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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23:16:46

극동 전쟁

극동전쟁
계묘왜란|癸卯倭亂
러시아어: 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война
일본어: [ruby(極東戦争, ruby=きょくとうせんそう)]
영어: Far Eastern War
기간 1903년 10월 15일[1] ~ 1905년 3월 5일[2]
장소 대한제국, 청나라 만주 남부[3], 요동, 동해, 사할린
결과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승리, 일본 제국의 패배, 포츠머스 조약[4] 체결
영향 대한제국의 확고한 독립보장(국체유지)
일본제국의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영향력 말소
한러방위조약의 파기
강화도 조약 철폐, 한일간 새로운 평등조약 체결
대한제국의 남만주 이익권 획득
교전국

[[대한제국|]][[틀:국기|]][[틀:국기|]]
[[틀:깃발|]][[틀:깃발|]][[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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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알렉세이 쿠로팟킨|
알렉세이 쿠로팟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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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스테판 마카로프
[[틀:깃발|]][[틀:깃발|]][[틀:깃발|]]로만 콘드라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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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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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로버트 비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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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예브게니 이바노바치 알렉세예프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오스카르 그리펜베르크

[[틀:깃발|]][[틀:깃발|]][[틀:깃발|]]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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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틀:깃발|]][[틀:깃발|]] 김시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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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헤이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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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틀:깃발|]][[틀:깃발|]][[틀:깃발|]]136만 5,000명
제1, 2태평양함대
발트함대
[[틀:깃발|]][[틀:깃발|]][[틀:깃발|]]36만명
불특정 다수의 삼남지방 의병
[[틀:깃발|]][[틀:깃발|]][[틀:깃발|]]120만 명
연합함대
피해 규모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틀:깃발|]][[틀:깃발|]][[틀:깃발|]]민간인
사상자 70만 명 이상[7]
[[틀:깃발|]][[틀:깃발|]][[틀:깃발|]]사상자 60만여 명[8]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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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가도 공방전
평양 공방전
203고지 전투
봉천 전투
사창리 전투
원산 상륙작전
부산 해전
울릉도 상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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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전개
3.1. 한반도 전역3.2. 만주 전역3.3. 사라진 쓰시마 해전, 일본 패배의 결정타가 되다3.4. 포츠머스 조약, 전쟁의 끝
4. 원역사 러일전쟁과의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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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문서는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에서 연재중인 한국의 대체역사 소설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전쟁인 극동전쟁에 대해 서술한다. 작품 내에서 러일전쟁을 대신해 발발한 전쟁이다.

2. 배경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팽창 야욕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미 1890년대에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을미사변을 일으키는 등 노골적으로 아시아 영향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일본에 맞서 대한제국은 러시아에 협력하면서 일본을 견제코자 했다.

서구 열강들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1901년 대타협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야욕은 잠시 저지되는 듯 했으나 다들 이것이 잠시간의 유예일 뿐 영구 평화를 보장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러시아와 방위협정을 맺고 없는 살림을 쥐어짜 군비를 확충하는 등 살아남기 위해 가용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준비한다.

당연히 이 모든 준비는 일본이 보기에 마뜩찮아 보였고 후발주자인 대한제국을 무시하는 심리가 겹치며 러시아만 잡으면 모든게 해결되리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3국간 긴장감이 절정에 달하며 일본은 한국과 러시아에 최후통첩을 하고 한국이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이 발발하게된다.

3. 전개

3.1. 한반도 전역

이후 원역사대로 일본군이 제물포에 정박한 바랴그급 방호순양함과 코리에츠를 기습하며 전쟁이 시작된다. 당연히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방위동맹국으로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여 병력을 한반도로 보내 전쟁을 시작한다. 일본은 한국을 무시하고 있었고 이에 한반도 전선을 부가적 전선으로 여겼지만 그들이 마주한 것은 그들의 예상보다도 거센 저항이었다.

우선 한반도에서 벌어진 첫번째 전투에서는 민영기가 지휘하는 3진위여단이 사령부의 명령까지 무시해가며 수도 한성으로 가는 길목인 경인가도를 결사방어하고자 한다. 일본군은 지금껏 자신들이 봐왔던 한국군의 상태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아군이 양적, 질적으로 모두 한국군을 압도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한국군의 방어선을 가볍게 격파하고 만주로 간 일본군 2군 및 3군과 신속히 합류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3진위여단이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상태에서 맥심 기관총 포대를 곳곳에 설치해놓고 신무기인 수류탄으로 맹렬하게 저항하였고 여단장 민영기가 전사하고 3진위여단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긴 했으나 5일간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며 일본군에 생각지도 못한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된다. 3진위여단이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한 덕분에 일본군은 사단을 재편성하느라 한동안 진격하지 못했고 덕분에 아군이 후방에서 대비하고 주민들이 피난을 떠날 시간을 어느정도 벌 수 있었다.

물론 경인가도를 뚫은 만큼 한국 정부는 한성을 지킬 수 없었고 함흥으로 정부를 옮기는 한편 지원온 러시아군과 함께 평양 남부에 방어선을 설치한다. 일본은 이를 공략하기 위해 정예병인 근위사단을 투입하지만 되레 한러 연합군에게 털리며 근위사단이 괴멸급 피해를 입고 만다. 근위사단이 털리면서 일본은 사단보다 더 큰 부대를 한반도에 잔류시켜야 했고 이로 말미암아 일본 제 1군이 한반도에 발이 묶여버린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간에는 근본적으로 뒤집기 어려운 국가간 체급 차이가 있었고 일본은 이를 잘 이용해 기어이 평양 남부 방어선을 뚫으며 함경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을 점령한다. 이에 한국군은 일본군 점령지 내부에 있는 의병들이나 진위대에게 지속적으로 일본군의 보급선을 공격하게 하는 한편 동해 제해권을 꽉 쥐고 있던 한러 해군이 일본 수송선단을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일본군의 보급을 사실상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대항한다. 보급이 잘 되지 않자 일본군은 더이상 진격하지 못한 채 결국 병력을 후방으로 돌려 삼광작전이라는 절멸 작전을 벌이기에 이른다. 가축 하나 남기지 않은 잔혹한 범죄로 경상, 전라, 충청 삼남 지방은 호적상 인구 700만 중 70만이 학살당해 사라졌으며 종군기자 어니스트 베델이 이를 목격하고 증거를 모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일본이 여론전에서 밀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렇게 한반도 전선이 지지부진해질 무렵 러시아군이 봉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승부의 추는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만주 전역의 패배로 일본군이 여력을 상실했음을 안 한국군은 원산 상륙작전을 세워 성공 시킴으로써 일본군에게 한 방을 제대로 때려주게 되고 뒤를 이은 한러 기병대의 대규모 전격전[9]까지 벌어지며 결국 일본군은 군산, 부산, 진해, 제물포를 제외한 모든 한반도 지역에서 축출된다.[10]

3.2. 만주 전역

한반도에서 혈전이 벌어질 동안 만주에서도 러시아와 일본의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일본군은 시작부터 꼬이게 되는데 원역사에선 없던 대한제국의 참전으로 신속하게 만주로 진입해야 했을 1군이 한반도에 발이 묶이며 예상한 풀전력이 아닌 상태로 요동을 쳐야 했던 것이다. 원역사보다 약한 전력으론 로만 콘트라첸코가 요새화시킨 뤼순을 뚫기란 더 어려웠고 뤼순의 러시아 군은 원역사보다도 2달을 더 버티며 2군과 3군의 소모를 강요했다. 그나마 전쟁 시작기간이 당겨진 덕에 러시아도 제대로 준비가 되지 못했고 일본군이 이를 살리며 간신히 뤼순을 점령하지만 대한제국군의 방해로 보급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기세가 있던 만큼 어찌저찌 밀어붙이는 듯 싶었으나 타이밍 좋게 러시아 유럽 본토에서 파견된 그리펜베르크의 원군이 도착하며 승부의 추는 기울기 시작했다. 특히 그리펜베르크는 한국군의 군제 개혁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한국군이 만들어낸 전술을 철저히 익힌 정예 부대를 만들어 끌고 왔고 그 부대들의 힘으로 봉천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며 일본군은 10만여명만 겨우 살아남아 뤼순으로 도주한다.

3.3. 사라진 쓰시마 해전, 일본 패배의 결정타가 되다

이렇게 육지에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지만 일본에 희망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 희망이란 아직 건제한 일본 연합함대였고[11] 그들이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저지한다면 아직 유지중인 점령지들을 기반으로 승리를 주장할 여지가 있었다.

문제는 이것을 미래인이었던 김시혁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이고 즉각 러시아군 사령부에 발트함대의 항로를 바꾸게 해달라고 요구하나 증거가 부족한 탓에 반려되었고 이에 증거를 모아 보여주자 러시아 사령부도 즉각 명령문을 보내지만 이때 발트 함대는 이미 출발해버린 뒤였다.

이에 남은 방법은 바다로 나가서 발트함대를 찾아내어 명령문을 직접 전달하는 방법밖에 없었고 대한제국 해군이 작전을 수행하기로 한다. 대한제국 해군은 노련한 지휘관인 신순성의 활약으로 발트 함대와 조우해 명령문을 전달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최단루트인 대한해협을 놔두고 츠가루 해협이나 소야 해협으로 돌아가라는 것에 대해 이미 사실상의 세계일주를 하느라 지쳐있던 발트함대 구성원들이 반발을 했으나 신순성의 설득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받아들이며 그나마 짧은 거리인 츠가루 해협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쓰시마 해전이 사라진다.

이후 발트 함대가 대한 해협으로 오지 않자 도고 제독은 무기력하게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이 츠가루 해협을 통과할 때 일본 본토도 큰 충격에 휩싸인다. 이후 정보를 전달받은 연합함대가 부랴부랴 추격을 시작하지만 발트함대는 이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였다. 그리고 이 작전이 성공하며 극동전쟁은 한러연합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되었다. 따로 해전을 벌이거나 할 것도 없이, 장기전을 벌일 재력도 없고, 연해주를 침공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점령할 능력도 없던 일본에게 러시아 주력함대가 숨만 쉬고 있어도 말라죽는 미래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다.

3.4. 포츠머스 조약, 전쟁의 끝

<1905년 3월 5일 최종 종전협상안>
1.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은 대한제국에 대한 자주 독립을 인정하고, 모든 군대를 한반도에서 철수한다. 이는 조약 비준 30일 내로 수행되어야만 한다.
2. 지난 1901년 한성조약에 의거, 프랑스 공화국과 독일제국, 대영제국에 더불어 미합중국 역시 대한제국의 자주 독립 및 중립을 보장한다. 제3국이 이를 무시하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할 시 반드시 상호 협력을 통해 대응한다.
3. 러시아 제국과 대한제국이 체결한 러시아-한국 방위조약을 조약 체결 직후 3개월 내로 파기한다.
4. 전쟁 당사국들은 서로 간의 배상금을 물리지 않는다.
5. 일본제국은 점령 중인 뤼순과 다롄에서 철수하며, 러시아 제국의 조차권을 승인한다. 또한 대한제국 내의 점령지인 제물포, 군산, 진해, 부산에서도 전면 철수한다. 대신 남만주철도지선(가칭)에 있어서 러시아 제국 및 대한제국은 일본을 위시하여 미합중국 등의 다국적 합자 회사의 설립에 적극 참여한다.
6. 1876년 이래로 체결되었던 조일수호조규를 철폐하고, 새롭게 한일 간의 평등한 수교조약을 신속한 시기에 비준한다.
7. 러시아 및 대한제국은 동해와 오호츠크, 베링해 연안에서 일본제국의 어업권을 일부 보장한다. 단, 제주도 인근 해역에 대한 일본인들의 어업행위는 전면 금지한다.
8. 1903년 10월 15일 이래로 선포된 일본에 대한 대한제국의 방곡령 및 금 수출 통제를 철폐한다. 단 이는 조약 비준 30일 뒤에 시행한다.
9.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에서 일본 해군은 조건 없이 철수한다.
10. 모든 전쟁포로들을 신속히 송환한다. 이는 조약 체결 1년 내로 집행되어야만 한다.
11. 조약 체결 직후 24시간 내로 모든 전쟁행위가 중단되어야 한다.

일본 연합함대의 발트함대 저지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일본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미국의 중재하에 포츠머스에서 협상을 시작한다. 이 협상에는 대한제국도 승전국의 일원으로 당당히 참여했고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의 영향력을 완전히 없앴으며 남만주에 대한 이익 보장, 강화도 조약에 기반한 불평등조약 폐지 등 많은 이익을 얻는데 성공했다.

원역사의 러일전쟁의 결과로 대한제국은 사형선고를 당한것과 다름없었지만, 바뀐 역사에서 대한제국은 미래인 빙의자 주인공을 위시로 살아남기 위한 철저한 준비와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전쟁의 당사자로서 침략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승리를 거두었고, 암울한 미래를 완전히 바꾸게 된다. 물론 그 피해가 가벼운 것은 아니어서 큰 피해를 받은 삼남지방에서는 한창 일해야할 생산가능 인구 중심으로 최소 70만 명이 학살당했고 인구 조사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학살 피해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다. 농토도 4할가량이 황무지가 되어 10년넘게 걸려 복구를 진행시켰으며 북부 지방의 불만을 감수하면서도 삼남지방에서는 징집을 자제하고 있다. 승전의 대가로 남만주를 얻어내 인구와 경작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1차 대전 시기까지 복구에만 매달리고 있었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흔이었다.[12]

한편 장교 전사자만 3만 5천에 오야마 원수를 필두로 주요 지휘관들이 패전 책임을 지고 퇴역, 할복한 일본 육군은 야마가타 번벌을 제외한 군맥이 모두 끊어졌으며 세대 하나가 통째로 소멸되어 1차 대전 시기까지도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다. 질적으로 우수한 한국군에 양적 우위로 맞서기 위해 경제에 심각한 무리를 지우면서 육군의 규모를 키웠는데 정작 늘어난 육군을 지탱할 장교가 사라져 무리하게 뽑아올리다보니 겉으로만 멀쩡할 뿐 전쟁에 나서 싸울 준비는 하나도 갖추지 못한 허울뿐인 군대가 되버렸다.

4. 원역사 러일전쟁과의 차이점


[1] 대한제국의 대일선전포고일을 기준으로 함. [2] 최종 종전협상안 작성을 기준으로 함. [3] 이때 청나라의 만주 남부는 러시아령 다롄이 된 상태였다. [4] 원래역사와는 내용이 상이. 자세한 내용은 후술. [5] 주인공. 작품 오리지널 인물. [6] 대한제국에서 복무 중인 미국인 기병고문으로 작품 오리지널 인물이다. [7] 삼남지방 피해자 만이며 추가조사 중 마을단위로 사라진 희생자들이 더 발견되고 있다. [8] 이중 장교 사망자만 3만 5천. [9]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동전 교리에 전격전이라는 이름을 붙인것이 아니라 김시혁의 출정 연설을 언론이 기사화하며 편집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실체없는 조어이다. [10] 정확히 말한다면 언급된 지역들 외에도 점단위 점령지는 있지만 그곳도 점령이라기보다는 포위당해 말라 죽어가는 곳이라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하다. 실제협상에서도 일부러 살려주고 있다고 나온다 [11] 남해 해전에서 일부 군함이 침몰했으나 그 군함들은 청나라에서 받아온 구식 군함이라 전력에 직접적인 타격은 적었다. [12] 이범진, 이범윤 형제가 주장한 남만주 중국인 추방론을 김시혁이나 다른 내각 구성원들이 강하게 반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만주로 흘러 들어온 한족과 만주족들이 최소한 대한제국의 지배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 세금을 내고, 경작을 해준 덕분에 원활한 남만주 경영이 가능했고 1차 대전에는 전투 병력의 3배에 달하는 노무단의 주축이 되어 본토의 징집 부담을 완화해주었다. 삼남에서 대규모 징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마저 없었다면 관서, 관북은 성인남자 씨가 말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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