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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15:00:19

딘 소장 구출 작전설

1. 개요2. 역사 왜곡의 시작과 국방부 역사기관의 부정(否定)3.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4.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4.1. 김재현 기관사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4.2. 장시경 신호원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5.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던 이유6. 역사 왜곡의 문제점 및 폐해7. 국가보훈부 등 정부기관의 조치8. 참고 자료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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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정체불명의 미군 결사대(특공대)와 함께 미군에서 실행한 적 없는 이른바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수행했다는 요지의 6.25 전쟁 관련 가장 어이없는 역사 왜곡 중 하나로 부연하자면 대전 전투에서 실종된 미 제24보병사단 사단장 ' 윌리엄 F. 딘' 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1950년 7월 19일( 김재현 기관사 등)과 20일(장시경 신호원 등) 두차례에 걸쳐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를 통해 30명의 미군 결사대(특공대)가 대전으로 투입되어 특수작전을 펼쳤다는 허위·과장 영웅담으로 국내 정부기관 주도의 대표적인 역사 왜곡 사례 중 하나이다.

한국철도공사 철도청 시절부터 호국철도의 상징으로 홍보하여 널리 알려진 이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흡사 전쟁 영화 시나리오 같은 화제성으로 말미암아 오랜 세월에 걸쳐 국가보훈부와 같은 정부기관과 언론사 등에 의해 '구출 작전'이 허위임을 단번에 판명할 수 있는 기관차의 대전 진입 시점, 미 제24보병사단의 대전 철수 시점, 딘 소장의 실종 시점 등 공식 전사(戰史)에 기록된 대전 전투의 사건 발생별 시간 순서 비교와 미군 결사대(특공대)원들의 소속과 신원 파악 등 기본적인 팩트체크 교차검증이 생략된 채 그대로 인용되고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구출 작전' # 등으로 무분별하게 확대·재생산되면서 정설처럼 굳어졌다.

그러나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은 작전에 참여했던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작전 목적에 대한 허위 증언에 기인한 역사 왜곡으로 진실은 딘 소장의 명령에 따라 7월 20일에 실행되었던 대전역 안의 대부분 탄약으로 구성된 보급품 적재 화차들을 미군 호송병들과 함께 후방으로 이송하는 이른바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한국철도공사가 주장하는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대전 전투에서 실행된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미군의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 및 대전 전투 당시 생산된 미 제24보병사단 자료 및 미국의 언론기사 등 1차사료에 기관차를 통해 투입된 미군 결사대(특공대)에 의한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미군의 대전 전투 공식 전사(戰史)와 미국 측 1차사료들은 국내에 잘못 알려진 이 작전을 딘 소장의 명령에 의하여 한국인 철도공무원들과 미군 호송병들이 함께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으며, 한국인 철도공무원 및 미군들의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후송에 실패하여 7월 21일 오전 8시 미 공군 보급품이 적재된 화차들을 폭격으로 파괴하여 북한군에 의한 노획을 방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덧붙여 이 대전역 화차 폭격은 AP 통신사를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어 'The Evening Star', 'The Daily Alaska Empire'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1950년 7월 21일자로 보도되었으며, 화차 폭격에 참여한 머스탱 전투기 조종사는 엄청난 탄약이 적재된 화차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화염을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행사의 상징인 화려한 불꽃놀이 광경에 비유하였다.
Capt. H. Moreland of Mobile, Ala., leader of the mission, said
"The train blew sky high, It was like the Fourth of July."
He said Taejon looked very still and deserted.

결론적으로 자신의 보급품 후송 명령에 의해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하는 기관차가 대전으로 진입했다고 기록한 딘 소장 회고록, 실제 기관차 탑승 미군 호송병인 스몰우드 하사(Staff Sergeant Elmo Smallwood)가 직접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했다고 진술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 등 이렇게 기관차 작전의 주역이었던 미군들의 자료와 미국 언론 자료들에서는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찾을 수 없으며 관련 미군들 조차 전혀 알지 못 하는데 이러한 작전을 자신들이 수행했다는 철도공무원들의 허위 증언으로 국내에서만 그들만의 '딘 소장 구출 작전'이라는 어이없는 역사 왜곡이 통용되어 왔던 것이다.

또한 이렇게 미국 측 사료들이 '딘 소장 구출 작전'을 부정하는 즉 철도공무원들의 기존 증언이 허위이고 한국철도공사가 이때까지 허위 공적으로 현양사업을 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한국철도공사의 위탁을 받아 국립대전현충원이 운영하고 있는 호국철도기념관에서는 대전 전투의 기관차 작전과 관련된 미국 측 사료들을 전시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다.

2. 역사 왜곡의 시작과 국방부 역사기관의 부정(否定)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의 시작은 6.25 전쟁 종전 후 교통부가 1953년 12월 24일 발간한 공식 역사서 '한국교통동란기'에서 김재현 기관사 공적(우군을 구출타가 항목, pp. 326~331)과 장시경 신호원 공적(포위망을 뚫고 항목, pp. 158~161)을 소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한국철도공사가 철도청 시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철도공무원들의 공적으로 소개하였으며 국가보훈부도 검증없이 받아들여 대대적인 현양사업이 진행되었고 미군 장성 구출 작전이라는 흡사 전쟁 영화 시나리오 같은 화제성 때문에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보도되면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실제로 실행된 작전이며 완벽하게 검증된 공적처럼 자리잡으며 확대·재생산되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물론 언론사에서도 모르고 있었지만 철도공무원들의 '딘 소장 구출 작전' 수행은 대한민국 국방부의 역사기관들이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전사(戰史)로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1979년 발간한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한국전쟁사 제2권 지연작전기 (p. 536)의 대전 전투 연구 항목에서 국내와 미국 측 자료를 통해 작전 목적을 비교 분석한 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모두 이 열차작전의 목적이 딘 소장의 구출에 있다고 하였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며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와전이라고 못 박았으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2008년에 발간한 현재 시점에서 최신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라고 할 수 있는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 (pp. 161–162, 각주 p. 217)에서는 '대전역 보급품 후송 실패'라는 제목의 단락으로 기술하고 각주를 통해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다시 한번 명확히 기술하였다.
파일: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2008-6.25전쟁사-4권-p.217.jpg

특히 국방부 소속 전쟁기념관에서는 2020년에 발간했던 학예지 -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pp. 118–123)에서 기밀 해제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를 국내 최초로 입수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이론의 여지없이 입증하여 기술하였고, 작전 목적의 오해에 대해 각주를 통해 한번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1]
"당시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부여된 임무를 두고 거듭되는 오해를 별기한다. 당시 승무원인 현재영·황남호의 수기 증언을 비롯해 국내의 각종 문헌과 현양 행사에서는 당시의 철도 수송 임무를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대전 철수작전 당시 작성된 미 제24사단 정보처 보고서와 미 육군,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에서 각각 발행된 공간사, 딘 소장의 회고록 등에 따르면 이들의 임무는 대전역에 적재된 보급품을 영동역으로 철수시키는 것으로 딘 소장의 구조와는 무관한 임무였다.[24th Infantry Division G-2 Journal, Vol. 8, For the Period 191700K July to 221550K July 50 ; Appleman, Roy E.,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 ,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1992), 169쪽; Dean,William F. and Worden, William L., General Dean’s Story , the Viking Press(1954), 37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4: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2008, 161∼162쪽]"

현재도 국민신문고를 통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기념관 민원으로 대전 전투의 기관차 작전의 실체에 대해 질의하면 기관차를 통해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 작전'이 실행되었으며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은 이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했다는 공식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는데 한마디로 한국철도공사는 국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국방부의 전쟁사 연구 기관들이 부정(否定)하는 역사적 사실로 혈세를 들여 현양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3.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 제기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사실 조금만 자세히 조사해보면 역사 왜곡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데 대표적으로 작전 일시와 기관차 탑승 미군의 정체를 들 수 있겠다.

파일:General_Dean's_Kill.jpg

위의 사진은 7월 20일 시점 딘 소장이 직접 전차 특공조를 지휘하여 파괴한 북한군 전차 사진으로 미군의 대전 전투를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이다. 이런 명백한 증거사진뿐만 아니라 딘 소장의 정확한 실종 시점이 7월 20일 늦은 밤이라는 사실은 솔직히 조금만 조사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기본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 등 한국철도공사 관계자들은 7월 19일 시점 실종 상태인 딘 소장을 구출하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으로 투입되었다는 언론 기사( 매일건설신문 기획칼럼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철도역사 이야기 '제47화')를 작성하고 딘 소장이 실제 포로가 된 시점은 실종된 지 36일 후인 8월 25일인데 호국철도기념관에는 7월 19일 시점 북한군에 포로가 된 딘 소장을 구출하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에 투입되었다고 전시물 설명문에 기재하는 등 기초적인 대전 전투 전사(戰史)도 확인 안 하고 역사 왜곡을 자행하였다.

파일:김재현기관사-호국철도기념관.png

그리고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진실이었다면 '딘 소장 구출 작전'의 작전 명령권자, 작전 계획서 등 상세한 관련 자료와 이 구출 작전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30명의 미군 결사대원의 소속과 신원 등이 미군의 대전 전투 전사(戰史)와 미 제24보병사단 자료에 자세히 남아 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

국내에서는 1953년 12월에 발간된 교통부 공식 역사서 '한국교통동란기'와 1983년 7월에 작성된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자필 경위서에서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의 정체를 '미군 결사대'로 명명하고 총원 30명, 전사자 29명이라고 기록하였지만, 후대에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특수작전처럼 과장하기 위해 소속은 '미군 특공대', '미군 특전단' #, '미 해병 특수부대' # #[2] 등으로 확대ㆍ 재생산되었고 병력과 전사자 기록도 한국인 철도공무원 3명과 합산 과정에서 혼돈을 일으켜 총원 33명, 전사자 32명으로 와전되었던 기록만 찾을 수 있을뿐 전후 70여년이 지났지만 소속과 신원 등 밝혀진 구체적인 기록이 전무하다.

그리고 실제로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실행되었고 29명에서 32명의 미군 결사대원이 전사한 것이 진실이었다면 이 미군들에게는 비록 작전에는 실패했더라도 죽음을 각오하고 상관을 구하기 위한 희생정신과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 명예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이 추서되고 미국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영웅 대우를 받았을 것이며, 미군 역사에 있어서도 비록 실패했지만 영웅적인 특수작전 사례로 기록되어 엄청나게 많은 관련 자료가 남아있었을 것이다.

실례로 1970년 베트남 전쟁에서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가 손타이 포로수용소의 포로 구출 작전( Operation Ivory Coast)을 실행했었는데 비록 미군 포로들이 작전 실행일 이전에 다른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어 실패하였지만 이 작전을 수행한 미 육군 특수작전부대원들에게는 은성훈장 등 각종 무공훈장 등이 수여되었다.

덧붙여 딘 소장 역시 29명에서 32명의 미군 결사대원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전사한 것이 진실이었다면 전사한 부하 장병들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을 표시했을텐데 회고록 등 어떠한 자료에서도 이런 기록을 찾을 수 없으며 딘 소장이 전역식에서 언급한 부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운전병이었던 조 린튼(Joe Lynton) 병장과 대전 전투에서 자신의 보급품 후송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한 수송장교 레이몬드 D. 햇필드(Raymond Davidson Hatfield) 대위였다.

참고로 딘 소장이 낙오하여 본대를 찾아가던 중 8월 20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에서 농부 박종구의 집에서 대략 3일간 머물며 닭죽 등 후한 대접을 받고 대구로 향하였는데 # 주한미군 공군으로 근무한 딘 소장의 아들이 1963년 박종구에게 감사인사차 방문했다는 일화가 있으며(조선일보 기사에는 방문시기가 1961년으로 보도되었지만 1963년이 정확하다) # # 이렇게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진실이었다면 딘 소장이 1981년 작고하기 전까지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에게도 감사함을 여러 번 표시하고도 남았을텐데 딘 소장은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에게 감사함을 표시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위와같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기념관 국방부 역사기관들로부터 공식적으로 부정 당하고 전쟁 역사 전문가들로부터 신빙성이 거의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2021년 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인 임재근 박사가 기밀 해제된 미 제24보병사단 각종 보고서 등을 근거자료로 삼아 작전 일시, 작전 목적, 기관차 탑승 미군의 정체, 기관차 모델 번호를 재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였고 2021년 8월 오마이뉴스 기사(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사실이 아니었다)를 통해 이 재조사 결과가 보도되었고 배은선 철도박물관장이 자신의 한국 철도 역사 저서 '기차가 온다' (2022년 개정판)에 인용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024년 6월 중앙일보 기사( '딘 소장 구출작전' 아니었다…6·25 그날, 기관사 죽음의 진실)를 통해 다시 한번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4. 작전의 실체와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7월 19일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미군 결사대원 30명과 함께 소위 '1차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실행하였고 이 작전이 실패하자 7월 20일 장시경 신호원 등이 미군 결사대원 20명과 함께 2차 딘 소장 구출 작전을 수행하였다는 '딘 소장 구출 작전설'은 미국과 대한민국 국방부의 6.25 전쟁 사료 등을 통해 교차 검증을 해보면 '보급품 후송 작전'의 오해 및 와전으로서 잘못 알려진 사실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으며 상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 김재현 기관사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자세한 내용은 김재현 기관사 문서의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문단을 참고하십시오.

(1) 작전목적: 딘 소장 구출 => 보급품 후송
(2) 탑승 미군 정체: 미군 결사대(특공대) 30명에서 29명 전사 => 미 제24 보병사단 병참부대 소속 일반 호송병 6명으로 사상자 없음
(3) 작전일(김재현 기관사 순직일): 7월 19일 => 7월 20일
(4) 투입 기관차 모델번호: 미카3-129호 => 미카3-219호
(5) 옥천역 복귀시 기관차 운전자: 황남호 부기관사 => 호송병 미군 스몰우드 하사(Staff Sergeant Elmo Smallwood)

4.2. 장시경 신호원 등이 참여한 작전에서 잘못 알려졌던 사실들

1950년 7월 20일 장시경 신호원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기관사 2명 그리고 미군 결사대원 20명이 참여했다는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사료들은 1953년 발간 공식 역사서 '한국교통동란기'(항목명: 포위망을 뚫고, pp. 158~161)와 장시경 신호원의 인터뷰를 담은 1979년 동아일보 기사 정도로 극소수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장시경 신호원 역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작전과 동일하게 대전역 안의 대부분 탄약으로 구성된 보급품 적재 화차의 후방 이송 작전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한국교통동란기'에서는 "딘 소장 이하 다수의 장병 및 군수물자를 구출키 위하여",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딘 소장이 대전에서 철수하지 못 했으니 신호조작을 위해 구출대원 20명과 함께 대전으로 가달라는 요청을 받고", "실탄적재화차 7량을 연결" 이런 증언 내용에 비추어 장시경 신호원 역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그래도 실제 작전 목적이었던 '보급품 후송'과 관련된 부분도 어느 정도 기억을 하고 있다.

장시경 신호원이 수행한 작전의 목적은 7월 20일에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로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미군 호송병 6명이 탑승하여 또다른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 작전에서도 기관차 운행 도중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한 미국 신문 기사를 통해 교차 검증이 되었다.

부연하자면, International News Service 통신사 소속 필립 딘(Philippe Deane Gigantès) 종군기자가 1950년 7월 21일 단독으로 보도하고 'South Bend Tribune', 'The Daily Times (New Philadelphia, Ohio)'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었는데, 이 기사에서 한국인 철도공무원 중 'switchman'이 등장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 신문 기사에 의하면 장시경 신호원이 수행한 작전에 등장하는 미군들 역시 '딘 소장 구출 목적으로 투입된 '결사대원'이 아닌 호송병이었다. 즉 '보급품 후송 작전' 지원 및 기관차 호위 임무를 맡았던 미 제24보병사단 소속의 일부 병사들로 세부 소속 부대는 기사상에서 특정되어 있지 않다.

5.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던 이유

위에서 자세히 설명한대로 김재현, 황남호, 현재영, 장시경 등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참가한 작전은 명백하게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국내에서는 한국철도공사( 철도청 시절 포함)와 국가보훈부(국가보훈처 시절 포함) 등에 의해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는데 그 이유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딘 소장 구출 작전'에 대한 근거자료는 1차 작전과 2차 작전을 막론하고 모두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 장시경 신호원의 증언 그리고 당시 철도 군사수송담당관이었던 류기남 철도참전유공자회 회장의 증언 이렇게 오로지 관련 철도공무원들의 증언들뿐으로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증언을 바탕으로 1953년 교통부 발간 공식 역사서 '한국교통동란기'(우군을 구출타가 항목, pp. 326~331)에 실린 내용이 시초이며 그 후 관련 철도공무원들이 언론사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여 '딘 소장 구출 작전' 영웅담이 지속적으로 보도되었고 미군 측 공식 전사 등 미국 측 자료들과 교차 검증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아무런 의심없이 공식적인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결국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잘못 알려졌던 이유는 철도공무원들의 허위 증언에 기인한 것인데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미군 호송병 6명이 탑승하여 사상자는 없었다고 증언을 했다면 미군들과의 의사소통 문제로 작전 목적에 대한 단순 오해 내지 착각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었겠지만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와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는 구출 작전을 위해 미군 결사대원 30명이 탑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는 구출 작전에 대한 개연성을 높이기 위한 허구의 내용을 증언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허위 증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6. 역사 왜곡의 문제점 및 폐해

첫번째, '딘 소장 구출 작전'이라는 역사 왜곡에 바탕을 둔 허위 공적으로 김재현 기관사 등 철도공무원들의 현양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국민 혈세를 들여 '딘 소장 구출 작전'은 물론이고 실제 작전이었던 '보급품 후송 작전'에 사용되지도 않았던 미카3-129호를 '딘 소장 구출 작전'에 사용된 기관차라고 왜곡하여 호국철도기념관에 전시하면서 역시 국민 혈세를 낭비하고 있다.

두번째, 대전 전투와 딘 소장에 관한 심각한 역사 왜곡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기관차 투입 작전의 목적만 국내에 잘못 전해진 것이 아니고 1962년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에 순직일이 1950년 7월 19일로
잘못 들어가는 불상사가 겹치면서 그 후부터 한국철도공사가 철도청시절부터 순직일에 짜맞추기 위해 1950년 7월 19일에 딘 소장이 실종 내지 포로가 되었고 이를 알게된 미군들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를 통해 투입시켰고 이때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다는 무용담을 퍼트리리고 이를 그대로 인용하는 언론 기사들에 의해 대전 전투의 시간대별 역사가 완전히 왜곡되어 버렸다.
딘 소장에 관해서도 7월 20일까지 북한군 탱크를 사냥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국내에서는 졸지에 7월 19일에 실종 내지 포로가 된 장군으로 알려져 버렸다.

세번째, 딘 소장의 명예훼손을 불러일으켰다.
빈틈없는 철수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대전역에 남아있던 보급품까지 후송 명령을 직접 하달했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은 완전히 묻혀 버린반면 딘 소장이 실종 내지 포로가 된 후 미군 특공대를 통한 전쟁영화 시니리오 같은 구출 작전이 실행되었으며 이 작전에서 미군 특공대원 29명과 한국인 기관사까지 전사하는 한마디로 아군에 짐이 되는 무능력한 장군으로 각인되게 하였다.

7. 국가보훈부 등 정부기관의 조치

2024년 국가보훈부는 이달의 6.25 전쟁영웅(2020년 5월) 선정 당시 배포한 보도자료에 아래와 같은 각주를 달아 정정하였고 # #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공적을 기술한 블로그 등 SNS의 콘텐츠를 전부 비공개처리고 현양사업을 잠정 중단하였다.
"위 게시물은 6ㆍ25전쟁 공식전사(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8년 발간), 호국인물총서(전쟁기념관, 2020년 발간) 등 관련 문헌에 ‘딘 소장 구출작전’이 아닌 ‘보급품 후송작전’으로 기술되어 있는 등 일부 논란이 제기되어 사실관계 재확인 중임을 알려드립니다."

대전역이 행정구역 안에 있고 황인호 전 구청장의 관심으로 6.25 전쟁 호국철도인 현양사업을 많이 진행하였던 대전 동구청을 비롯한 대전광역시의 지방자치단체, 철도박물관이 소재한 의왕시, 국토교통부 등 모든 정부기관들이 허위 공적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론화 이후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공적을 기술한 블로그 등 SNS 콘텐츠를 전부 비공개처리고 현양사업을 잠정 중단하였다.

결론적으로 2024년을 기점으로 현재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딘 소장 구출 작전' 참여 공적은 오로지 한국철도공사만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공적으로 취급받고 있으며 덧붙여 철도계에서도 한국철도공사에서 언론홍보팀장으로 재직했다가 퇴직한 철도인 등 한국철도공사의 입김을 받지 않는 철도인들은 역사 왜곡을 바로 잡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8. 참고 자료

9. 관련 문서



[1]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에서 작전 목적을 '딘 소장 구출'이 아닌 '보급품 후송' 그리고 기관차에 탑승한 미군을 '결사대원'이 아닌 '호송병'으로 정확히 기술하였지만, 철도공무원들의 증언에서 작전 목적과 호송병을 '결사대원'으로 오해한 점 이외에는 진실로 추정하여 호송병 30명이 탑승하여 29명이 전사했다고 기술한 부분은 향후 개정판에서 총원 6명에 전사자 없음으로 정정해야 할 팩트 오류이다. [2]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