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李圭泰생몰년 미상으로,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다. 자는 기원(基元), 호는 호은(湖隱)으로, 충청남도 청양 출신이다.
2. 생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장위영 영관이 되었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양호도순무영 별군관에 임명되었다.당시 동학군에 대한 정부군의 선봉장으로서 통위영의 병졸을 이끌고 청주·공주지역에 출동하였다. 직접 공주 및 목천세성 전투에 참가하여 동학군의 동태를 보고했고 일정한 전공도 세웠다.[1][2]
1895년 을미사변 후 홍주를 중심으로 김복한과 이설, 송창식, 송병찬, 임한주, 이근주 등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홍주의병에 대하여 중군으로서 이들을 진압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오히려 의병장 김복한, 유진원 등과 내통하여 일본군을 죽이고 의병이 되었다. 그 뒤 홍주성이 정부군에 의하여 함락되자 안면도로 도피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
-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에서는 홍계훈과 함께 김시혁이 처음 만난 후원자이자 전우. 경복궁 습격에서 김시혁의 활약을 눈여겨보고 먼저 다가와 친한 사이가 되었다.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함께 했으며 홍계훈 전사 이후 든든한 상급이자 한성구락부 창설 멤버로서 김시혁의 방식을 실현하는데 조력을 아끼지 않는다. 고종의 무리한 대청 선전포고와 남만주 진격때 평안도 방면군 사령관을 맡아 중앙에서 뭐라든 무리한 진격을 지양하고, 한인촌들만 점령하는 신중한 움직임으로 불필요한 희생을 막았다. 이때 고종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틀어져 2차 쿠데타 때 근위사단장으로서 적극 협력했으며 극동 전쟁이 발발하자 근위사단장 겸 황해, 경기, 강원 병마를 통솔하는 삼도통어사를 겸임했다. 이시기 주로 담당한 업무는 근위사단장으로 고종을 보필하며 그의 헛소리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극동 전쟁 종결 후 육군 대장 겸 원수부 총관으로 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