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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2-28 14:21:08

대법흥

송서(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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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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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2·3권 「무제기(武帝紀)」 4권 「소제기(少帝紀)」 5권 「문제기(文帝紀)」
유유(劉裕) 유의부 유의륭
6권 「효무제기(孝武帝紀)」 7권 전폐제기(前廢帝紀)」 8권 「명제기(明帝紀)」
유준(劉駿) 유자업 유욱(劉彧)
9권 「후폐제기(後廢帝紀)」 10권 「순제기(順帝紀)」
유욱(劉昱) 유준(劉準)
※ 11권 ~ 40권은 志에 해당. 송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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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3f51ba> 41권 「후비전(后妃傳)」 ||
조안종 · 소문수 · 장애친 · 장궐 · 사마무영 · 호도안 · 원제규 · 노혜남 · 왕헌원 · 하영완 · 심용희 · 왕정풍 · 진묘등 · 강간규 · 진법용 · 사범경
42권 「유목지등전(劉穆之等傳)」 43권 「서선지등전(徐羨之等傳)」 44권 「사회전(謝晦傳)」
유목지 · 왕홍 서선지 · 부량 · 단도제 사회
45권 「왕진악등전(王鎮惡等傳)」 46권 「조륜지등전(趙倫之等傳)」 47권 「유회숙등전(劉懷肅等傳)」
왕진악 · 단소 · 상정 · 유회신 · 유수 조륜지 · 왕의 · 장소 유회숙 · 맹회옥 , 맹용부, · 유경선 · 단지
48권 「주령석등전(朱齡石等傳)」 49권 「손처등전(孫處等傳)」 50권 「호번등전(胡藩等傳)」
주령석 · 모수지 · 부홍지 손처 · 괴은 · 유종 · 우구진 호번 · 유강조 · 원호지 · 장흥세
51권 「종실전(宗室傳)」
유도린 · 유도규 · 유준고
52권 「유열등전(庾悅等傳)」 53권 「장무도등전(張茂度等傳)」 54권 「공계공등전(孔季恭等傳)」
유열 · 왕탄 · 사경인(1) · 원담 · 저숙도(2) 장무도(3) , 장영, · 유등지 , 유병지, · 사방명 · 강이 공계공 · 양현보 · 심담경
55권 「장도등전(臧燾等傳)」 56권 「사첨등전(謝瞻等傳)」 57권 「채곽전(蔡廓傳)」
장도 · 서광 · 부륭 사첨 · 공림지 채곽
58권 「왕혜등전(王惠等傳)」 59권 「은순등전(殷淳 等傳)」 60권 「범태등전(范泰等傳)」
왕혜 · 사홍미 · 왕구 은순 · 장창 · 하언 · 강지연 범태 · 왕준지 · 왕소지 · 순백자
61권 「무삼왕전(武三王傳)」
유의진 · 유의공 · 유의계
62권 「양흔등전(羊欣等傳)」 63권 「왕화등전(王華等傳)」 64권 「정선지등전(鄭鮮之等傳)」
양흔 · 장부 · 왕미 왕화 · 왕담수 · 은경인 · 심연지 정선지 · 배송지 · 하승천
65권 「길한등전(吉翰等傳)」 66권 「왕경홍등전(王敬弘等傳)」 67권 「사령운전(謝靈運傳)」
길한 · 유도산 · 두기 · 신념 왕경홍(4) · 하상지 사령운
68권 「무이왕전(武二王傳)」
유의강 · 유의선
69권 「유담등전(劉湛等傳)」 70권 「원숙전(袁淑傳)」 71권 「서담지등전(徐湛之等傳)」
유담 · 범엽 원숙 서담지 · 강담 · 왕승작
72권 「문구왕전(文九王傳)」
유삭 · 유굉 · 유창 · 유휴인 · 유휴우 · 유휴업 · 유휴천 · 유이부 · 유휴약
73권 「안연지전(顏延之傳)」 74권 「장질등전(臧質等傳)」 75권 「왕승달등전(王僧達等傳)」
안연지 장질 · 노상 · 심유지 왕승달 · 안준
76권 「주수지등전(朱脩之等傳)」 77권 「유원경등전(柳元景等傳)」 78권 「소사화등전(蕭思話等傳)」
주수지 · 종각 · 왕현모 유원경 · 안사백 · 심경지 소사화 · 유연손
79권 「문오왕전(文五王傳)」
유탄 · 유위 · 유혼 · 유휴무 · 유휴범
80권 「효무십사왕전(孝武十四王傳)」
유자상 · 유자훈 · 유자방 · 유자욱 · 유자란 · 유자인 · 유자진 · 유자원 · 유자우 · 유자맹 · 유자운 · 유자사(劉子師) · 유자소 · 유자사(劉子嗣) · 유찬
81권 「유수지등전(劉秀之等傳)」 82권 「주랑등전(周朗等傳)」 83권 「종월등전(宗越等傳)」
유수지 · 고침 · 고기지 주랑 · 심회문 종월 · 오희 · 황회
84권 「등완등전(鄧琬等傳)」 85권 「사장등전(謝莊等傳)」 86권 「은효조등전(殷孝祖等傳)」
등완 · 원의 · 공기(孔覬) 사장 · 왕경문(5) 은효조 · 유면
87권 「소혜개등전(蕭惠開等傳)」 88권 「설안도등전(薛安都等傳)」 89권 「원찬전(袁粲傳)」
소혜개 · 은염 설안도 · 심문수 · 최도고 원찬
90권 「명사왕전(明四王傳)」
유우 · 유홰 · 유숭 · 유희
91권 「효의전(孝義傳)」
공영 · 유유(劉瑜) · 가은 · 곽세도 · 자원평 · 엄세기 · 오규 · 반종 · 장진지 · 왕팽 · 장공 · 서경 · 손법종 · 범숙손 · 복천여 · 허소선 · 여제민 · 손극 · 하자평
92권 「양리전(良吏傳)」
왕진지 · 두혜도 · 서활 · 육휘 · 완장지 · 강병지 · 왕흠지
93권 「은일전(隱逸傳)」
대옹 · 종병 · 주속지 · 왕홍지 · 완만영 · 공순지 · 유응지 · 공기(龚祈) · 적법사 · 도잠 · 종욱지 · 심도건 · 곽희림 · 뇌차종 · 주백년 · 왕소 · 관강지
94권 「은행전(恩倖傳)」
대법흥 · 완전부 · 왕도륭 · 양운장
95권 「삭로전(索虜傳)」 96권 「선비토욕혼(鮮卑吐谷渾)」
삭로 토욕혼
97권 「이만전(夷蠻傳)」
임읍국 · 부남국 · 가라타국 · 가라단국 · 반황국 · 반달국 · 사파파달국 · 사자국 · 가비려국 · 고구려 · 백제국 · 왜국 · 형옹주만 · 예주만
98권 「저호전(氐胡傳)」 99권 「이흉전(二凶傳)」
구지 · 저거몽손 유소(劉劭) · 유준(劉濬)
100권 「자서전(自序傳)」
심약
(1) 본명이 사유(謝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인(景仁)으로 표기되었다.
(2)본명이 저유지(褚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숙도(叔度)로 표기되었다.
(3) 본명이 장유(張裕)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무도(茂度)로 표기되었다.
(4) 본명이 왕유지(王裕之)로 유유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홍(敬弘)으로 표기되었다.
(5) 본명이 왕욱(王彧)으로 유욱의 휘를 범하여 자인 경문(景文)으로 표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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戴法興
대법흥
최종직위 월기교위(越騎校尉)
성씨 (戴)
법흥(法興)
아버지 대석자(戴碩子)
생몰연도 414년 ~ 465년 9월 6일
고향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승상 재임기간 464년 7월 12일 ~ 465년 8월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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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조시대 유송의 권신으로 양주(揚州) 회계군(會稽郡) 산음현(山陰縣) 사람이다. 영광(永光) 연간에 월기교위(越騎校尉)를 지냈다.

2. 생애

강직하기로 이름이 있었던 대석자(戴碩子)의 아들로 위로는 두명의 형이 있었는데 그중 대법흥이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453년 5월 20일, 효무제 유준(劉駿)이 즉위하자 대법흥은 조정의 일을 대신 맡게 되었는데 덕분에 그는 황제의 행신(倖臣)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유준은 정사를 보는 것을 포기하고 매일마다 사치와 향략에 빠졌기 때문에 조서의 실행과 상서대(尙書臺)의 사무는 모두 대법흥의 손 안에서 이루어졌다. 대법흥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줄 알고 정무를 처리하는데 실수가 없어서 유준은 대법흥을 신임할 수 있었다.

당시 명사 소상지(巢尙之)는 비록 집안이 가난하였지만 문학과 역사를 두루익혀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였고 때문에 조정의 정무는 소상지와 대법흥이 처리하게 되었고 사소한 일은 대명보(戴明寶)가 모두 처리하였다. 소상지는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여 관련 인사를 전부 풀어주고 사람을 보는 눈이 좋아 능력을 보고 걸출한 인재를 선발하는 등 뛰어난 모습을 보였고 때문에 조정은 모두 소상지에게 의지하였다. 반면 대법흥은 이런 정무를 처리하는데 뇌물에 크게 의지하였고 그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고위관직에 오르기 힘들었다.

464년 7월 12일, 효무제 유준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장남 유자업이 뒤를 이었는데 이미 조정의 정무 처리는 대법흥과 소상지가 맡고 있었고 여전히 모든 정무 처리는 대법흥의 손에서 이루어 졌기 때문에 민중에서는 조정에는 두명의 천자가 있는데 한명은 유자업이고 다른 한명은 대법흥이니 황제의 자리는 유자업의 것이라 할 수없다는 말까지 떠돌았으니 유자업의 입장에서 조정을 좌지우지 하는 대법흥은 좋게 보일리가 없었다. 대법흥은 유자업이 비행(非行)을 저지를 때 마다 이를 막아서고는 했는데 이것이 유자업에게 크게 거슬렸다.

유자업은 대법흥에게 죄를 물어 월기교위(越騎校尉)의 직위를 박탈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유자업은 여기서 끝내지 않고 다시 사신을 보내 대법흥에게 자결을 명령하였고 크게 한탄하면서 자신의 두 아들에게 창고를 걸어 잠궈 가족들에게 창고의 열쇠를 신중하게 보관하도록 명한뒤 자결하니 향년 52세였다. 유자업은 대법흥이 자결하자 그의 두 아들을 살해했으며 대법흥의 관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