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19:37:35

니콜라이 바투틴

바투틴에서 넘어옴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c0000, #cc0000 20%, #cc0000 80%, #cc0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color: #fff; min-height: 31px"
{{{#gol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81818,#e5e5e5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이반 스모로디노프 니콜라이 바투틴 게르만 말란딘 베냐민 즐로빈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파벨 보딘 알렉산드르 보골류보프 블라디미르 이바노프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파벨 티호미로프 알렉세이 안토노프 세르게이 시테멘코 니콜라이 로모프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니콜라이 파블롭스키 세묜 이바노프 미하일 포발리 미하일 코즐로프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발렌틴 바렌니코프 이반 가시코프 브로니슬라프 오멜리체프
제21대 제22대
블라디미르 데니소프 레온티 쿠즈네초프 }}}}}}}}}}}}}}}}}}
니콜라이 바투틴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붉은 군대 낫과 망치.svg
소비에트 지상군 전선 사령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d0000, #d40000 20%, #d40000 80%, #cd0000); color: #ffe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가브릴 자시힌 게오르기 자하로프 게오르기 주코프 니칸드르 치비소프
니콜라이 바투틴 다닐 주라블료프 드미트리 랴비셰프 드미트리 코즐로프
드미트리 파블로프 레오니트 고보로프 로디온 말리놉스키 마르키안 포포프
막스 레이테르 막심 푸르카예프 미하일 그로마딘 미하일 예프레모프
미하일 코발레프 미하일 코진 미하일 키르포노스 미하일 페트로프
바실리 고르도프 바실리 소콜롭스키 발레리안 프롤로프 세묜 부됸니
세묜 티모셴코 안드레이 예료멘코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야코프 체레비첸코
이반 마슬렌니코프 이반 바그라먄 이반 보그다노프 이반 체르냐홉스키
이반 코네프 이반 튤레네프 이반 페듀닌스키 이반 페트로프
이오시프 아파나셴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키릴 메레츠코프
파벨 아르테미예프 파벨 쿠로치킨 표도르 코스텐코 표도르 쿠즈네초프
표도르 톨부힌 표트르 구디멘코 표트르 소벤니코프 필리프 골리코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전방에서 단독으로 부대를 배치 · 지휘한 장군을 전선 사령관(Командующие войсками)으로 임명했다. }}}}}}}}}

파일:800px_Soviet Army-Communist_star_with_golden_border_and_red_rims.png 제2차 세계 대전 소련군 장성급 장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원수
Маршал Советского Союза / Адмирал флота
육군
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P | 세묜 부됸니 | 세묜 티모셴코 |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 게오르기 주코프 |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 이오시프 스탈린P | 이반 코네프 | 레오니트 고보로프 |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 로디온 말리놉스키 | 표도르 톨부힌 | 키릴 메레츠코프
NKVD
원수
라브렌티 베리야
해군
원수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 이반 이사코프
병과상원수
Главный маршал рода войск
육군
병과상원수
포병상원수
니콜라이 보로노프
공군
항공상원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
병과원수
Маршал рода войск
육군
병과원수
포병원수
니콜라이 야코블레프
기갑원수
파벨 로트미스트로프 | 세묜 보그다노프 | 파벨 리발코 | 야코프 페도렌코
통신원수
이반 페레십킨
공병원수
미하일 보로비요프
공군
항공원수
세르게이 후댜코프
대장
Генерал армии
육군
대장
이반 튤레네프 | 드미트리 파블로프1 | 니콜라이 바투틴 | 알렉세이 안토노프 | 안드레이 예료멘코 | 바실리 소콜롭스키 | 안드레이 흐룰료프 | 이반 바그라먄 | 이반 체르냐홉스키 | 게오르기 자하로프 | 이반 마슬렌니코프 | 막심 푸르카예프 | 이반 페트로프 | 니콜라이 불가닌P | 마트베이 자하로프
상장
Генерал-полковник / Адмирал
육군
상장
미하일 키르포노스 | 야코프 체레비첸코 | 표도르 쿠즈네초프 | 필리프 골리코프P | 막스 레이테르 | 바실리 쿠즈네초프 | 파벨 쿠로치킨 | 바실리 고르도프 | 바실리 카자코프A | 키릴 모스칼렌코 | 안드레이 그레치코 | 세르게이 바렌초프A | 바실리 추이코프 | 니칸드르 치비소프 | 미트로판 네델린A | 미하일 카투코프T | 마르키안 포포프2 | 드미트리 렐류셴코 | 세르게이 비류조프 | 안드레이 즈다노프P | 파벨 바토프 | 니콜라이 크릴로프 | 이반 페듀닌스키 | 세르게이 시테멘코 | 이반 치스차코프 | 알렉산드르 고르바토프 | 알렉세이 프로실랴코프Sa | 안드레이 크라브첸코T | 테렌티 시티코프 |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 세묜 이바노프 | 이반 류드니코프 | 이사 플리예프 | 뱌체슬라프 츠베타예프 | 미하일 슈밀로프 | 니콜라이 나고르니A | 아파나시 벨로보로도프 | 니콜라이 푸호프
해군
상장
레프 갈레르 | 아르세니 골로프코 | 블라디미르 트리부츠 | 이반 유마셰프 | 가브릴 자시힌A | 필리프 옥탸브리스키 | 블라디미르 알라푸조프 | 고르데이 레브첸코
공군
항공상장
콘스탄틴 베르시닌 | 스테판 크라솝스키 | 세르게이 루덴코 | 블라디미르 수데츠 | 파벨 지가레프
중장
Генерал-лейтенант / Вице-адмирал
육군
중장
드미트리 랴비셰프 | 미하일 예프레모프 | 파벨 폴루보야로프T | 이반 자하르킨 | 안드레이 블라소프4 | 알렉산드르 로딤체프 | 바실리 글라주노프 | 표트르 코셰보이 | 알렉산드르 루친스키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P | 미하일 글린스키 | 안드레이 게트만T | 알렉세이 라지옙스키T | 표트르 이바슈틴 | 파벨 쿨레쇼프A | 니콜라이 비류코프 | 야쿠브 차니셰프 | 미하일 루킨
해군
중장
유리 판텔레예프 | 니콜라이 하를라모프 | 세르게이 고르시코프
공군
항공중장
예브게니 로기노프 | 예브게니 사비츠키
소장
Генерал-майор / Контр-адмирал
육군
소장
미하일 페트로프 | 파벨 바티츠키 | 이반 야쿠봅스키 | 아마자습 바바자냔T | 이반 파블롭스키 | 이오시프 구사콥스키T | 그리고리 쿨리크3 | 콘스탄틴 카자코프A
해군
소장
블라디미르 카사토노프
공군
항공소장
필리프 아갈초프 | 게오르기 지민
P: 정치장교, A: 포병, T: 기갑, Si: 통신, Sa: 공병
※ 문서가 있는 인물만 종전 당시 계급으로 서술
※ 병과원수랑 병과상원수는 대장과 동급이나 의전서열상 대장과 원수 사이에 있었다
※ 포병·기갑·통신·공병·공군 장교는 상장→대장이 아닌 상장→병과원수로 진급
※ 윗 첨자 : 전사
1. 반공 및 지시불이행 혐의로 총살당했으나 전후 1957년 7월 31일 무죄로 판결나면서 복권
2. 1944년 4월 20일 대장에서 상장으로 강등, 전후 1953년 8월 3일 대장 계급 복권
3. 1942년 3월 17일 원수→소장으로 4계급 강등 및 1945년 7월 19일 중장→소장으로 강등
4. 1942년 7월 12일 독일군에게 생포당한 이후 나치 독일에 전향, 종전 후 체포되어 나치 부역 혐의로 사형됨
}}}}}}}}}
<colbgcolor=#cd0000><colcolor=gold> 소비에트 연방 제2대 총참모부 작전국장
니콜라이 바투틴
Никола́й Вату́тин | Nikolai Vatutin
파일:바투틴 대장.jpg
본명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바투틴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Вату́тин
Nikolai Fyodorovich Vatutin
출생 1901년 12월 16일
러시아 제국 보로네시현 발루이스키구 체푸히노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벨고로드주 발루이스키군 바투티노)
사망 1944년 4월 15일 (향년 42세)
소련 우크라이나 SSR 키예프주 키예프
묘소 우크라이나 키이우주 키이우 마린스키 공원
재임기간 제2대 총참모부 작전국장
1940년 7월 26일 ~ 1941년 2월 13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cd0000><colcolor=gold> 부모 아버지 표도르 그리고리예비치 바투틴
어머니 베라 에피모브나 바투티나
형제자매 형제 4명, 자매 4명
복무 소비에트 지상군
1920년 ~ 1944년
최종 계급 대장 (소비에트 지상군)
주요 참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쿠르스크 전투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
주요 서훈 소비에트 연방 영웅 (사후 추서)
레닌훈장 2회
}}}}}}}}}
1. 개요2. 생애
2.1. 출생과 전쟁 발발 전2.2. 북부 전선에서의 활동2.3. 중부 전선의 활동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활약2.4. 하르코프의 패배와 쿠르스크의 승리2.5. 우크라이나 해방2.6. 최후
3. 평가4. 기타 매체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 활약한 소련군 장군.

2. 생애

2.1. 출생과 전쟁 발발 전

바투틴은 보로네시 근처의 체푸히노 마을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붉은 군대에 들어가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 1926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 보로실로프 참모대학에서 수학해 참모장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숙청 기간에 상관들이 숙청당함에 따라 바투틴은 쾌속 승진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하고 키예프 특별 군관구 참모장이 될 수 있었다.

1939년에 바투틴은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의 군사작전을 계획했으며 게오르기 주코프의 지휘 아래 베사라비아 점령에도 참여했다. 스탈린은 바투틴의 공적을 인정하며 그를 중장으로 승진시키고 총참모부에서 일하게 했다. 하지만 바투틴은 너무 젊었고 경험이 많지 않은 편이라서 총참모부에서 일하며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응할 작전 수립 과정에서 오판을 여럿 범하고 말았다. 총참모부의 참모로 일하는 와중에 바투틴은 작전 과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신임을 받고 그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바투틴은 6월 30일에 북서 전선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그곳에서 활동했다.

2.2. 북부 전선에서의 활동

소련 북서 전선군은 에리히 회프너의 제4기갑집단을 선봉으로 한 독일 북부집단군에게 패하여 레닌그라드로 밀려나고 있었다. 제4 기갑 집단 소속인 그 유명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56 기갑 군단은 빠른 속도로 진격하며 레닌그라드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투틴은 노보고로드 근처에서 제56 기갑 군단을 포위할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을 명령했다. 만슈타인은 이 공세에 제법 놀랐지만 만슈타인답게 적절히 대처하며 군단이 포위당하는 걸 막았다. 하지만 바투틴의 공세 작전으로 독일군의 진격은 주춤했고 레닌그라드를 하계 기간 동안 점령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비록 전략적으로 소련군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사실 바투틴의 공세 작전은 작전적으로는 실패였다. 바투틴은 아군의 공세력을 지나치게 높게 잡았으며 너무 야심찬 목표를 설정했다. 그의 작전 조정 능력은 아직 형편없는 시절이었으며 그의 하급 제대 지휘관들은 너무 무능했다. 이 시절 바투틴은 당시 제28 전차 사단장으로 북서전선군 지휘관들 중 가장 유능했던 이반 체르냐홉스키 대령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그와 급속히 가까워졌다.

2.3. 중부 전선의 활동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활약

1942년 동계 공세가 시작되자 바투틴은 데미얀스크 포위 작전을 입안했고 데미얀스크 일대의 독일군을 포위망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데미얀스크 포위망은 너무 약했고 공군력의 부족으로 인해 포위망 안의 독일군은 공중보급으로 버티며 포위망을 계속 위협했다. 결국 바투틴의 포위망은 독일군의 반격에 뚫리고 말았다.[1]

1942년 6월에서 7월 독일군의 청색 작전이 개시될 동안 바투틴은 총참모부로 돌아와 있었다. 1942년 7월 1일에 바투틴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위험에 처한 브랸스크 전선군을 통합 지휘하는 스타프카 대리로 임명되었다. 한편 체르냐홉스키가 제18 전차 군단을 이끌고 독일군의 공세에 붕괴 위기에 처한 보로네시 전선군을 구원하러 제때에 달려오자 바투틴은 체르냐홉스키를 제60 소총군 사령관으로 승진시킬 것을 스탈린에게 건의해 승인받았다. 독일군은 보로네시를 점령했지만 보로네시 전선군의 방어선은 붕괴되지 않았다.

한편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일 때 천왕성 작전이 입안되자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대장은 바투틴을 새로 창설된 남서전선군 사령관에 임명해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돈 전선군과 함께 스탈린그라드 역포위 작전인 천왕성 작전에 참여하여 로코솝스키와 협격해 스탈린그라드를 역포위할 것을 명령했다.

아직 지나치게 젊은 장군이었던 바투틴에게 그런 중책을 맡기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많이 나왔지만 바실렙스키는 끝내 바투틴에게 임무를 맡겼다.[2] 바투틴은 로코솝스키와 함께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의 독일 제6군을 파멸로 몰아넣는데 큰 기여를 했다.

2.4. 하르코프의 패배와 쿠르스크의 승리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로 소련군 전체가 낙관적인 분위기에 젖었고 바투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바투틴은 소련군의 공세 능력을 지나치게 과신하고 독일군의 작전 능력을 너무 얕본 나머지 무리한 갈로프 작전을 시행해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자포로제까지 진격하려 했다. 결국 만슈타인의 책략에 걸린 바투틴은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포포프 전차군을 비롯한 3개 야전군을 날려먹고 하르코프를 다시 뺏기게 되었다. 바투틴으로서는 다행히도 스탈린은 바투틴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를 대장으로 승진시켰다.

바투틴은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이 되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의 결과로 탄생한 쿠르스크 돌출부 남쪽의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바투틴은 스타프카의 명령에 따라 깊고 빽빽한 종심 방어진을 돌출부 남쪽에 건설했고 쿠르스크 전투 동안 위기 상황에 여러 번 처하면서도 만슈타인의 치열한 공세를 받아넘기는 데 성공했다.

파일:attachment/images_15.jpg
미국 히스토리 채널에서 쿠르스크 만슈타인 대 바투틴의 대결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DVD 커버.

2.5. 우크라이나 해방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돌출부 남쪽에서 루미얀체프 작전을 개시했고 바투틴의 보로네시전선군은 하르코프를 재탈환했다. 바투틴은 이후 키예프 탈환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드네프르 강 도하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비록 몇번 만슈타인의 반격에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바투틴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작전을 완수할 수 있었다.

1943년 말에 바투틴은 제1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겨 이반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과 함께 주코프의 지휘 아래 코르순-세브첸코 작전을 개시해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의 막을 열었다.

바투틴의 기동 부대인 안드레이 크랍첸코의 제6전차군의 활약으로 포위망이 완성되었지만 바투틴은 제6전차군을 공세종말점의 한계 이상으로 진격시키는 실수를 범했다. 결국 제6 전차군의 느슨해진 포위망이 뚫리고 바투틴이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함에 따라 체르카시 포위전은 소련의 완승으로 끝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바투틴을 크게 질책하며 그의 원수 승진을 보류했다.

2.6. 최후

1944년 2월 바투틴은 다시 코네프의 제2우크라이나전선군과의 협격을 통해 카메네츠-포돌츠크 일대의 독일 제1기갑군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이 한창이던 그때 슬라브타 일대를 시찰하던 바투틴은 우크라이나 봉기군의 공격을 받았다.

바투틴은 게릴라의 총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키예프의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3] 바투틴은 6주간 상처와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1944년 4월 15일 43세 나이에 전사했다. 그의 형제인 아파나시와 세묜도 1944년 2월과 3월에 전사하는 바람에 바투틴의 어머니 베라는 두 달 사이에 세 아들의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3. 평가

사망 후 마린스키 공원에 묻혔다. 독소전쟁 중 바투틴의 활약은 적지 않았으며 그의 활약을 기려 키이우와 도네츠크 등지에는 바투틴의 동상이 있다. 그러나 2014년 돈바스 전쟁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반러감정과 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우호감정이 늘어나면서 후손들이 2015년 그의 무덤을 모스크바로 이장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했다. 한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동상이 2017년 빨간색 페인트칠을 당하는 등 반달을 당했다. 2018년에는 다른 지역에 있는 그의 흉상이 도난당하거나 파괴당하기도 했다. 2023년에는 결국 그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하르키우주의 한 마을은 이름은 니콜라이 바투틴의 이름을 딴 바투티네였는데 발레리 잘루즈니의 이름을 딴 잘루즈네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 참모장교 출신이라서 처음에는 지휘에 조금 서툴렀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작전을 입안하는 공을 세우는 등 그의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다. 바실렙스키와 주코프의 구상으로 알려진 천왕성 작전(스탈린그라드 반격)도 사실은 그의 아이디어였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몇번이나 낙관론에 빠져 작전을 시행하다 패배를 당하고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완승을 놓쳐 버리는 등 부정적인 모습도 조금 보이고 있다.

4. 기타 매체



[1] 그러나 데미얀스크 포위전에서의 공중 보급 성공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헤르만 괴링이 공중 보급의 효율을 과신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2] 이 때문에 한동안 바투틴은 바실렙스키의 낙하산이란 말이 돌았다. [3] 이에 주코프가 바투틴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제1우크라이나전선군을 직할로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