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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5 01:59:15

신순성

파일:신순성.jpg

愼順晟
1878년 1월 27일 ~ 1944년 2월 7일 (향년 66세)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상선사관이다. 본관은 거창(居昌)[1], 자는 시경(時景).

2. 생애

1878년 1월 27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신제원(愼濟遠, 1841 ~ 1906. 5. 15)과 어머니 함안 조씨[2]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관립 한성일어학교를 수료하고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구마모토(熊本)상업학교[3] 고용인으로 일하면서 도쿄 간다(神田)상업학교[4] 예비 항해학교 #를 졸업하였고, 이어 1901년 10월 동경고등상선학교[5][6]를 졸업하면서 #,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갑종 해기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 후에 상선사관, 조선 말부터 들여온 대한제국 황실 혹은 정부 소유 함정들인 창룡호와 현익호에 부함장 등으로 근무하다가 1902년에 대한제국군이 첫 근대식 군함인 양무호를 도입하면서 근대적인 배를 몰아본 경험이 있는 그를 초대 함장으로 초빙하였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양무호는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고 1904년에 그는 세관순시선인 광제호로 소속을 옮겼다. 1910년에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그는 민간으로 이동해 상선사관으로 근무하였다. 군 복무기간은 결국 1902년에서 1904년으로 짧은 편이었다. 최종계급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함장이란 직위등으로 볼 때 영관급 장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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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들과 찍은 사진. 세관순시선 광제호 시절의 사진이며 맨 뒷줄 오른쪽 끝이 신순성 3등운전사이다.
경술국치 후에는 광제호가 조선총독부 체신국 소속의 관용선으로 전환되었고, 이름도 코사이마루(光濟丸; 광제환)으로 바뀌었다. 1912년 조선우선주식회사가 발족되어 광제호를 이양하자 신순성은 타 상선의 선장으로 근무하다가, 1914년부터 다시 광제호를 맡게 되었다. 1914년 코사이마루의 2등운전사 촉탁으로 근무하였으며,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3등운전사 촉탁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인천 해원양성소가 설립되고 코사이마루는 해원양성소 실습선으로 전환되었다. # 이에 신순성은 1919년부터 1924년까지는 코사이마루의 촉탁을 맡으면서 1920년부터는 인천 해원양성소 교무계의 촉탁도 겸직하였다. # 이후 1938년까지 인천해원양성소 실습선 광제호 실습교관으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을 1년 6개월 앞두고 1944년 2월 7일 사망했다.

3. 여담

그가 한일합방 전날 광제호에서 내린 태극기를 개인적으로 보관해 왔고, 그 태극기는 1945년 광복이 이루어지자 당시 한국에 남아있던 유일한 기선인 부산호의 취항식에서 다시 게양되었다. 신순성 본인은 광복을 1년 앞두고 1944년에 세상을 떠난 터라 이를 직접 보진 못 했고, 아들 신태범(愼兌範) 의학박사 #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기증했다.

조선인들은 배 타는 일을 천한 일로 여겨 기피했는데,[7] 그는 일찌감치 해양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점에선 항공력의 중요성을 간파한 노백린과 비슷했다.

조선이나 구한국 배경 대체역사물에선 해군 제독이라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1] 장성공파(章成公派) 30세 성(晟) 항렬. [2] 조기룡(趙基龍)의 딸이다. [3] 구마모토(熊本)현립구마모토상업고등학교의 전신이다. [4] 토시마가쿠인(豊島學院)고등학교의 전신이다. [5] 現 도쿄 해양대학 [6] 원래는 해군장교를 양성할 계획으로 일본해군병학교에 유학하도록 유도했지만 일본 정부가 불허했다. 조선인과 대만인 입학자를 조금이라도 받은 일본육군사관학교와 달리 순혈주의가 강한 일본해군병학교는 학교 문을 닫을 때까지 외국인을 받지 않았다. [7] 선상에서 쓰러지는 것이면 몰라도 바다에 빠져 죽을 경우에는 주검을 찾기가 거의 불가능한데, 이는 사망자를 매장하고 상을 치르는 유교에서 매우 기피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