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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8 12:24:41

한승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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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昇助
1930년 1월 13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 2017년 7월 25일 (향년 87세)

1. 개요2. 상세3. 대중매체4.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학자, 철학자, 언론인, 우익운동가로 한승조(韓昇助)는 필명이고 본명은 한기식이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박홍 前 서강대 총장, 송복 前 연세대 교수와 함께 극우 논객 3인방으로 손꼽혔던 인물이다.[1]

2. 상세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으로 유학,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67년부터 1995년까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

재임 중 정경대학장을 지냈으며, 한국유신학술원 회원, 한국정치학회 회장, 국민윤리학회 회장, 보수단체인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그 외에 아시아 태평양공동체 이사장, 대한민국지키기불교도총연합[2](대불총) 상임고문을 맡았다.

정년 퇴임 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에 선임되었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된 후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했다.

2.1. 일제강점기 찬양, 미화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민족지성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던 한승조는 수많은 기고를 통해 한일관계 악화를 반대해왔으며 독립운동을 실속없는 짓이라고 표현하는 등의 친일 관련 발언을 수도 없이 해왔다.

2000년 11월 2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반성해야하는 한국인의 국민성격>이라는 글을 올렸다.

2001년에는 한국논단 9월호에 일본 교과서 논란을 "어느 나라가 역사교과서를 어떻게 쓰든 그것은 그 나라와 국민의 고유권한이며 역사교과서를 어떻게 써라 주문하는 건 내정간섭"이라고 주장했다.

2004년 8월에는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나 윤봉길, 이봉창의 폭탄투척은 항쟁이라기 보다는 세계의 여론을 환기하려는 외교활동의 일환이라면서 독립군을 전투다운 전투를 한 일은 없었다고 봐도 지나친 일이 아니라며[3] 독립군 활동을 폄하하기도 했다.

2005년 3월 4일에는 일본 우익언론인  산케이 신문의 자매지인 세이론(正論) 2005년 3월호에 "공산주의·좌파사상에 기인한 친일파 단죄의 어리석음: 한일 병합을 재평가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였다. 글의 내용 중에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구절 등이 문제되어 대한민국 내 여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신 친일파라고 불리며 비판받기도 했다. 문제의 논설 전문

이 때문인지 2005년 3월 16일 한승조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해야 했고,[4]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공동대표로 있던 자유시민연대 측에선 "한승조 주장, 색다른 견해일 뿐"이라며 오히려 옹호 의견을 발표했다.

2.2. 사망

2017년 7월 25일 자택 앞 공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7세. 사망 하루 전까지만 해도 집 앞 공원에서 산책을 다녔을 정도로 건강했다고 한다. 다만 1년 전 부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등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고 전해졌다.

모교인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에 장례식장이 마련되어 7월 27일 6시에 발인했다.

3. 대중매체

아무래도 지만원, 변희재, 김완섭, 고 젠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명한 일빠 어그로꾼이다 보니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대표적으로 너구리알이 만든 불멸의 이순신 게임에서 지만원과 함께 독도를 침략한 일본군 보스로 등장한다. 독도에 관한 퀴즈를 내는데, 5개 이상 틀리면 김명민이 죽고 5개 이하로 틀리면 한승조가 죽는다.

4. 관련 문서


[1] 사실 사상계 출신인 송복 교수나 극우 변신 전에는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기도 했던 박홍 신부와 달리 일관된 극우 친일 발언으로 3인방에서 비교적 말석에 있던 인물이었다. [2] 불교관련 단체중 보수교권성향이 강하다. [3] 노파심에 쓰자면 당장 독립군에 대해서 인터넷 검색만 해 봐도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등 여러 전투들이 똑똑히 나오며, 교과서에도 명시되어 있다. 물론 이 전투들의 전과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일본군보다 훨씬 열세인 독립군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전과를 떠나서 마냥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다. [4] 사임 여부는 3월 6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