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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20:22:46

회은군

조선 성종의 현손
회은군
懷恩君
작호 회은부수(懷恩副守) → 회은군(懷恩君)[1]
본관 전주(全州)
이름 덕인(德仁)
생부 정양군 이회(正陽君 李誨)
생모 현부인 청주 한씨(淸州 韓氏)[A]
부인 현부인 나주 박씨(羅州 朴氏)
현부인 초계 정씨(草溪 鄭氏)[A]
자녀 2남 2녀[A]
생몰
기간
음력 1586년 추정[5][6] ~ 1644년 7월 29일 #
양력 1586년 추정 ~ 1644년 8월 30일

1. 개요2. 가계3. 생애
3.1. 역모 고변3.2. 병자호란과 이후3.3. 심기원의 난에 엮이다
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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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왕족. 인조 시기에 주로 활동했다.

2. 가계

성종의 2남이자 서장자인 계성군의 증손자이다. 계보 상으로는 다음과 같다.
성종 이혈 - 계성군 이순 - 계림군 이유(생부는 성종 이혈의 형 월산대군 이정의 서자 덕풍군 이이) - 정양군 이회 - 회은군 이덕인
즉, 인조에게는 숙부 뻘 항렬[7] 성종까지 공통 조상인 9촌 지간이다. 그런데 위 표에서 보듯이 회은군의 할아버지 계림군은 원래 월산대군의 손자로, 계성군의 양자가 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 혈통 상으로는 덕종(의경세자)까지 공통 조상인 11촌 지간이다.

3. 생애

1599년(선조 32년)에 '회은부수(懷恩副守)' 작위를 받았다. # 나중에 '회은군(懷恩君)'으로 승봉하는데, 이 된 시기는 확실히 모르나 1617년(광해군 9년)에서 1627년(인조 5년) 사이인 듯 하다.[8] 1629년(인조 7년)에는 기우제 헌관으로 봉무했고 #, 같은 해에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임명받았다. # 1632년(인조 10년)에는 부총관을 역임했다. #

3.1. 역모 고변

1632년(인조 10년) 11월 27일[9]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역모를 고변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회은군의 상소에 따르면, 전 좌랑 심장세가 회은군에게 "자신이 원주에서 만난 충원 수령 송흥주가 편지 한 통을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예전에 이러이러한 일을 다시는 못들었는데 다만 회은군 역시 그말을 들었다.'고 적혀있었다. 그 편지는 조공숙의 아들 조세형이 홍우정에게 답한 편지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에 놀란 회은군이 자신은 이상한 일과 엮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심장세에게 들은 이야기를 인조에게 고변한 것이다. 회은군의 고변 이후 심장세도 회은군의 말이 맞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인조 의금부에 회은군과 심장세의 상소를 내려보냈고, 의금부에서는 회은군과 심장세를 포함한 관련자들을 전부 심문해야한다고 인조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인조는 회은군을 제외하고 전부 잡아다 심문하라 일렀는데, 그때 잡혀왔던 조세형과 홍집[10]이 핵폭탄급 진술을 하고 말았다. 바로 양녕군[11]이 역모에 엮였으며 대왕대비 인목왕후[12]도 이를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회은군 이덕인이 고변하여 국청이 열리다
...(전략)...

조세형은 공초하기를,

" 임해군(臨海君)의 종 아내가 신의 외삼촌 홍집(洪[雨+集])의 첩에게 말하기를 ‘ 경창군(慶昌君)의 아들 양녕군(陽寧君)이 임해군(臨海君)의 양자(養子)가 되었는데, 경창이 양녕을 위하여 남몰래 역모를 꾸민다.’고 하자, 홍집이 그 말을 듣고서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로써 경솔하게 발설할 수 없기 때문에, 예판(禮判) 최명길(崔鳴吉)에게만 말하고 또 신에게도 말하였습니다. 신이 또 홍우정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 뒤에 송흥주가 신에게 묻기에, 신이 한결같이 우정에게 말해 주었던 것으로써 말하였을 뿐입니다. 회은(懷恩)은 이 일에 간여하지 않았습니다만, 회은의 5촌 조카인 유학(幼學) 이유형(李惟馨)이 신에게 말하기를 ‘회은이 사람들에게 미움받아 막대한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신은 이 말만을 들었을 뿐입니다."

...(후략)...

홍집은 공초하기를,

'동네에 임해군의 종 아내가 때로 출입하는데, 하루는 와서 말하기를, 「나라에 큰일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자세한 것을 묻자, 답하기를 「경창군이 우리 궁(宮)의 양자(養子)를 위하여 계해년 일( 인조반정) 을 도모하려고 술사(術士)를 조치하여 거사(擧事) 시기를 선택하였는데, 대비( 인목왕후)께서도 이일을 알고 있다고 한다. 임해군의 부인이 항상 지극히 걱정하면서 말하기를 『내 생전에 이 따위 일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한다.’ 하였습니다.

...(후략)...
《인조실록》 27권, 1632년(인조 10년) 10월 16일 경진 두 번째 기사
그런데 정작 인조는 이 사건을 확대하려 하지 않고 조용히 묻으려 했다. 왜냐하면 정치적 부담이 됐기 때문이었다. 반정을 일으키고 대왕대비 인목왕후에게 인정받아 즉위한 인조에게 인목왕후가 역모를 묵인했다는 일은 그 자체로 자신의 왕위계승 정통성을 뒤흔들 수 있는 큰 문제였다. 인조 입장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는 것 자체가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최대한 막아야 했다. 그래서 인조는 고변 접수 일주일 만에 사건을 사실무근으로 결론지었다.

회은군은 인조의 명이 있었음에도 조사 도중에 잠시 잡혀 심문을 받았지만, 그것도 인조가 사건을 덮기로 마음먹은 이후였고, 사건이 종결된 뒤에는 다른 관련자들과 함께 석방되었다. # 그러나 그 뒤로도 사건의 여파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며, 이는 엉뚱하게도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의 훼철이란 결과를 낳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인경궁 문서의 2.4 단락 참조.

3.2. 병자호란과 이후

1637년 1월[13]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회은군은 소현세자를 따라 강화도로 피신했다. 그리고 청나라 군대의 강화도 도하를 막으려는 강화도 방어전에서 종친의 노비 및 강화 수비병 200명을 거느리고 강화성 동문을 수비했다. 그러나 전투는 불과 하루 만에 끝났고 강화도는 청나라 군대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인 1637년(인조 14년) 3월[14]에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심양에 가서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종친들을 돌아오게 하는 임무를 맡았고 # 1640년(인조 18년)에 한번 더 다녀왔다. #

3.3. 심기원의 난에 엮이다

1644년(인조 22년)에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남한산성의 수어사 심기원이 역모를 꾸몄다. 원래는 인조 상왕으로 물러나게 하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키려 했으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아버지를 몰아내고 아들을 올린다는 계획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어 종친 중 한 명을 옹립시키려 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회은군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심기원의 수하였던 황헌(黃瀗), 이원로(李元老) 등이 훈련대장이었던 구인후(具仁垕)[15]에게 밀고하여 탄로가 나버렸고 심기원은 가산을 몰수당한 뒤 거열형을 받아 말 그대로 사지가 찢겨 죽었다.

그리고 본인의 잘못이 없다해도 역적들의 수장으로 추대받았던 회은군 역시 형벌을 피하지 못했다. 회은군은 전라도 대정현(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 안덕면 일대)으로 유배를 갔다가 # 그해 8월 30일[16]에 결국 사약을 받고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 향년 59세.[17]

숙종 1년인 1675년에 외손자 이감(李堪)의 요청으로 복권 여론이 나왔으나 끝내 복권되지 못했다 숙종실록의 사관평에 의하면 사람들이 모두 회은군의 죽음을 억울하게 여겼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따르면 비록 복권되지는 못했으나 숙종이 회은군에게서 몰수한 재산은 도로 내주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고 한다.

4. 가족과 후손

혼인을 두 번 했다. 첫 번째 정실 부인은 나주 박씨 박지(朴杫)의 딸이고, 두 번째 정실 부인은 초계 정씨 정기(鄭䔇)의 딸이다. 자녀는 2남 2녀인데, 딸은 모두 정실 소생이며 아들은 모두 측실 소생이다. 장녀는 평창 이씨 이창현과, 차녀는 전주 류씨 류세헌과 혼인했다.

장남은 이팽형(李彭馨), 차남은 이복형(李復馨)이다. 이들이 자손을 많이 낳아 현재 회은군 후손들의 수는 많다. 이상 내용은 1900년(광무 4년)에 펴낸 《선원속보 - 성종대왕자손록 계성군파 권1》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회은군의 늦둥이 딸이 강화도에서 포로로 잡혔는데, 외모가 아름다워 청 태종이 반해 데려가 시녀로 두었다가 이후 공신인 피파이(皮牌)의 첩으로 삼게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야사로 생각할 수 있는데 정사인 《 인조실록》에 적혀있는 이야기이다. 당시 청나라 심양에 있던 박로와 신득연이 인조에게 올린 보고에 회은군의 늦둥이 딸에 관한 내용이 있다.
심양의 재신 박로·신득연이 회은군의 딸·주청사에 대해 치계하다
심양(瀋陽)의 재신(宰臣) 박로(朴𥶇)·신득연(申得淵) 등이 치계하기를,

"회은군(懷恩君)의 딸이 피패[18](皮牌)의 집으로부터 관소(館所)에 사람을 보내어 세자를 뵙기를 요구하더니, 하루는 과연 몇 명의 종인(從人)을 데리고 와서 양궁(兩宮)을 뵈었습니다. 그 뒤에 피패가 또 신 박로·신득연을 초청하여 주식을 베풀어 대접하였는데, 피패가 좌우 사람을 물리치고 회은군의 딸만 같이 앉게 하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이어서 책봉(冊封)하는 데 대해 언급하니, 피패가 답하기를 ‘세자 세우기를 청하는 것은 국가가 있는 이상 그만둘 수 없는 것으로, 황제의 태자와 국왕의 세자는 진실로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이 일은 오직 황제의 마음에 달려 있는데, 조선에서 주청한다면 따르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내가 안의 일을 주관하고 있으니, 또한 안에서 힘을 다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당초 회은군(懷恩君) 덕인(德仁)의 딸이 나이 겨우 15세에 강도(江都)에서 포로가 되었는데, 청나라 한(汗)이 시녀로 삼았습니다. 그 뒤에 피패 박씨(博氏)가 전공이 가장 많았으므로 그녀를 상으로 주었는데, 그녀는 스스로 국족(國族)이라 하여 우리 나라의 일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후략)...
《인조실록》 38권, 1639년(인조 17년) 1월 30일 경진 두 번째 기사
그런데 이후 이 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선원속보》에는 저 딸의 존재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 만약 박로와 신득연이 보고한 게 사실이라면, 청나라에 끌려가 오랑캐의 측실이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1] 작호는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시 보은군 일부에 있었던 회인군(懷仁郡)에서 유래했다. [A] 출처: 《선원속보 - 성종대왕자손록 계성군파 권1》 [A] [A] [5] 생년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선조실록》 - 1599년(선조 32년) 5월 25일 자 기사에는 당시 회은군의 나이를 14세로 적어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세는나이를 통용했기에 이를 기준으로 생년을 계산하면 1586년이 나온다. [6] 다른 의견도 있다. 《선조실록》에서 해당 부분의 원문을 보면, '而以宗親時年十四歲'로 적혀있는데, 이를 '종친이 된지 14세이다.(즉, '작위를 받은지 14년이 지났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고종 때 편찬한 《선원속보》에는 회은군의 아들인 이팽형의 생년이 1576년으로 적혀있는데, 이를 보아 회은군의 생년을 최소 1566년, 혹은 그 이전까지로도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저 실록의 기사를 더 들여다보면, 그해(1599년) 말에 부수로 봉작받을 예정이라고 나와있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종친이 된지 14년이 지났다.'란 해석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본문에서 후술하겠지만, 회은군은 1644년(인조 22년)에 일어난 심기원의 난에서 반란 세력에게 왕으로 추대받았는데, 1566년 이전 생이면 당시 최소 79세로 나이가 너무 많아 택군되기 힘들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다만 그렇다면, 회은군의 아들 이팽형의 생년이 걸리므로 현재까지는 확실한 회은군의 생년은 모른다고 봐야한다. [7] 즉, 광해군, 정원군과 같은 항렬. [8] 《광해군일기》 - 1617년(광해군 9년) 1월 4일 자 기사에는 '회은부수'로, 《인조실록》 - 1627년(인조 5년) 1월 19일 자 기사에는 '회은군'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9] 음력 10월 16일. [10] 정명공주의 남편 홍주원의 삼촌. [11]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 양자이자 9남 경창군의 차남. [12] 선조의 계후. [13] 음력 병자년(인조 14년) 12월. [14] 음력 2월. [15] 인조의 외사촌형이다. [16] 음력 7월 29일. [17] 《선조실록》 - 1599년(선조 32년) 5월 25일 자 기사 기준.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으로 59세이며, 만으로는 57 ~ 58세이다.(정확한 생일을 알 수 없으므로.) [18] 피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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