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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6:31:59

JG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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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전투항공단 묄더스(Jagdgeschwader 51 Mölders)

1. 창설과 프랑스, 영국 전역2. 독소전 참전3. 지중해로4. 역대 지휘관

1. 창설과 프랑스, 영국 전역

제국 항공성이 개전 직전인 1939년 8월에 특별 명령을 발동해 바트 아이블링(Bad Aibling)에서 창설된 전투기 부대인 JG 51은 테오도르 오스터캄프(Theodor "Theo" Osterkamp: 1892~1975 / 32대 격추) 대령이 지휘봉을 잡았다. 부대 창설과 개편, 대원들의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탓에 개전과 함께 시작된 폴란드 침공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프랑스 침공 이후부터 전선에 모습을 나타냈다. 또한 이 부대는 이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의 마지막까지 프랑스에 남아서 영국 공군과 혈투를 치른 부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희생도 커서, 해협 전투가 끝날 때까지 JG 51은 68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1940년 7월 12일, 부대는 생-잉글뤼베르(Saint-Inglevert)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항공단 본부는 11월까지 그곳에 머무르며 새 지휘관인 베르너 묄더스 소령을 맞아들이게 된다. 독일 공군 수뇌부는 일선의 항공단장들을 젊은 에이스들로 교체하며 새 피를 수혈하고 있었는데, 묄더스 또한 곧 개시될 소련 침공을 대비하여 JG 51로 부임한 것이었다.

2. 독소전 참전

바르바로사 작전이 발동하자,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이 지휘하는 제2기갑군(2. Panzerarmee)을 지원하게 된 JG 51의 앞에는 남북으로 4,480 km나 되는 긴 전선을 마주하게 된다. 게다가 이 전선의 북동쪽에는 모스크바가 자리잡고 있었다. 1941년 11월 22일에 항공단 사령관 묄더스가 에른스트 우데트 장군의 장례식에 참석하다가 사고로 순직해버리자 이 위대한 에이스를 기리는 의미에서 부대에는 묄더스의 이름이 붙여졌고, 동부전선에 둥지를 튼 항공단은 새로운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들은 독소전이 발발한 이래 12월 5일까지 무려 1,881대의 소련 공군기를 격파했지만, 그 대가로 84대의 기체를 잃고 상당한 숫자의 조종사들도 잃어야만 했다. 문제는, 소련군은 그 손실을 곧 보충할 수 있었지만 인력풀이 작은 독일에게는 메꾸기 어려운 전력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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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을 상대하는 중앙 집단군을 지원하는 책임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Wolfram Freiherr von Richthofen) 장군이 지휘하는 제8항공군(VIII. Fliegerkorps)의 임무였고 JG 51은 그 선봉에 서 있었다. 1942년 1월에 리히토펜 장군이 쓸 수 있는 전투기 부대는 실질적으로 JG 51의 제2, 3, 4 비행단 뿐이어서 이들은 하루 평륜 적게는 4회, 많이는 8회 이상까지 엄청난 혹사를 강요당했다. 러시아에서 맹위를 떨치는 동장군 역시 항공단의 가동률을 떨어뜨리는데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1942년 초기에 중앙 집단군은 소련군의 역습을 맞아 전선을 지키려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기체와 조종사의 손실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고, 지친 이들이 밤에 누우면 어디선가 가르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Po-2 복엽기들이 날아와 숙영지에 폭탄을 던지고 도주해버려 숙면을 취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야간 폭격은 42년 6월에 오룔 브랸스크, 두기노를 전전하던 부대원들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8월까지 이들은 밤의 마녀들이 흩뿌리는 폭탄으로 101대의 전투기를 잃고 17명의 조종사가 죽거나 후방으로 후송을 당할 정도로 공중전에서 입는 피해 이상으로 많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

3. 지중해로

1942년 11월에 제2비행대(II. / JG 51)는 지중해 전역으로 옮겨져 튀니지 시칠리아, 그리고 이탈리아반도에서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 캠페인은 1943년 4월에 사르디니아를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곧 제 II 비행대는 독일 본토 방어를 위해 JG 1에 합류했고, 남은 대원들은 JG 77 소속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이들은 묄더스 항공단의 마크를 계속 고집했다. 이 전역에서 주로 과거의 숙적 영국 공군과 다시 싸우면서 26명의 조종사를 잃었다. 7월에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트라파니(Trapani) 부근에서 팔팔한 미군까지 상대하게 되자, 도저히 제공권을 유지할 수가 없어졌고 방어에만 급급하게 된다.

해가 바뀐 1944년 3월에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발칸반도로 기지를 옮겨서 독일군에게 귀중한 연료 공급처였던 플로에스티 유전을 방어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 연말부터 이들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유전을 공습하는 미 15공군(15th Air Force)의 4발 중폭격기 대편대를 맞아 처절한 요격 전투를 벌이며 완강하게 맞섰다. 이들의 분전은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일종의 공포로 다가왔고, 헝가리 그리스, 오스트리아까지 밀려난 1944년 말이 되어서야 진화되는 기미가 보였다.
목표인 플로에스티 상공에 진입하고 6분 후, 나는 한 번도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무서운 광경을 내 눈으로 목격했다. 지상에 바싹 붙어 낮게 날고 있던 우리 폭격기들을 향해 날개에 흰 네모가 그려진 불가리아 전투기들이 마치 눈보라가 덮치듯이 습격해오고 있었다. 하늘의 요새로 불리던 우리 중폭격기들이 동체 이곳저곳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나며 조각조각 흩어지는 것이 보였고, 그중 한 대는 높은 참나무에 부딛히면서 눈부신 섬광을 번쩍이며 폭발해 승무원들이 사방팔방으로 흩뿌려졌다... 제아무리 용감한 조종사라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추축군 조종사들은 마치 철천지 원수를 대한 것처럼 미친 듯이 우리를 공격했다. 그들이 보호하고 있는 유전은 추축군의 보물임이 분명하다. - 제97전투비행중대 P-38 조종사 에드워드 틴커 소위

그러는 동안 오룔에서 버티던 제1, 3, 4 비행대는 제6항공함대(Luftflotte 6) 휘하에서 쿠르스크 전투에 참가했다. 1943년 7월 5일부터 소련 공군은 루프트바페가 주둔하고 있는 비행장을 공격하는 임무에 온 역량을 집중시켰다. 이에 따라 제4, 6 항공함대 휘하의 전투기들은 쉴새 없이 출격을 반복해야만 했고, 항공단 전대원들은 스크램블 태세로 전투기의 콕핏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지경에 이를 정도로 반복 출격을 강요당했다. 이 전역에서 그들은 항공 전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공중전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나치 독일이 패색이 짙어진 1945년 5월에 이들은 동프로이센까지 후퇴했고 극히 일부의 조종사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상요원들은 육군과 함께 지상전투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안톤 하프너, 하인츠 베어, 카를-고트프리트 노르트만, 귄터 샤크 같은 항공전사에 이름을 아로새긴 수퍼 에이스들을 배출한 부대인 묄더스 항공단의 영광된 이름은 유로파이터를 운용한 독일 공군의 제74전투항공단(Jagdgeschwader 74)에서 사용되었으나 2005년 스페인내전 참전경력과 나치에 비판행동을 하지 않았다는이유로 삭제되었다.

4. 역대 지휘관


[1] Friedrich Bec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