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문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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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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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은 1960년대 박정희 정부 시기부터 1980년대 전두환 정부에 이르기까지 30여 년간 야당 정치인으로서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화운동가였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으나, 대통령 재임 기간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임기 초반 역대 최고 지지율(84%)로 출발해 임기 말 역대 최저 지지율(6%)로 마무리했다는 사실은,[1] 김영삼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얼마나 극과 극으로 갈리는지 방증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둘러보아도 김영삼만큼 지지율 낙차가 컸던 정부수반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 김영삼을 긍정적으로 평하는 이들은 그가 개혁 대통령이었다는 점을 내세운다. 과감한 개혁으로 어두운 과거의 잔재를 청산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대통령 김영삼은 집권 그 자체만으로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32년 만에 등장한 문민(文民) 대통령이라는 민주적 상징성을 지녔고, 그 상징성에 걸맞게 취임 단 11일 만에 육군 내부의 불법 사조직인 하나회를 일거에 숙청함으로써 또 다른 군사 독재자가 출현할 가능성을 제거했다. 또한 전방위적인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펼쳐 뒤틀린 과거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기도 했다.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5.18 민주화운동의 명예를 회복시켰으며, 12.12 군사반란과 5.17 내란, 5.18 광주 학살과 제5공화국 시절의 인권 탄압 및 부정부패에 대해 큰 책임이 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등 신군부 인사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워 단죄했다.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가장 어두운 역사인 일제강점기의 잔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결단을 내렸다. 금융실명제 실시와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로 한국 사회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하지만 긍정적 측면만큼이나 부정적 측면도 상당히 짙다. 집권 5년 동안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대형 인명사고가 끊이지 않아 '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썼고, 아무런 공식 직함조차 없이 일명 '소통령'(小統領)으로 군림했던 차남 김현철은 끝내 한보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 친인척으로서는 처음으로 구속되면서 김영삼 대통령 레임덕의 신호탄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임기 말 발생한 IMF 외환 위기는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던 한국의 고도 성장기를 끝장냈고 이후의 한국 사회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는데, 여기에는 정치를 의식한 정부의 비상식적인 외환 운용과 김영삼 대통령 본인의 무지에 책임이 있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또한 민주- 진보 진영에서는 김영삼이 집권을 위해 3당 합당을 단행함으로써 군사독재 세력( 민정계, 공화계)과 손을 잡은 뒤 영남 지역주의를 등에 업고 영호남 지역갈등을 심화시켰다는 점, 1996년 노동법 날치기로 왜곡된 노사관계를 만들었다는 점도 크게 비판한다.
민주당계 정당에서 30년 넘게 활동하며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했음에도 이후 보수정당으로 옮겨 대통령까지 오른 인물이었다는 특징 때문에 민주 진영에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받는 그것, 보수 진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받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민주 진영에서는 기본적으로 민주화운동 공적은 인정하나 위 문단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3당 합당에 대해서 비판하는 입장인 한편, 보수 진영에서는 주로 산업화 시대를 띄우는 경향이 있어 ' 경제 파탄'의 이미지가 강한 김영삼에게는 관심도가 떨어지는 편이며,[2] 친박 계열 등 일부 극우 세력은 ' 좌파의 숙주' 정도로 폄하하기도 한다.
생전 민주화 진영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이자 부울경 지역의 맹주, 5.16 군사정변 이후 32년 만의 문민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위상을 생각하면 전직 대통령 선호도 조사에서도 자신이 정계에 데려왔던 노무현, 필생의 숙적이었던 박정희,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에 비하면 많이 초라한 게 사실이다. 특히 박정희와 김대중은 각자의 지역 기반인 대구·경북과 호남 지역에서 기성세대를 중심으로 여전히 많은 존경을 받으나, 김영삼은 자신의 지역 기반이었던 부산광역시 등지에서도 그다지 기억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2015년 11월 22일 서거 이후 언론을 통해 김영삼의 긍정적 측면이 재조명됨과 동시에 부정적 측면 또한 온전히 김영삼만의 책임은 아니라는 의견이 힘을 얻으면서 대중적 평가가 점차 좋아지는 추세에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11월 5주 한국갤럽 조사에 의하면 김영삼에 대한 평가는 긍정 40%, 부정 30%로 나타났으며, 보수 진영 대통령 중에서는 박정희와 함께 긍정이 더 우세한 둘 뿐인 대통령이었다.
2. 긍정적 평가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긍정적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3. 부정적 평가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부정적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논란이 있는 평가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논란이 있는 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이 기록은
2010년대 중반에야 경신된다. 역대 최저 지지율은
2016년 11월 4주
박근혜 전 대통령이 기록한 4%, 역대 최고 지지율은
2017년 6월 1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기록한 84%로 바뀌었다.
[2]
그나마 YS키즈 출신이었던
홍준표가
2017년
자유한국당 대표가 되면서 김영삼의 초상화를 당사에 거는 등 당 차원에서 재평가를 시작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