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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2:04:35

코모도어 64

C64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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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의 컴퓨터
CPU 모델명
KIM-1
PET
VIC-20
64
Plus/4
128
CBM-2
SX-64
MAX
Machine
Educator
64
16


파일:external/blog.tmcnet.com/commodore-64.jpg
코모도어 64 광고 영상

Commodore 64

1. 개요2. 역사
2.1. 개발2.2. 성공2.3. 문제 해결2.4. 단점
3. 사양4. 일본에서의 코모도어 645. 한국에서의 코모도어 646. 복각7. 기타

1. 개요

1982년 8월에 코모도어 인터내셔널(Commodore International)에서 발표한 8비트 가정용 컴퓨터이며, 코모도어의 전작인 VIC-20의 발전형이다. 이름에 '64'가 붙어 있는데, CPU 64비트라는 뜻이 아니라 DRAM 용량이 64KB라는 뜻이다. 약자는 'C64'이며, 개인용 컴퓨터의 개념을 완성한 역사적인 컴퓨터로 간주된다.

2. 역사

2.1. 개발

MOS 테크놀로지는 1982년 1월 소비자 가전 전시회(CES)를 목표로 '비디오 게임기'를 만들고 싶어하는 기업에게 판매할 그래픽 칩과 사운드 칩을 1981년 1월부터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코모도어 64 개발의 시작이다. 하지만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코모도어 64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MOS 테크놀로지는 이전에 그래픽과 사운드 칩을 둘 다 내장한 VIC[1] 칩을 개발하였으며, 이 칩은 자사의 코모도어 VIC-20 컴퓨터에 내장하여 당시 북미 가정용 컴퓨터 시장에 크게 기여를 하는 등 여러모로 좋은 성과를 보였다. 1981년 11월, MOS 테크놀로지는 이 VIC 칩의 후속작인 비디오 칩 VIC-II와 사운드 칩 SID[2] 칩을 만들었다. 결국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의 CEO였던 잭 트러멜(Jack Tramiel)은 비디오 게임기 개발 솔루션이 아닌 가정용 컴퓨터 완성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코모도어 VIC-20의 진정한 후속작인 코모도어 64이다.

1982년 1월 소비자 가전 전시회를 위해 5주 동안 5대의 프로토타입 컴퓨터를 설계 및 제작해서 전시했다. 그 당시 코모도어는 코모도어 64의 출시 가격으로 당시 가정용 컴퓨터 산업계 전체를 매우 놀라게 했다. 키보드, CPU, 그래픽 및 사운드 칩, 64KB DRAM으로 구성된 컴퓨터가 겨우 $595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곳에서 부스를 열고 있었던 아타리 직원들이 찾아와 "어떻게 그 가격이 가능하냐"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코모도어는 코모도어 64의 전시로 1982년 1월 CES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2.2. 성공

이 컴퓨터가 기획 및 발매된 1981~1982년엔 DRAM이 엄청 비쌌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64kbit(8KB) DRAM 칩 한 개에 $100가 넘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그당시 DRAM 가격이 비싸긴 해도 기술 발전으로 가격 하락 속도 또한 굉장히 빨랐던 시기라 이런 가격이 오래가진 않았지만, 당시 잡지 광고 등을 살펴보면 1981년 전반기에도 64Kbit DRAM는 $50 정도에 팔렸던 것을 볼 수 있으니 아무리 가격이 떨어져도 여전히 비싼 부품이었다. 이거야 소매가니까 도매가와는 또 다르겠지만, 어쨌든 그 시점에서는 이런 것을 8개 탑재해 64KB로 구성하면 원가가 비쌀 수 밖에 없다. 코모도어 64가 발표된 1982년 1월 경에 다른 컴퓨터들의 DRAM 용량과 가격은 추가 카드를 꽂아 DRAM를 64KB로 확장한 애플 II+가 $1200 남짓, 아타리 800을 위한 32KB 확장 메모리 보드가 $150~200선에 팔렸고, 코모도어 64가 출시되기 2년 전에 자사가 출시했던 VIC-20은 5KB의 DRAM을 넣어 $300의 가격에 출시되었다.

이렇게 가격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잭 트러멜이 DRAM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코모도어 64 판매 시점에는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예측은 적중해 대량 생산 시점의 생산 단가가 고작 $135 뿐이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가격은 계속 떨어져서 이듬해인 1983년에는 일본 메모리 반도체 치킨 게임이 시작되었고, 64Kbit 메모리 칩은 소매가로도 $10 아래까지 내려간다. 그에 더해서 수직 계열화[3]와 대량 생산 및 대량 납품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에 의뢰한 부품의 대량 구매를 통한 원가 절감, 저가 부품의 사용 등으로 싸게 생산해 파는 박리다매 전략을 펼쳤다. 출시 가격은 $595였지만, 출시 이후에 공격적인 가격 인하를 계속하여 1983년에는 이미 딜러가를 $200까지 내려서 소매가는 $300선, 1984년에는 본체 소매가 $200선에 컬러 모니터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까지 갖춰도 한 $600 정도면 살 수 있었다.[4] 당시 다른 기종 갖고 이렇게 갖추려면 일단 천 달러는 기본으로 넘기고 시작했다. 오늘날에도 가성비의 전설로 남아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게 얼마나 싼 것이냐 하면, 십여 년 뒤에 IBM PC 호환 기종의 본체 가격이 $500로 내려가는 것을 두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이전 기종인 VIC-20도 코모도어 64보다 아랫급 기종으로 100$ 남짓한 가격에 계속 판매되었고, 코모도어 64와 함께 코모도어의 가정용 컴퓨터 시장 장악에 기여했다. 그래서 1980년대의 한국에 MSX나 애플이 아니라 코모도어 64가 들어와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겠지만, 애플 II 호환 기종과 MSX가 인기가 있었고 그 이유는 하술한다.

첫 등장 이후로 1986년도까지 북미와 서유럽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컴퓨터로, 최대 시장 점유율은 무려 40%나 되었고, 이후에도 꾸준히 30%대를 유지했다. 이러한 엄청난 성공으로 코모도어 64는 현대의 개인용 컴퓨터의 개념 확립과 시장 형성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컴퓨터로 평가받는다.[5] IBM PC는 당시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쌌고 사무용 컴퓨터를 지향했기 때문에 가정용으로는 잘 안 팔렸다. 가정용 컴퓨터로서 최대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애플 II의 경우에는 동 시기에 주력으로 판매되었던 애플 II+에 비하면 나중에 나온 코모도어 64쪽이 성능 면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6] 그보다 상급 기종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높은 가격 정책 때문에 외면받았다.[7] 애플과 마찬가지로 코모도어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 중 하나였던 아타리에서는 같은 시기 코모도어와 거의 비슷한 사양의 컴퓨터를 냈지만[8] 가격이 $899로 더 비쌌고, 아타리 쇼크의 여파로 신뢰받기 힘든 상황이었으니 코모도어가 잘 팔린 건 시대를 잘 타고난 덕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자제품 전문점이 아닌 일반 소매점에서 판매한 것도 세일즈 포인트였다. 코모도어 64의 모양은 본체와 키보드가 일체화 되어 있는 형태로, 모니터가 없는 대신에 텔레비전에 연결하여 TV를 출력 장치로 쓰기 때문에 타 기종들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있었다.[9] 생김새 때문에 별명은 'Breadbox'(빵상자)(...)였다.[10]

보조 기억 장치로는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카세트 테이프 데이터 레코더[11]를 사용하고, 1만 개 이상의 상용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져서 팔렸으며, 개중에는 당연히 코모도어 64의 그래픽/사운드 성능을 살린 게임도 아주 많다. 애플 II판으로 발매되어 한국에 알려진 대부분의 게임들이 코모도어 64판으로도 나와 있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그리고 애플판과 코모도어 64판이 함께 있는 게임은 십중팔구 코모도어 64판 쪽이 더 낫다. 그래서인지 '출력장치는 TV'라는 특성과 함께 어우러져 과거에 한국에서 MSX를 게임기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코모도어 64를 게임기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좀 있다. 이런 이유인지 PC 게임을 다루지 않는다는[12] AVGN도 코모도어 64 게임은 가끔 다루다가[13] 마침내 E198에서 전체적인 리뷰를 하였고 수많은 게임들(특히 캐릭터 게임들)이 나왔고 그중 몇몇은 형편없는 캐릭터 게임들이나 이식작들도 제법 있지만 나쁘지 않은 이식에 잘 만든 게임도 확실히 많다면서 전체적으로 호평하였다. 한국 내의 팬이라면 AVGN을 통해서 코모도어 64를 처음 접한 사람도 많을 듯하다. 실제로 2008년부터 닌텐도에서는 버추얼 콘솔로 코모도어 64용 게임을 에뮬레이션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하고, 애플에서는 앱스토어로 코모도어 64 클래식 게임들을 판매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코모도어 64 게임으로 심즈의 원조격인 리틀 컴퓨터 피플이 있다. 물론 MSX처럼 게임에 적합한 특성이 있다는 것일 뿐이지 코모도어 64는 어디까지나 개인용 컴퓨터였고, NES 같은 진짜 게임기보다는 훨씬 다루기 까다롭고 신경쓸 것도 많았다. 그래서 당대 게임기에 견줄 만한 게임 성능을 가졌음에도 게임기에 견줄 만한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다.[14]

성공에 힘입어 많은 파생 기종이 나왔고, 개중에는 재믹스와 비슷하게 아예 게임만 할 수 있는 '코모도어 64 게임 시스템'[15]과 운반하기 쉽도록 설계된 '코모도어 SX-64', 제대로(?)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 디자인을 변경한 '코모도어 64C' 등이 나왔다.[16] 1986년에는 GUI 운영 체제인 GEOS가 등장했다.

후속 컴퓨터 기종은 코모도어 128[17]을 거쳐 아미가로 발전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많이 팔리고 있었던 덕분에 코모도어 64는 다른 코모도어 8비트 컴퓨터들과 달리 코모도어가 파산하는 그 순간까지 생산됐다. 또한 이 때문에 아직도 코모도어 64를 이용하는 애호가들이 상당히 많다. 케이스나 PCB의 복각판이 아직도 판매되고 있어서 구매하지 못하는 부품 몇 개[18]만 제외하면 완전한 코모도어 64를 만들 수도 있다.

현재도 '이상적인 컴퓨터'를 구상하라면 유닉스 워크스테이션의 성능(UNIX Workstation Power), IBM PC의 확장성(IBM PC Compatibility), 애플의 그래픽(Apple Graphics), 코모도어의 가격(Commodore Price)이라는 4가지를 꼽을 정도로 역사에 남은 컴퓨터이다.

2.3. 문제 해결

코모도어는 코모도어 64를 양산하기 전까지 고작 1년여 만에 속도전으로 개발했던 탓인지 양산 초기에도 여러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했다.

우선 그래픽 칩은 가정용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 둘 다 수행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트랜지스터 회로가 들어간데다 12V를 전원으로 썼던 탓에 발열이 무척 심했다. 그래서 코모도어는 차폐 덮개의 설계를 변경해 비디오 칩셋과 연결해 방열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초기 생산품은 빛 반점들이 나타나는 결함이 있었는데, 원인은 그래픽 칩이 아닌 롬의 결함이었다. 그리고 그래픽 칩의 수평 공백 신호의 클럭 타이밍에 오류가 있어 세로 가장자리에 색상 오류가 있었다.

이런 문제점들은 양산품이 쏟아져 나온 이후에야 해결되었고, 초기에 생산된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은 코모도어의 가격 정책을 이용해 환불받아 더 저렴해지고 문제가 해결된 코모도어 64를 다시 구매했고, 이에 코모도어가 손실을 입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치명적이지 않은 오디오 출력단에서 나오는 화인 노이즈나 6581의 음량 레지스터 버그 등은 좀 더 시간이 지나서 해결되기도 했다. 그래서 코모도어 64에는 제조 시기에 따라 하드웨어 리비전이 많다.

2.4. 단점

이렇게 성공한 코모도어 64의 가장 큰 단점은 '코모도어 1541'이라는 이름의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였다.[19]

코모도어 1541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나치게 느렸다는 점이다. 코모도어 1541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코모도어 VIC-20에서 쓰인 코모도어 1540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와 호환성 있게 하고자 설계했는데, 문제는 코모도어 1540과 1541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에 있는 MOS 테크놀로지 6522 인터페이스 컨트롤러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VIC-20의 CPU가 IEEE-488 통신으로 1비트씩 직접 제어했고, 그러다보니 읽기 속도가 고작 초당 512바이트에 불과했다. 그러나 코모도어 VIC-20의 RAM은 5KB뿐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64KB나 되는 코모도어 64에서는 큰 문제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애플 II의 Disk II는 초당 10KB는 넘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반 VIC-20/코모도어 64 이용자들의 상당수는 그냥 속도는 좀 느리지만 저렴하고 매체도 구하기 쉬운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데이터세트)를 사용하였다.[20]

이 문제는 1984년 Epyx를 필두로 서드파티 회사들이 패스트 로더 카트리지를 만들어 코모도어 1541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카트리지에 연결하면서 해결되었다. MOS 테크놀로지 6522 인터페이스 컨트롤러의 역할을 카트리지에 있는 ROM 프로그램이 대신하면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읽기 속도가 초당 2500바이트로 무려 5배 증가했다. 결국 패스트 로더 카트리지는 코모도어 64 구매자들의 필수 번들 구매품이 되었다.

또한 코모도어 1541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처음에 알프스에게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납품받아 판매했는데, 이것들은 드라이브에 플로피 디스크를 꽉 삽입한 이후 디스크를 꺼내려면 다시 눌러 꺼내는 스프링 배출 방식이었다. 그러나 잘 고장나 플로피 디스크가 껴 빠지지 않기 일쑤였기 때문에 이후 뉴트로닉스/미츠미 전기의 레버 방식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로 납품처를 변경해 해결했다.

그리고 자기 헤드 정렬 상태가 잘 어긋나 읽기 쓰기 오류가 많았다. 원인은 코모도어 1541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전원 공급 장치가 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 설계를 제대로 하지 않는 바람에 자주 과열 상태가 되었고, 스테퍼 모터의 축과 축에 압입(壓入)된 도르래의 재질이 달라 열팽창 계수가 다르다 보니, 과열 상태에서 도르래가 축에서 이완되어 어긋나는 것이 원인이었다. 이는 냉각팬을 부착하도록 개조하면 완화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장나면 주기적으로 교정 작업을 받거나 아니면 도르래가 조립되어 있는 전용 스테퍼 모터 부품으로 교환받아야 했다. 자기 헤드 정렬 어긋남 문제는 전원 공급 장치를 전원 어댑터로 분리하고 다양한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작게 만든 코모도어 1541-II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21]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유저들을 괴롭혔다.

또 헤드 코일의 권선이 끊어지기도 했는데, 헤드 커넥터를 뽑아 각 핀들 사이의 저항값을 재면 알 수 있다. 코일 수선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반대로 생각하면 모든 1541은 시기는 다를지언정 언젠가는 고장나서 버려질 운명이다. 참조

1541 외에도 코모도어 디스크 드라이브는 역사도 구조도 특이한데,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이 영상 참고.

3. 사양

4. 일본에서의 코모도어 64

코모도어 인터내셔널은 코모도어 64 출시 이전, 이 VIC-II와 SID칩을 기반으로 한 '코모도어 MAX 머신'을 일본에 내놓았다. 하지만 코모도어 MAX 머신은 2KB밖에 안 되는 RAM 용량과 단가를 후려친 멤브레인 키보드[24], RF 단자로 TV에 연결하는 것이 유일한 수단인 등 전작인 VIC-20보다 못한 점들이 많아 얼마 팔지 못하고 외면받다가 결국 MSX가 나오기도 전인 1982년에 단종되었다. 미국에서 Ultimax, 서독에서 VC-10이라는 제품명으로 알려졌으나 일본 이외의 나라에 실제로 판매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그리고 1982년 말, 코모도어 재팬에서는 가나 문자를 지원하는 코모도어 64를 드디어 발매했다. 그러나 일본 내의 경쟁 제품들에 비해 너무 비싸 가성비가 낮았던데다 호환 소프트웨어도 심하게 부족해서 얼마 못 팔고 역시 또 외면받았다. 코모도어 재팬 본사에서 발매된 게임 소프트웨어 몇 점 말고는 호환 소프트웨어가 없었던지라 마이컴 BASIC 매거진(マイコンBASICマガジン)에 수록된 프로그램을 직접 손으로 타이핑해서 쓰거나 DIY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해외판 소프트웨어를 구해서 일본어판 코모도어 64에서 돌리면 문자 깨짐이 일어나서 쓰기 나빴다.[25]

거기에다가 이듬해 MSX 규격이 발표되면서 MSX 진영에 참여한 여러 기업들과 소수의 독자규격 채택 기업들로 인해 일본 컴퓨터 시장이 레드 오션이 되었고 MSX가 사양길에 접어들었을 땐 이미 대세가 16비트로 기울어진 뒤라 결국 코모도어 64는 더 이상 일본 시장에 진출하지 못했다.[26]

5. 한국에서의 코모도어 64

코모도어 64의 전성기 때, 한국에서는 대체로 애플 II 복제품과 국산 MSX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고, 코모도어 64는 정식 발매는커녕 호환 기종도 없었던 탓에 매우 보기 힘들었다. 1980년대에 한국은 개발도상국이어서 한국인들의 가계 경제력으로는 가정용 컴퓨터를 장만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는데, 당시 가격이 30~50만 원 정도로 이는 사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에 육박한 금액이었다. 또한 미국제, 일본제 등의 오리지널 컴퓨터를 직접 구매하는 것은 가격이 싸다 할지라도 해외 여행이 제한되어 있어 매우 어려웠다. 이런 사정이 애플 II 복제품이 인기를 끈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 중소 기업에서 복제품[27]을 만들어 대략 30만 원 정도로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공급했기 때문에 복제품의 대량 보급이 가능하였다. 관련 소프트웨어 역시 복제해서 사용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정품 패키지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모르던 흑역사가 있다. MSX는 아예 규격 자체가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대우전자를 비롯한 한국 대기업들이 직접 뛰어들 수 있어서 나름대로 경쟁력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코모도어 64의 특징인 싼 가격은 애플 II 복제품이, 간이 게임기를 겸하는 가정용 컴퓨터 역할은 MSX가 완벽히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코모도어 64가 보급될 여지가 딱히 없었던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코모도어 64의 제품 특성도 한몫을 한다. 애플 II는 애초에 개방형 아키텍처 규격이었던데다가, 전용 칩 따위는 발주해서 생산할 주제가 못 되었던 영세 벤처 기업 제품답게 흔한 범용 TTL(Transistor-Transistor Logic: 트랜지스터-트랜지스터 논리) IC 회로를 이리저리 짜맞춰서 구성한 물건이라 복제도 쉬웠다. MSX는 복제품이 아닌 라이선스 생산품이긴 했는데, 이것도 '범용 부품들을 모아서 값싸고 안정적으로 공급이 가능한 공통 규격 컴퓨터를 만들어보자'는 기본 이념으로 만들어진 규격이라서 생산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코모도어 64는 MOS 테크놀로지를 계열사로 갖고 있는 회사 물건답게 CPU, 그래픽, 사운드에 모두 전용 칩을 사용하고 있어서 복제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커스텀 칩으로 구성되어있었던 닌텐도 패미컴도 수많은 복제품이 만들어졌듯이, 돈만 된다면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복제품을 만들지 못할 리가 없었지만... 코모도어 64는 정품 자체가 워낙 심하게 싸다 보니까 그보다 싼 값에 복제품을 만들 수 없었다(...). 복제품을 만들면 도리어 정품보다 제조원가가 비싸지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코모도어 64의 저렴한 가격은 상술한 대로 저렴한 원가에 있는 것인데, 이는 복제품 제조업자에게는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코모도어는 다른 곳에 제조 라이선스를 주지도 않았다. 이렇다보니 한국은 물론이고 대만 등에도 애플 II 복제품이 흔하게 널려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코모도어 64는 그런 것이 없었다.

당시 한국에서 어떻게든 복제품을 만들었다고 쳐도 한국에서 수십만, 수백만 대씩 팔렸을리는 없으니 코모도어처럼 싸게 만들 수도 없었을테고, 정품이 아무리 싼 물건이라지만 그게 바다를 건너와 한반도까지 수입되는 과정을 거치면 쌀 리가 없었을 테니 직수입도 그렇게 경쟁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연히 1980년대는 지금처럼 미국에서 디자인하면 대만 기업이 중국에서 생산해서 세계에 판매하는 그런 시대가 아니었다.[28] 또한 당시 한국에 판매되던 가정용 컴퓨터들은 비록 외국산의 복제품이라도 어떤 식으로든 한글을 표시할 수 있도록 개조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1980년대에 한글 지원이 되는 8비트 기기의 한글 구현 능력은 지금 보면 뭐 조악하기 짝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예 한글 지원이 안되는 물건하고 비교가 되겠는가. 그리고 당시 정부 정책을 생각해보면, 보따리 수준으로 소량 들여다 파는거면 모를까 과연 '한글도 안 나오는 가정용 컴퓨터'에 대해 대규모의 수입 허가가 나왔을지부터가 의문스런 일이기도 하다. 1980년대의 한국은 국산 제품 보호라는 미명하에 외국에서 가전 제품을 수입해서 판매하는 것에 대한 규제가 상당히 빡쎘다.[29]

물론 미국에서 개인이 직접 사다 쓰는 정도는 가능한 일이었겠고, 아마 실제로 쓰던 사람도 있기는 했겠지만, 사용자가 많지는 않은 기종이다보니 소프트웨어 수급은 스스로 알아서 다 하는 수밖에 없었을테고, 특히 그 시절에는 꽤나 막막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게 그런 대단한 노력을 들여가면서까지 쓸 만큼 대단한 물건이냐 하면 그게 참 애매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코모도어 64는 미국 현지에서의 대성공에 비해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은 기종이었다. 복제품 덕분에 한국에 널린 라이벌 제품 애플 II나 여전히 많은 수의 올드팬을 자랑하는 MSX와 비교하면 한없이 후달리는 인지도를 갖고 있다. AVGN 유튜브 영상에서 처음 보았다는 사람도 꽤나 많다. 사실 이는 그 역도 성립하는데, 코모도어 64가 활발히 보급된 지역에서는 MSX가 상대적으로 마이너이다. AVGN에서도 MSX 얘기가 간혹 나올 때면 '일본의 가정용 컴퓨터'라는 부가 설명을 붙여서 시청자들의 이해를 도울 정도이다.

만일 그 시절에 누군가가 이 물건의 복제품을 만들거나, 정품을 수입 및 개조해서 한글 롬(ROM)을 장착하고, 소프트웨어를 들여다가 배포하고, 일부라도 한국어화해서 발매할 수 있었다 쳐도 과연 그것이 경쟁 기종들보다 매력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가격면에서의 장점이 아니라면 남는 건 풍부한 소프트웨어뿐인데, 당연하게도 코모도어 64는 소프트웨어가 기본적으로 다 영어판이고, 이 분야에서 애플 II가 코모도어에 결코 밀리는 기종이 아니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는 것은 세운상가의 영세 업체나 오퍼상 레벨에서는 도저히 하기 힘든 규모의 일이기도 하고... 앞 섹션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일본에서 코모도어 64를 정식으로 발매했다가 비싼 가격과 소프트웨어 부족 때문에 죽을 쑤었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코모도어 64가 한국 시장에 정식으로 진출했다 쳐도 결국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코모도어의 기종이 한국에 정식 발매된 건 한참 뒤인 1990년, 코모도어 아미가를 통해서였다. 아미가 500과 2000을 한국에 발매하기는 했지만 보급 시점 자체가 늦은데다 소프트웨어 한국어 번역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때는 이미 1989년 한국에서 교육용 PC 기종으로 IBM PC 호환기종을 선정하여 IBM PC 및 호환기종이 급격히 시장의 대세로 떠오른 이후인데다가 가격도 상대적으로 고가였던 탓에 일반 개인 유저들 상대로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다만 아미가의 경우 방송 및 영상 분야에서는 1990년대 중반까지[30] 널리 쓰일 정도로 인지도가 있었다.

6. 복각

결국 2011년에 복각으로 부활했다. ( #1, #2) 최신 스펙이지만 디자인 부분에서는 1980년대의 코모도어 64와 다른 게 전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콘셉트를 잘 살렸을 뿐이지, 키보드 레이아웃 및 각인된 폰트부터 다르다. 현존 PC의 인터페이스를 넣을 수밖에 없는 뒷면과 옆면은 말할 것도 없고. 가격도 크고 아름답다.[31]

Retro Games라는 회사에서 미니 콘솔 버전인 'The C64 Mini'를 출시했다.( #) 원래는 위의 2011년 버전과는 정반대로 코모도어 64의 성능에 외형을 현대화한 'The 64'를 제작할 예정이었으나, 모종의 사유로 인해 지연되면서 C64 미니를 출시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이 제품의 키보드는 실제로 동작하지 않는다. 크기가 작아서 입력이 쉽지 않기도 하고, 게임 위주인 복각 콘솔이기 때문에 키보드가 거의 필요없기도 하다.[32] 다른 복각형 콘솔과 다른 점으로는 USB 드라이브를 이용해서 수록된 것 이외의 코모도어 게임 롬을 실행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만 The C64 Mini에 장착된 USB 단자가 2개밖에 없어서 키보드를 쓰려면 USB 허브가 필요하다. 2019년 12월에는 Maxi라는 풀사이즈 버전이 발매되었다. The C64 Maxi 리뷰(The 8-Bit Guy)

현재 Gideon's Logic라는 업체에서 FPGA를 사용하여 Ultimate-64라는 이름으로 코모도어 64의 클론을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이 업체는 이미 코모도어 64의 주변 장치를 개발했다.( #)

레트로 기술들을 주로 다루는 유튜버 The 8-bit Guy를 중심으로 코모도어 64의 커널과 BASIC을 기반으로 완전히 새로운 8비트 컴퓨터인 'Commander X16'을 제작하고 있으며 비교적 단순한 구조로 인해 컴퓨터 아키텍처 교육용으로 적합하지만, 단종된 지 오래된 구형 기기이기 때문에 한계점[33]이 있다는 8비트 컴퓨터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기획되어 시중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부품들을 사용하도록 설계되었으며, 덕분에 현세대 주변기기 사용이 가능해지고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출시가 가능해졌다고 한다. FPGA를 통해 구현된 제품이 아니며, 하드웨어 구조도 코모도어 64와 다르기 때문에 코모도어 64와 일부 소프트웨어만 호환된다. # #[34]

7. 기타

코모도어 64 이전에도 코모도어에서 내놓은 히트작 PC가 여럿 있다. 코모도어 PET은 1977년에 발표되었는데, 애플 II를 간발의 차로 제치고 역사상 최초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PC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 제품인 VIC-20은 상술했듯 코모도어 64와 함께 가정용 컴퓨터의 개념 확립에 큰 공을 세웠으며, 코모도어 64 다음에 나온 Plus/4[35]는 성공하지 못했고, 코모도어 128도 성공이라기에는 좀 애매했지만 아미가가 성공하여 코모도어 64의 명성을 이어갔다.

와레즈의 역사도 코모도어 64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지금까지도 활동하는 최고참급 크랙 릴리즈 그룹들은 코모도어 64 시절부터 코모도어 64용 소프트웨어 크랙으로 명성을 쌓아온 이들이다. 다른 8비트 컴퓨터들도 크랙 대상이었지만 코모도어 64가 선두 플랫폼이었던 만큼 주요 표적이 되었다.

코모도어 64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일반적인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와는 다르게 독립적으로도 작동할 수 있는 컴퓨터[36]를 내장하고 있으며, 이 컴퓨터가 플로피 디스크의 데이터를 읽어서 보내주거나, 받아온 데이터를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하는 작업을 한다. 원가를 절감하고 작동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목표는 그랬지만 상기 단점 문단에서 보이듯 실현하지 못했으며, 이후 데이터 로드 프로토콜을 완전히 수정한 패스트 로드 카트리지가 나오고 나서야 어느 정도 고속 데이터 전송이 가능해졌다.

코모도어 64는 SID 사운드 칩이 한번 바뀌었던 기록이 있다. 전기형에 속하는 SID 6581 칩은 당시 불완전한 설계로 인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완벽히 분리시키지 못한 탓에 독특한 하드웨어 결함이 있었다. SID 칩은 공식적으로 3채널만 지원하지만 하드웨어 결함으로 인해 볼륨 레지스트를 조정하면 기존 3채널 외에서 들리는 특유의 클릭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를 이용해 원하는 샘플값에 따라 볼륨 레지스터를 빠른 속도로 조절하면 가상적으로 4번째 채널에서 샘플을 연주하는 것이 된다.[37] 이를 이용해 각종 가상의 4채널 코모도어 64 음악이 만들어졌다.( #)[38] 이후 후기형인 SID 8580 칩에서는 그 결함이 수정되어서 해당 칩이 달린 코모도어 64에서는 4채널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digifix라는 개조 기술이 발명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개조만 한다면 8580에서도 샘플을 들을 수 있다.

AVGN에서 등장한 코모도어 64는 윈도우 기반 PC로 개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PC 화면을 미리 촬영해서 코모도어 64의 모니터( 산요 CRT TV)에 합성한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마이너한 게임에 속했던 'Netherworld'의 타이틀 곡이 재발굴되었다. # 고전 컴퓨터임에도 박력있는 메탈을 하는 듯한 느낌인데 AVGN에 쓰인 해당 곡은 1.5배속으로 빠르게 해서 꽤 멋들어지게 들린다.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AVGN은 코모도어 64를 두고 '지 마음 내킬 때만 작동하는 것도 이 컴퓨터의 특징'이라고 깠다. 아무튼 본편 내에 나오는 코모도어 64는 인터넷에 연결해 웹서핑도 되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로 CD도 읽고, 심지어 화상 채팅도 가능하지만 어째서인지 오리지널 은 설치가 안 되는 수상쩍은 물건으로 등장한다.(...)

완다비전 5화에서도 등장한다. 모니터와 플로피 드라이브까지 충실히 재현했으며 모니터에 코모도어 로고도 그대로 붙어있다. 다만 BASIC 화면에서는 코모도어 글자를 빼고 "64 BASIC V2" 로 표시하고 있다.
파일:wandavision_commodore64.jpg

[1] Video Interface Chip, 비디오 인터페이스 칩. 말 그대로 화면 송출용 칩이란 뜻이다. [2] Sound Interface Device, 사운드 인터페이스 장치. 말 그대로 사운드 송출을 위한 칩이다. 프로그래밍 가능한 3개 채널을 가지고 있으며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뛰어난 수준이었다. [3] 가장 핵심적인 반도체인 CPU를 생산하는 MOS 테크놀로지를 코모도어에서 1976년에 인수해 자회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타리 2600, 애플 II, 닌텐도 패미컴의 메인 CPU인 6502 시리즈가 바로 MOS 테크놀로지의 제품이다. 다만 패미컴의 CPU는 코모도어에게서 라이선스를 받은 RICOH에서 생산했다. [4] 당시의 판매가가 나와있는 잡지를 보여주는 영상을 보자. [5]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는 코모도어 PET, 애플 II, 탠디 TRS-80 이렇게 셋이지만 이들은 당시 상황의 제약으로 가정에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가격도 비쌌고 당시에는 개인이 컴퓨터를 사용한다는 개념 자체도 없었고 컴퓨터를 사용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PET는 교육용 시장, 애플 II는 사무용 시장에서 성공했고 탠디도 가정용 시장이 크지는 않았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 최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나온 것이 애플 IIe이다. [7] 극단적인 사례로 애플 리사 참고. $9995라는 미친 가격을 자랑했다. 이후 등장한 매킨토시도 여전히 가격이 비싼 데 비해 가정용에 걸맞은 소프트웨어와 확장성을 갖추지 못했기에 PC로서의 판매량은 낮았다. [8] 아타리는 태생이 게임기 회사였지만 초기 개인용 컴퓨터들이 자사의 게임기에 비해 딱히 기술적으로 진보되어 있지 않은 설계임에도 불구하고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을 보고 1979년 아타리 400/800을 시작으로 8비트 컴퓨터 시리즈를 발매한다. 아타리 8비트 컴퓨터들은 합리적인 가격과 뛰어난 게임 성능으로 PC 시장에서 일정 지분을 가져간다. [9] 위의 사진에 있는 코모도어 64용 모니터는 일반적인 모니터가 사용하는 RGB 단자 대신 컴포지트 단자가 달려있는 물건으로서 지금도 이베이에서 검색해보면 중고 매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39] 나름대로 화질도 괜찮고 S단자도 있어서 레트로 게이밍용으로 꽤 각광을 받는 모양이다. 코모도어 64와는 S단자-컴포지트 컨버터 케이블을 통해 연결한다. [10] 거의 같은 생김새인 전작 VIC-20도 공유하는 별명이다. PC로서는 적합한 디자인이었지만 기업용이나 교육용으로는 부적합했기에 PET의 케이스에 코모도어 64 내부가 들어간 형태인 기종(에듀케이터 64)도 있지만 이전에 교육 시장에서 지배적이었던 PET의 명성을 이어받지 못했다. PET이 도태된 이후 교육용 컴퓨터 시장은 애플 II가 장악했고, 애플은 지금까지도 미국 교육용 컴퓨터 시장에 일정 지분을 가지고 있다. [11] 현역일 당시에는 주로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사용했다.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가격도 비쌌고 구조적인 한계로 속도도 카세트에 비해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단의 단점 문단을 참고. [12] 빅 릭스가 유일하다. [13] 메탈기어같은 MSX 게임을 다룬 적도 있다. [14] 일단 당시 개인용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BASIC을 기본적으로 알아야 했고 게임을 제대로 하려면 카세트든 플로피 디스크든 데이터 레코더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PC 대비 게임기가 가지는 편의성의 이점은 지금까지도 세계 게임 시장에서 게임기가 PC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는 데에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다. [15] 키보드를 제거하고 카트리지 게임만 할 수 있는데, MSX와는 달리 코모도어 64의 게임들은 대부분이 카세트테이프나 플로피 디스크로 나와서 카트리지 게임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발매연도가 1990년이라서 이것보다 나은 게임기가 많았던 이유로 그다지 팔리지 않아서 망했다. 아타리도 XEGS라는 비슷한 개념의 게임기를 만들기도 했다. [16] 코모도어 128과 같은 디자인 코드를 공유한다. [17] 코모도어 64의 성능 강화판 하드웨어에 Z80 CPU를 탑재해 CP/M을 구동할 수 있게 하였으나 그러나 애플 IIc 등의 동 시기의 유사한 기종들에 비해 판매 실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18] 대표적으로 위에 나온 VIC 칩과 SID 칩 등이 있다. 이런 전용 칩은 현역일 때 코모도어 64가 복제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는 칩과 같은 사이즈의 기판에 마이크로컨트롤러를 박아 칩의 작동을 에뮬레이션하는 모듈이 나와 있으며 부품용 C64에서 추출한 VIC 칩과 SID 칩도 중고로 구할 수 있다. [19] VIC-20 전용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인 VIC-1540의 후속이며 원래 VIC-1541이라는 이름이었고 외관도 새하얬으나, 이후 코모도어 64와 같은 디자인으로 변경된다. 나중에는 코모도어 128 및 64C에 맞춰 디자인 변경 및 소형화가 이루어진 모델도 나왔다. [20] 지금 사용하기에도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 쪽이 더 편하다. 백업용 자기테이프 매체와 달리 단순히 음성 형태로 데이터를 저장하는 것이라 노트북이든 스마트폰이든 연결하고 음성을 재생하면 프로그램이 실행된다. 반면 플로피 디스크는 구하기도 어렵고 당시 모든 컴퓨터들처럼 전용 포맷을 사용해 파일 복사하는 것도 일이다. [21] 코모도어 128과 같은 디자인 코드를 공유한다. [22] 40자×25열 16색 모드도 있으나 문자 해상도가 4×8 뿐이라 실용적이지 않아 거의 쓰이지 않았다. [23] 단색 모드로 24×21 해상도의 스프라이트도 쓸 수 있으나 거의 쓰이지 않았다. [24] 현대의 실리콘 멤브레인 키보드를 생각하면 안 되고 세탁기나 밥솥에 보이는 조작 버튼들을 키보드랍시고 달아 놓았다고 보면 된다. [25] 일례로 이 동영상을 보면 MAME를 이용해 일본판 코모도어 64를 에뮬레이션하여 해외판 문 패트롤을 구동하고 있는데 위쪽에 'ミフチルナメ'라는 표기가 보인다. 이 표기는 본래 'PLAYER'라고 나와야 할 것이 문자 깨짐이 일어난 것일 뿐이라 아무 의미도 없다. [26] 일본에서 8비트 컴퓨터는 후지쯔 FM-7, NEC PC-8801, 샤프 X1이 8비트 고산케로 불렸고 MSX도 가정용 컴퓨터로서 비중이 높았다. [27] 한국은 국제저작권협회에 가입한 1987년이 돼서야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컴퓨터프로그램 보호법이 발효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복제품을 마구 만들어 유통해도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프로그램 보호법은 국제 표준을 따르기 위해 2009년에 저작권법과 통폐합되었다. [28] 당시 직수입 컴퓨터를 유통하는 업체가 있긴 했는데 관세와 수입 비용을 포함하여 현지 가격의 2배 정도였다고 한다. [29] 그당시 미제는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보급형 이미지였던 일제 물건이라도 쓰면 중산층 이상으로 봤다. 게다가 당시는 한국이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던 시절이라 중산층의 수도 훨씬 적었다. 당시 국내에서 수입품에 대한 이미지가 어땠는지는 전기밥솥, 보따리상 문서를 참고하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30] 이후에는 코모도어의 아미가 계열 PC에서 애플의 매킨토시 계열 PC로 교체되었다. 현재는 윈도우 PC와 병행 활용하는 중이다. [31] 게다가 이름만 빌린 제품일 뿐이어서 코모도어 64의 후속 모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32] 일부 필요한 부분에서는 조이스틱으로 가상 키보드를 입력하거나 USB 키보드를 연결할 수 있다. [33] 희소성, 가격, 부품 및 주변기기 수급의 어려움, 장기간 운용으로 인한 불안정성 등. [34] 다만 이건 초기 목표였고, 지금은 변경된 부분이 많다. 개발진들의 언급에 의하면 당시 있었던 코로나 사태로 인해 지연된 상태이고, 개발진들 사이에서도 이 기기의 철학에 대한 의견이 갈리면서 나가는 등 이런 저런 문제가 많았다. 가격 또한 초기에 목표로 했던 가격보다 비싸지는 것이 확실해졌다.(원래는 개발자 보드 수준의 가격을 목표로 했다.) 물론 에뮬레이터는 이미 개발된지 오래됐고 소프트웨어도 포팅된 것이 대부분이긴 해도 이미 많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어디까지나 실기를 구현하는 게 목표였고, 에뮬레이터만으로는 사실 그냥 코모도어 64 에뮬레이터를 쓰는거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다. 8-bit guy 본인의 말에 따르면 코모도어 8비트 컴퓨터 패밀리에서 이어지는 후속 기종과 같은 컨셉의 기기라고 한다. 기기의 정체성은 사용자가 하드웨어로 직접 접근하는 것을 막는 16비트 이후의 컴퓨터들과 달리 8비트 컴퓨터들처럼 사용자와 컴퓨터 사이에 층을 두지 않는 기기이다. 현재는 프로토타입 보드가 나왔고 여러 사람이 프로토타입 보드를 이용해 영상을 올리고 있다. [35] 코모도어 64의 설계를 기반으로 스프라이트 등 게임에 필요한 부분을 전부 제거하여 가격을 낮추고 키 배열과 케이스 디자인을 사무용 시장에 적합하게 바꾼 저가형 사무용 컴퓨터였으나 제작 도중 CEO이자 Plus/4의 개념을 만든 잭 트러멜이 쫓겨나 제2의 코모도어 64로 바뀌었으나 시장에서 실패한다. [36] 코모도어 64에 사용된 MOS 테크놀로지 6510의 원본이면서 패밀리컴퓨터 애플2에 사용된 MOS 테크놀로지 6502를 CPU로 사용한다. 당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 치고는 과한 성능이다. [37] 이 '가상의 채널'은 4비트 음원값을 가진다. [38] SID 칩은 파형이 톱니파·삼각파·사각파·노이즈로 이루어져 있다. 채널이 5개지만 채널별로 사용할 수 있는 파형이 정해진 패미컴과는 다르게 가상의 4번째 채널을 제외한 모든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파형을 변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