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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11:45:42

황순희


前 조선혁명박물관 관장
황순희
黄順姬 | Hwang Sun Hui
파일:황순희.jpg
출생 1919년 5월 3일
중화민국 지린성 연길현 화룡리
사망 2020년 1월 17일 (향년 100세)
평양시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조선인민위원회1946~1948

[[북한|]][[틀:국기|]][[틀:국기|]]1948~2020
직업 정치인
정당


1. 개요2. 생애3. 장의위원회 구성4. 매체에서5. 여담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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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후의 항일 빨치산 1세대. 류경수의 아내로 조선혁명박물관장을 수십년간 지냈다.

2. 생애

1919년 5월 3일, 중국 연길현 화룡리의 빈농가에서 출생했다. 아동단과 공청조직에서 일하다가 1935년 11월에 김일성 유격대에 가입했다고 하며, 간호원으로 활동했다. 김일성을 따라 소련으로 퇴각해서 88여단으로 조직되었다. 1945년 11월, 조명록, 최춘국, 김경석 등과 함께 노약자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이때 그녀가 북한에 데리고 온 사람이 다름아닌 김정일로, 빨치산 자녀들을 도맡아 길러서 김씨 일가와 매우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해방후 혜산 녀맹위원장을 맡아서 여성사업을 하였으며 김일성고급당학교를 졸업, 1956년 3월, 녀맹 량강도 위원장을 맡았다. 1958년 11월, 남편 류경수가 요절한 이후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죽을 때까지 대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65년 2월, 조선혁명박물관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하게 되었으며 1965년 12월, 서채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9년 9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71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회 비서가 되었으며 1973년 6월, 조선혁명박물관 중앙위원회 비서가 되었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12월, 여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1979년 5월, 로력훈장을 받았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 최현 장의위원,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4월, 오백룡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7월 21일, 조선혁명박물관 창건 40주년을 기념하여 공화국영웅 칭호, 금별메달,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88년 7월에 조선혁명박물관 중앙위원회 비서를 다시 맡았다. 1990년 5월에 조선혁명박물관 관장이 되었다. 1992년 4월 23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을 기념한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 최광, 김철만, 전문섭, 백학림,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최인덕, 태병렬, 김룡연, 최용진, 리종산과 함께 공화국 2중영웅이 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 1998년 12월, 전문섭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10월 6일, 모범적 일군으로 선정되어 김정일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태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심화조 사건 당시에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자신이 어릴 때 키웠던 김정일에게 친서를 보내서 사태가 너무 이상하다고 간언했고 이걸 본 김정일이 숙청을 중단하고 숙청 지휘자인 채문덕 등을 역으로 숙청했다고 한다.

2005년 4월, 러시아로부터 대조국전쟁 승리 60주년 기념메달을, 2010년 5월에는 대조국전쟁승리 65주년 기념메달을 받았다. 김정일과 워낙 돈독한 사이였기 때문에 2008년에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에는 김씨 일가가 아님에도 유일하게 김정일 병상을 계속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재선되었다. 솔직히 정치 일선에서 하는 것 없는데 예우상 준 것으로 봐야 하지만 이미 이때 나이가 90세에 가까웠던걸 보면 여러모로 대단한 인선.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재선되었다. 2012년에 김정일훈장을 받았다.

말년에도 각종 보고회에 참석했으며 2018년 7월의 5차 전국로병대회는 사실상 황순희가 주인공에 가까웠다. 2018년 12월, 김철만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9년, 백세 생일을 맞았을 때 김정은이 직접 생일상을 내려주었다.

2020년 1월 17일 10시 20분에, 급성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국무위원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황순희동지는 우리 혁명의 1세로서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동지의 령도를 충직하게 받드는 항일의 로투사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인민들과 인민군군인들을 주체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하기 위한 성스러운 투쟁에로 고무추동하였다. 황순희동지는 당과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과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적복무정신,투철한 혁명적원칙성과 겸손하고 소탈한 품성으로 하여 동지들과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황순희동지의 생애는 혁명의 수령을 신념과 의리로 받들고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옹호고수하고 빛내이며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멸사복무한 참다운 혁명가의 한생이였다."라고 엄청난 칭송을 퍼부었다. 김정은이 직접 리설주와 함께 조문하였다.

시신은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남편 류경수와 함께 합장되었다. 이후 그녀의 삶을 기리는 연속소개편집물이 신속하게 제작되는 등 정권의 원로로 예우받고 있다.

3. 장의위원회 구성

4. 매체에서

5. 여담

6.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