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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베컴/클럽 경력/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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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베컴
1992-2003
파일:46c6e86defcbfe7f72b81e8f7b9595865496e4af.jpg.webp
▲ 1992년 데뷔 당시
소속팀 <colbgcolor=#ffffff,#191919>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프리미어 리그)
등번호 7
10(1996-1997)
24(1995-1996)
28(1992-1994)
기록
파일:프리미어 리그 로고 (92-07).svg
265경기
62득점 80도움
81경기
15득점 31도움
파일:UEFA컵 로고 (1997-2005).svg
2경기
파일:FA컵(잉글랜드)로고(화이트).svg
22경기
6득점 4도움
파일:와딩턴.jpg
12경기
1득점 1도움
파일:crR1Bvv.png
5경기
1득점 2도움
파일:UEFA 슈퍼컵 로고_white.svg
1경기
파일:FIFA 클럽 월드컵 로고.svg 2경기
파일:인터image.jpg 1경기
합산 성적
390경기
85득점 118도움
1. 개요2. 1992-93 시즌 ~ 1995-96 시즌3. 1996-97 시즌 ~ 1998~99 시즌4. 1999-00 시즌5. 2000-01 시즌6. 2001-02 시즌7. 2002-03 시즌
7.1. 이적 사가
8. 총평

[clearfix]

1. 개요

파일:DavidBeckham_Player.jpg
390경기 85골 118도움
데이비드 베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경력을 다룬 문서.

2. 1992-93 시즌 ~ 1995-96 시즌

베컴은 맨유 유스팀의 일원이 되어 팀을 이끌었고, 92년 5월 잉글랜드 FA 유스컵 우승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퍼거슨 감독에게 눈도장을 찍는다.

1992-93 시즌: 1경기(선발 0경기)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코카콜라컵 1 0 1 0 0
합계 1 0 1 0 0

이후 베컴은 93년 5월이 되어서 맨유 1군팀으로 승격해 가끔씩 출전 기회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맨유는 매 시즌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 아무리 유스팀에서 날고 기었던 베컴이었다해도 세계 최고의 선수들만 있다는 맨유에서 그가 주전을 차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렇듯 퍼스트 팀 승격 이후, 경기에 결장하는 것이 잦아졌고,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그런 베컴을 본 퍼거슨 감독도 베컴의 재능이 썩는 데에 아쉬워했다. 결국 1994-95 시즌에 베컴은 당시 리그 2 소속이었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라는 팀으로 임대되었다. 프레스턴은 베컴을 주전 선수로 출전시켜줬고, 이는 그가 다시금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프레스턴에서의 경험으로 5경기 2골이라는 성과를 거두었고, 임대 2달차가 되던 때에 맨유의 갑작스러운 복귀 요청으로 다시 맨유로 복귀했다. 주전 선수들이 모두 부상으로 쓰러진 것이었다. 이에 퍼거슨 감독은 급히 프레스턴으로 임대가 있던 베컴을 불러들였고, 급한대로 그를 오른쪽 윙어로 출전시킨다. 맨유에 복귀한 베컴은 어린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킥력을 선보였고, 자신의 이름을 잉글랜드 전역에 각인시켰다.

1993-94 시즌: 0경기

1994-95 시즌: 8경기(선발 6경기) 1골 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4 2 2 0 0
챔피언스 리그 1 1 0 1 1
코카콜라컵 3 3 0 0 0
합계 8 6 2 1 1

1995-96 시즌: 40경기(선발 33경기) 8골 5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3 26 7 7 5
UEFA컵 2 2 0 0 0
FA컵 3 3 0 1 0
코카콜라컵 2 2 0 0 0
합계 40 33 7 8 5

3. 1996-97 시즌 ~ 1998~99 시즌

파일:베컴 리즈 시절.jpg
1999년 트레블을 달성하던 해의 베컴의 모습, 가히 그의 전성기가 열리기 시작하던 순간이었다.
파일:Beckham Wimbledon Goal(96-97).gif
그는 1996-97 시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윔블던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골키퍼 설리반을 농락시키는 그 유명한 60야드짜리 초장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1][2] 베컴은 어느덧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잉글랜드의 미래를 이끌어 갈 대표적인 기대주로 손꼽히게 되었다. 특히 97년 2월, 첼시와의 경기에서 터뜨린 대포알같은 중거리포는 유럽의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의 오른발을 떠나 골문을 향해 무시무시한 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볼은 눈깜짝할 사이에 득점으로 연결됐고, 그 시속이 무려 97.9마일(약 157km)로 측정되었다. 이쯤되면 야구에서도 '강속구'가 아닌, '광속구'를 던지는 투수들의 직구 스피드에 버금가는 수치라 할만했다.
베컴의 활약에 힘입은 맨유는 프리미어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 이후, 시즌이 끝나자 몇몇 스타 선수들이 이적해버리고, 퍼거슨 감독은 영입 대신 유스 출신선수들을 기용할 것을 결정, 이에 대해 영국 언론과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구단의 유스시스템에 확신에 차 있었다. 베컴 역시 그런 퍼거슨 감독의 신뢰에 부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한 이적시장을 보내고, 시즌이 시작되었다. 시즌이 시작되자 베컴을 필두로 맨유는 예상을 뒤엎고 6연승을 하는 기염을 토해내며 기량을 과시했다. 베컴을 비롯한 맨유의 유스팀 선수들이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이자 언론들은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거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매 경기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맨유의 아이들, 이른 바 '퍼거슨의 아이들'은 그렇게 등장했다.

1996-97 시즌: 49경기(선발 46경기) 12골 11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6 33 3 8 8
챔피언스 리그 10 10 0 2 1
FA컵 2 2 0 1 0
채리티 실드 1 1 0 1 2
합계 49 46 3 12 11
파일:94b5b6ae814d3030.jpg
파일:FB_IMG_1588476609783.jpg
맨유에서 계속해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1997년, 칸토나의 갑작스런 은퇴 결정으로 인해 많은 맨유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베컴에게 7번을 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고, 베컴 역시 7번 유니폼을 입고 이곳저곳 누비며 그 신뢰에 보답하며 결국 1998-99 시즌 맨유 역사상 프리미어리그, FA 컵, 챔피언스리그 모두 우승하는 트레블을 달성하였다. 구단 최초의 트레블의 중심[3]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베컴은 세트피스, 프리킥, 페널티 킥 등으로 수많은 골들을 양산하며 잉글랜드 최고의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로 자리매김했다. 베컴의 존재는 맨유를 세계적인 인기 클럽으로 만들어줬다.

부상 전엔 환상적인 킥력 외에 돌파도 준수했는데 베컴은 맨유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서 모습을 보였다. 다이내믹한 윙어의 최고봉이었던 라이언 긱스의 왼쪽과 후방에서 활동량과 로빙 패스로 받쳐 주는 베컴의 오른쪽은 한 시대를 풍미한 좌우 날개 조합이었다.[4]

1997-98 시즌부터 2000-01 시즌 사이에 세 번의 리그 도움왕에 올맀고, 맨유 시절 도움 해트트릭만 9회나 기록하며 공격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특히 1998-99 시즌에는 팀의 트레블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 2위, 그리고 UEFA 올해의 클럽 축구 선수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상을 가져간 선수는 히바우두였는데, 클럽 커리어로는 맨유의 베컴이 압도적이었지만 히바우두의 바르셀로나에서의 입지가 베컴의 맨유에서의 그것을 이겼고, 개인 퍼포먼스의 우위, 코파 아메리카에서의 활약도 인정되어 베컴이 아깝게 놓쳤다.

1997-98 시즌: 50경기(선발 45경기) 11골 20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7 34 3 9 13
챔피언스 리그 8 8 0 0 5
FA컵 4 3 1 2 2
채리티 실드 1 0 1 0 0
합계 50 45 5 11 20

1998-99 시즌: 54경기(선발 52경기) 9골 1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4 33 1 6 11
챔피언스 리그 10 10 0 2 8
FA컵 7 7 0 1 0
워딩턴컵 1 0 1 0 0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0 0
합계 54 52 2 9 19

4. 1999-00 시즌

1999-00 시즌: 48경기(선발 46경기) 8골 19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30 1 6 15
챔피언스 리그 12 12 0 2 4
채리티 실드 1 1 0 0 0
인터컨티넨탈컵 1 1 0 0 0
클럽 월드컵 2 1 1 0 0
슈퍼컵 1 1 0 0 0
합계 48 46 2 8 19

5. 2000-01 시즌

2000-01 시즌: 46경기(선발 43경기) 9골 16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9 2 9 12
챔피언스 리그 12 11 1 0 3
FA컵 2 2 0 0 1
채리티 실드 1 1 0 0 0
합계 46 43 3 9 16

6. 2001-02 시즌

파일:베컴.png
그러다가 2002년 4월 10일, 베컴은 데포르티보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왼발의 제2 중족골 부상을 당했다.[5] 이 부상으로 베컴은 시즌 남은 기간 동안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경기를 치르지 못했고, 프리미어리그를 아스널에게 내주었지만,[6] 추가 급여와 초상권 등과 관련해 구단과의 몇 달에 걸친 협상 끝에 5월에 3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새로운 계약을 체결해 다수의 협찬 계약으로 벌어들이는 수입과 합쳐, 베컴은 당시 세계에서 최고 주급을 받는 선수로 등극했다. 또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2001-02 시즌은 베컴이 유나이티드 선수로 치른 최고의 시즌이었다. 베컴은 리그에서 28경기를 치르면서 11골을 넣었고, 모든 경기를 통틀어 42경기에서 16골을 넣었는데, 이는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저 부상으로 인하여 드리블 돌파 능력이 떨어지게 된다.

2001-02 시즌: 43경기(선발 38경기) 16골 14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28 23 5 11 8
챔피언스 리그 13 13 0 5 5
FA컵 1 1 0 0 1
채리티 실드 1 1 0 0 0
합계 43 38 5 16 14

7. 2002-03 시즌

하지만 2002-03 시즌 초에 부상을 당한 후, 베컴은 주전 오른쪽 미드필더로서의 입지를 유지하기 힘들어졌으며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베컴을 대신하여 우측 미드필더 보직을 꿰찼다. 물론 부상 복귀 후에는 베컴이 다시 오른쪽 미드필더 주전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파일:20200518_232259.jpg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레알 마드리드 CF 전에서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되었고, 팀은 합산점수에서 밀려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나 베컴은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이후 문전 혼전 상황에서 볼을 밀어넣으며 2차전 경기만큼은 4-3 승리로 끌었다. 자신의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준 경기였다. 그리고 이 경기 끝나고 베컴은 지단과 유니폼을 교환했는데 이때 베컴은 지단에게 마드리드로 오지 않겠냐는 꼬심(?)을 받았다고 한다.[7]

어쨌든 축구화 사건 이후로 팀에서 경기 출전 시간이 급격히 줄어들었지만, 베컴은 이 시즌에 모든 대회를 통틀어 52경기에 출전해 11골을 기록했다. 또한 여전히 잉글랜드의 주전 현역 선수였지만, 축구에 대한 공로로 2003년 6월 13일에 영국 제국 금강 기사단 장교 훈장(OBE)을 받았다.

2002-03 시즌: 52경기(선발 45경기) 11골 13도움
대회 경기 선발 교체 득점 도움
프리미어 리그 31 27 4 6 8
챔피언스 리그 11 8 3 2 3
FA컵 3 3 0 1 0
워딩턴컵 5 5 0 1 1
챔피언스 리그 예선 2 2 0 1 1
합계 52 45 7 11 13

7.1. 이적 사가

그런데 2003년 2월 15일, FA컵에서 아스날에게 패배한 뒤 알렉스 퍼거슨과 라커룸에서 충돌, 결국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당시 상황을 서술하자면, 경기에서 패배한 후 라커룸에서 알렉스 퍼거슨이 데이비드 베컴에게 "플레이가 이게 뭐냐. 애슐리 콜에게 완전히 발렸잖아."는 식으로 호통을 쳤는데, 발끈한 베컴이 "영감님은 아르센 벵거에게 완전히 발려버렸고요."는 식으로 맞받아치자 열받은 퍼거슨이 축구화를 발로 차버렸다. 솔샤르의 축구화였다 카더라 그런데 그게 우연히 베컴의 얼굴을 직격하는 바람에 축구화를 눈에 맞아서 눈썹 위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에 분노가 폭발한 베컴이 퍼거슨에게 달려들었으나 팀메이트들이 엉겨붙어 간신히 떼놓았다고. 결국, 퍼거슨은 나중에 따로 베컴에게 찾아가서 이번에는 자신이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면서 사과를 했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러한 자초지종이 베컴의 아내 빅토리아 베컴에 의해 언론에 새어나가고, 이후 베컴도 보란 듯이 눈 위에 반창고를 붙이고 돌아다니는 모습이 파파라치에 의해 언론을 타면서 둘 사이는 봉합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시즌 종료 이후 베컴은 팀을 떠나게 되었다. 퍼거슨이 자신의 두 번째 자서전에서 밝히길 베컴이 자신의 권위를 무시하는 행위를 했기 때문에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훈련을 할 때 베컴이 비니를 쓰는 모습을 보고 (비니를) 벗으라고 했는데 무시한 것부터 시작해서 밑에도 나와 있듯이 빅토리아와의 사랑에 빠지거나 하는 등 축구에 소홀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 실망했다고 한다.[8] 만약 그가 축구에 더 집중했다면 자기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도 맨유에 남아있었을 것, 정말로 축구 자체에 헌신했다면 레알 마드리드에서 로스앤젤레스 갤럭시로 이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성토했다. 물론 베컴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저런 축구 외적인 잡음들을 매우 싫어했던 퍼거슨과 이런 크고 작은 갈등이 쌓이고 쌓여 결국 2003년 축구화 사건이 터지면서 파국을 맞게 되었다. 현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앙금이 가라앉으면서 화해했다.[9]

8. 총평

파일:베컴 빅이어.jpg
베컴은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265회 프리미어 리그 경기에 출전해 61골을 넣었으며,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에도 81회 출전해 15골을 기록했다. 베컴은 12년의 기간 동안 프리미어 리그를 6회, FA컵을 2회, UEFA 챔피언스 리그를 1회, 인터컨티넨탈컵을 1회, 그리고 FA 유스컵을 1회 우승했다. 이 시기에, 그는 라이언 긱스에 이어[10] 두 번째로 최장 기간 활약한 선수였다.

여담으로 베컴은 맨유의 7번으로 너무 유명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7번은 베컴이 클럽에 입단한 이래 네 번째로 부여받은 등번호였다. 그는 데뷔시즌 28번을 입었었고, 그 후 1995-96시즌부터 24번으로 바꾸며 정규 멤버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96-97 시즌부터 10번으로 번호가 승격되었는데, 바로 마크 휴즈가 달던 번호였다. 하지만 1년 후 테디 셰링엄이 맨유에 합류하고 에릭 칸토나의 충격적인 은퇴발표가 있은 후, 베컴은 자신의 등번호 10번을 셰링엄에 양보하고, 맨유에서의 나머지 생활을 7번 번호를 계승해 달고 뛰며 맨유의 상징적인 슈퍼스타가 되었다.

여러 클럽을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맨유의 레전드라고 감히 칭할 수 있는 선수로 맨유 역대 최고의 7번 중 한 명이다.
파일:57125c72.jpg
맨유 전설의 유스 출신 선수들인 Class of 92[11] 사망하였다.]. 왼쪽부터 라이언 긱스, 니키 버트, 데이비드 베컴, 게리 네빌, 필립 네빌, 폴 스콜스, 테리 쿠크[12]
파일:attachment/데이비드 베컴/Example.jpg
2011년 게리 네빌의 은퇴 경기에 이들은 다시 모여 그때와 같은 포즈를 취하고 찍었다.[13]


[1]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기념 베스트 골 10선에 포함되기도 한 환상적인 골. 여담으로 베컴은 이날 축구화를 급하게 다른 선수에게 빌린 것이라고 한다. [2] 당시 골 영상을 보면 골을 넣고 두 팔 벌려 세리머니하는 베컴을 볼 수 있는데 무슨 영화 배우 비주얼의 미소년을 볼 수 있다.. [3] 1998-99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만난 FC 바이에른 뮌헨과 맞대결에서 경기종료 직전 베컴에게 찾아온 2번의 코너킥은 정확히 테디 셰링엄 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연결되어 골로 연결되었고 맨유에게 챔스 우승을 안겨주었고 이는 캄 노우의 기적이라며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4] 뒤에 서술되는 2002년 중족골 부상 전까지는 돌파 능력도 상당했으나, 부상 이후 드리블 돌파 능력은 크게 떨어졌다. [5] 베컴에 부상을 입힌 피해자가 아르헨티나인 알도 두스체르였기에 나중에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그 해 FIFA 월드컵에서 맞대결을 펼칠 예정이기에 고의로 부상을 입혔다고 영국 언론으로부터 의혹이 제기되었다. [6] 챔피언스리그도 레버쿠젠과의 준결승전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탈락했다. 해당 시즌 우승팀은 레알 마드리드 CF. 지단의 인생골이 나온 바로 그 시즌이다. [7] 베컴은 뼛속까지 지단빠로 유명한데 그가 그렇게 좋아하는 선수가 원래 말수도 적고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와서 유니폼 교환을 제안하며 자기랑 레알 마드리드에서 같이 뛰자고 하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갔을 정도로 기뻤다고 한다. [8] 다만 로이 킨은 이와는 상반되는 주장을 한다. 베컴이 아무리 일류 축구선수를 뛰어넘는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되었어도 축구에 대한 헌신은 여전했다고. 때문에 베컴이 축구 외적인 일을 하는 거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로이 킨은 선수들의 태도에 대해서 굉장히 깐깐한 인물인데 만약 베컴이 슈퍼스타가 되고 나서 축구를 약간이라도 등한시하였더라면 진작에 실컷 디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9] 그도 그럴 것이, 베컴은 꾸준히 인터뷰를 통해 맨유가 아니면 다른 프리미어 리그 내의 팀으로는 갈 생각이 없다는 생각을 밝히며 맨유에 큰 애정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 바 있다. 이후 퍼거슨 감독과의 관계도 문제가 없었다. 퍼거슨을 직접 보기 위해 맨유 선수들과 런던으로 찾아갔던 것과, 이벤트 매치 때 맨유 선수로 참가하며 퍼거슨과 조우했던 것, 퍼거슨 감독 은퇴 당시에도 본인의 페이스북에 감사를 담은 장문의 글을 남긴 것이 그 대표적인 예시이다. 퍼거슨 역시도 베컴이 은퇴하자 그에 대한 찬사를 보내며 화답했다. 이 둘의 깊은 관계 때문인지, 베컴의 은퇴에 퍼거슨의 은퇴가 영향을 미쳤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10] 니키 버트, 게리 네빌, 그리고 폴 스콜스와 함께 [11] 긱스 왼쪽의 트로피를 들고 있는 사람이 이 선수들을 유스시절부터 키워낸 에릭 해리슨 코치다. 현지 시각으로 2019년 2월 13일, [12] 당시 유망주로 주목받았지만 약 4년간의 임대생활을 거쳐 결국 맨체스터 시티로, 거기서도 임대생활만 전전하다가 MLS 콜로라도 래피즈에서 겨우 정착해서 주전선수로 활약하고 2011년 은퇴했다. [13] 그 와중에 이 사진을 잘 보면 6명인데 실패한 유망주였던 쿠크는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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