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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5 03:11:17

주아이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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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일본 제14대 천황
주아이 덴노
仲哀天皇
파일:주아이 천황.gif
출생 149년
사망 200년 3월 8일 (향년 51세)
오이타현 혈문풍포궁
(現 일본 오이타현)
능묘 에가노모후시노오카릉([ruby(惠我藻伏崗陵, ruby=혜아조복강릉)])
재위기간 왜국 황태자
179년 4월 24일 ~ 192년 2월 11일
제14대 천황
192년 2월 11일 ~ 200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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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타라시나가츠히코([ruby(足仲彦, ruby=족중언)])
부모 부친 야마토타케루
모친 후타지이리히메
배우자 진구 황후
자녀 4남
종교 신토
관저 아나토노토유라노미야([ruby(穴門豊浦宮, ruby=혈문풍포궁)])
츠쿠시노카시이노미야([ruby(筑紫橿日宮, ruby=축자강일궁)])
한풍 시호 주아이 덴노([ruby(仲哀天皇, ruby=중애천황)])
화풍 시호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1][2]
약대일자천황(若帶日子天皇)[3][4]
}}}}}}}}} ||
1. 개요2. 행적3. 의문점4. 가계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제14대 천황. 게이코 덴노의 황자로 일본 열도의 동•서 방면을 정복한 영웅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의 차남으로 모습이 단정하고 키가 10척이었다고 한다.

그의 시호 중에서 타라시히코 게이코 덴노, 세이무 덴노의 시호에도 들어가 있고, 7세기 때의 천황인 조메이 덴노, 사이메이 덴노의 시호에도 들어가 있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 조작된 것으로 추측되어, 전설상의 천황으로 여겨지는 등 실존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아래 의문점 단락에서 서술된 석연치 않은 정황이 있으며, 만일 실존인물이었다면 일본 제1왕조의 마지막 천황이었을 것이다.[5]

2. 행적

《일본서기》에 따르면 주아이 덴노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178년 봄 3월 1일, 31세로 세이무 덴노의 후계자(조카)로서 황태자가 되었다. 191년 가을 9월 6일에 야마토국의 사키노타타나미노이케시리노미사사기(狭城盾列池後陵)에 선황을 장사지냈고, 192년 정월 11일에 즉위했다. 가을 9월에는 어머니 후타지노이리비메노미코토(両道入姫命)를 황태후로 높였다.

겨울 11월에 세이무 덴노가 사망한 것을 언급하면서 백조를 잡아 능역의 연못에 길러 그 새를 보는 것으로 그리움을 위로하고자 한다면서 여러 국에게 백조를 바치도록 했으며, 11월 4일에 코시국(越國)이 백조 4마리를 바치려 했다가 이복동생 아시카미노카마미와케노미코(蘆髮蒲見別王)가 그 백조를 빼앗자 군사를 보내 주살하면서 "사람들이 아버지는 하늘이고, 형은 또한 임금이다라고 했다. 하늘을 우습게 알고 임금을 거스르면 어찌 주륙을 면할 수 있겠냐"고 말했다.

숙부의 딸인 오호나카츠히메(大中姬)를 첫 번째 비로 삼았고, 193년 정월 11일에는 진구 황후와 결혼했으며, 2월 6일에 츠누가(角鹿)로 가서 행궁인 케히노미야(笥飯宮)를 짓고 머물렀으며, 아하지노미야케(淡路屯倉)에 사냥을 나갔다. 3월에는 미나미국(南國)을 돌아보았고, 키이국(紀伊國)에서는 토코로츠노미야(德勒津宮)에 머물렀으며, 규슈의 구마소(熊襲)가 봉기하자 이를 공격하기 위해 토코로츠(德勒津)에서 출발해 아나토(穴門)로 나아가, 사자를 츠누가로 보내 진구 황후에게 바로 진을 출발해 아나토에서 만나자고 했다.

여름 6월 10일에 토유라노츠(豐浦津)에 정박했고, 가을 7월 5일에 진구 황후가 토유라노츠에 도착하면서 합류하자 9월에 궁실 아나토노토유라노미야(穴門豐浦宮)를 짓고 머물렀다.

199년 정월 5일에 츠쿠시로 갔는데, 오카현주의 선조인 와니(熊鰐)로부터 가지 500개가 있는 현목(賢木)을 뱃머리에 세운 채로 나무의 위, 중간, 아래에 각기 걸린 백동경(白銅鏡), 토츠가노츠루기(十握劒), 야사카니(八尺瓊)를 헌상받았다. 그의 배를 타고 가다가 수문에서 나아가지 않았다. 그 포구에 오오쿠라누시(大倉主), 츠부라히메(莵夫羅媛)라는 신이 있어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고 하자 즉시 기도를 올리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자 배가 나아갔으며, 또한 히코시마(引嶋)에서 이토 현주의 선조 이토테(五十迹手)로부터, 와니처럼 현목을 뱃머리에 세운 채로 나무의 위, 중간, 아래에 각기 걸린 야사카니, 백동경, 토츠가노츠루기를 헌상받았다.

21일에 나노아가타(儺縣)[6]의 카시히노미야(橿日宮)에 머물렀고, 가을 9월 5일에 구마소를 토벌하는 일을 논의했는데, 신(神)이 황후에게 나타나 구마소보다는 바다 건너 신라를 공격하는 게 더 나을 것이며,[7] 신라 또한 제사를 잘 지내면 구마소가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고 했지만 주아이 덴노는 이를 의심해 [8]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200년 봄 2월 5일에 갑자기 몸이 아프다가 6일에 사망했는데, 기록에 따라 신의 말을 듣지 않아 일찍 죽었다거나 구마소를 친히 정벌하러 떠났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진구 황후와 타케우치노 스쿠네는 죽음을 감췄고, 몰래 그 시신을 거두어 황후가 타케우치노 스쿠네에게 해로를 통해 아나토로 옮기도록 하면서 아나토노토유라노미야(穴門豐浦宮)에 빈소를 차려 비밀리에 장사를 지내도록 했다.

22일에 타케우치노 스쿠네가 이를 황후에게 보고했지만 신라 공격으로 장사지내지 못하다가 201년 봄 2월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사실 주아이 덴노의 생년이나 사망년은 《일본서기》 및 《고사기》의 기록을 비교하면 서로 충돌한다. 《고사기》에 따르면 주아이 덴노는 임술년 6월 11일에 죽었다고 한다. 일단 사망일자가 다르다. 《고사기》는 6월 11일, 《일본서기》는 2월 5일에 죽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실은 사망년도도 상당히 다르다. 《고사기》는 주아이 덴노가 죽은 해를 '임술년'이라고 설명했는데, 《일본서기》의 묘사를 따르면 주아이 덴노는 서기 200년 '경진년'에 죽었다. 서기 200년에서 가까운 임술년은 182년 또는 242년이므로 차이가 매우 크다. 주아이 덴노가 죽었을 때의 나이가 52세라고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를 확정할 수 없으니 당연히 생년도 불분명하다.

3. 의문점

주아이 덴노에서 진구 황후를 거쳐 오진 덴노로 이어지는 황위 계승 과정은 수상쩍기 그지없다. 기기신화라는 것이 원래 천황가의 만세일계라는 신화를 조작하기 위한 관찬신화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매끈하게 날조하는 것이 그 목적에도 맞는다. 하지만 아무리 사료를 날조해도 어색함이 남는다면, 그것은 무언가 날조하기 어려운 대형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주아이 덴노 사망의 기사를 건조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이주갑인상 등 연도상의 문제도 있지만, 모든 것을 무시하고 《일본서기》의 묘사를 따라가면 이러하다.

주아이 덴노는 일본 열도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싶어 했다. 주아이 재위 8년(199?) 9월, 갑자기 진구 황후에게 신령이 지피더니 "바다 너머 신라를 정복하면 나머지 문제는 알아서 해결될 테니, 신라를 정복하길 원한다면 나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명령했다.[9] 하지만 주아이 덴노는 신령의 말을 따르기를 거부하며 다른 소국을 쳤다가 소득없이 돌아왔다.

주아이 재위 9년(200?) 2월에 뜬금없이 주아이 덴노가 붕어했다. 진구 황후는 권신 타케우치노 스쿠네와 짜고 주아이의 죽음을 은폐한 뒤 바다 건너 신라를 공격할 준비를 한다. 그해 9월, 진구 황후는 산달이 되어 아기가 나오려고 하자 돌로 주술을 행하여 산달을 늦추었다. 10월 3일, 진구 황후가 몸소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했다. 그렇게 배를 몰아 바다를 건너 신라를 치니, 신라 왕은 싸워보지도 않고 자진해서 항복했다. 또한 진구 황후의 군세를 보고 고구려와 백제의 왕들마저 자진해서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했다. 그리하여 진구 황후는 일본으로 돌아왔는데 12월 14일 이토노아카타(伊覩縣: 오늘날 후쿠오카현 이토시마시)에서 아들 오진 덴노를 낳았다.

기기에서는 진구 황후가 허리에 돌을 차고 주술을 해서 출산을 늦추었다고 말한다. 사실 《일본서기》의 묘사를 문자 그대로 보면, 오진 덴노는 어머니 진구 황후의 뱃속에서 15개월이나 있었다. 이것도 말이 안 되지만, 만삭이 다 된 여자가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싸움도 없이 삼국의 항복을 받은 뒤 일본으로 돌아와 아들 오진을 낳기까지 걸린 시간이 딱 2개월 11일이다. 믿기는가?

옛 일본 사람들은 아기가 어머니 태중에 있는 시간을 딱 1년이라고 여긴 듯하다. 그래서 《일본서기》에 따르면 주아이 재위 8년(199?) 9월, 진구 황후에게 신령이 지폈을 때 신령이 진구가 아들을 임신했다고 말하는데, 이듬해 9월에 산달이 되어 아기가 나오려고 하므로 진구는 주술로 산달을 늦추었다. 그렇게 한반도의 삼국을 복속시킨 뒤 일본으로 돌아와 12월에 오진 덴노를 낳았다고 하므로, 묘사상으로는 오진 덴노는 진구 황후의 태중에 15개월이나 있었다.

오늘날에는 아기가 어머니 태중에 있는 기간을 약 9개월 반 정도로 본다. 여기서 역산해보면 오진 덴노가 잉태된 때는 주아이 9년(200?) 3월 초순인데, 주아이 덴노가 그 전달에 죽었으므로 오진 덴노는 주아이 덴노의 아들일 수가 없다. 옛 일본인들이 임신 기간을 1년이라고 생각했다면, 잉태 시기가 주아이 8년 12월이므로 말이 되지만.

진구 섭정 원년(201?), 주아이 덴노와 오오나카츠히메의 아들들이자, 진구 황후 입장에서는 의붓아들인 카고사카 황자와 오시쿠마 황자 형제가 진구 황후와 권신 타케우치, 오진 덴노의 귀국을 막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계모가 군사적 업적을 이루고 돌아와 문자 그대로 갓 태어난 아기를 차기 천황으로 세울 생각을 하니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두 황자의 거점은 오늘날 고베에 있는 고시키즈카 고분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 황후는 이 의붓아들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섭정이 되어 무려 69년이나 나라를 다스리다가 서기 269년에 죽으니, 이듬해에야 오진 덴노가 즉위할 수 있었다. 역시 《일본서기》의 묘사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오진 덴노가 즉위한 해는 서기 270년이다. 오진 덴노가 200년 12월에 태어났다고 하므로 세는 나이로 따져보면 무려 71세에 겨우 즉위했단 뜻인데, 그럼에도 오진 덴노의 재위기간이 41년이나 된다. 즉 기록대로라면 오진 덴노의 항년이 111세라는 납득이 되지 않을 정도의 고령이다.

기기에서는 천황 혈통을 만세일계로 만들기 위해 이 과정을 집안싸움으로 만들었지만, 그래서 사건 전개가 더 어색해져 버렸다.[10]

오늘날에는 아무도 진구 황후, 주아이 덴노 같은 사람들이 액면 그대로 실존인물이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부족연맹왕국 단계에 있었던 당시 야마토 왕국의 각 부족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인물들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장 고구려만 해도 왕과 왕비의 출신 부족이 다르다. 즉 기기신화에서 말하는 주아이-진구 교체는 일본 열도 석권을 우선시한 기존 왕조가 대륙과의 관계를 우선시한 세력에게 왕위를 빼앗기는 과정을 담은 왕위찬탈신화일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만세일계의 신화가 무너지게 된다.[11]

주아이 덴노가 대표하는 것은 야마토의 기존 왕권 세력이라고 볼 수 있지만 진구 황후가 어느 세력을 대표하는지는 의문이다. 다만 의미심장한 것은 일본에서 이미 오진 덴노가 주아이 덴노의 친자가 아니고, 진구 황후와 수신(水神)의 아들로 뱀의 꼬리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는 것이다. 용과 뱀은 전통적으로 물을 상징하는데, 규슈를 기반으로 세토 내해에 영향력을 투사한 해인족은 해룡신 와타츠미노미코토를 조상신으로 삼았다.

진구(로 대표되는) 세력이 큰 바다를 건너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도,[12] 이후 고베에 진을 친 야마토 기존 왕조의 잔당을 공략하기 위해서도[13] 이들 해양세력과의 협조는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용왕과 진구 황후의 교접은 야마토 신왕조와 이들 해양 세력의 영합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14] 진구 황후의 카구라에 이끌려 뭍으로 올라와 용궁의 진주를 바친 수신 '아즈미노 이소라' 신화에서는 이 부분이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또다른 가능성으로 진구 황후와 오진 덴노가 친백제 세력 또는 백제에서 유입된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권을 찬탈해가면서 추구해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기 백제가 일본, 즉 왜국(야마토)과 거의 혈맹 관계였음은 잘 알려져 있고, 해적 따위가 아닌 일본 정권이 무리를 해가면서 신라를 공격해야 할 이유는 백제와 연대하기 위함 외에는 생각하기가 어려워, < 임나일본부설>은 이미 파훼되었다. 실제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한성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그래서 일부 한국인들은 심지어 오진 덴노가 백제인이라고 설레발을 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 일선동조론> 같은 제국주의 식민사관 논리와도 통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15]

4. 가계



[1] 타라시나가츠히코노스메라미코토 [2] 《일본서기》(日本書紀) [3] 타라시나가츠히코노스메라미코토 [4] 《고사기》(古事記) [5] 현재의 일본 천황가는 제26대 케이타이 덴노를 시조로 하는 제3왕조이다. 결사팔대를 실존하는 가문이었다고 간주하면 주아이 덴노는 제2왕조, 케이타이 덴노는 제4왕조가 된다. [6] 규슈 해인족의 나라인 나노국이 있었던 곳이다. 만화 《 하늘의 혈맥》에 보면 이 방문과 신탁, 그리고 주아이 덴노의 급사가 문자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로 고스란히 묘사된다. [7] 신이 신라 공격을 주장하는 이유는 순전히 가성비 때문이었다. [8] 산 위에 올라가 바다 건너를 바라보았으나 망망대해이기 때문에 "어찌 텅 빈 곳에 나라가 있으며, 내가 모든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지금 나를 유혹하는 신은 누구냐."라고 의심했다. [9] 이때 신령은 진구 황후가 아들을 임신했다고 말하는데, 오진 덴노를 가리킨다. [10] 아무리 상식적인 이야기로 다듬어 보아도 천황이 갑자기 죽었는데 황후가 그 사실을 은폐하고, 이역만리 외국에 가서 그곳을 2개월 만에 정복하고 돌아와 아기를 낳고, 그 아이를 차기 천황으로 올렸다는 이야기이다. 야마토가 제대로 된 왕조국가였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이야기이다. 즉 4세기 야마토는 (기기가 편찬된) 8세기 일본은 커녕 하다못해 근초고왕이나 광개토대왕이 재위한 동시대 한반도 정도의 왕조국가가 못 되었다는 진실이 전제된 것이다. [11] 현대 일본사학계에서는 주아이 덴노와 오진 덴노가 (실존인물일 경우) 각기 제1왕조의 마지막 왕, 제2왕조의 첫 번째 왕이고, 케이타이 덴노가 제3왕조의 첫 번째 왕이라고 보고 있다. 현재의 일본 황실은 제3왕조이다. [12] 이들 규슈 세력은 '나노국'(奴國)이라는 이름으로 야마타이국 히미코 여왕보다 먼저 후한의 세조 광무제 유수에게 조공을 바친 바 있다. 그들에게는 동중국해를 건널 선진 기술이 있었다는 뜻이다. [13] 고베는 세토 내해 한복판에 있다 [14] 해인족 아즈미씨는 세토 내해 연안 곳곳에 자기들의 이름을 지명으로 남겼는데, 심지어 야마토보다도 동쪽에 있는 오늘날의 나가노현에도 '아즈미노'가 있다. 이곳에는 일본 제3의 고봉 호타카다케산이 있는데, 이 산에 있는 호타카 신사에서는 와타츠미노미코토, 호타카미노미코토 같은 바다의 신들을 산꼭대기에서 모시고 있다. [15] 주아이 덴노가 가야계 마지막 천황이고, 오진 덴노가 백제계 최초의 천황이라는 막나가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오진 왕조 다음이자 현 왕조의 시조인 케이타이 덴노는 온조계 최초의 천황이고, 오진 덴노는 비류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학자가 아니고 수학자(...)인 김용운 교수가 한겨레 등 지면을 통해 주장한 설이다. 근거라고는 언어비교 같은 것뿐이기에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이야기가 못 된다. [16] 고사기》에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의 소생으로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