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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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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상
백남순 白南淳 | Paek Nam Su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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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6b534><colcolor=#FFF> 출생 | 1929년 3월 13일 |
평안도 (現 양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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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07년 1월 2일 (향년 77세) |
평양시 | |
학력 |
평양사범대학 (학사)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
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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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전 외무상으로 김정일 시대의 첫 외무상.2. 생애
1929년 3월 13일, 양강도의 노동자 집안에서 출생했다. 평양사범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로동당 지도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여러 부서에서 일하다가 1968년 조선로동당 국제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1972년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대외문화연락협회 부위원장,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상무위원,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냈다. 이 기간에 백남준이란 가명을 쓰고 조선평화옹호 전국민족위원회 상무위원의 자격으로 1~7차 남북 적십자회담 자문위원으로 남측과 접촉하였다.
1974년 5월 4일에는 다시 백남순이란 이름으로 김히순의 뒤를 이어 폴란드 대사로 부임, 신임장을 봉정하였다. 5년 가까이 대사로 재임한 후 1979년 2월 24일, 작별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3월 15일에 후임 대사로 오응권이 임명되었다.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 그의 엘리트 그룹 파티에 자주 초대받았으며 김정일이 그의 장남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실수를 했는지 그의 눈밖에 나 1983년 외국문출판사 사장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984년 조선적십자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복귀하여 1984년 9월 북측의 대남 수재 물자 지원 전달을 위해 방남하였다. 1985년 조선기자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9년 2월 남북고위급회담에 북측 대표단 단원으로 방남하여 다시 한번 한국에 얼굴을 알렸다. 1990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정무원 참사실장 자격으로 1~8차 남북고위급회담 북측단장 자격으로 4차례 (1,3,5,7차) 방남했다. 이것만 보면 그냥 별볼일 없는 대남일군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류현우의 증언에 따르면 통일전선부 부부장,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역임한 거물이다.
199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북측본부 부의장을 맡았으며 1991년 방남 때는 취재차량이 백남순이 탄 버스를 들이박는 바람에 부상을 입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92년 조선반핵평화위원회 부위원장, 남북고위급회담 정치분과위 북측위원장직을 맡았다. 백남준의 명의로 1992년 7월, 홍기문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3년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 1994년 정무원 책임참사 자격으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부총리급 예비접촉 대표를 맡아 1994년 6월과 7월 남측과 접촉했으나 김일성의 감작스러운 죽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김일성 사후 1996년 김정일의 신임을 얻어 조국전선 서기국장에 임명되었다. 1996년 9월, 려연구 장의위원을 맡았다.
1998년 7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대의원에 선출, 9월 5일의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간 김영남의 뒤를 이어 내각 외무상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지금까지 알려진 백남준이 아니라 백남순으로 나타나 남한에 상당한 혼란을 안겼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2000년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장례식 참석, 노로돔 시아누크 캄보디아 국왕,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의 회담,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고노 요헤이 일본 외무대신 등 외교관들과의 회담에 참석했다. 2000년 9월, 유엔총회 참석도 예정되어 있었으나 2000년 프랑크푸르트 공항 사건의 여파인지 취소되었다. 2003년 8월, 11기 대의원에 재선출, 9월 3일의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외무상에 유임되었다. 말년까지 외교무대에 꾸준히 등장했지만 신장병 등으로 투병하며 건강이 악화되면서 차차 활동이 뜸해졌다.
하지만 2006년 7월 쿠알라룸푸르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회의에서 콘돌리자 라이스 앞에서 "제재 모자를 쓰고는 6자회담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발언하여 화재를 모았다. 하지만 이때 부축을 받지 않고선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건강이 이미 좋지 않았기 때문에 비밀리에 치료를 받고 귀국했다.
2007년 1월 2일 4시 30분에 77세를 일기로 폐암으로 사망하였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은 공동명의로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나 피눈물나는 생활을 하여오던 백남순은 해방후 당과 수령의 품속에서 유능한 일군으로 성장하여 당중앙위원회와 여러 중앙기관의 책임적인 위치에서 사업하면서 당과 혁명대오를 강화하고 사회주의건설을 다그치며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에서 지혜와 정열을 다 바쳤다. 그는 우리 당의 자주적인 대외정책을 받들고 나라의 대외적권위를 보장하며 우리 혁명의 유리한 국제적환경을 마련하기 위하여 적극 투쟁하였다. (...) 백남순은 우리 당의 주체사상,선군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혁명에 무한히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통일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조의를 표했다. 김정일도 조화를 보내고 애도를 표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외무상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경력
임기시작 | 임기종료 | 비고 |
내각 외무상 | ||
1998년 9월 5일 | 2007년 1월 2일 |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유임 임기 중 사망 |
4. 수훈
5. 여담
아들은 백룡천이라고 한다. 중앙은행 총재를 지냈으나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낸 것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6. 참고문헌
- 북한연구소 편집부, 외무상 백남순, 북한 344 (2000.8).
- 북한연구소 편집부, 외무상 백남순, 북한 360 (2001.12).
- 통일부 통일정책국 정치사회분석과, 2009 북한의 주요인물(서울: 통일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