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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용의 역임 직책 및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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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배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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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김철용 金哲鎔 | Kim Cheol-Y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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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4년 4월 27일 ([age(1954-04-27)]세) | |
전라북도
군산시 (現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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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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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76cm | |
직업 | 배구 감독 | |
학력 |
군산북중학교 (졸업) 성지공업고등학교 (졸업) 성균관대학교 (학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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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감독 |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 배구부 (1982~1986) 일신여자중학교 배구부 (1986~1987) 호남정유-LG정유 배구단 (1987~2003) 대한민국 여자 대표팀 (1993~2001, 2004, 2016~2017) 천안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2006) 중앙여자중학교 배구부 (2007~2009) 페루 여자 대표팀 (2009~2011) 중앙여자고등학교 배구부 (2012~ / 총감독) |
종교 | 무종교 → 개신교( 장로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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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구인. 2022년 11월 25일에 대한배구협회에서 여자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됐다.2. 감독 경력
1980년 송림중학교ㆍ 송림고등학교에서 체육교사 겸 감독으로 활동하던 김철용 감독은 1982년 일신여상 배구부 감독을 맡게 된다. 이후 특유의 카리스마와 지도력을 발휘하여 팀을 강하게 만들었고, 1984년 대통령배 고교 선수권 결승에서 성암여자상업고등학교를 꺾고 5연패를 달성했으며 팀은 114연승을 기록하게 된다. 일신여자상업고등학교의 주역에는 여자배구의 전설적인 세터 이도희도 있었다.그는 일신여상의 118연승을 만들었지만 학교와의 갈등 속에 1986년 일신여자중학교 감독이던 류화석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일신여중으로 좌천되었다가 [1] 1987년 호남정유의 사령탑에 오르게 된다. 이 당시 호남정유는 1970년대 창단한 이후 현대와 미도파 등쌀에 밀려 그저 그런 팀으로 전전하고 있었다. 그가 취임한 후 일신여상 때 키운 수제자 이도희를 중심으로 1988년 장윤희가 입단하면서 팀은 이전과 전혀 다른 팀으로 변하게 된다.
1989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이도희와 장윤희의 힘을 앞세워 양강구도 중 하나였던 박미희의 미도파를 꺾고, 최강 지경희[2]를 앞세운 현대와 결승에서 맞붙었다. 아쉽게 현대에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미도파와 현대의 양강구도를 무너뜨렸고, 이는 호남정유의 무적 시대를 예고하는 서막에 불과했다.
1990년에는 파란을 일으켰던 어린 선수들이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고, 우승에 기대를 모았지만 1~2차 대회 최종승점에서 다른팀들에게 밀리면서 이미 결승은 좌절되어 있었다. 김철용 감독은 어차피 결승에 못 올라가는거 신인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고, 이도희, 장윤희, 홍지연, 김호정, 이정선 등 주축 멤버들을 전부 벤치에 앉혔다. 선경은 호남정유가 대농을 이겨줘야 결승에 오를 수 있었지만, 호남정유가 전부 신인들을 내보내면서 대농에게 1시간만에 3:0으로 패배하였고 결국 대농이 결승에 올라가게 되었다. 선경은 호남정유의 황당한 라인업으로 대농이 승점을 확보하며 결승진출이 좌절되었고 힘이 빠졌는지 현대에게 무기력하게 패하고 만다. 조금은 찜찜하게 결승에 진출했던 대농은 결국 현대에게 패하면서 현대가 우승팀이 되었고, 풀 전력으로 나온 호남정유는 3~4위전에서 선경에게 패배하였다.
호남정유는 1991년 대통령배 결승에서 영원한 우승후보 현대와 또 다시 맞붙었다. 호남정유는 이동공격의 여왕 홍지연과 다재다능한 박수정까지 가세하여 전력이 더욱더 막강해져 있었다. 결국 현대를 꺾고 1991년 대통령배에서 우승하며 첫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이후 1993년 제 10회 대통령배 우승을 하면서 3연패를 달성하였고, 1996년에는 제2의 장윤희라 불리던 정선혜까지 가세하여 6연패의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누가 그들을 막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못하던 때, 그들에게도 위기는 찾아온다.
1997년 호남정유에서 LG정유로 개명되었고, 결승에서 선경 인더스트리와 맞붙게 된다. LG정유는 세터 이도희의 은퇴로 전력이 약해져 있었고 알고도 못막는 선경의 강혜미 - 장소연 콤비의 이동공격에 밀리면서 시리즈 전적 2:1로 몰리게 된다. 4차전에서도 2:1로 뒤지던 호남정유. 여기서 패배하면 우승을 내줘야하는 위기의 순간 김철용 감독이 타임아웃을 부르며 독사기질을 발휘한다.
김철용 감독 : 니가 타이밍 맞춰. 아니면 ! 백 머리 뒤에 니가 잘 때리는 거 때리라니까?! 네가 늦으니까 보고 뜬다니까. 연결되면 블록 타이밍 잡으려고 하지말고 그냥 넓혀. 게임 아직 안끝났어~~
홍지연의 빠른 백A가 코트에 꽂히는 것을 시작으로 LG정유는 흐름을 타기 시작하였고, 4세트 듀스 접전 끝에 세트를 따내면서 5세트로 이어가게 된다. 이후 선경은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 LG정유의 흐름을 막아내지 못했고, 5세트를 내주면서 시리즈 전적 동률을 이루게 된다. 시리즈 5차전. 결국은 LG정유가 3:0으로 승리하면서 7연패를 달성하게 되었고 특히나 LG정유와 선경의 명경기는 1990년대 침체기에 빠졌던 배구의 흥행을 다시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팬들과 관계자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특히 LG정유는 1991년 3월부터 1995년 1월 2일까지 92연승을 기록하였고[3] 1월 3일 선경 인더스트리 배구단에게 1:3으로 패하면서 연승행진이 종료된다. 공교롭게도 이때 선경의 감독은 1986년 일신여상에서 좌천되어 일신여중에 갈 때 서로 감독직을 바꿨던 류화석이었다.
LG정유 감독 재직 중이던 그는 1993년부터 여자대표팀을 지휘해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고,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여자배구 국가대표팀을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2003년 박삼용 코치에게 LG정유의 감독직을 넘겼다. 2006년 초 시즌 중 흥국생명의 감독을 맡게 되었으나, 2006년 말 선수단과의 마찰로 다시 황현주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2009년에는 페루 여자배구 대표팀을 맡기도 하였으며, 2년의 계약종료 후 추계초등학교- 중앙여자중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 배구부의 총감독이 되었다. 그 당시 GS칼텍스의 복귀설이 있기도 하였지만 불발되었다.
2012년부터 MBC SPORTS+ 배구 해설위원을 지내다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이후 AVC컵을 대비한 여자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됐으나, 2017년 홍성진 감독이 선임되면서 소리없이 물러났다.
2003년 7월 3일 [한국일보] 여자배구 국가대표 감독 김철용씨
3. 감독 스타일
호남정유 선수들의 낮은 신체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정확한 리시브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패턴 플레이와 견고한 수비벽을 만들었다. 선수들의 신장이 낮았기 때문에 큰 공격보다는 창의적인 공격들이 필요했는데, 이 부분에서 이도희의 존재감이 상당했고 장윤희, 정선혜, 박수정 등의 뛰어난 리시브와 디그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였다. 호남정유는 블로킹을 따돌리기 위해 한 박자 빠른 C퀵을 사용하기도 하였고, 장윤희는 C퀵이 왔을때 대각으로 정확하게 때려냈다. 1997년 선경과의 결승전에서 우승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빠르고 다양한 공격력도 있었지만 상대팀을 질리게 만드는 수비력이 받쳐줬기 가능한 일이었다.김철용 감독의 이런 지도력은 대표팀에서도 이어졌으며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는 중국과 일본을 제치고 금메달을 따 냈다. 김철용 감독의 대표팀은 정확한 리시브를 바탕으로 신체조건이 좋은 유럽이나 남미팀들의 높은 벽을 따돌리기 위해 C퀵이나 속공, 이동공격 등 빠른 공격들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상대팀의 공격을 기절할 만큼 끈질긴 수비로 버텨내었다. 김철용 감독의 지도력은 아시아 배구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줬다. 다만 그게 공격에서도 확실하지 않으면 강공을 포기하고 다시 디그해 세팅하는 극한의 수비배구라 노잼은 물론이고 경기시간 늘어지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사이드아웃제 시절에는 1경기 3대 0경기도 2시간을 찍고, 5세트라도 가면 3시간을 찍는 수면배구화로 인해 TV중계 외면의 주범으로 찍히기도 했다. 장윤희와 (국대한정)김남순이 없었다거나, 컨디션이 안좋아서 손이 안감기면 호남정유 경기는 강타 한번 제대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느리고 지리한 배구를 하게 된다.
2000년대에 황현주 감독이 있었다면 2010년대에는 이정철 감독이 있다. 그리고 1980년대와 1990년대 여자배구에는 김철용 감독이 있었다.[4]
김철용 감독은 감독으로서 엄청난 성과를 만들어냈지만, 그 과정 또한 아시아 배구의 진보를 이끌어 냈기에 지금까지도 여자배구의 명장으로서 계속해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올림픽 메달까지 이끌어냈으면 더욱 더 빛이 나는 명장이 되었을 수도 있다.
4. 신앙
배구계의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래서 처음 호남정유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매년마다 선수단이 고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부임 직후 훈련 이외의 시간에는 본인은 숙소에서 매일 금식 기도를 올렸다고 하며, 선수들에게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호남정유 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나면 한데 모여 어깨동무를 하며 코트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감독을 위시하여 선수들이 교회에 다니고 그래서인지 성적이 연전연승을 기록하게 되자, 언론에서는 호남정유 배구단에게 무적의 십자군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신앙은 어린 시절 누나의 손에 이끌려 교회 주일학교를 다니며 갖게 되었다고 하며, 현재 출석중인 교회는 예장통합 소속의 동막교회[5]이고, 現 직분은 장로. 신앙을 갖게 했던 것은 당시 호남정유 선수들이 그의 스파르타식 맹훈련 이후에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고 이것이 신앙과 조화를 이루면서 시너지 효과를 불러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다.그러나 후에 흥국생명 감독 시절에도 호남정유 시절에 했던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려다 구기란 등 고참 선수들의 반발에 부딪혀 자진사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6] 선수들의 증언으로는 시도때도 없는 기도는 기본이고 항상 교회에 나가라는 잔소리는 물론, 훈련 전후 미팅에서 훈련 얘기는 안 하고 설교만 했다거나 구기란 선수가 아끼는 달마도 그림을 함부로 태워버리는 만행 등(일명 달마도 사건)[7] 종교 강요 행위가 있었다고 하며, 지나친 60년대식 과도한 훈련으로 구기란 선수가 총대를 메고 훈련장을 이탈하고, 10여명의 선수들이 이탈하는 등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프런트의 직권으로 우승 직후였음에도 바로 해임당하고 마는 최악의 사태를 만들었다. 덕분에 개신교의 이미지에 똥칠을 한 배구감독으로 남게 되었다.
선발한 제자들이 훗날 개막장의 배구계 추락을 시키는 일을 내는 덕에 인성이 역시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