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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로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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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 패더럴 리그 / 니그로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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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1800년대 중반, 태동기2.2. 180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의 흑인 추방2.3. 1900년대 초반, 니그로리그 설립
2.3.1. 흥행
2.4. 1900년대 중반, 몰락2.5. 202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편입
3. 이모저모4.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니그로리그 관련 인물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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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egro Leagues(s가 붙은 것에 주의), 니그로리그

과거 흑백 분리 시대 유색 인종이 뛰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리그. '공식적으로' 메이저 리그가 맞다.

1920년 경부터 1960년대까지 존재했던 미국의 '여러' 흑인[1] 야구 리그를 말한다.

2. 역사

2.1. 1800년대 중반, 태동기

1800년대 중반 미국 동부에서는 야구가 유행을 하기 시작했는데 흑인들 또한 이러한 유행을 타고 야구를 즐기게 되었다. 특히 남북 전쟁 전후로 군인들이 여가시간에 야구를 즐기는 등 미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자연스럽게 대중 스포츠로서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리하여 1800년대 중후반에는 군인, 실업, 대학 팀등 다양한 각계의 분야에서 흑인 야구팀이 생기게 된다. 특히 당시 미국에서 가장 흑인이 많은 도시 중 하나였던 필라델피아에서는 필라델피아 피티안스를 비롯한 많은 팀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있었다.

2.2. 180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의 흑인 추방

당시 메이저리그 팀에서도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으며, 특히 흑인 야구 팀의 주축 선수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시도하기도 했다. 첫 번째 흑인 프로 선수였던 버드 파울러는 좋은 활약으로 마이너리그에서 각광받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을 지켜본 메이저리그에서는 흑인 선수를 영입하려는 시도를 하게되었고, 그리하여 최초의 흑인 메이저리거가 탄생하게 된다.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2](이하 AA) 소속 팀인 톨리도 블루스타킹스는 1883년 형제 야구 선수였던 플리트 워커와 웰디 워커를 영입했다. 워커 형제의 아버지는 당시로써는 드물었던 흑인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백인인 흑백 혼혈이었다. 특히 플리트는 명문 대학교인 미시간 대학교에서도 포수로써 맹활약을 한 유망주였으며, 웰디는 오벌린 대학에서 최고의 베이스 런너로 각광받던 유망주였다. 톨레도 측 또한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당시에 존재했던 흑백차별을 돌파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플리트 워커가 참가한 첫 연습 경기부터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최고의 인기 스타이자 시카고 화이트스타킹스의 선수 겸 감독이었던 캡 앤슨이 플리트 워커가 포수로 있다는 것을 알자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던 것. 결국 감독 찰리 모튼이 해당 경기에서 워커를 제외하겠다고 선언하고서야 경기가 속행될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 이후로 플리트 워커가 메이저리그에서 커리어 아웃되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음 해인 1884년에도 톨리도와 시카고 간의 연습 경기가 있었는데, 이 때는 불명확한 이유로[3] 플리트가 선수 명단에서 빠진 채 게임이 진행되기도 했다. 이 해 5월 1일에, 플리트 워커는 간신히 메이저 리그에 최초의 흑인 선수로 데뷔하게 되었고, 웰디 워커도 7월 15일에 두 번째 흑인 선수로 데뷔하게 된다. 웰디 워커는 고작 5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지만, 플리트 워커는 디콘 맥과이어와 함께 팀의 안방을 책임졌으며, 타격에서도 .264의 타율과 .641의 OPS를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4] 그러나 플리트 워커는 시즌을 마친 뒤 다시 마이너리그로 돌아가야 했다.

팀원이었던 토니 멀레인[5]은 플리트 워커가 포수일 때 사인과 정반대로 던지기도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던 등 백인 팀원과 결국 융화되지 못했던 점이 가장 컸고, 팀에서 입지가 좁았던 플리트와 웰디는 결국 팀에서 방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

2.3. 1900년대 초반, 니그로리그 설립

메이저리그의 인종차별 분위기가 개선될 조짐이 보이지 않자 흑인 선수들은 자신들만의 리그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1920년 루브 포스터가 8개의 흑인 야구팀들로 구성된 니그로 내셔널리그를 결성해 기대 이상의 인기를 모으자, 1923년 이스턴 컬러드리그, 1937년 니그로 아메리칸리그 등 여러 리그들이 탄생한다. 니그로리그는 메이저리그와 비교해 격렬하면서도 오락적인 요소를 섞어 관중들을 끌어들였고, 메이저리그 팀들과의 순회 경기에서 통산 309승 129패라는 뛰어난 기록도 남겼다.

믿기 힘든 기록이지만 통산 약 2000승과 3만 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는 사첼 페이지, 체력부담이 큰 포수를 맡았음에도 단일 시즌 84홈런 통산 0.370 정도의 타율과 800개 이상의 홈런을 때린 조시 깁슨 등이 니그로 리그 소속 선수로 뛰었다. 조시 깁슨은 메이저 올스타팀과의 경기에서 디지 딘, 조니 반더 미어 등의 투수들을 상대로 61타석 5홈런 0.426의 타율을 기록한 바 있다.

이후로 1947년까지 몇십년 동안은, 메이저리그는 백인 선수들만의 무대가 되었고, 흑인 선수들 (그리고 흑인피가 섞인 중남미 선수들)은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니그로리그에서만 뛰어야 했다.

2.3.1. 흥행

체계가 잘 잡힌 메이저리그에 비해서, 흥행(정확히는 '수익')에도 약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각자만의 구장이 있었고, 시즌 시작하기 전에 이미 그 시즌의 스케줄이 잡히지만, 니그로리그는 자기 팀만의 구장이 없어서 홈에서나 원정에서나 경기때마다 경기장을 빌려서 하는 식이였다. 이러다보니 큰 도시에서는 메이저리그 팀의 구장을 빌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메이저리그 스케줄이 정해진 후에야 스케줄을 꾸릴 수가 있었다.

니그로리그는 비싼 구장 대여비로 표값의 일부를 잃었고, 구장에서 파는 음식으로 나온 수익은 구장의 주인, 즉 메이저리그팀 구단주의 주머니로 들어갔기 때문에 흥행에 비해서 수익성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은 메이저리그 구단주들이 유색인종이 메이저리그에 진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원인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구장을 쓰지 않는 날에는 니그로리그 팀이 와서 임대료를 내주고 음식팔이도 해주니, 니그로리그가 없어지면 오히려 그들의 수익이 줄어드는 상황이였으니까.

그러는 중에 니그로리그 선수들은 메이저리그 구장을 사용하는 동안 락커룸이나 샤워시설 사용도 금지되었다. 돈을 내고 구장을 빌리지만, 시설을 제대로 사용할 수도 없었던 것.

그나마 구장을 빌릴수나 있으면 다행이었고, 구장을 빌릴수가 없으면, 메이저리그가 없는 중소도시로 원정을 가서 경기를 했어야하는 등 barnstorming(그냥 아무 동네나 가서 그 동네에 있는 야구팀과 경기를 하는 것. 어떻게 보면 야구판 도장깨기이다.)을 하기도 했다

상기된 오락적인 요소의 예시로는 사첼 페이지가 벌인 포수를 제외한 모든 야수를 덕아웃으로 보내놓고 9구 3탈삼진으로 이닝 끝내기(...)와 같은 것들이 있다. 도시전설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다수의 증언자가 있는데다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일로 치고 있다.

이런 열악한 상황속에서도 니그로리그 경기의 관중수는 메이저리그 경기보다 높은 경우도 많았다. 니그로리그에도 사첼 페이지 등의 인종을 초월한 리빙 레전드들이 있었고,[6] 이런 선수들이 있는 팀이 하는 경기는 흑인들만 아니라 백인 관중들도 관심을 가지고 관람했었다. 그 높은 관중수가 그들만의 수익으로 이어이지 않는 게 문제지만...

골때리는 건, 메이저리그팀이 없는 남부의 작은 도시에서 경기를 할 때는 당연히 프로야구 수준의 경기를 보러오는 백인관중들도 있었고, 이 백인관중들도 경기중에는 흑인선수들을 응원했지만, 경기가 끝난 후에 선수들이 호텔에 체크인 하거나 동네 음식점에 식사를 하러 가면 일하는 (백인관중이었던) 사람들이 동네 인종차별법에 의해서 그 선수들을 거절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특기할 점으로는 토니 스톤(Toni Stone)을 필두로 한 3명정도의 흑인 여성 선수가 뛰었다. 물론 마케팅적으로 이용하려고 쓴 선수가 아니냐고 하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실력으로 본인의 자리를 지켰다. 특히 토니 스톤은 흑인차별만으로도 서러운데 흑인 남성 선수들로부터 여성차별까지 받아가면서도 실력으로 선발 자리를 지켰다. 포지션은 2루수. 피지컬 좋은 유색인종 굇수들이 날뛰던 니그로리그 자체가 매우 격렬했던데다가 여성차별로 틈만 나면 밀쳐지고 걷어차이고 엄청난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그럴수록 더 좋은 플레이로 돌아왔다고. 선수, 선수 겸 코치, 감독 경력을 합쳐 70년을 야구장에서 보낸 전설적인 니그로리그의 1루수 벅 오닐도 "여자치고 괜찮은게 아니라 정말 좋은 플레이를 했다. 매우 부드러운 플레이를 하던 선수였다."고 기억했다.

영화 그들만의 리그에 나온 AAGPBL[7]은 여성들만 뛰던 리그였으니 예외로 치고, 야구가 생겨난지 약 150년 가까이 된 2020년대인 현재까지도 프로야구는 금녀의 영역이다. 하물며 여성 인권이 더 낮은 그 당시에는 더욱 여성이 경기를 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대에 여성으로서 남성 선수들과 같이 프로급 야구경기를 하였으니 놀라울 따름. 공식적으로 니그로리그의 역사는 메이저리그의 역사이니 토니 스톤은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며 다년간 뛴 최초의 여성 메이저리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2.4. 1900년대 중반, 몰락

니그로리그의 몰락은 1947년부터 시작된다. 일단 1945년 여름에 브루클린 다저스의 브랜치 리키 재키 로빈슨을 영입했고, 재키 로빈슨은 1946 시즌을 몬트리올 로열스 마이너 리그에서 보낸 후, 1947년 4월에 다저스에서 데뷔한다. 그리고 몇달 후인 1947년 7월에는 아메리칸 리그의 첫 흑인 선수인 래리 도비[8]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데뷔를 하였고, 이를 시작으로 사첼 페이지, 돈 뉴컴[9], 로이 캄파넬라 등 뛰어난 흑인 선수들이 니그로 리그보다는 메이저 리그에서 뛰게 된다.

1948년에는 래리 도비 사첼 페이지를 앞세운 인디언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고, 몇년후인 1954년엔 윌리 메이스 몬테 어빈을 앞세운 자이언츠가, 1955년에는 재키 로빈슨 돈 뉴컴을 앞세운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였다.[10]

이렇게 우수한 흑인선수들이 하나둘씩 메이저리그에서 뛰게되고, 따라 흑인 관중들도 니그로 리그 경기들 보다 우수한 흑인 선수들이 뛰는 메이저 리그 경기들로 모이게 되고 경기마다 흑인 관중이 30% 이상 되는 경기들도 흔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만큼 니그로 리그의 질과 관중수가 줄어드는 것을 뜻하고, 니그로 리그의 상업성에 크게 타격을 입힌다.

결국 1951년 이후에 니그로 리그는 없어지고, 이후 흑인 야구선수들은 자유롭게 메이저리그에서 뛰게 된다.[11] 이 후에도 흑인들만의 팀이 당장 없어진건 아니지만, 니그로리그라는 체계가 없어졌으니 몇년 버티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니그로리그 출신으로서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한 선수는 1976년까지 뛴 행크 애런이었다.

모든 흑인 니그로리거들이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건 아니었기에 일부 선수들은 다른 미국의 독립리그 도미니카 공화국 등의 리그에서 뛰기도 했고 일본프로야구 한큐 브레이브스 등에서 초창기 외국인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2.5. 202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편입

2020년 12월 17일 니그로리그의 역사도 MLB의 역사로 편입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흑인 선수들의 메이저리그 금지령이 해제되기 전까지 같은 나라 안에서 얼마만큼의 기록을 가졌는지와 같은 당시 상황에 대한 연구 목적이 크지만, 역사를 받아들이면 기록도 받아들여야 하는 터라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 기록이 있으면 인정을 하면 되는데, 니그로리그 기록이 제대로 정립된 게 아니다보니 어디까지 인정을 해야 하는지 불분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니그로리그 홈런 1위인 조시 깁슨 같은 경우 약 800개의 홈런을 쳤다고 전해지지만 깁슨이 800개를 넘겼는지 아닌지에 대한 믿을 만한 기록이 없다. 일단 메이저리그 역사로 편입된 주요리그들의 공식전 홈런 기록 113개는 베이스볼 레퍼런스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러한 결정 때문에 기존의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 타자였던 테드 윌리엄스는 공식적으로는 이제 더 이상 마지막 4할 타자가 아니게 되었다. 테드 윌리엄스의 1941년 4할 기록 이후 1943년 니그로리그에서 4할을 친 조시 깁슨이 메이저리그 마지막 4할 타자가 되었다.

3. 이모저모

4. 나무위키에 문서가 있는 니그로리그 관련 인물

5. 관련 문서



[1] 정확히 말하면 미국 흑인뿐만 아니라 '비백인'으로 분류되는 남미 출신, 특히 쿠바 출신(당시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식민지에 가까운 처지였고 야구 교류도 매우 활발했다.) 선수도 메이저리그에서 배제되어 니그로리그에서 뛰었다. 쿠반 자이언츠(1885~1915), 뉴욕 큐반스(1939~1950) 등 쿠바계를 중심으로 히스패닉 선수로만 구성한 니그로리그 구단도 존재했을 정도다. [2] 내셔널리그에 밀려서 사라진 미국 최초의 메이저 리그 [3] 플리트가 부상이었다는 설도 있고, 이전과 같은 사태를 우려하여 경기 명단에서 제외했다는 설도 있다. [4] 이 해 AA 리그 타율은 .240, OPS는 .604였다. 이는 당시 투수 친화적이고, 발야구가 주가 되었던 근대 데드볼 시대 야구의 특성 때문이다. [5] 메이저 리그 최초의 스위치 투수로 유명하다. [6] 재키 로빈슨은 오히려 이런 리빙 레전드들에 비해 실력적으로는 한수 처지는 선수였고, 백인 야구팬들에게는 그리 알려져있지 않았지만, 학력+장교로 군복무 기록+젊은 나이+성격 등의 외적인 조건들이 맞춰줘서 브랜치 리키에서 선택받았다. 재키 로빈슨의 전기영화 42에서는 영입 리스트의 니그로리그 선수들을 살펴보며 구단 직원의 사첼 페이지 영입 추천에 브렌치 리키는 너무 늙었다며 장래가 있는 선수를 원한다고 말했다. [7] All-American Girls Professional Baseball League [8] 이 선수도 재키 로빈슨 못지 않은 실력 있는 선수였다. 올스타 7번, 아메리칸 리그 홈런왕 2번, 아메리칸 리그 득점왕 1번 등의 기록이 그의 실력을 증명한다. 이 선수도 물론 선수생활 중 많은 인종차별주위자들의 야유와 협박을 견디면서 이겨냈지만, 재키 로빈슨보다 몇 달 늦게 데뷔했다는 이유로 철저한 콩라인이 되어 버렸고, 인지도도 훨씬 떨어진다. 지못미 [9] 1956년 사이영상 초대 수상 투수. [10] 게다가 다저스는 월드시리즈 우승은 1955년에서야 했지만 그전에 우수한 흑인선수들을 토대로해서 1947, 1949, 1952, 1953년에 꾸준히 내서날리그 우승을 한 강호로 자리잡았다. [11] 마틴 루터 킹 문서나 맬컴 엑스 문서 등에서 볼 수 있듯, 미국 사회에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만연했고 야구계라고 예외가 아니라 아마야구, 마이너리그, 심지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선수들도 각종 협박과 야유, 불이익에 시달리는 등 곡절을 많이 겪어야 했다. 메이저리그 구단들 중에도 50년대 중후반까지 흑인 선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구단들이 있었다. 로빈슨이 MLB에 입성할 당시 존재했던 구단들 중 가장 늦게 흑인 선수에 문호를 개방한 구단은 보스턴 레드삭스(1959년, 펌시 그린(Pumpsie Green) 내야수)였다. 이마저도 절대로 콜업을 안 시키려던 레드삭스 프론트를 지역 흑인 민권운동가들이 항의운동까지 벌이며 보챈 끝에 비로소 콜업된 것. [12] 이 사람은 인종차별이 만연한 그 시절에 흑인 남편과 결혼하고 함께 뉴저지 주를 연고로 하는 뉴어크 이글스를 경영하였다. 니그로리그 최초로 에어컨 달린 버스를 구매하는 등 야구 인프라뿐 아니라 인권운동 역시 활발하게 하였으며 미국 최대 흑인인권단체 NAACP 창설에도 참여한 바 있다. 뿐만 아니라 경기 도중 사인도 내고 투수 등판도 지시했으며 래리 도비 몬테 어빈과 같은 선수 발굴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1946년 니그로리그 월드시리즈에서 자신의 팀을 우승시키기도 한다. 인종장벽이 무너진 후 1948년 자신의 팀은 해체되었으며 1981년 8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13]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멕시칸 리그의 총재였던 호르헤 파스켈(Jorge Pasquel)의 공이 컸는데, 그는 미국 제국주의와 인종 차별주의를 대단히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