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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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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1946-47 시즌 ~ 2011-12 시즌

1946년 BAA 출범 당시 필라델피아 아레나 소유주인 피터 A. 타이렐의 주도로 '필라델피아 워리어스'로 창단됐고, 초대 감독직에 유대인 세미프로팀 '필라델피아 스파스' 감독이던 에디 고틀립을 앉혔다. 창단 첫 시즌부터 영입된 머리 주립대학교(Murray State) 출신 슈터 '점핑 조' 조 펄크스를 필두로 두 차례 컨퍼런스 우승과 한 차례 챔피언 결정전 우승에 성공했다.

1952년에는 고틀립 감독이 직접 팀을 사서 구단주를 겸했고, 1954년에 펄크스가 은퇴하자 팀은 폴 아리진, 닐 존스턴, 톰 골라[1] 3인방을 주축으로 하여 1955-56 시즌에 다시 NBA 정상을 차지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1959년에 워리어스는 연고지 우선 지명으로 필라델피아 출신인 윌트 체임벌린을 뽑으며 강호로 계속 군림했다.[2] 체임벌린은 그 괴수 같은 능력을 유감없이 뽐내며 워리어스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득점왕, 리바운드 왕, 한 경기 100득점 등 그야말로 골밑의 제왕으로 군림하면서 워리어스의 간판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그는 반지의 제왕은 되지 못했는데, 동 시기에 빌 러셀 보스턴 셀틱스가 군림했기 때문이다.

1962년에 샌프란시스코 지역 방송 프로듀서 프랭클린 뮬리(Franklin Mieuli, 1920~2010)가 고틀립 구단주로부터 팀을 인수하면서 서부로 이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체임벌린을 1965년 고향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로 떠나보낸 후 1965 드래프트에서 마이애미대 출신 슛의 달인 릭 배리[3]를 1라운드 2순위로 지명했다.

슬램덩크 팬들 입장에선 강백호의 언더 핸드 자유투 원조로만 알고 있는 배리는 통산 득점 17위, 그리고 NBA 역대 3위에 해당하는 통산 자유투 성공률 90%(ABA 기록은 별도)를 자랑하는 리그 엘리트 스몰 포워드로 팀의 에이스가 되었다. 팀은 배리를 축으로 재편성하면서 1966-67 시즌 NBA 파이널에 올랐지만, 이제는 적이 된 체임벌린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게 졌다. 시즌 후 배리가 구단과의 갈등으로 ABA 팀 오클랜드 오크스로 떠나면서 준수한 강호로 남다가, 1972년에 배리가 복귀한 후 1974-75 시즌에 다시 오른 NBA 파이널에서 전력 열세라는 예상을 깨고 워싱턴 불리츠를 4-0으로 스윕하면서 세 번째 NBA 우승에 성공했다.

위와 같은 영광을 뒤로한 채 1977-78 시즌부터 9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으며, 1978년에 노쇠해진 배리를 휴스턴 로키츠로 떠나보낸 후 이렇다 할 구심점을 찾지 못했다. 1980년 오프 시즌에서 3번픽과 로버트 패리시를 묶어서 보스턴 셀틱스로 팔고[4] 드래프트에서 퍼듀대 출신 조 배리 캐롤을 1라운드 1순위로 지명했으나, 그는 이 팀에 있을 적 락커룸에서 코치의 말에 딴청피우며 책을 읽거나, 코트에서 원맨쇼만 펼쳐서 비난을 들었고, 농구보다 장학사업 및 흑인 인권신장에 더 관심을 가지는 등 기행을 보였다. 이러한 기행이 당대 약체였던 팀에 존재감이 발휘되기도 했다.( 미주한국일보 기사)

1986년에 전 밀워키 벅스 구단주 짐 피츠제럴드(1926~2012)와 동업자 댄 피네인(1934~2020)이 팀을 인수해 이듬해에 명장 돈 넬슨을 부사장 겸 단장으로 모셔왔다. 1988년에는 넬슨 부사장이 감독까지 겸해 팀 하더웨이, 미치 리치몬드, 크리스 멀린으로 이어지는 막강 백코트 라인 'Run TMC'를 바탕으로 반전을 이뤄 화끈한 공격농구로 중흥기를 열었다. 1991년 오프시즌 때 드래프트에서 전체 16픽으로 크리스 개틀링(올드 도미니언대), 17픽 빅터 알렉산더(아이오와 주립대)를 각각 뽑아 미래를 준비하는 듯했으나, 개막일인 11월 1일에 리치몬드를 레스 젭센 및 1995 드래프트 2라운드 픽이랑 묶어 새크라멘토 킹스의 빌리 오웬스랑 맞바꾸면서 'Run TMC'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즌 내내 멀린, 오웬스, 하더웨이의 활약으로 55승 27패를 찍어 플레이오프에 가서 시애틀 슈퍼소닉스랑 맞붙었으나, 1승 3패로 탈락당했다.

1992년 오프시즌 때 드래프트에서 라트렐 스프리웰(앨라배마대)을 전체 24픽으로 뽑고, 밀워키 벅스에서 FA로 풀린 제프 그레이어를 영입하고 마리오 엘리를 FA로 풀어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보내고, 시즌 극초반인 동년 11월에 로드 히긴스를 FA로 풀어 새크라멘토 킹스로 보냈다. 그러나 시즌 와중에 멀린, 하더웨이, 사루나스 마르셜오니스, 오웬스 등의 줄부상으로 초반 18승 14패 이후 8연패 등으로 허덕였고, 1993년 3월에는 유리몸인 앨튼 리스터를 방출시키고 개틀링, 타이론 힐, 멀린, 하더웨이 등이 악전고투했음에도 최종적으로 34승 48패로 추락했다.

1993 드래프트 때 멤피스 주립대학교(현 멤피스 대학교) 출신 앤퍼니 하더웨이를 전체 3픽으로 지명했으나, 올랜도 매직이 뽑은 미시간 대학교 'Fab 5' 중 하나인 크리스 웨버(1픽)랑 맞바꿨다. 트레이드 시장에서 타이론 힐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가진 1994 드래프트 1라운드 픽이랑 맞바꾸고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FA로 풀린 에이버리 존슨을 영입했다. 정규시즌 때 하더웨이와 마르셜오니스가 부상으로 시즌아웃되고 멀린이 손가락 부상으로 20경기를 날렸음에도 넬슨의 든든한 지도력, 스프리웰의 괄목한 활약 등으로 50승 32패로 올라 플옵에 다시 나갔으나, 부실한 수비력 등으로 인해 피닉스 선즈에게 3전 전패를 당했다.

1994 드래프트 때 루이빌 대학교 출신 클리포드 로지어(1972~2018)를 17픽으로 뽑고, 트레이드 시장에서 마르셜오니스 및 바이런 휴스턴을 시애틀의 11픽 카를로스 로저스 및 리키 피어스, 1995 드래프트 2라운드 픽 셋과 맞바꿨다. 그해 10월에 피츠제럴드 구단주는 케이블 방송회사 '소닉 커뮤니케이션즈'를 운영하는 크리스 코헨에게 팀을 팔았고, 정규시즌 개막 3일 전인 11월 1일에 빌리 오웬스 및 샤샤 다닐로비치를 마이애미 히트의 로니 세이컬리와 맞바꾸는 등 팀을 개선했다.

개막 초기부터 하더웨이가 건강을 회복하여 초반 5연승을 포함한 8승 5패를 기록했지만, 13일 후인 11월 17일, 웨버가 넬슨 감독과의 불화 끝에 1996 드래프트 1라운드 픽 등 3장과 묶어져 워싱턴 불리츠의 톰 구글리오타랑 맞바꾸는 악재가 생겼다. 거기에 멀린, 피어스, 세이컬리 등의 부상으로 연거푸 연패를 기록하자 넬슨은 1995년 2월 13일에 단장 및 감독 자리를 내려놓았고, 단장직에 스카우트부장 에드 그레고리(1931~2022)를 앉히고 밥 래니어 코치를 감독 대행으로 메웠다. 멀린, 스프리웰, 로지어, 개틀링 등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26승 56패로 추락했다.

1995년 오프시즌 때 전 샬럿 호네츠 단장 데이브 트와직을 새 단장직에 앉힌 후, 포틀랜드 감독이던 릭 아델만을 감독직에 각각 앉혀 새 출발을 알렸고, 드래프트에서 메릴랜드 대학교 출신 조 스미스를 전체 1픽으로 뽑고 알렉산더를 카를로스 로저스, 마틴 루이스, 마이클 맥도널드, 드웨인 윗필드와 묶어 창단팀 토론토 랩터스가 보유한 B.J. 암스트롱과 맞바꿨다. 또한 토론토가 확장 드래프트로 뽑았다가 버린 제롬 커시, 밀워키에서 FA로 풀린 릭 배리의 차남 존 배리도 각각 영입했으며, 주력이던 멀린과 하더웨이는 벤치 신세가 되었다. 특히 멀린은 손가락 부상으로 55경기밖에 못 뛰었고, 하더웨이는 1996년 2월 23일에 개틀링과 묶여 마이애미 히트의 케빈 윌리스 및 빔보 콜스와 맞바꿔졌다. 시즌 내내 스프리웰이 올 루키 퍼스트팀에 선출되고 세이컬리와 커시도 같이 활약하여 36승 46패로 성적을 올렸으나, 플옵은 못 갔다.

1996년 오프시즌 때 홈 구장 오클랜드 콜로세움 아레나의 보수공사로 산호세 아레나(현 산호세 SAP 센터)를 임시 홈으로 쓰도록 했고, 7월에는 워싱턴에서 FA로 풀린 마크 프라이스를 영입하고 윌리스, 배리, 커시를 방출시켰다.[5] 개막 하루 뒤인 11월 2일에 세이컬리 및 로지어, 1999 드래프트 2라운드 픽을 올랜도의 존 콘칵, 도니엘 마셜, 펠튼 스펜서 셋과 맞바꿨다. 그러나 콘칵은 시즌 내내 부상을 너무 당해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그대로 은퇴했고, 암스트롱은 무릎을 다쳐 49경기만 뛰고, 콜스도 탈장으로 고생해 51경기만 뛰는 등 팀에 악재가 생겼다. 1997년 2월에 도널드 로얄을 샬럿의 스캇 버렐과 맞바꾸는 수를 쓰고 스프리웰이 최선을 다했으나 30승 52패로 떨어졌다.

1997-98 시즌을 앞두고 팀은 트와직 단장과 아델만 감독을 자르고 전 새크라멘토 킹스 감독 게리 세인트진을 단장으로, 포틀랜드 감독이던 P.J. 칼리시모를 새 감독직에 앉힌 뒤 스프리웰을 중심으로 조 스미스, 도니엘 마셜, 마크 프라이스, 빔보 콜스, 펠튼 스펜서 등의 기량에 기대를 거는 한편, 드래프트에서 8픽으로 콜게이트대 출신 아도날 포일을 지명하고 멀린을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에릭 댐피어 및 듀안 페럴과 맞바꿔가며 쇄신을 단행하여 패배주의를 버리고자 했으나, 초반에 스프리웰이 칼리시모 감독과 싸우다가 목조르기를 하는 바람에 눈밖에 났고, 이러한 내홍 속에 팀은 19승 63패로 굴러떨어졌다.

결국 팀은 골칫덩이 취급받은 스프리웰을 뉴욕 닉스로 팔고 대신 존 스탁스를 받아온 뒤, 드래프트에서 노스캐롤라이나대 출신 앤트완 재미슨을 4순위로 지명하는 등 팀을 쇄신했지만 21승 29패로 플레이오프를 못 갔다. 그 이후에도 프런트의 실책은 해를 갈수록 거듭해 FA 등으로 영입된 선수마다 부상을 안 입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팀에 오래 있는 선수보다 금방 떠나는 선수가 더 많았다. 그런 탓에 2005-06 시즌까지 플옵을 못 갔다.

2004년에 단장으로 돌아온 멀린은 2006년에 은사 넬슨 감독을 모셔서 '배산적' 배런 데이비스를 중심으로 팀을 다시 짜 부임 첫 시즌에 8번 시드로서 1번 시드인 댈러스 매버릭스를 격침시키는 기염을 토했지만, 다음 시즌 들어 사루나스 야시케비셔스가 그리스 파나시나이코스로 떠나고, 배런도 부상을 당하고 스테판 잭슨도 컨디션에 난조를 보이는 등 악재가 생겨 다시 플레이오프를 못 갔다. 2008년에 배런이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로 떠났으며 2011-12 시즌까지 리빌딩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2009년 드래프트에서 구단의 운명을 바꾸는 순간이 찾아온다. 1라운드 7번에서 스테픈 커리를 지명한 것. 이 한 번의 선택으로 워리어스는 NBA의 그저 그런 구단에서 NBA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구단이자 전세계적인 인기 구단이 된다.

참고로 2012-13 시즌부터 시작된 위닝 시즌 전의 프랜차이즈 통산 정규 시즌 성적(1946-47 시즌 ~ 2011-12 시즌)은 2,352승 2,794패로 약 45.7% 승률에 불과했다. 오랜 전통과는 달리 NBA의 대표적 약체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 2012-13 시즌

센터 앤드류 보것의 부상으로 인한 미비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젊은 3점 슈터 스테판 커리와 올스타 백인 빅맨 이대리 데이비드 리를 앞세워 오랜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1라운드 상대는 3위 덴버 너기츠. 홈에서만 38승 3패, 시즌 종료까지 홈 23연승를 기록할 정도로 악명 높은 덴버의 1옵션 펩시 던전에서 열리기 때문에 매우 빡센 상황. 거기에 리의 엉덩이 부상으로 힘들어지나 했지만 보것이 부활하고 커리가 터져주면서 2차전 펩시 센터 정복에 성공, 홈에서 전승하며 4-2로 업셋하고 2라운드까지 진출했다.

세미파이널 상대는 샌안토니오 스퍼스였는데 2-4로 패배했다. 1차전에서 잘 앞서가다가 막판에 어이없이 역전당해서 경기를 내준 게 큰 타격이었다. 그래도 2, 4차전을 잡으며 2-2로 따라붙었으나, 5, 6차전을 모두 내주며 아쉽게 탈락했다. 특히 주전 슈팅 가드 클레이 탐슨이 기복이 매우 심한 모습을 보여주는게 뼈아팠다.

4. 2013-14 시즌

오프 시즌에는 드와이트 하워드에 입맛을 다셔보기도 했지만 하워드는 휴스턴행. 대신 샐러리만 먹던 잉여들인 리처드 제퍼슨과 안드레스 비듬린스비에드린스를 처리하는 데 성공해[6] 운동 능력과 수비가 좋은 안드레 이궈달라를 영입해 전력을 강화했다. 2012-13 시즌 커리를 잘 보좌해주었던 베테랑 제럿 잭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했다. 가드진의 뎁스는 이렇게 약해졌지만 대신에 보것의 유리몸을 대비해 왕년의 스타였던 저메인 오닐을 영입하기도 했다.

2014년 상향 평준화된 서부 경쟁에서 살아남아 실로 오랜만에 50승 고지를 돌파, 6위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최종 성적은 51승 31패(.622). 다만 이번에는 좀 멀쩡하게 지내나 했던 유리몸 보것이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갈비뼈 골절을 당하고 말았다.

상대는 서부 지구 3위였던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커리가 나름 미친 활약을 했고, 보것의 공백은 데이빗 리와 저메인 오닐이 번갈아 가면서 나름 최선을 다해 상대하였으며 2년차 스몰 포워드인 드레이먼드 그린이 한층 성장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더군다나 클리퍼스의 구단주 도날드 스탈링의 인종차별적 발언 논란이 터져 클리퍼스 선수단과 코칭 스태프진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고, 결국 스탈링의 인종차별적 발언의 녹취록이 공개된 다음날 홈 경기에서 118-97이라는 큰 점수차로 승리하면서 손쉽게 시리즈를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저메인 오닐까지 부상을 당한 와중에 블레이크 그리핀과 디안드레 조던이라는 짐승들과의 파워 싸움에서 밀렸다. 결국 7차전에서 전반전까지는 잘 버텼지만 3, 4쿼터의 극심한 슛 난조 때문에 121-126으로 패해 2라운드 진출이 좌절되면서 탈락했다.

골든스테이트 역시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이 클리퍼스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 중에 감독 마크 잭슨의 거취 여부를 가지고 이야기가 나왔다. 마크 잭슨과 코치진 그리고 프런트와의 불화가 겹쳐져서 잭슨이 우승급 성적을 남기지 않는 한 시즌을 끝으로 경질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당초 골든스테이트의 어시스턴트 코치들이었던 마이크 말론과 스칼리브리니, 그리고 보스턴 셀틱스가 2014-15 시즌을 위해 영입한 코치 대런 얼먼 등의 코치진이 팀을 떠난 게 마크 잭슨과의 불화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며, 구단주 역시 간접적으로 잭슨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따라서 코칭 스태프 변화가 오프 시즌에 나올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구단이 이궈달라를 영입해주고 시즌 중반에는 스티브 블레이크까지 영입해서 할 건 다 해주었는데 1차전에서 탈락했다는 명분도 있었고, 결국 플레이오프가 끝나자 마크 잭슨을 해고하면서 시즌을 마쳤다.

5. 2014-15 시즌

TNT에서 해설가로 활동하던 스티브 커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감독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뚜껑을 열고 보니 엄청나게 잘나갔다.[7] 2015년 1월 들어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리그 1위를 질주하였으며, 특히 득실 마진은 평균 10점이 넘어 4쿼터 가비지 제조기라 불렸다. 커는 시즌 시작 전에 뉴욕과 골든스테이트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는데, 본인과 팀 모두에게 있어 좋은 선택을 한 셈이 되었다. 또 재계약한 탐슨이 올스타급으로 활약한 데다 보것이 준수하고, 드레이먼드 그린도 팀의 핵심 멤버로 성장했다.

결국 서부 2위인 휴스턴과의 차이를 5게임 이상 벌리며 거의 40년 만에 디비전 1위 자리를 확보했고, 최종 성적 67승 15패로 구단 역사상 최고 승률[8]을 찍으며 전체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스테판 커리는 MVP를 수상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8위인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를 가볍게 스윕하면서 빠르게 2라운드에 진출. 2라운드 멤피스와의 대결에서는 멤피스의 수비에 고전했지만, 결국 스테판 커리의 활약 속에 4승 2패로 승리하면서 1976년 이후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휴스턴을 4승 1패로 일축하면서 40년 만에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고, 끝내는 NBA 파이널에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를 꺾고 파이널 우승까지 차지하면서 2015년 최강팀 자리에 올랐다.[9]

6.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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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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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17-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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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018-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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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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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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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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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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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023-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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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2024-2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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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관련 자료


[1] 선수 은퇴 후 1969년부터 공화당 소속으로 펜실베이니아 주 하원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고, 1970년부터 1974년까지 필라델피아 시 감사를 각각 지냈다. [2] 여기서 약간 꼼수 아닌 꼼수를 썼는데, 체임벌린은 필라델피아에서 고등학생 때까지 살았으나 최종 졸업 학교는 캔자스 대학이라 정상적으로는 필라델피아가 연고지 우선 지명을 할 수 없으며 NBA 드래프트를 거쳐야 했다. 그러나 워리어스 구단주인 에디 고틀립은 체임벌린이 필라델피아에서 자랐으며 어차피 캔자스에는 NBA 팀이 없으니 자기들이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NBA가 받아들여 체임벌린은 연고지 지명 제도 사상 처음으로 대학 입학 전 출신지를 기반으로 지명된 선수가 된다. 일각에서는 고등학교 시절 체임벌린을 필라델피아가 지명했다는 루머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3] Rick Barry; 일본어 번역 과정에서 릭 발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4] 보스턴은 바꾼 3번픽으로 케빈 맥헤일을 뽑았다. [5] 동년 8월에 윌리스는 휴스턴, 배리는 애틀랜타, 커시는 레이커스와 각각 계약했다. [6] 샐러리 덤프를 위한 대가로 2014, 2017 드래프트 1라운드 픽과 2016, 2017 드래프트 2라운드 픽도 희생해야 했다. [7] 당시 커는 단순한 해설자 출신이 아니라 선즈에서 단장으로 팀을 운영한 경력이 있으며, 농구를 보는 눈과 친화력이 뛰어나 감독으로 잘 할거란 기대를 받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커를 두고 워리어즈와 닉스의 쟁탈전이 일기도 했다. [8] 이는 2015-16 시즌 73승 퍼포먼스로 또 한 번 경신된다. [9] 참고로 통합 우승이라는 말은 NBA에는 없다. NBA에서 정규 시즌 우승은 기념 깃발(banner)도 달지 않고, 별다른 기념 행사도 없다. 다만 디비전에서 1위를 하는 경우 팀 자체적으로 조그만 깃발을 단다. NBA에서 제대로 인정하는 업적은 플레이오프뿐이다. 즉 NBA에서 우승이라고 하면 무조건 플레이오프 우승뿐이다. 심지어 파이널에 오르기만 해도 "컨퍼런스 우승"이라고 트로피가 수여되는데 정규 시즌 1위는 트로피도 없다. 사실 통합우승이라는 명칭은 일본프로야구에서 온 말로, 미국 스포츠는 정규 시즌 우승이라는 말 자체를 안쓴다. 한국 프로스포츠 역시 K-리그를 제외하고는 마찬가지였지만, 일본의 영향인지 최근들어 야구와 농구, 배구에서 통합우승이라는 개념을 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