트 코츠(1882~1953)가 제5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했고, 과거 적국이었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 관계가 개선되자 해당 국가들의 유명 지휘자를 객원으로 적극 초빙해 공연하기 시작했다. 코츠가 1922년에 사임한 뒤에는 한동안 상임지휘자 없이 활동했지만,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1930년에는 당대의 거장 지휘자 빌렘 멩겔베르크[5]가 상임지휘자에 취임했다. 그러나 대공황의 여파 때문인지 깐깐한 성격의 멩겔베르크와 트러블이 생겼던 것인지 일년만에 결별하고 말았다. 런던 심포니 역사를 통틀어도 상당한 네임드급의 지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멩겔베르크 측이나 런던 심포니 측 모두 거의 언급되지 않는 흑역사로 남아 있다.

1932년 영국인 해밀턴 하티(1879~1941)가 제6대 상임지휘자로 부임한 직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경제도 완전히 박살났고, 악단 운영에도 큰 타격이 가해졌다.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량 감원이 행해졌고, 하티도 1935년에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이후 거의 15년 가까이 상임지휘자 없는 긴 침체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나마 공연이나 녹음 수요는 아직 있어서 이 수입으로 간신히 버티는 상황이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심한 타격을 입었다.

종전 후인 1950년에 오스트리아의 명지휘자인 요제프 크립스[6]를 제7대 상임지휘자로 영입해 재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여전히 재정 문제로 순탄치 않았다. 당시 런던 심포니는 음반 녹음 계약을 거의 맺지 못했고 이에 다른 경쟁 오케스트라들에 비해 재정적으로 열악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런던의 다른 경쟁 오케스트라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는 EMI 전속 녹음 오케스트라였으며, 비첨이 이끌던 로열 필과 아드리안 볼트가 이끌던 런던 필 역시 EMI와 전속 계약을 맺고 많은 음반을 내고 있었다. 한편 당시 영국의 또다른 대형 음반사인 DECCA 빈 필과 전속 계약을 맺었고 오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녹음을 빈 필과 진행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였던 요제프 크립스는 DECCA 소속 지휘자였는데, 그는 데카에서 런던 심포니가 아닌 빈 필과 대부분의 녹음을 남겼다.(...) 크립스가 원래 빈 필에서 잔뼈가 굵은 지휘자였고, 크립스의 전문 분야였던 모차르트나 슈트라우스 왈츠는 빈 필이 특히 정통했던 레퍼토리였기 때문에 DECCA의 이러한 결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50년대 중반 영화 음악 녹음 문제로 단원들과 경영진 사이에 격한 불화가 생기며 오케스트라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경영진은 재정적인 이유로 영화 음악 녹음을 강행하려 했고, 다수의 단원들이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7]. 오케스트라가 격한 갈등 상황에 처하자 크립스는 1954년 미국의 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맡으면서 런던 심포니를 그만두게 되었다. 비록 서로 피치못할 사정으로 결별했지만 크립스와 런던 심포니는 이후에도 좋은 관계를 이어갔고, 악단이 정상화된 1960년대에 여러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영화 음악 녹음을 둘러싼 악단 내부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고, 경영진이 영화음악 녹음을 강행하자 1955년 결국 단원들이 대거 퇴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수석급 단원들이 거의 모두 퇴단했으며, 또 40대 이상 단원들도 대거 퇴단했다. 이에 런던 심포니는 젊은 단원들을 대거 충원하여 연균연령 30대의 젊은 오케스트라로 재탄생되었다.

이렇게 급격하게 물갈이되며 사실상 새로운 오케스트라로 창단된 것이나 다름없게된 런던 심포니는 이후 수년간 재정비의 기간을 거쳤다. 런던 심포니는 6년간이나 상임지휘자도 뽑지 못한 채 운영되었다. 당시 스테레오 녹음 기술이 실용화되면서 클래식 음반계는 최대의 호황기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당시 런던 심포니는 이처럼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클래식 분야 음반사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며 이 좋은 시절을 거의 날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대신 경영진이 의도했던 바대로 영화음악을 활발히 녹음하면서 악단의 재정이 탄탄해졌다. 이런 안정된 재정 상태는 60년대 재도약의 밑바탕이 되었다.

1960년 프랑스 출신의 노장 지휘자인 피에르 몽퇴[8]가 제8대 상임지휘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재도약이 시작되었다.[9] 몽퇴는 해외에서도 명망과 인지도를 갖고 있었기에 여러 음반사와 음반을 녹음하기도 했고, 1963년 첫 월드 투어를 떠나며 이후 해외 순회공연도 활성화되었다.

몽퇴가 서거한 후 1965년 헝가리 출신의 이슈트반 케르테스[10]가 부임했다. 케르테스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지휘자이며, 런던 소재 음반사 DECCA가 전폭적으로 그를 밀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젊은 신예였기 때문에 음악계에서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런던 심포니 측은 케르테스를 영입하여 DECCA와 활발한 음반 녹음을 기대했겠지만, 안타깝게도 DECCA는 자사와 전속계약을 맺은 빈 필의 세션에 케르테스를 주로 투입했기 때문에 런던 심포니와는 그다지 많은 녹음을 남기지 않았다. 케르테스는 실력 있는 지휘자임은 분명했으나 나이가 너무 젊은 편이어서인지 단원들이 무시하는 경향도 있는 등 악단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케르테스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었고 단원들과도 사이가 원만치 못했다는 점을 큰 문제점으로 여긴 경영진은 후임으로 화려한 언변과 친화력, 대중성, 쇼맨쉽을 겸비한 앙드레 프레빈[11]을 상임지휘자로 영입했다.(1968년) 앙드레 프레빈은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1년전인 1967년부터 BBC에서 방영된 '앙드레 프레빈의 음악의 밤(André Previn's Music Night)'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진행과 지휘를 맡으며 클래식 대중화로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런던 심포니는 그 프로그램에서 프레빈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로서 출연하고 있었다. 프레빈은 헐리우드에서 영화음악으로 명성을 쌓았지만 클래식 지휘자로는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런던 심포니를 맡기 전 프레빈의 지휘 경력은 휴스턴 심포니 상임지휘자로 1년 일한 것이 전부였다. 프레빈이 상임지휘자로 취임하여 두세 시즌이 지나자 경영진은 이번에는 프레빈의 음악성에 한계를 느꼈다. 당시 이웃의 경쟁 악단인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는 오토 클렘페러,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등 쟁쟁한 거장들을 내세워서 큰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으나 프레빈으로는 이에 대항하여 런던의 클래식팬들을 끌어모으기엔 너무나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마침내 경영진은 프레빈을 중도에 경질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레빈은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프레빈은 계약서상에 명시된 자신의 임기 보장을 요구하며, 단원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지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경영진은 그를 경질하려는 것을 포기했고, 그는 계약서상의 임기를 모두 채웠다. 덕분에 프레빈은 런던 심포니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재임한 지휘자가 되었고, 임기를 마치고 계관지휘자가 되었다. 쇼맨쉽과 화려한 언변을 지녔던 프레빈은 BBC 방송 프로그램에 런던 심포니와 함께 출연하기도 했다. 다만 프레빈의 대중적 명성과는 별도로 클래식 지휘자로서의 평판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음반을 녹음하지는 못했다.

런던 심포니 경영진은 프레빈을 경질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음악성 있는 거장 지휘자들을 객원지휘자로 초빙하는데 많은 노력과 자금을 투입했다. 런던 심포니는 뉴욕 필을 그만두고 유럽으로 진출한 레너드 번스타인을 객원 지휘자로 초빙했다. 런던 심포니 이사진은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넘어온 번스타인이 런던 심포니를 이끌기를 기대했지만, 번스타인은 곧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래도 런던 심포니와 번스타인은 좋은 관계를 이어갔고, 1987년 악단은 번스타인을 악단 회장(President)로 추대하기도 했다.

만년에 고향인 영국으로 돌아온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도 70년대 런던 심포니의 주요 객원 지휘자가 되었다. 60년대 후반 런던으로 돌아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주로 활동하던 스토코프스키는 70년대에는 런던 심포니와 주로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9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스토코프스키는 70년대 런던 심포니에서 가장 많은 녹음을 남긴 지휘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75년에는 독일의 거장 지휘자 오이겐 요훔을 명예지휘자(Conductor Laureate)로 초빙하여 70년대 후반 런던 심포니의 주요 객원 지휘자가 되었다. 런던 심포니는 요훔의 소속 음반사인 EMI에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녹음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또 런던 심포니는 독일-오스트리아의 거장 칼 뵘을 객원지휘자로 초빙하기 위해 당시 다른 오케스트라들이 정상급 지휘자들에게 지불하던 개런티의 세 배 정도 되는 거액을 제시했다. 칼 뵘은 처음에 런던 심포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나 실제로 지휘해보고 나서 런던 심포니의 뛰어난 기량과 머니파워에 감탄하여 70년대 런던 심포니의 주요 객원지휘자가 되었다. 빈 필과 베를린 필하고만 녹음을 하던 칼 뵘은 최만년에 런던 심포니와도 몇 장의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런던 심포니는 악단을 지휘하던 또다른 거장인 스토코프스키가 서거한 후인 1977년 칼 뵘을 악단 회장(President)으로 추대했다.

또 같은 시기에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된 소련 출신의 명지휘자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가 런던 심포니의 주요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는 상임지휘자인 프레빈이 아닌 로제스트벤스키가 런던 심포니를 지휘하기도 했다.

또 상임지휘자 교체기인 1978년부터 서독에서 명성을 얻고 있던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객원지휘자로서 런던 심포니 포디움에 자주 오르기 시작했다. 1979년 새로운 상임지휘자가 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다른 오케스트라와의 활동으로 매우 바빠 런던 심포니를 자주 지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첼리비다케가 1980년 동아시아 투어를 이끌었다.

1979년 프레빈과 계약된 임기가 모두 끝나자 런던 심포니 경영진은 프레빈의 후임 지휘자로 당시 차세대 지휘자로 떠오르던 인물 중 한명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상임지휘자로 영입하였다. 그러나 아바도가 유명해짐에 따라 빈 필과 빈 국립가극장, 시카고 심포니, 라 스칼라 등 다른 악단과의 활동에 더 큰 신경을 쓰느라 런던 심포니와는 활동이 거의 뜸해지게 되었다. 단원들의 불만이 높았는데, 아바도가 다른 오케스트라와 활발하게 음반 녹음을 하면서 정작 런던 심포니와는 녹음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한 수석 단원은 아바도가 빈 필이나 시카고 심포니, 심지어 보스턴 심포니와도 녹음하는데, 런던 심포니와는 녹음을 안한다면서 언론에 불만을 노출하기도 했다.

단원들의 불만이 높아진 상황에서 아바도는 런던 심포니를 사임하려했지만, 오히려 경영진은 아바도에게 이름만 걸어놔도 좋으니 계속 상임지휘자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에 아바도는 런던 심포니의 상임을 몇년간 더 유지했다. 그러나 1988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차기 지휘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내심 시카고 심포니를 노리고 있던 아바도는 마침내 런던 심포니를 사임하고 말았다.

1988년 아바도의 후임으로 미국의 신예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지명되었다. 틸슨 토머스는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지만, 버팔로 필을 맡은 것이 유일한 경력일 정도로 당시에는 무명에 가까운 지휘자였다. 런던 심포니는 전임 아바도 시절 고충 때문인지 이번에는 명망있는 네임드 지휘자 대신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지휘자에게 악단을 맡기는 도박을 걸었다. 틸슨 토마스는 런던 심포니의 상임지휘자가 된 후 개인적인 성장을 이루어내면서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의 능력을 보였으나, 하지만 당시 카라얀, 번스타인이 잇달아 타계하며 40대의 젊은 지휘자들이 대거 뜨면서 세대 교체기에 있던 클래식 지휘계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전임 아바도가 다른 오케스트라와의 활동에 매진하느라 런던 심포니와의 활동에 매우 소홀했던 것과 달리 틸슨 토머스는 런던 심포니에 헌신했고 그덕분에 악명높은 런던에서도 그의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1995년 콜린 데이비스(1927~2013)가 상임지휘자에 부임했다. 데이비스는 해밀턴 하티 이후 실로 오랜만에 런던 심포니의 수장직에 오른 영국인이었다. 데이비스는 당시 영국 지휘계를 대표하는 원로 지휘자였으며, 60년대부터 대중적인 음악회인 BBC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국뽕에 찬 여러 음악들을 연주하며[12] 영국 대중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던 지휘자였다. 런던 심포니와 데이비스의 파트너쉽은 11년간이나 유지되어 악단의 역사에 한 장을 남겼으며, 2006년 퇴임한 후에도 2013년 타계할 때까지 악단의 회장 직책을 맡으면서 객원지휘자로 주기적으로 악단을 지휘했다. 다만 데이비스가 런던 심포니를 맡은 후 클래식 음반계가 불황에 빠지게 되면서 음반 녹음이 여의치 않게 되었고, 때문에 자체 레이블을 설립하는 등의 자구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데이비스의 후임으로는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2007년에 부임해 2015년까지 8년간 수석지휘자로서 악단을 맡았다. 이후 게르기에프는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맡으며 런던 심포니를 떠났다.

2년간 공백 후 2017년 9월 사이먼 래틀이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다가 2022/2023년 시즌까지 런던 심포니를 이끌고 떠나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2024년 9월에 취임할 후임 수석지휘자는 잉글랜드 출신의 이탈리아계 영국인인 안토니오 파파노이다.

2012 런던 올림픽

스카이림 10주년 콘서트에서 사운드 트랙을 연주했으며 중간에 출시 예정인 Starfield(게임) 음악도 연주한 바 있다. #

2022년 이후로 HoYoverse의 게임 원신 수메르, 폰타인, 나타 지역 테마곡을 녹음했다.

3. 역대 수석지휘자

4. 특징

영국 오케스트라 중에서 기량면에서 가장 탑으로 꼽히며, 런던 빅5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전체적인 합주력 외에 개별 단원들의 연주 실력도 상당히 출중한 편으로, 특히 수석급 연주자들은 영국 최고의 명인들이라 할만한 인물들이다. 제임스 골웨이( 플루트), 배리 터크웰( 호른), 모리스 머피( 트럼펫), 게르바스 드 페이어( 클라리넷), 오시안 엘리스( 하프) 등의 주자들은 독주자 혹은 실내악 연주자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명성과 전통 때문에 단원들의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 편으로 유명하다.

유럽 오케스트라 중에서는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별로 받지 않고 거의 자생적으로 명문 교향악단으로 성장한 흔치 않은 경우에 속한다. 역사가 짧지 않은 편이기에 재정난과 전쟁크리 등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었지만,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며 압도적인 인구수를 자랑하는 대도시 런던에 기반한 덕분에 전반적으로 재정적으로는 풍요로운 편이었다.

그럼에도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악단 전용의 콘서트홀이 없어서, 뛰쳐나온 퀸즈 홀이라든가 로열 앨버트 홀, 로열 페스티벌 홀 등 이곳저곳에서 셋방살이를 해야 했다. 그나마 1982년 준공되어 입주한 바비컨 센터도 음향이 이게 뭐냐고 까이기 바빴고, 수 차례의 개보수 공사를 거쳐 21세기에 와서야 그럭저럭 괜찮은 공연장이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2017년에 부임한 래틀이 계약 협상을 하면서 악단 전용 콘서트 홀 건립을 요구했기 때문에, 계약 조건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바비컨 센터를 떠나 새로 짓는 홀로 거점을 옮길 것으로 보인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탓에 녹음 의뢰가 꽤 많이 들어오는 편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실력과 명성에 비해서 의외로 음반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 편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 음반계의 3대 메이커 중 EMI DECCA가 영국 런던에 본사가 있는 회사이지만 런던 심포니와 녹음이 별로 없다.

몽퇴가 수석으로 부임한 후에는 네덜란드에서 갓 설립한 신생 음반사인 필립스에서 최신 기술이었던 스테레오로 녹음한 양질의 음반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 즈음 해서 객원 지휘자로 출연하던 안탈 도라티가 소속 음반사인 머큐리에서 당시 최고의 스테레오 기술 중 하나였던 리빙 프레젠스 시리즈로 음반을 내놓기도 했다.

필립스 외에도 데카, 도이체 그라모폰, EMI, 컬럼비아(현 소니BMG 계열의 소니 클래시컬) 등등 별의별 크고 작은 음반사들에 이름을 남겼는데, 다만 21세기 들어 음반 산업이 침체기에 들어서며 녹음이 줄어들고 있다. 2000년 부터는 아예 악단에서 자체적으로 'LSO Live' 라는 음반사를 창립해 공연 실황 녹음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있다. 음반 뿐 아니라 해당 음원들을 아이튠즈 아마존닷컴 등에 유료 다운로드로 판매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영국의 악단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악단 중에서도 현대 기술에 꽤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재정적인 문제와 관련해서인지[13]2차대전 후에는 영화음악 쪽에서도 많이 작업하고 있다. 다른 유명 오케스트라가 영화음악 같은 일을 꺼렸기 때문에 주요한 영화음악 녹음시장의 상당지분을 런던 심포니가 차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스탭 롤에도 오리지널 스코어를 연주한 악단으로 꽤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존 윌리엄스의 지휘 아래 스타워즈 OST를 녹음한 것을 비롯해 여러 헐리우드 영화나 미국 주요 방송사의 대작 드라마의 연주를 담당했다. 《 기동전사 건담 SEED》와 《 기동전사 건담 SEED DESTINY》의 OST를 기반으로 작곡가인 사하시 토시히코가 개편한 두 앨범의 교향조곡(교향 모음곡)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다. 대중음악 쪽에서도 활발한 녹음 작업을 했다. 비틀즈 딥 퍼플, 마이클 잭슨 같은 록 음악이나 뮤지션들과도 협연하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김동률의 솔로 앨범 2집 희망 ~ 디지털 싱글 동화에 기용되었다. 요즘도 이렇게 대중음악 쪽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게 흔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무척 이례적인 경우로 여겨졌다.

영화음악이나 대중음악에 적극적인 런던 심포니의 경영 정책은 지휘자의 선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헐리우드의 영화음악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앙드레 프레빈을 상임지휘자로 선임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선임 당시 프레빈의 직업지휘자로서의 경력은 1년에 불과했다.

이처럼 영화음악이나 대중음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에 런던의 오케스트라들 가운데서 재정으로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또 이를 통해 악단의 기량을 계속 최고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14]. 그러나 대중음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대가로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실력에 비해 과소평가받는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실제로 런던 심포니가 클래식 분야에서 남긴 명연주는 악단의 명성에 비해 크게 부족한 편이다.[15]

1966년에는 악단 부속 합창단으로 런던 심포니 합창단(London Symphony Chorus)이 창단되었고, 합창단 단독 공연 외에 교향악단과 거의 전속으로 협연하고 있다.

5. 참고 자료


[1] 특히 존 윌리엄스와 궁합이 좋아서 스타워즈 인디아나 존스등의 OST 연주로 유명하다. 특히 스타워즈 시리즈의 OST는 전적으로 이 악단이 맡고 있어서 팬덤에서는 스타워즈 교향악단으로 알고있을 정도. [2] 아래에 서술되어있지만 런던 필, 로열 필 모두 다양한 분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평가가 절하되는 이유는 같은 시기에 나온 음반들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교했을 때 잘 알려진 음반들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영국 유명 지휘자들이 녹음한 영국 고전음악 녹음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녹음이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녹음보다 적다. [3] 리하르트 바그너의 수제자로 빈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를 20년 가까이 했다. 리히터는 런던 심포니를 맡기 이전에 다소 비정기적인 활동을 했던 빈 필을 정상궤도로 올려 놓은 인물이다. 빈 필의 자리를 그만둔 후에는 좋은 페이를 제시했던 런던에서 자주 활동하다가 아예 런던 심포니 상임지휘자를 맡게 되었다. [4] 그런데 하필이면 이 공연 때문에 악단 전체가 수장될 뻔하기도 했다. 바로 그 유명한 타이타닉으로 이동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도 예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올림픽호로 바꾼 덕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5] Josef Willem Mengelberg, 1871년 3월 28일 ~ 1951년 3월 21일/ 네덜란드 출신 [6] Josef Krips, 1902년 4월 8일 ~ 1974년 10월 13일 [7] 이게 당시 시대상으로도 사실 어쩔 수 없는게 고전 문화권에서 대중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은 과거 한국에서 연예인들을 일컬어 ‘딴따라’라 부르며 천시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일종의 계급의식 비슷한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명맥을 이어져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 작곡가들의 작품과는 달리 대중의 인기에 영합해 제작되어지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그다지 환영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한때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자신의 공연을 거부한 예술의 전당을 비난했던 싸이의 사연도 있을만큼 고전 문화의 대중문화 천대는 악명 높았었다. [8] Pierre Monteux, 1875년 4월 4일 ~ 1964년 7월 1일 [9] 이 때부터 2010년 현재까지는 거의 공백 상태가 없이 상임지휘자 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10] Istvan Kertesz. 1929년 8월 28일 ~ 1973년 4월 16일 / 1973년 이스라엘에 휴가와서 헤엄을 즐기다가 익사했다... [11] André Previn, 1929년 4월 6일 ~ 2019년 2월 28일 / 프레빈은 베를린 출신 유태인이지만 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에 남아있던 반독일 정서를 우려해서 독일 출신임을 숨기기 위해서 성을 Priwin에서 Previn으로 고쳤고, 이름도 Andreas Ludwig라는 독일식 대신 프랑스식으로 했다. [12] 영국과 인연이 있는 작곡가들의 곡을 대거 선정했고, 심지어 헨델의 유명한 곡들을 영국 국가와 이어붙여 연주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 대중들은 이에 열광했다. [13]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이라는 장르 한정상 수요가 제한되어 있는데다 그야말로 ‘부자들이나 노년들을 위한 음악’이란 취향을 타다보니 소비층도 극한된다는 약점을 상쇄하기가 힘들다. 그러다보니 일부 영세한 악단들은 전문 분야인 클래식 외에도 영화 OST나 최근에는 게임에서도 작품성을 높이기 위해 삽입하는 OST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의뢰를 받아 연주하는 추세가 많아지고 있다. 전통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겠지만 악단 유지와 단원들의 생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보니 현실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14] 오늘날 영화는 영상 뿐 아니라 청각적인 면에서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바, OST는 그 영화를 대표하는 위상을 차지해가는 중이다. 한마디로 영화의 아이덴티티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최고의 영화 음악은 팬들의 기억속에 오래 남는다. 그러므로 이를 연주하는 악단들의 기량 역시 높아야 함은 물론이다. [15] 그래도 명반들이 없는 것은 아닌데 프레빈과 정경화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아바도의 비제 관현악곡, 콜린 데이비스의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등은 그라모폰지 올해의 음반상까지 받았다. 이외에도 요제프 크립스와의 슈베르트 교향곡 9(1958/데카), 페터 막과의 멘델스존 교향곡 3'스코틀랜드'(1960/데카) 볼트와의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1970/EMI)도 대표적인 명반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