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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22:22:04

러스티 스타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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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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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8 No.10 No.30
<rowcolor=#ffffff> 게리 카터 안드레 도슨 러스티 스타우브 팀 레인스
팀의 후신인 워싱턴 내셔널스의 영구결번은 여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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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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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안 휘트니 페이슨 케이시 스텡겔 길 호지스 조지 와이스 자니 머피
윌리엄 셰이 랄프 카이너 밥 머피 린지 넬슨 버드 해럴슨
러스티 스타우브 톰 시버 제리 쿠스먼 에드 크레인풀 클레온 존스
제리 그로티 터그 맥그로 무키 윌슨 키스 에르난데스 게리 카터
토미 에이지 프랭크 카센 드와이트 구든 데이비 존슨 대럴 스트로베리
존 프랑코 마이크 피아자 에드가르도 알폰소 론 달링 존 매틀랙
게리 코헨 하위 로즈 하워드 존슨 알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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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티 스타우브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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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67 MLB 올스타전 로고.gif 파일:1968 MLB 올스타전 로고.svg 파일:1969 MLB 올스타전 로고.gif 파일:1970 MLB 올스타전 로고.gif 파일:1971 MLB 올스타전 로고.gif 파일:1976 MLB 올스타전 로고.gif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
1967 1968 1969
1970 1971 1976

보유 기록
대타 연타석 최다 안타 8연타석[1]
단일 시즌 최다 대타 타점 25타점(1983년)[2]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애스트로스 등번호 10번
놈 라커
(1962)
러스티 스타우브
(1963~1968)
토미 데이비스
(1969~1970.6.21)
몬트리올 엑스포스 등번호 10번
창단 러스티 스타우브
(1969~1971)
짐 콕스
(1974~1976)
뉴욕 메츠 등번호 4번
론 스워보다
(1966~1970)
러스티 스타우브
(1972~1974)
브루스 보클레어
(1976~1979)
뉴욕 메츠 등번호 10번
더피 다이어
(1968~1974)
러스티 스타우브
(1975)
켄 헨더슨
(1978)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번호 10번
진 라몬트
(1974~1975)
러스티 스타우브
(1976~1979)
알 코웬스
(1980~1981)
몬트리올 엑스포스 등번호 6번
론 페얼리
(1969~1974)
러스티 스타우브
(1979)
크리스 스미스
(1981)
텍사스 레인저스 등번호 20번
밥 뱁콕
(1979~1980)
러스티 스타우브
(1980)
래리 콕스
(1981)
뉴욕 메츠 등번호 10번
켈빈 채프먼
(1979)
러스티 스타우브
(1981~1985)
데이브 마가단
(1989~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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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usty-Staub.jpg
<colbgcolor=#ab0003><colcolor=#ffffff> 워싱턴 내셔널스 No.10
대니얼 조셉 "러스티" 스타우브
Daniel Joseph "Rusty" Staub
출생 1944년 4월 1일
사망 2018년 3월 29일 (향년 73세)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출신지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신체 188cm / 86kg
포지션 우익수, 1루수, 지명타자
투타 우투좌타
프로 입단 1961년 아마추어 자유계약 ( HOU)
소속팀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애스트로스 (1963~1968)
몬트리올 엑스포스 (1969~1971)
뉴욕 메츠 (1972~1975)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1976~1979)
몬트리올 엑스포스 (1979)
텍사스 레인저스 (1980)
뉴욕 메츠 (1981~1985)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
3.1. 사망
4. 플레이 스타일5. 이모저모6. 연도별 기록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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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야구 선수. 선수 시절에는 주로 코너 외야수(대부분 우익수로 출장), 1루수, 지명타자로 활약했다.

몬트리올 엑스포스창단 멤버이자, 창단 초기 거의 유일한 스타로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그 이후에 뛰었던 뉴욕 메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등 다른 팀들에서도 전성기를 구가하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타자였다. 한 팀에서는 아예 영구결번되었고, 다른 팀에서도 구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별명은 Le Grand Orange(위대한 오렌지)로, 현역 시절 머리 색깔이 오렌지 빛이 도는 적발이어서 붙여졌다.[3] 그런데 미국인인 스타우브에게 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된 별명이 붙었는가 하면, 이 별명이 생겼던 시기는 몬트리올 엑스포스 초기 시절로, 구단의 연고지가 프랑스어권인 캐나다 퀘벡 몬트리올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의 출신지가 한때 프랑스령이었던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이기도 하고...

통산 성적은 23시즌 .279/.362/.431, OPS 0.793, 순장타율 .152, BB/K 1.41, wRC+ 122, 2716안타 292홈런 1466타점 47도루. 1이 넘어가는 BB/K에서 알 수 있듯 뛰어난 선구안을 가졌던 타자였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1944년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에서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야구선수 출신이었던 아버지 레이 스타우브(Ray Staub)[4]의 영향으로 3살 즈음부터 야구배트를 쥐고 집안의 각종 사물들을 맞히며(!) 놀았다고 한다.

이후 그는 성장하면서 형 척 스타우브(Chuck Staub)와 함께 제슈잇 고등학교(Jesuit High School)에 진학해 주로 중견수로 활약했고, 팀이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휩쓰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런 스타우브의 맹활약이 메이저 리그 각 구단의 귀에 들어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아마추어 자유계약 기간을 앞두고 16개 팀이 그에게 입단 제안을 할 정도[5]였다. 심지어 보스턴 레드삭스는 스타우브의 영입을 위해 그에게 무려 테드 윌리엄스(!!!)를 보내 설득하려 했을 정도니... 이는 당시 아직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가 도입되기 전이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든 선수는 자유롭게 계약을 할 수 있는 신분으로 풀리고 구단들은 그런 선수들과 계약 가능 기한 내에 어떻게든 접촉하여 잘 꾀어내면(?) 바로 계약을 맺을 수 있는 형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온 구단의 관심 속에 스타우브는 이제 막 창단한 신생팀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와 입단 계약을 맺으며 메이저리그에 입문한다.

2.2. 휴스턴 콜트 포티파이브즈 -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절

파일:Rusty Staub Astros.jpg
입단 첫 해에는 아무래도 신인이었던 만큼 바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지는 못했고, 대신 B리그[6]에서 시즌을 보내며 기량을 점검했는데 여기서 타율 .293에 149안타, 23홈런 93타점 OPS 0.913이라는 호성적을 기록, 마이너 리그에서는 더 보여줄 것이 없다며 무력시위를 한다.

이런 활약에 고무된 콜트 포티파이브즈는 1963년 시즌을 앞두고 입단 2년차 신인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서 선발 4번 타자 우익수로 내보내며 그에 대한 기대감을 여실히 드러냈고, 비록 팀은 패배했으나 스타우브는 경기에서 3타수 1안타 1타점 1볼넷으로 나름 좋은 모습을 보이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너무 기대가 크면 부담도 큰 법인지, 이후 그는 빅리그 투수들의 공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으며 5월 중순부터 부진의 늪에 빠졌고, 6월 초 데뷔 첫 홈런[7]을 포함 2경기 연속 홈런을 터뜨리며 살아나나 싶더니 이내 다시 슬럼프가 찾아왔고, 이 슬럼프가 시즌 끝까지 이어지며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게 시즌을 마무리했다. 최종 성적은 .224/.309/.308에 6홈런, 45타점으로 기대치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고, 주전 우익수 자리 또한 시즌 중에 다른 선수에게 넘기고 1루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8] 이듬해에 맞이한 2년차 시즌(1964년)에서도 스타우브의 부진은 이어졌고, 오히려 첫 해보다 더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며 7월에 마이너 리그 트리플 A로 강등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타격 부진도 부진이었지만, 6월 23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7회에 혼자 2개의 포구 실책을 범하며 결승점을 내주는 등 수비에서도 구멍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 결정적이었다.[9] 주전 1루수 자리도 당연히 다른 선수의 몫이었다. 그나마 트리플 A에서 자신감을 되찾은 뒤 메이저로 복귀한 뒤로는 16경기에서 타율 .271에 4홈런 8타점을 기록하며 약간이나마 나아진 모습을 보였지만, 최종 성적은 지난해(1963년)와 별 다를 바 없었다. (.216/.272/.346 8홈런 35타점) 사람들은 점차 그에 대한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콜트 포티파이브즈가 홈구장을 애스트로돔으로 옮기고 팀 이름을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바꾼 1965년에는 포지션을 다시 1루수에서 우익수로 바꾸는 등 부진 탈출을 위해 안간힘을 써봤지만, 개막 후 4월 한 달간 타율 .114라는 끔찍한 성적을 거두며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나마 5~6월을 거치며 타율을 .216까지 끌어올리긴 했지만 여전히 주전으로서는 낙제감인 성적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을 때 왔다. 전반기 마지막 뉴욕 메츠와의 2연전에서 도합 5안타를 쳐 내며 감을 잡은 스타우브는 7월 타율 .406의 호성적으로 정상궤도에 올라섰고, 이후 8월부터 시즌 마무리까지 .276의 타율에 8홈런 29타점을 추가하며 시즌 최종 성적을 .256/.339/.412에 14홈런, 63타점으로 마무리, 반등의 가능성을 보여줬다.[10] 다음 해인 1966년에는 팀 사정상 좌익수 우익수 자리를 오가면서도 .280/.345/.412에 13홈런 81타점으로 준수한 모습을 보이며 지역 기자들로부터 팀 내 자체 MVP로 뽑히는 등 명실상부한 주전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렇게 맞이한 1967년에는 드디어 스타우브다운 모습으로 자신의 포텐셜을 터뜨린다. 타율 .333(리그 5위)의 고감도 타격에 리그에서 가장 많은 44개의 2루타를 쳐내며 비슷한 시기에 포텐이 터진 지미 윈과 함께 애스트로스의 중심 타자로 거듭난 것. 올스타전에도 감독 추천으로 출장했고, MVP 투표에서도 16위에 오르는 등 전성기를 연다. 이듬해(1968년)에는 사타구니 부상이 겹쳐 1루와 외야를 왔다갔다한 탓에 전반적인 타격 지표들이 대부분 하락(시즌 성적 .291/.373/.387 6홈런 72타점)[11]했지만, 이 시즌의 투고타저는 역대 최악급이었기에[12] wRC+는 127로 좋은 편이었다. 올스타전에도 2년 연속 출장.

이렇게 갑자기 환골탈태급으로 포텐셜이 터지게 된 이유로는, 스타우브 본인이 밝히길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이 가장 컸다고 한다. 초년병 시절까지만 해도 '나 홈런 타자야'라는 마인드로 타석에 임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장타를 의식하며 폼이 무너졌는데, 그 마음가짐을 버리고 오히려 '난 홈런을 치려고 들어온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타석에 들어섰더니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13] 마음가짐 하나 바꿨다고 성적이 180도 바뀌는 걸 보면 확실히 야잘잘이다. 거기다 1965년부터 쓰게 된 새 홈구장 애스트로돔이 홈런을 치기 최악의 조건이었던 것도 타격 접근법을 바꾸는 데에 한 몫 했다. 아무튼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포텐이 터지며 애스트로스의 차기 스타로 자리 잡는 듯 했다.

하지만 애스트로스에서의 생활은 더 이상 오래 가지 못했다. 1968년 시즌 중 그래디 해튼 감독이 해임된 뒤 새로 감독이 된 해리 워커[14]는 타격코치 시절 자신의 조언을 구하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타격폼을 바꿔보는 등 문제를 혼자 해결하길 좋아했던 스타우브를 탐탁지 않아 했고, 구단 수뇌부에도 홈런 타자를 기대했더니 똑딱질만 일삼는[15] 스타우브에 대한 투자가 실패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그렇게 언제 저 골칫덩이를 팀에서 내보낼까 구단이 고심하던 찰나, 리그가 24개 팀으로 확장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는 곧 새 선수들을 필요로 하는 팀이 늘어난다는 것과 일맥상통. 안 그래도 스타우브를 못 내보내 안달이던 애스트로스 프런트와 워커 감독은 '옳거니' 싶어 바로 영업(...)에 나섰고, 이는 마침 영입 전문가들을 데리고 전력 보강에 박차를 가하던 최초의 캐나다 연고 야구팀 몬트리올 엑스포스에게 포착돼 스타우브의 트레이드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2.3. 몬트리올 엑스포스 1기 시절

파일:Rusty Staub Expos 1st.jpg
결국 1969년 1월 22일, 헤수스 알루[16] 돈 클렌데논을 대가로 스타우브를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보내는 트레이드가 결정되었다. 문제는 애스트로스로 팀을 옮기게 된 돈 클렌데논이 ' 인종차별주의자 감독(=해리 워커) 밑에서는 못 뛰겠다'[17]며 그의 밑에서 뛰느니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차라리 일반 회사에서 일하겠다며 은퇴를 선언한 것. 당연히 리그는 발칵 뒤집혀 사무국까지 나섰고, 스타우브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트레이드 거부 파동은 개막 직전까지 질질 끌다가 결국 시즌 개막일인 4월 8일에 클렌데논 대신 다른 선수 두 명과 현금 10만 달러를 엑스포스가 애스트로스 측에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겨우 종지부를 찍는다. 여담으로 거부의 당사자였던 클렌데논은 다시 엑스포스로 복귀해 2달여를 뛰다가 시즌 중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됐고, 그 해 월드 시리즈에서 3홈런을 기록하는 미친 활약으로 월드 시리즈 MVP에 올라버린다! 거기다 이후 스타우브가 보여준 활약까지 생각하면 여러모로 애스트로스에겐 상처만 남은 트레이드.[18]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엑스포스 유니폼을 입게 된 스타우브는 자신의 영입이 돈 낭비였다는 애스트로스 프런트의 판단을 완벽하게 빗나가게 만드는 맹활약을 펼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일단 자기를 고깝게 보던 감독과 프런트에게서 벗어났고, 극강의 투수 친화 구장이었던 애스트로돔을 떠난 데다, 프랑스 문화의 색채가 짙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 출신이었기에 비슷한 느낌의 도시였던 몬트리올에서의 적응도 전혀 문제없이 끝마친 스타우브는 심리적 안정감을 얻어 시즌 초반부터 맹타를 휘두른다. 비록 팀은 신생팀이라는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연일 패배를 거듭했지만, 그만은 엑스포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며 타선을 이끌었다. 특히 1969년 6월 8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원정경기에서 길었던 엑스포스의 20연패를 끊어내는 선제 2점 홈런과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는 슈퍼 캐치는 그를 일약 몬트리올의 슈퍼스타로 만들었다.[19] 당연히 올스타전에도 감독 추천 선수로 또 한 번 선발됐고, 올스타전 이후로도 그의 방망이는 식지 않고 더욱 불타올랐다. 시즌 최종 성적은 .302/.426/.526에 29홈런 79타점, fWAR 6.1이라는 리그에서도 손꼽힐만한 활약[20]을 보여주며 홈런도 못 치는 똑딱이라던 애스트로스 프런트에 보기 좋게 어퍼컷을 날린다.[21] 이듬해에는 비록 비율 스탯은 대부분 하락(.274/.394/.497)했으나 커리어 처음이자 유일한 30홈런을 날리며 지난해의 홈런 기록이 플루크가 아니었음을 증명했고, 역시 커리어 유일의 두 자릿수 도루(12개)도 기록하며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볐다. 1971년에는 장타는 다시 평년보다 약간 나은 수준으로 줄었으나(19홈런) 3할 타율을 회복(.311), 여기에 엑스포스에서의 최다 타점인 97타점을 기록하며 MVP 투표 19위에 오르는 등 중심 타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줬다. 3년 내내 올스타에 뽑힌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22]

이런 스타우브의 엑스포스에서의 활약은 그라운드 안에서만 그치지 않아서, 비시즌에 엑스포스를 알리기 위해 캐나다 각지를 돌아다니며 홍보 활동을 했고, 영 엑스포스 클럽(Young Expos Club)[23] 등 구단의 주요 행사들과 캐나다 내 유수의 기업들이 제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물론 당시 엑스포스에서 이런 대외 활동들에 내세울 만한 스타가 스타우브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지만... 이런 스타우브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는지 창단 첫 해(1969년) 25,000명이었던 영 엑스포스 클럽 회원은 이듬해(1970년) 75,000명, 그 다음해(1971년)에는 150,000명까지 늘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팬들 보기 예쁜 짓만 골라하는 복덩이가 엑스포스에 사실상 공짜로 굴러들어온[24] 셈이다.

하지만 다 좋았던 그에게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역시나 엑스포스의 약한 전력. 스타우브가 있던 3년간(1969~1971) 엑스포스의 승률은 .321/.451/.441로 빈말로라도 좋다고 하기 어려운 성적이었다. 구단 수뇌부는 엑스포스가 더 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큰 움직임(=대형 트레이드)이 필요하다고 생각, 팀에서 그나마 가치 있는 선수였던 스타우브를 트레이드 매물로 내놓아 전력 보강을 꾀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를 놓치지 않은 뉴욕 메츠와의 협상이 급진전됐고, 1972년 4월 5일 내야수 팀 폴리와 외야수 마이크 조르겐슨, 켄 싱글턴을 상대로 메츠로 트레이드된다.[25]

2.4. 뉴욕 메츠 1기 시절

파일:Rusty Staub Mets 1st.jpg
정들었던 제2의 고향을 떠나 뉴욕이라는 대도시에서 맞게 된 1972년은 스타우브에게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 초 2주 정도의 경기가 취소됐고, 팀의 감독이었던 길 호지스는 스타우브가 이적해오기 사흘 전인 4월 2일에 동맥발작으로 47세의 나이에 급사하며 팀 분위기는 어수선함의 끝을 달렸다. 상황이 이랬다보니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고, 스타우브 본인도 6월 3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의 투구를 손에 맞고도 2주 정도를 더 나오다가 결국 골절상 판정을 받고 시즌을 3달이나 날려먹는 등 제대로 꼬여버렸다. 그나마 팀은 요기 베라 감독의 지휘 아래 분위기를 추스르며 시즌 83승 73패를 기록, 스타우브에게 생애 첫 5할 승률 이상을 기록한 시즌을 선물해 줬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26]

제대로 공쳤던 1972년을 뒤로 하며 1973년에는 다시 좋은 성적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스타우브였지만, 시즌 초반 1할대의 타율에서 허덕이면서 헤메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5월 11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서 또 몸에 맞는 공을 얻어맞으며 부상 악령에 시달렸다.[27]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이 몸에 맞는 공 이후로 집나갔던 타격감이 돌아오며 어느 정도 예년의 모습을 되찾았다. 비록 시즌을 다 마친 후의 성적은 기대치에 비해 다소 평범해(.279/.361/.421 15홈런 76타점) 보였지만, 원체 물타선이었던[28] 메츠에 이 정도 성적을 거둬주는 타자면 감지덕지인 수준이었다. 팀도 8월 초까지 48승 60패로 몰려 있다가 마지막 53경기에서 34승 19패를 기록하는 어마어마한 뒷심을 발휘해 지구 2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1경기 반 차이로 NL 동부지구 우승을 거두며 포스트시즌에 진출한다. 메이저 커리어를 시작한지 10년 만에 첫 포스트시즌에 올라간 스타우브는 '빅 레드 머신' 신시내티 레즈와의 NLCS에서 3안타에 그쳤으나, 그 3안타를 모두 홈런으로 연결시키며 영양 만점의 활약을 펼쳤고, 수비에서도 시리즈 4차전 연장 11회 위기 상황에서 역전타가 될 뻔한 타구를 건져내며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멋진 수비를 보여줬다. 하지만 팀은 다음 이닝 역전당하며 4차전을 패했고, 설상가상으로 그 타구를 잡아낸 뒤 펜스에 오른쪽 어깨를 강하게 부딪히는 바람에 어깨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5차전에서는 결장해야 했다. 다행히 메츠는 5차전을 이기며 3승 2패[29]로 간신히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부상 정도가 워낙 심해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도 대타로만 1타석 나왔고, 2차전부터는 선발 라인업에 복귀했으나 정상적인 송구가 어려울 정도[30]였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스타우브는 월드 시리즈에서 홈런 1개 포함 11안타에 타율 .423의 맹타를 휘두르며 우승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드러냈지만,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패하며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스타우브의 처음이자 유일한 포스트시즌 경력의 끝.

이어진 1974년에는 메츠 이적 이후 처음으로 부상 없이 시즌을 완주하지만, 이전 시즌에 당한 어깨 부상의 후유증 탓인지 타율이 .258까지 떨어지며 약간 부진[31]했다. 더구나 그의 나이가 30대에 접어듦에 따라 슬슬 노쇠화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지만, 다음 해(1975년) 스타우브는 그러한 우려들을 불식시키며 커리어 첫 100타점 및 당시 기준으로 메츠 구단 역사상 최다 타점(105타점)을 기록[32]하는 등 건재함을 알린다.

하지만 메츠 구단은 당시 팀 내 에이스였던 'The Franchise' 톰 시버에 버금가는 고액 연봉자였던 스타우브를 감당하기엔 재정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고, 더 젊은 선수들로 팀을 꾸리는 것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그를 트레이드하려고 했다. 이내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속 링크가 뜨면서 유망주 더그 데신세이[33]를 대가로 하는 트레이드가 성사 직전까지 갔지만, 갑자기 메츠의 구단주가 딜을 파토내면서[34] 최종적으로 스타우브는 1975년 12월 12일 부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트레이드 대가는 미키 롤리치 빌리 볼드윈.[35] 그런데 이 과정에서 미키 롤리치가 트레이드 거부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애스트로스 시절에 이어 또(...) 딜이 연기될 뻔했으나, 이번에는 속전속결로 일이 해결되며 그대로 트레이드가 진행됐다.

2.5.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시절

파일:Rusty Staub Tigers.jpg
난생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에 발을 디딘 스타우브는 이적 첫 해(1976년) 간만에 전 경기 출장을 기록하면서 타율 .299에 15홈런 96타점으로 타이거스에서도 여전히 중심 타자로 활약했고, 이 해 올스타전에도 5년 만에 복귀, 그것도 생애 첫 올스타전 선발 출장이라는 쾌거를 이룩하며[36]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열어젖힌다. 이듬해(1977년)부터는 그동안 그를 괴롭혀 왔던 어깨 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예 전업 지명타자로 포지션을 변경, 2년 연속 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며 방망이는 아직 죽지 않았음을 각인시킨다. 특히 1978년에는 무려 121타점[37]을 기록하며 MVP 투표 5위에까지 올랐고,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지명타자 상까지 수상하며 리그 최고의 지명타자로서 이름을 날린다.

하지만 1979년에는 시즌 시작 전부터 계약 문제로 구단과 마찰을 빚으며 스프링캠프에서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개막 후 한 달이 지나서야 첫 출장을 했고, 어느새 35세에 다다른 그의 나이 탓에 노쇠화의 영향을 직격으로 맞으며 .236/.331/.402의 커리어 최악 급의 스탯을 찍는다. 그는 또 다시 구단의 골칫거리로 전락했고, 열이 제대로 받은 타이거스 구단 측은 시즌 중반인 7월 20일 그를 현금 트레이드로 다른 팀으로 보내게 되는데...

2.6. 몬트리올 엑스포스 2기 시절

파일:Rusty Staub Expos 2nd.jpg
스타우브가 옮기게 된 팀은 다름 아닌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였다. 당시 엑스포스는 대타 요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던 터라 때마침 시장에 나온 그를 놓치지 않은 것. 당연히 엑스포스 팬들은 난리가 났고, 7월 27일 열린 스타우브의 복귀전에는 스타드 올랭피크에 59,000명이 넘는 구름관중이 몰려들어 그가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을 때 5분간 기립박수를 보내며 8년 만에 돌아온 원년의 스타를 환영해주었다. 스타우브 또한 내셔널 리그 팀이라 수비를 나와야 한다는 디버프 속에서도 타이거스 때보다 나은 성적을 찍으며 대타 요원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8년 전의 엑스포스와 1979년의 엑스포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8년 전의 엑스포스는 전형적인 약체 팀에 스타우브 아니면 팀이 굴러가지 않을 정도였지만, 1979년의 엑스포스는 어느덧 지구 2위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강팀이 되어 있었고, 스타우브는 그저 팀의 대타 요원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는 곧 그의 효용성이 엑스포스에서는 이미 약발을 다했다는 의미였고, 1980년 시즌 개막 전 텍사스 레인저스로 트레이드되며 짧았던 금의환향의 시간을 마치게 된다.

2.7.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파일:Rusty Staub Rangers.jpg
아메리칸 리그로 돌아온 스타우브는 다시 지명타자 역할을 맡으며[38] 비록 규정타석 미달이었지만 1971년 이후 9년 만에 3할 타율에 복귀(.301)했고, OPS도 1976년 이후 5년 만에 0.8을 넘기며 약간 회춘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36세에 달했고, 언제 다시 에이징 커브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그에게 레인저스 구단은 굳이 로스터 한 자리를 할애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스타우브는 자유계약 선수로 풀리며 레인저스와의 인연을 끝낸다.

2.8. 뉴욕 메츠 2기 시절

파일:Rusty Staub Mets 2nd.jpg
이렇게 쓸쓸히 은퇴하는 듯 했던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왕년의 동반자였던 뉴욕 메츠였다. 비록 나이가 나이였으니만큼 그의 자리는 대타 요원이나 백업 1루수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특히 1981년에는 비록 타석수는 적었지만 .317/.398/.466이라는 전성기 못지않은 슬래시라인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1983년에는 8연타석 대타 안타에 대타로만 나와서 25타점을 기록하는 등 이색적인 기록들도 남겼다. 또한 나이가 40대에 접어든 1984~1985년에도 홈런을 때려내며 타이 콥에 이어 두 번째로 메이저 리그에서 10대와 40대에 걸쳐 홈런을 기록한 선수가 되기도 했다.[39]

하지만 점점 불어나는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는지 출장 시간은 갈수록 줄어들어 갔고, 1985년 10월 6일 경기에서 대타로 출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길었던 23년의 선수 생활을 끝마쳤다.[40]

3. 은퇴 후

파일:Rusty Staub Broadcaster.jpg
은퇴 후에도 스타우브는 레스토랑 경영, 자선 사업, 방송 등 각종 분야에서 활약하며 현역 시절 못지않게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은퇴 직후인 1986년 메츠의 홈경기 라디오+TV 중계를 담당하는 해설자로서 방송 일을 시작해 10년 동안 이어갔고, 같은 해 메츠 구단 자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외에도 메츠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 친선 앰배서더로도 활동했고,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 동문 협회의 부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3년에는 그의 전성기를 함께했던 몬트리올 엑스포스가 그의 등번호 10번을 영구결번하겠다[41]고 발표,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기도 했다. 다만 2005년 엑스포스가 워싱턴 D.C.로 연고지를 이전해 워싱턴 내셔널스가 된 이후 잠시 영구결번이 해제되었다가 2011년에야 다시 지정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42]

한편 1991년엔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자 자격을 얻었으나 한 번도 두 자릿수 득표율을 넘기지 못하며 계속 후보자로만 남아있다 결국 1997년에 3.8%(18표)의 득표율로 7년차에 탈락했다. 23시즌이나 뛴 덕에 누적 기록은 나쁘지 않은 편이지만 수상 실적이 올스타 6번 외에는 전무하고, 한 팀에서 진득하게 뛴 적이 없어 특정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라는 이미지도 희미했던 데다 누적 기록도 명예의 전당에 확실하게 들어가기엔 약간씩 모자라다는 점이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그나마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될 수 있는 선수로는 꾸준히 언급되고 있는 중.

2006년에는 Mascot Books라는 출판사와 협력, 'Hello, Mr. Met'라는 아동용 책을 펴내기도 했다.

3.1. 사망

2018년 3월 29일, 플로리다 주 웨스트팜비치에서 향년 73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사인은 다발성 장기 부전. 이미 2015년 아일랜드를 방문했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심장마비로 한 번 쓰러진 전력이 있었는데, 그때는 수술 후 어찌 잘 회복해 그 해 디비전 시리즈[43]에서 시구를 할 정도로 괜찮았으나 이후 상태가 다시 안 좋아졌다고 한다.

4. 플레이 스타일

뉴욕 메츠 시절 타격 영상. 1973년 월드 시리즈 4차전에서 홈런을 기록하는 모습이다.
타자로서의 스타우브는 매 시즌 30개 전후의 2루타에 10개 후반대의 홈런, 0.8에 가까운 OPS를 기록해줄 수 있는 전형적인 중장거리 유형의 타자였다. 다만 대부분의 중장거리 유형의 타자들과는 달리 삼진을 굉장히 적게 당하고(통산 K% 7.9%)[44] 볼넷을 많이 골라나가는(통산 BB% 11.2%) 선구안이 좋은 선수라 대부분의 시즌에서 타율과 출루율의 차이는 8푼 이상을 유지했다. 거기다 아메리칸 리그에서 뛰던 시기를 제외하면 홈구장들이 죄다 투수 친화 구장이었던데다[45] 활동 기간도 1960년대~1970년대의 투고타저 시대를 관통하는지라 장타력도 중장거리포라고 결론짓기에는 차고 넘칠 정도였다. 가는 팀마다 팀 내 홈런 3걸 안에는 꼭 들어갔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는 사실 애스트로스 시절 만들어진 타격 어프로치가 홈런을 노리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알게 모르게 꽤 꾸준한 타자이기도 한데, 이래봬도 메이저리그 4개의 팀[46]에서 모두 통산 500안타 이상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다. 만일 프런트의 삽질로 인한 트레이드 없이 한 팀에서 좀 진득하게 뛰면서 이런 성적을 기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선수.

하지만 발은 그닥 빠르지 못해서 통산 병살타 순위 12위(297개)에 이름을 올리고[47] 있고, 수비도 데뷔 시즌인 1963년에 1루수임에도 10개의 실책을 범하는 등 평균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그나마 외야 전향 후로는 슈퍼 캐치도 간간이 나오는 등 약간 나아지나 싶더니 1973년 포스트시즌에서 어깨 부상을 당해버리며 송구 능력이 급격히 저하, 결국 지명타자로 전환하게 된다. 여러 모로 KBO 리그 김기태와 유사한 점이 많다. 볼넷이 삼진보다 많은, 선구안 좋은 중장거리 유형의 좌타자에 전성기가 투고타저 시대를 관통하고, 수비력이 똑같이 헬(...)이었던데다 트레이드로 팀을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는 점 등. 다만, 김기태는 리그 홈런왕과 타격왕을 차지한 적이 있을 정도로 리그 지배력이 있었다는 점이 차이다.

5. 이모저모


파일:Rusty Staub with Wine.jpg

6. 연도별 기록

파일:MLB 로고.svg 러스티 스타우브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63 HOU 150 585 115 17 4 6 43 45 0 59 58 .224 .309 .308 .617 0.5 0.6
1964 89 320 63 10 2 8 26 35 1 21 31 .216 .272 .346 .618 -0.4 -0.5
1965 131 470 105 20 1 14 43 63 3 52 57 .256 .339 .412 .751 1.6 1.6
1966 153 628 155 28 3 13 60 81 2 58 61 .280 .345 .412 .756 2.7 3.6
1967 149 621 182 44 1 10 71 74 0 60 47 .333 .398 .473 .871 4.7 5.1
1968 161 682 172 37 1 6 54 72 2 73 57 .291 .373 .387 .761 3.4 3.2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69 MON 158 673 166 26 5 29 89 79 3 110 61 .302 .426 .526 .952 6.1 6.2
1970 160 699 156 23 7 30 98 94 12 112 93 .274 .394 .497 .891 5.9 6.3
1971 162 690 186 34 6 19 94 97 9 74 42 .311 .392 .482 .874 5.7 6.0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2 NYM 66 278 70 11 0 9 32 38 0 31 13 .293 .372 .452 .824 0.8 0.7
1973 152 666 163 36 1 15 77 76 1 74 52 .279 .361 .421 .781 2.6 2.1
1974 151 649 145 22 2 19 65 78 2 77 39 .258 .347 .406 .754 0.8 0.1
1975 155 670 162 30 4 19 93 105 2 77 55 .282 .371 .448 .818 3.1 3.0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6 DET 161 690 176 28 3 15 73 96 3 83 49 .299 .386 .433 .818 2.6 2.9
1977 158 695 173 34 3 22 84 101 1 59 47 .278 .336 .448 .784 1.4 0.9
1978 162 734 175 30 1 24 75 121 3 76 35 .273 .347 .435 .782 2.1 1.5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79 DET/ MON 106 389 81 15 1 12 41 54 1 46 28 .244 .340 .404 .744 0.4 0.3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0 TEX 109 388 102 23 2 9 42 55 1 39 18 .300 .370 .459 .828 1.9 1.3
<rowcolor=#fff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1 NYM 70 186 51 9 0 5 9 21 1 22 12 .317 .398 .466 .864 1.3 1.0
1982 112 250 53 9 0 3 11 27 0 24 10 .242 .309 .324 .633 0.0 -0.6
1983 104 132 34 6 0 3 5 28 0 14 10 .296 .371 .426 .797 0.5 0.5
1984 78 79 19 4 0 1 2 18 0 4 9 .264 .291 .361 .652 -0.1 -0.2
1985 54 55 12 3 0 1 2 8 0 10 4 .267 .400 .400 .800 0.3 0.3
MLB 통산
(23시즌)
2951 11229 2716 499 47 292 1189 1466 47 1255 888 .279 .362 .431 .793 47.9 45.8

7. 관련 문서


[1] 1983년 6월 11일~1983년 6월 26일. 1958년 데이브 필리(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동률. [2] 1943년 조 크로닌( 보스턴 레드삭스), 1958년 제리 린치( 신시내티 레즈)와 동률. [3] 그의 애칭으로 잘 알려진 'Rusty'도 '녹슨, 녹빛의'라는 뜻이 있는 단어임을 생각하면 (녹은 주황빛에 가까우므로) 꽤 적절한 별명이다. [4] 포지션은 포수였다고 한다. 선수 생활을 끝낸 후 교사로 일하다가 스타우브를 낳았다. [5] 당시 팀이 양 리그를 합해 20개였으니 거의 모든 구단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6] 지금의 싱글 A 전신 격 즈음 되는 리그로, 경제적 문제와 선수 수급 부족 등을 이유로 1963년부터 비슷한 수준의 C리그와 합쳐져 싱글 A로 통합됐다. [7] 당시 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레전드 돈 드라이스데일. [8] 다만 이쪽은 기존의 1루 주전이었던 피트 러널스가 노쇠화로 스타우브보다 더한 부진을 겪었던 것이 컸다. [9] 트리플 A로 내려가서는 또 좋은 성적을 찍으며 전형적인 AAAA리거의 모습을 보였다(트리플 A 성적 .314/.427/.646 20홈런 45타점). 물론 스타우브가 뛰었던 PCL(Pacific Coast League)이 전형적인 타고투저 리그라는 점은 감안해야겠지만. [10] 7월부터의 성적만 따지면 슬래시라인은 .296/.369/.495로 당시의 투고타저 애스트로돔의 투수 친화 구장 성향을 생각하면 굉장히 좋았다. [11] 사실 이 시즌에도 전반기까지 타율 .317로 순항했으나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 부진에 빠져 성적이 떨어졌다. [12] 아메리칸 리그는 3할 타자가 칼 야스트렘스키 단 1명(그마저도 3할 턱걸이(.301)), 내셔널 리그 피트 로즈, 펠리페&마티 알루 형제, 알렉스 존슨 4명뿐이었고, 양 리그에 ERA 1~2점대 투수가 문자 그대로 넘쳐났다. 밥 깁슨의 전설적인 ERA 1.12 시즌도 바로 이 해. [13] 사실 이런 타격 어프로치의 변화가 타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꽤 크다.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前 내야수 김동주는 현역 시절 다른 구장을 썼다면 홈런을 노리는 스윙을 곧잘 했겠지만 자신의 홈구장인 잠실 야구장이 넓은 구장이다 보니 타격 어프로치를 홈런을 위한 타격과는 다르게 가져갔다고 밝힌 바 있다. [14] 선수 시절 정교한 타격을 자랑하며 1947년 .363의 고타율로 타격왕 자리에 오르는 등 '타격의 달인(Guru)'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 재키 로빈슨의 출전에 항의해 리그 파업을 주도하려고 했다는 의혹을 사는 등(워커 본인은 부인)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냐는 주홍글씨도 남아있다. [15] 물론 이는 지금에 와서 보면 완벽한 오판이다. 스타우브는 홈런 타자는 아니더라도 홈 구장의 특성을 일찍이 파악, 자신의 타격 스타일을 중장거리 타자로 바꿀 정도로 여전히 천재성이 있는 타자였고, 성적 또한 홈런은 비교적 많지 않아도 많은 2루타를 생산한 덕에 적어도 똑딱이라고 폄하될 타자는 아니었다. 자기네 홈구장이 무식하게 넓은 건 생각 안 했나보다 [16] 펠리페 알루 몬트리올 엑스포스 감독의 동생이자 모이세스 알루, 멜 로하스의 삼촌으로 잘 알려져 있다. [17] 아예 헛소리라고 치부하기도 그랬던 것이, 클렌데논은 해리 워커가 피츠버그 파이리츠 감독을 역임하던 시절(1965~1967) 주전 선수로 뛰고 있었다. 선수 시절 재키 로빈슨과 관련한 의혹도 그렇고 밑에서 뭔가 보고 들은 것이 있으니 클렌데논이 저러지 않았겠느냐는 반응이 중론. 거기다 애스트로스에서 그를 경험해 봤던 조 모건도 훗날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팀의 흑인 선수들이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른다고 여겼다'라며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폭로하기까지 했으니... [18] 뭐 애스트로스도 헤수스 알루와 클렌데논의 대체자로 합류한 잭 빌링햄을 잘 써먹긴 했지만, 다른 둘이 보여준 임팩트에 비하면... [19] 이 경기 이후 그의 별명인 'Le Grand Orange'가 처음 등장했다. [20] wRC+는 무려 167에 달했다. 또한 그 해 리그 평균 출루율이 .319였음을 감안하면 그의 출루율 .426도 엄청난 기록인 셈. [21] 거기다 엑스포스의 홈구장이었던 파르크 자리(Parc Jarry)는 그라운드 크기만 놓고 보면 양쪽 폴대까지 103m, 중앙 담장까지 128m(!)라는 애스트로돔 뺨칠 정도의 크기를 자랑했다. [22] 다만 3번 다 감독 추천 선수로 나갔고, 1971년에는 뽑히긴 했으나 출전하지는 못했다. [23] KBO 리그로 치면 각 구단의 어린이 회원 즈음 되는 단체라고 생각하면 쉽다. [24] 트레이드 대가였던 알루와 클렌데논은 1968년 시즌 후 진행된 신생팀 특별 드래프트에서 뽑았던 선수들이라 한 번 제대로 써먹지도 않았다! [25] 스타우브는 트레이드 당일 소식을 듣고 몬트리올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엉엉 울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스타우브와 엑스포스 팬들 사이의 유대는 끈끈했다. [26] 그동안 뛰었던 팀이 신생팀이었다 보니 좋은 승률을 기록하는 게 어려웠던 상황이긴 했다. [27] 다행히 1972년처럼 큰 부상은 아니었기에 경기 출장에는 그리 지장이 없었다. [28] 이건 홈구장이었던 셰이 스타디움이 손꼽히는 투수 친화 구장이었던 것도 컸다. [29] 당시에는 챔피언십 시리즈가 5판 3선승제였다. [30] 어깨 위로 팔을 올릴 수가 없어 언더핸드로만 송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31] 그래도 이 시즌에 메츠 이적 후 최다 홈런인 19홈런을 때렸고, 타점 또한 78타점으로 팀 내에서 최다 홈런/타점을 기록한 타자였다. 메츠가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물타선 집합소였는지를 다시 한 번 알려주는 대목. [32] 이 기록은 1990년 '메츠의 신성' 대럴 스트로베리가 108타점으로 경신한다. [33] 나중에 실버 슬러거도 타 보고 20홈런 시즌도 5번 기록하는 등 나름대로 메이저에서 활약하게 되는 타자지만, 이 때에는 아직 메이저 통산 72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한 햇병아리 3년차 유망주에 불과했다. [34] 스타우브를 유망주와 바꾸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고 한다. 프런트도 이런 구단주의 성향을 알고는 있었는지 협상을 진행하면서도 절대로 구단주에게 알리지 않았다(...). 어차피 최종 결재 받으려면 구단주 사인이 나야 하는데 부질없는 짓 아닌가 [35] 이 때 스타우브와 함께 한 명의 선수가 추가되어 함께 타이거스로 건너간다. [36] 다만 이것이 그의 마지막 올스타전이 되었다. [37] 물론 스타우브 본인이 잘 친 것도 있지만, 이 타점에는 항상 스타우브 앞에서 출루해 밥상을 차려주던 론 르플로어- 루 휘태커 듀오가 포진한 테이블 세터진의 역할이 컸다. [38] 다만 타이거스 시절처럼 전업 지명타자는 아니었고 1루 및 외야 수비도 이따금씩 봤다. [39] 이후 게리 셰필드,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이 기록을 달성한다. 둘 다 약쟁이다 [40] 현역 마지막 경기는 공교롭게도 몬트리올 엑스포스와의 경기였다. [41] 이후 1997년에 엑스포스에서 같은 등번호(10번)를 달았던 팀 후배 안드레 도슨도 함께 영구결번됨에 따라 공동 영구결번이 되었다. [42] 지금도 말이 영구결번이지 이 등번호를 쓰고 있는 선수가 내셔널스에 있는 터라 제대로 복구됐다고 하기도 뭣하다. [43] 이 시리즈에서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뉴욕 메츠가 맞붙었다. [44] 당시 타자들의 K%이 14% 전후였으므로 꽤 낮은 수치였다. 1970년을 제외하면 단일 시즌에서 70개 이상의 삼진을 당한 적이 없고, 23시즌을 뛰었음에도 통산 삼진이 888개에 그친다. [45] 극단적으로 투수 친화적인 구장으로 악명 높았던 애스트로돔은 물론이고, 콜트 스타디움, 스타드 자리, 스타드 올랭피크, 셰이 스타디움, 타이거스 스타디움 역시 투수 친화적 구장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광활한 외야를 자랑한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옛 구장인 알링턴 스타디움 역시 쿠키커터형 구장으로 투타 공평한 구장이었다. [46] 휴스턴 애스트로스, 몬트리올 엑스포스, 뉴욕 메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47] 특히 1976~1977년에는 2년 연속 병살타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48] 프랑스어는 엑스포스의 연고지인 퀘벡 몬트리올의 공용어다. 이 때문에 엑스포스의 경기는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로도 중계돼 프랑스어권 야구의 소중한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49] 이곳에서는 매해 립(Rib, 갈비) 요리 먹기 대회를 개최했는데, 1981년의 우승자가 다름 아닌 브룩 실즈(!)였다고 한다. # [50] 10이라는 숫자는 그의 엑스포스 시절 등번호인 10번을 의미한다. [51] 다만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국가적 애도 기간을 선포하기도 했고, 애스트로스 구단도 이를 따라 6월 10일 경기를 치르지 않기로 하는 등 분위기가 대체적으로 추모 분위기였기에 생각보다 벌금을 크게 물지는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