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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21:52:56

호이스 그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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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승부로 인한 공동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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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호이스_그레이시.jpg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호이시 그레이시
(Royce Gracie)
생년월일 1966년 12월 12일 ([age(1966-12-12)]세)
리우데자네이루주 리우데자네이루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종합격투기 전적 20전 15승 2패 3무
2KO, 11SUB, 2판정
2KO
그래플링 전적 55전 51승 4패[1]
체격 185cm / 80kg / 194cm
가족 아들 콩리 그레이시(Khonry Gracie)[2]
주요 타이틀 세계 주짓수 라이트 헤비급 우승[3]
UFC 1 무제한급 토너먼트 우승
UFC 2 무제한급 토너먼트 우승
UFC 4 무제한급 토너먼트 우승
기타 2003 UFC 명예의 전당 헌액
UFC 무제한급 토너먼트 방어 1회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전적
2.1. 종합격투기2.2. 그래플링
3. 커리어
3.1. UFC3.2. Pride3.3. 그 이후
4. 파이팅 스타일5. 기타
5.1. 논란
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종합격투기 선수. 주짓수 선수.

2. 전적

2.1. 종합격투기

2.2. 그래플링

3. 커리어

1966년 브라질리언 주짓수를 창시한 그레이시 가문의 일원 엘리오 그레이시의 6남으로 태어난 호이스는 어린 시절부터 주짓수를 접했고 8세 때부터 토너먼트에 출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수차례 토너먼트에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17세의 호이스는 큰형 호리온의 부름을 받고 영어도 못하는 상태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이미 1978년에 미국에 정착하여 밑바닥에서부터 생계를 꾸려오던 호리온은 어느덧 100명 가까운 문하생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도자로서의 재능 뿐 아니라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뛰어났던 그는 미국에서 인맥을 쌓으며 사업확장에도 열심이었고, 호이스는 이런 호리온을 대신하여 사범대리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시절, 호이스는 수많은 도장 깨기 도전자들과 대결해 승리했다고 한다. 가라데, 쿵후 등 많은 격투가들이 그에게 패배했고, 이 장면들을 담은 비디오는 고스란히 홍보영상으로 편집되어 호리온의 '그레이시 주짓수' 홍보에 이용되었다. 브라질과 미국에서 개최된 주짓수 토너먼트에서 호이스의 전적은 51승 4패를 기록했다.

1993년 호리온은 미국의 지인들과 모종의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세계 유수의 격투가들을 불러모아 펼치는 격투 토너먼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로 UFC의 시작이었다. 호리온의 지명으로 참가 선수들이 결정되었고, 이들과 맞설 그레이시의 대표자를 결정할 차례가 돌아왔다. 부친 엘리오가 브라질에서 거뒀던 승리로 작은 체구로 거한들에게 승리한다라는 컨셉이 가진 매력을 잘 알고 있던 호리온은 켄 샴락, 제라드 고르도, 테일라 툴리 등의 거구와 맞설 후보자들을 추려 보았다.

힉슨 그레이시는 일족 최강으로 일컬어지고 있었지만 근육질의 다부진 몸이라 그다지 드라마틱하지 않고, 무엇보다 도장 문제로 호리온과는 그다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호일러 그레이시는 체격도 작고 화려하고 뛰어난 테크닉을 가지고 있지만 체격이 너무 작기 때문에 혹여라도 패배할 위험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선수가 바로 호이스였다. 얼핏 보기에는 호리호리하고 약해 보이지만[9] 실제로는 강인한 육체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부터 늘 곁에 있어준 호이스에 대한 신뢰도 남달랐을 것이다.

3.1. UFC

1993년 11월 펼쳐진 원데이 토너먼트에서 주짓수 대표로 참여하게 된다. 호이스에게는 프로 MMA 데뷔전이다. 1차전 상대는 권투 선수인 아트 짐머슨이었다.[10] 짐머슨은 왼 손에만 권투 글러브를 낀 채 등장한다.[11] 거리 싸움을 하던 중 호이스가 짐머슨에게 태클을 걸고 사이드 마운트에서 바로 풀마운트 포지션을 취한다.[12] 나름 짐머슨은 호이스의 목덜미를 붙잡고 방어하며 계속 스윕을 시도한다. 이후 호이스가 박치기를 시전하자마자 탭을 쳐버렸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말이 많다.[13] 짐머슨만 호이스와의 대전료가 이기거나 져도 UFC 1 토너먼트 우승 상금의 40%이었다.[14] 짐머슨은 굳이 부상을 당하며 계속 싸울 필요가 없었다. 짐머슨에게는 유일한 MMA 전적이었다.

파일:attachment/호이스 그레이시/82.jpg

2차전에서 만난 상대는 일본 Pancrase의 제왕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인 켄 샴락이었고 이미 MMA 단체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었다. 샴락은 호이스의 태클을 막아내며 오히려 겨드랑이를 파 톱 포지션을 잡고 마운트를 시도한다. 호이스는 샴락의 오른쪽 다리를 잡아 마운트를 저지한 후 가드에서 다리로 허리를 감아 일어서려는 샴락을 다시 그라운드로 끌고 내려왔다. 호이스는 가드에서 샴락의 오른팔을 잡고 있었고, 샴락은 호이스의 왼쪽 다리를 잡고 힐훅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른팔이 잡혀 있던 상황에서 뒤로 누워버렸기 때문에 상위를 호이스에게 빼앗겨 버렸고, 샴락은 하위에서 호이스의 오른발을 제대로 그립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힐훅을 하려고 돌았지만 호이스는 발을 빼내고 오히려 백만 내주고 호이스에게 리어네이키드 초크 내주며 승부를 결정지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57초.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파일:attachment/호이스 그레이시/51.jpg

3차전에서 만난 상대는 사바트 챔피언으로 출전한 극진공수도 베이스의 제라드 고르도였다. 허나 샴락과 싸우면서도 상처 하나 없이 올라온 호이스와는 달리 고르도는 1차전에서 스모 선수인 테일라 툴리를 만나 심각한 부상을 입고 있었다.[15] 하지만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고르도는 2회전에서 자신보다 덩치가 큰 킥복서를 KO (코너 타월) 시키고 결승전까지 왔다. 호이스는 고르도에게 태클을 걸었으나 고르도도 레슬링를 배워서 스프롤로 막았다. 호이스가 언더훅으로 달라붙고 계속 발을 걸어서 테이크 다운시켰고 하위에 깔린 고르도는 호이스의 목덜미를 팔로 잡고있다가[16] 호이스에게 헤드락을 걸고 왼쪽으로 돌았지만[17], 호이스는 탈출하고 오히려 왼쪽으로 돌은게 백포지션이 되어서 오히려 리어 네이키드 초크로 고르도를 1분 44초만에 제압하며 UFC 초대 대회의 우승자가 되었다. 그리고 고르도가 항복하는데도 호이스는 초크를 안풀어준다. 결국 심판이 억지로 풀어준다. 이유는 고르도가 하위에 깔렸을때 호이스의 귀를 깨물었기 때문.

1994년 3월에 열린 UFC 2 토너먼트에서는 하루에 4번의 대전을 모두 승리로 장식하며 결승에서 만난 앤디 훅을 이긴 적도 있는 입식 타격가 패트릭 스미스를 1분 17초만에 쓰러뜨렸다. 스미스는 UFC 1에서 주짓수 퍼플벨트 유단자라 켄 샴락과의 경기에서 가드 플레이를 했었으나 패배했었다. UFC 2 결승전에서 역시나 주짓수 검은띠 호이스에겐 그라운드에서 상대가 안되었다.

파일:attachment/호이스 그레이시/7e.jpg

그러나 1994년 9월의 UFC 3 토너먼트에서 호이스는 제대로 임자를 만나게 된다. 막싸움계의 거성으로 일컬어지는 키모 레오폴도에게 머리끄덩이를 쥐어뜯는 진흙탕 싸움 끝에 탈진해버린 것이다.[18] 키모와의 대결은 암록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지나치게 체력을 소진해버린 호이스는 다음 상대인 헤럴드 하워드와의 경기에서 기권하고 만다.[19] 리벤지를 위해 출전했던 샴락도 부상으로 기권했다. 결승에 오른 하워드는 정작 호이스의 대체선수로 투입된 스티브 제늄에게 패배한다.[20] 헤롤드 하워드는 처음에는 우세하지만 후반부에는 체력이 떨어져서 제대로 방어도 못한다. 그리고 갈비뼈쪽에 피가 묻어있는걸 골절로 인한 보니 출혈도 있는듯하다. 제늄은 딱 한 번 싸우고 토너먼트 우승에 오른 셈이다. 대체 선수에 대한 대비책이 미약했던 초창기 UFC의 문제점이다. 원래 UFC 1때도 대체선수간의 경기가 있었는데, 정작 정규선수들이 부상을 당해도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나와서 출전하지 못했다. UFC 2에서는 16강전 이기에 시간이 촉박하므로 대체 선수 간의 경기는 없었고, 대체선수가 순서대로 빈자리에 들어가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때는 1명만 필요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UFC 3에서는 결승전에 대체선수 제늄이 투입되어 그의 실력에 대해 논란이 되었다. 이후 다시 대체선수간의 경기를 하게 되었다.

그레이시도 한물 간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으나, 1994년 12월 출전한 UFC 4 토너먼트에서 키스 해크니, 댄 세번 등 쟁쟁한 선수들을 제압하며 정상에 오르며 이러한 목소리들을 모두 잠재웠다. 결승에서 만난 세번의 강인한 육체에 눌려 상위를 내주었으나, 15분간 계속된 가드 게임에서 한순간에 트라이앵글 초크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파일:attachment/호이스 그레이시/3b.jpg

1995년 4월 UFC 5에는 토너먼트가 아닌 원매치 이벤트에 출전[21], 기다리고 기다리던 켄 샴락과의 2차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지리한 공방을 주고받은 끝에 무승부가 선언된다. 호이스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지만 특히 장기전 전략을 들고 나왔던 샴락은 관중들의 엄청난 야유를 받았다. 호이스의 닥치고 그라운드로 가는 격투 스타일은 UFC 5에서 오히려 샴락에게 파훼당하면서 호되게 당했기에 프라이드 부터는 스탠딩 타격 중심의 스타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한편 호이스와 샴락이 불참한 채 진행되었던 토너먼트에서는 4회 준우승자인 세번이 우승을 차지했다.

UFC 토너먼트 3관왕에 오르며, 호이스는 그레이시 주짓수의 이름을 전 미국에 널리 알렸다. 특히 토너먼트 1에서 일본 Pancrase의 켄 샴락을 꺾은 일은 미국을 넘어 일본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UFC 5를 마지막으로 NHB가 막을 내리고 글러브, 판정, 라운드제 등 룰이 도입되면서 그레이시는 UFC를 떠나게 된다.

3.2. Pride

한편 판크라스의 제왕이었던 켄 샴락의 패배[22]는 일본에서는 엄청나게 큰 충격을 주었다. 타카다 도장의 에이스였던 안조 요지가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힉슨 그레이시의 도장으로 찾아가 힉슨에게 도전했다가 관광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타카다 노부히코는 일본 U- 프로레슬링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레이시를 쓰러뜨릴 것을 결심하고 1997년 힉슨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리벤지에 나선다. 타카다 역시 힉슨에게 관광을 당하지만 이 시합은 엄청난 관중수익을 기록하며 Pride의 모태가 되었다. PRIDE는 이후 많은 그레이시 파이터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일본의 프로레슬러들과 대전시키며 성장해 간다.

호이스도 2000년 1월 무차별급 그랑프리 오프닝에 출전, 타카다 노부히코를 셀프가드 포지션으로 끌어들인 뒤 계속하여 압박하는 전술로 판정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2000년 5월 그랑프리 결승 토너먼트에서 만난 사쿠라바 카즈시에게 패하며 생애 첫 패배를 기록하고 만다. 그레이시측이 요구한 무규칙룰로 진행된 1시간 30분의 대결에서 사쿠라바의 장기인 그래플링에서의 변칙적이고 기상천외한 움직임[23]을 보여준 사쿠라바를 상대로 호이스는 거의 탈진한 모습을 보였으며, 사쿠라바가 호이스의 다리에 레그킥으로 데미지를 쌓아서 결국 엎어져 버리고 타격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호이스가 발로 사쿠라바를 차려고 하면 캐치 해서 바로 바닥에 던져 버리는 등 타격을 하려다가 오히려 역공을 당했다. 결국 세컨드가 타월을 던지며 TKO패가 선언되었다. 호이스가 사쿠라바 상대로 타격과 그래플링 모두 밀린 경기였다.

2002년 12월의 PRIDE 남제에서는 일본의 유도 영웅 요시다 히데히코와 대결했다. 요시다의 MMA 데뷔전이기도 했던 이 시합은 요시다에게 다소 유리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마운트를 차지한 요시다가 깃초크를 넣었고 호이스가 기절했다고 심판에게 어필을 했다. 이 어필이 받아들여져서 요시다의 서브미션승이 선언되었는데 호이스가 벌떡 일어나며 항의를 하는 바람에 판정에 크게 논란이 일었다.[24] 솔직히 선수가 위험한데도 항복안하고 버티면 심판이 TKO 선언이 가능하다.

호이스는 탭도 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상당히 우스운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호이스측에서 맹렬한 항의가 이어졌다.[25] 호이스는 리매치가 아닌 시합을 무효로 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요시다는 '그럼 좋다. 대신 마지막의 그 포지션에서 시작하자.'라고 맞받아쳤다. 더 웃긴 것은 이 항의가 받아들여져서 이 시합이 무효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26] 그래서 셔독에서는 이 경기를 아예 전적으로 올려놓지도 않았다.

탈도 많고 말도 많았던 둘의 재시합은 이듬해인 2003년 12월의 남제에서 열렸다. 그레이시측은 이 시합을 판정이 없는 특별룰로 할 것을 제안했고, 일본인 심판은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심판도 미국인이 맡았다. 호이스는 깃초크를 당했던 1차전을 의식한 듯 도복 상의를 벗고 나왔다. 결과는 관광에 가까운 호이스의 우세였다. 비록 제한시간을 모두 써버리면 무승부로 결정하는 룰에 따라 승부를 결정짓지는 못했으나 경기가 끝난 시점에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요시다를 본다면 누가 승자인지는 자명했다. 해외 네티즌들은 이 경기에 대해 불공정하고 비겁하다는 이유로 그레이시를 가루가 되게 까고 있다[27]. 요시다는 이 전 이후 아직 종합으로 넘어온지 얼마 안된 마크 헌트를 암바로 잡고 UFC의 자객으로 넘어온 탱크 애봇을 잡으며 재기하는가 싶더니 미르코 크로캅, 제임스 톰슨, 조쉬 바넷에게 패하며 노쇠화에 따른 한계[28]를 보이고 말았다.

파일:attachment/호이스 그레이시/56.gif

3.3. 그 이후

2004년 12월에는 K-1 다이나마이트에서 아케보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특이사항은 이 시합이 셔독에서 선정한 '가장 괴상한 경기 베스트 10(10 Great Freak Matches)'에 선정되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아케보노가 나와서 괴상하지 않았던 경기가 있었냐마는.

파일:attachment/호이스 그레이시/e2.gif

이후에는 2005년 12월 K-1 다이나마이트에서 토코로 히데오와 고전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였는데 이게 꽤 이색적인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는 호이스 그레이시가 골리앗이었기 때문이다. 다윗 포지션으로 유명한 호이스지만, 이 경기 상대였던 토코로는 페더급 파이터로서 신장차는 약 15cm차이가 났는데 무체급매치로 펼쳐진 경기였다. 토코로를 신데렐라로 만든 경기였다. 토코로는 청소부를 겸하는 무명의 프리터 파이터였으나 7월 데뷔전에서 제4대 슈토세계라이트급 챔피언 알렉산드레 프란카 노게이라를 화끈한 스피닝 백 피스트 한 방으로 실신시키며 일약 스타로 떠오른 상태였는데, 12월 31일 연말대회에 호이스라는 초거물과 붙게된 것이다. 사실 미스매치 느낌이 심했는데, 호이스는 일본의 유도영웅 요시다(라헤급~헤비급에서 놀던)에게도 사실상 이긴 경기를 펼쳤을 정도였고 1년전 아케보노 따위는 가볍게 꺾는 등 헤비급과도 붙던 파이터인지라 토코로와 체급 차이가 심하게 났으며, 전적을 봐도 당대 초거물급들과 붙던(켄 샘락, 사쿠라바 등 중량급 강자들) 호이스와 토코로는 비교불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기는 그레이시룰로 인해 무승부로 끝났으나, 사실상 토코로가 이긴 경기였다. 경기 자체는 꽤 명승부였다. 타격, 그라운드 가리지 않고 펼쳐졌는데,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맹공을 퍼붓는 토코로와 이에 방어하느라 급급한 호이스의 양상이었다. 그라운드전도 상당히 명승부였는데 지루한 개비기 양상이 아니고 그라운드에서 쉴새없이 엎치락뒷치락하는 공방이 펼쳐졌는데 그라운드전을 싫어하는 사람도 긴장하며 봤다는 댓글이 많았을 정도로 상당히 수준높은 그라운드 공방전을 보여줬다. 경기 후 그레이시측에서 토코로에게 다가와 칭찬하며 인정할 정도로 명승부였다. 그동안 호이스는 라헤급, 헤비급 등 덩치큰 파이터들을 꺾으면서 다윗으로 유명했는데, 이 경기에선 처음으로 자신보다 작은 파이터와 싸우며 골리앗 역할로서 '다윗' 토코로를 빛내주는 역할이었으니 이색적인 경기였다고 할 수 있다. [29]

'다윗' 토코로에게 '골리앗' 호이스가 쌍코피가 터지는 굴욕도 겪었다. 영상 4분 50초에 토코로가 달려들며 날린 킥에 호이스가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데, 뒤이어 토코로가 몸을 내던지며 날린 다이빙 파운딩에 정통으로 맞아 쌍코피가 터진다. 쌍코피가 터진 짠한 모습으로 토코로의 맹공 파운딩을 필사적으로 막는데 급급한 호이스의 모습이 이색적이다. 그간 '다윗' 호이스가 골리앗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여주며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2006년 5월 12년만에 다시 UFC에 찾았지만 이미 UFC는 이전의 어중이떠중이들의 UFC가 아니었다.

결국 UFC 60에서 맷 휴즈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며 TKO패하였다. 호이스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주짓수 수련자들이나 MMA 초창기 팬들은 그래도 호이스가 무언가 이변을 연출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특기인 그라운드 공방에서조차 아무것도 못 하고 그라운드에서 탈출 하려고 무리하게 백포지션을 내준 뒤 파운딩 세례를 맞고 패하였다. 결과는 얼굴이 퉁퉁 부었고 골절도 있어 보인다. 관중석에서 다 포기한 듯한 엘리우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이미 UFC는 과거의 반쪽짜리 파이터들의 힘겨루기 대회가 아닌 제대로 된 종합격투 메이져단체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2007년 6월에는 왕년에 첫 패배를 안겨주었던 사쿠라바와 7년만에 재격돌해서 리벤지로 승리하기도 했다. 1라운드 초반 다운을 빼앗기도 했지만 본인 스타일대로 잘 이끌고 나가면서 결국 만장일치로 판정승을 거두었다. 다만 경기가 끝난 다음에 호이스 그레이시가 약물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며 크게 체면을 구겼다.

2010년 셔독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경기를 가질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이미 생각해 놓은 대전상대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한참 지나 2016년 2월 19일(한국시간 2월 20일) 벨라토르 149에서 켄 샴락과 경기노인정 매치했다. 결과는 클린치에서 로블로를 한뒤 샴락이 그 곳을 잡은채 심판을 쳐다보는데 갑자기 호이스가 샴락을 테이크 다운 시킨 뒤 파운딩을 해서 1라운드 2분 22초만에 TKO승을 거두었다. 호이스에겐 첫 TKO 승리였다. 이전에 샴락과의 경기에서 결과가 무승부지만 샴락은 얼굴이 깨끗한 반면 호이스는 피범벅에 광대뼈 함몰도 보였다. 판정이었다면 호이스의 패배였다. 어쨌거나 리벤지 한셈이다.

다만 심판이 로우블로를 보고도 개입하지 않았고, 샴락도 경기 이후동안 한참을 그 곳(...)을 잡은채 불만을 표시해서 결과가 영 찝찝해졌다.. 요즘 벨라토르의 행보를 보자면 2차전까지 갈 수도...? 켄 샴락이 경기 이후에 도핑이 적발되면서 노인정 매치 → 로우 블로우 → 도핑 적발이라는 막장의 3연타를 달리는 경기가 되었다.

4. 파이팅 스타일

당시 그라운드와 스탠딩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시절 수준높은 그라운드 기술을 선보였다. 격투기를 잘모르는 일반인들은 격투기라 하면 입식타격기를 으레 연상했었고 그래플러들조차도 대개 관절기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엄청난 지식의 깊이를 가진 그레이시 주짓수는 그야말로 사기에 가까운 전법이었다.[30][31]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현대에 보면 어이없게 지는 장면들이 꽤 있다. 체급 차이가 많이 나는 상대가 상위에서 파운딩을 하다가 오히려 호이스에게 클로즈드 가드-삼각조르기-암바로 연계되어 어이없게 지는 장면들도 있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장면이다.( 키모 레오폴도, 댄 세번, 키스 해크니 등), 스탠딩 그래플링에서도 이해도가 떨어져 호이스가 붙으면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안끌려갈려고 안간힘만 쓴다.( 제라드 고르도, 키스 해크니 등) 당시에도 클린치 니킥을 호이스가 썼기에 이 선수들도 쓸 순 있었으나 두발로 서서 버티기도 힘든 상태인데 클린치 니킥을 했다가 한 발로 서 있을 때 발 걸리거나 오버훅 하다가 엘보우를 했다가 테이크 다운을 당해 그라운드로 끌려가니 안 썼던 듯 하다. 종합인데 아무래도 그라운드를 포기했으니 당연한 결과다. 반쪽이라고 볼 수 밖에. 그라운드에서도 탈출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파운딩이나, 관절기, 초크를 걸려다가 오히려 어이없게 진다.

초창기에 호이스가 보여준 모습은 '무조건 그라운드'였다. 일단 상대를 어떻게든 넘어뜨린 후[32], 가드패스, 섭미션으로 가는 초창기 그래플러의 필승공식을 보여주었다. 일단 손을 뻗어 거리를 확보하고 상대에게 단발 킥을 내며 셋업을 주다가 상대가 공격하는 순간에 가드를 바싹올리고 낮게 상대에게 뛰어들어서 레슬링식 태클 또는 클린치후 언더훅으로 상대에게 달라 붙는다. 상대의 체격이 너무 커서 안넘어가면 언더훅 상태에서 니킥으로 로블로를 마구 난타한다.[33], 패트릭 스미스도 주짓수를 배웠기에 하프가드로 하위 포지션에서 방어하는데[34], 그라운드로 끌고가서 삼각조르기에서 암바로 연계하는 방식이다.[35][36] 그라운드와 스탠딩의 개념은 물론 테이크 다운 방어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립되어있지 않던 시절 상대 선수들은 호이스의 태클 한방에 추풍납엽처럼 나가떨어졌고 일단 그라운드로 가면 일사천리였다. 상대들보다 왜소한 호이스는 주짓수 뿐만이아니라 타격에 대처하기 위해 복싱, 무에타이 등 타격기를 연마하기도 했기에 UFC 1 때부터 무에타이의 오블리킥, 앞차기, 하이킥, 로우킥, 클린치 니킥 등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복싱도 배워서 타격가들이 공격하는 순간에 호이스가 피하면서 그라운드로 가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스탠스도 복싱의 필리 쉘 가드를 사용한다. 레슬링도 수련해서 자신보다 10cm이상 크고 훨씬 체격도 좋은 상대들을 상대로 레슬링 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 켄 샴락, 댄 세번, 키모 레오폴도 등 파워리프터형 레슬러들에게는 역으로 깔리기도 했으나 가드에서 섭밋시켜버렸다. 이렇듯 상위와 하위를 가리지 않고 상대의 기술을 무력화하며 자유자재로 관절기를 완성시키는 모습은 마치 마술사와도 같았다. 또한 도복을 정말 잘 활용하기도 했다.[37] 또한 체급으로 밀리자 상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상대가 타격을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38]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방도 점차 그레이시의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하자 선수들의 그래플링 실력들이 상향평준화가 되어 그의 연승행진도 제동이 걸리게 된다. 결정적인게 UFC 5에서 샴락이 호이스에게 장기전을 들고 나왔는데 호이스에게 상위 마운트 상태에서 자신의 손은 하위의 호이스 몸을 붙잡고 기회가 되면 박치기를 하는 것이다. 30분 넘게 경기는 진행되었고 결국 무승부로 끝났는데 호이스의 얼굴은 만신창이였다.[39][40] 이 이후 호이스는 UFC를 떠나고 일본 프라이드로 간다. 그리고 격투 스타일을 과거와 같이 닥치고 그라운드 전략을 버리고 스탠딩 타격으로 바꾼다. 사쿠라바는 호이스의 움직임과 전략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호이스의 도복을 역으로 이용하기도 했다.[41] 게다가 사쿠라바의 레그킥으로 다리에 데미지가 쌓여 엎어지기까지 한다. 호이스의 발차기는 오히려 사쿠라바가 캐치해 던져 버리기까지 한다. 룰이 도입되고 규정이 바뀌면서 MMA가 스스로 진화했고, 이에 따라 선수들도 세대를 거듭하며 기량이 놀랍도록 향상되면서 예전과 같은 극강의 포스는 잃어버리게 되었다.

특히 UFC 60에서 가진 맷 휴즈와의 대결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라운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며 클린치에서 이번에는 오히려 자신이 테이크 다운을 당했고 사이드 마운트에서 무리하게 빠져나오려다가 백 마운트를 잡힌 상태에서 파운딩에 광대뼈가 골절 됐다. 1라운드만에 TKO 패 했다. MMA 선수들의 테이크 다운 방어 능력이 향상되었고 주짓수 기술이 상향평준화되었기 때문. 당시 40세였던 나이를 패인으로 들 수도 있으나 기량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사실 토너먼트 시절의 UFC는 제대로 된 종합격투기 프로선수들의 경기보다는 무규칙 막싸움인데다가 프로레슬링이나 레슬링, 복싱 등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이 종합격투기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출전하던 곳이었기에[42] 처음부터 종합격투기를 목표로 잡고 수련하는 요즘과는 수준자체가 달랐을 때의 상황이었다.

물론 MMA의 역사를 논할 때마다 UFC 초창기 대회가 엄청나게 중요한 역사로 인정되고 있는건 부정할 수 없다.

5. 기타

UFC 1 토너먼트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우승한 후에 "나의 형인 힉슨은 나보다 10배는 강하다."라는 말을 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힉슨이 누구냐', '호이스가 저렇게 강한데 그럼 힉슨은 얼마나 강한거냐'며 혼란에 빠졌고 대외적으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던 힉슨이 한순간에 유명세를 타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그레이시도.

한편 이 말로 호이스를 2인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헨조 그레이시도 힉슨이 호이스보다 훨씬 뛰어난 파이터라고 말했다. 힉슨이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우는 것을 피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레이시의 MMA용 결전병기는 호이스라고 보는 게 마땅하다는 시각도 있지만, 힉슨이 싸움을 피한 거야 90년대 후반 이후의 이야기이고 그 전까지만 해도 발리 투도 제팬을 두 차례 평정하는 등 활약을 보인 바 있다(발리 투도 제팬은 UFC 탄생 이후에 열린 이벤트이며 UFC 1의 제랄드 고르도도 참전했었다). 힉슨이 조 로건 팟캐스트에 출연해서 UFC에 참전하지 못한 경위를 질문 받자 '호리온이 호이스가 출전하기를 원했고, 난 호이스의 훈련 코치이자 백 업 플랜이었다. 만약에 호이스를 꺾는 상대방이 나온다면 내가 그 다음 타자로 나갈 계획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힉슨은 독자적인 길을 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호리온이 자신의 사업을 통제하기 위해서 더 욕심 없는 호이스를 중용한 거라는 추측도 있다.

힉슨이 마냥 회피만한 것도 아니었다. 판크라스의 일본인 에이스였던 후나키 마사카츠를 어린아이 팔목 비틀듯 손쉽게 꺾은 것만 해도 충분히 실력을 입증했다고 볼 수 있다. 호이스가 UFC에서 상대했던 킥복서나, 복서보다는 후나키쪽이 좀 더 위험한 상대였다. 실제 힉슨이 과장됐다고 비판하던 판크라스의 선수들은 후나키의 승리를 점칠 정도였다. 호이스야 그래플링에 무지한 선수들에게 손쉽게 승리했다면, 판크라스에서 잔뼈가 굵은 후나키는 쉽게 당하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후나키와 기량 차이를 보여주며 리어 네이키드 쵸크로 손쉽게 잠재웠는데, 이 정도의 그래플링 레벨이라면 초창기 UFC에서 호이스 이상의 업적을 거뒀을 것이다. 아쉬운 것은 바로 사쿠라바와의 경기가 취소된 것. 사쿠라바는 '그레이시 헌터'라는 별명처럼 호이스 그레이시까지 그레이시 일족을 모조리 완파할 정도의 기량이었고, 그레이시 일족의 '최종보스'였던 힉슨과의 대결이 추진되던 때에 하필 힉슨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바람에 힉슨이 충격을 받아 좌절되어 묻혔기 때문이다. 사쿠라바 기량의 최절정기이자, 힉슨도 아직 그레이시의 최종병기로서의 기량이 남아있던 시절에 붙었다면 꽤 역사적인 명경기가 되었을 텐데, 끝내 메이저 대회에서는 기량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힉슨이 UFC에는 안나갔지만, 프라이드의 메인이벤트에서 다카다 노부히코와 두차례 붙어 손쉽게 암바로 승리했기에 딱히 힉슨이 실전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 그레이시 주짓수가 철저히 실전을 추구했었기에, 그 일파의 우두머리인 힉슨이 과장된 거품일리도 없었다. 물론 지금은 다카다의 실력이 뽀록났기에 별로 전적으로 쳐주지 않지만, 어차피 90년대에는 종합격투기보다는 이종격투기의 개념에 가까웠고, 당시 다카다의 위상은 일본 프로레슬링 시멘트매치(슛파이팅)의 최강자였기에 적어도 당시로서는 우습게 볼 순 없었던 상대였다. 애초 프라이드도 프로레슬링의 연장선으로 나온 것이고 일본 프로레슬링의 특색은 실전 지향적이라는 점이었기에 속칭 시멘트 매치가 난무했다. 그 중 다카다는 키타오 코지 참교육 사건으로 최강의 폴리스맨으로 인식되었는데, 먼저 키타오 코지란 인물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이 인물은 무려 1991년 WWF 레슬매니아 VII에서 한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태그팀 챔피언 데몰리션과 맞서는 일본인 자객으로 등장했고 '텐류 앤 키타오'가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충격을 주는데, 당시 덩치 큰 백인 데몰리션에게도 꿀리지 않은 큰 덩치의 일본인이 코지였고, 스모 출신이었다. 이 선수는 심지어 당시 WWE에서 헐크호건과 종종 대립했던 어스퀘이크와도 시멘트 매치를 벌여서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어스퀘이크는 WWE 현피 중 최강자급으로 인식되던 선수였다. 코지가 경기 중 각본을 무시하고 느닷없이 어스퀘이크에게 실전성 공격을 퍼부으며 뜬금없이 눈찌르기 자세를 취하며 눈찌르기 공격으로 위협하는 등 어스퀘이크가 경기 중 크게 당황할 정도로 기행을 일삼고 후배폭행 등 행실도 안좋던 선수였다. 그때 이 선수를 참교육할 폴리스맨으로 낙점된게 바로 다카다였는데, 타카다가 시멘트 매치를 걸어 결국 하이킥으로 실신시켜버렸다.( 영상 9분 18초) 타카다는 실전 지향적이던 일본 프로레슬링의 특성상 기본적인 타격기와 관절기도 익혔기에 힉슨의 강력 대항마로 꼽히며 프라이드에서 실전매치가 열렸던 건데, 힉슨에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힉슨이 UFC에 불참했기에 이소룡처럼 과장됐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시 초창기 UFC의 그래플링 문외한인 킥복서들보단, 차라리 관절기에 대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던 일본 프로레슬러들이 더 까다로울 수도 있었으나 힉슨은 1도 겁내지 않았다. 아쉬웠던 것은 사쿠라바와의 경기가 예정대로 성사됐으면 힉슨의 견적이 제대로 나왔을텐데, 호이스가 패하며 힉슨과의 빅매치가 성사되기 직전 아들의 교통사고로 경기가 열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호이스가 나섰던 UFC의 선수들이 판크라스 출신의 켄 샴락을 제외하면 다들 그래플링 문외한들인지라 부담이 적었을텐데, 그럼에도 어쨌거나 UFC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초기대회 챔피언으로서의 상징성이 있기에 힉슨보단 호이스를 더 쳐주는 사람들도 많다.

비록 순수 주짓수 분야에서의 업적은 그리 뛰어나지 않지만 MMA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호리온의 상표등록건도 있고 해서 주짓수 신봉자들에게는 가루가 되도록 까인다. 또한 주짓수 선수 마크 라이몽(Marc Laimon)이 맷 휴즈에게 패배한 호이스에게 잘 하는 블루벨트 또는 퍼플벨트 정도의 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마크 라이몽은 과거에 호리온 그레이시의 아들 히론 그레이시(ryron gracie)를 그래플링 경기에서 이기기도 했다.

현대 종합격투기 선수들 중에는 어린 시절 호이스에 매료되어 진로를 결정한 이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로는 UFC 웰터급 챔피언 조르주 생 피에르, UFC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료토 마치다, UFC 헤비급 챔피언 프랭크 미어, PRIDE 2006 웰터급 GP 준우승자 데니스 강 등이 있다. 사실 하나하나 따지자면 끝이 없을 정도. 특히 미국에서는 UFC의 영향으로 힉슨을 능가하는 유명세를 누리고 있다. MMA가 아니라 스포츠 주짓수 쪽을 봐도 인터뷰를 보면 십중팔구 '호이스를 보고 주짓수를 시작했다'는 말이 나온다.

UFC 1 토너먼트는 종합격투기의 역사를 논할 때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대회이다. 카와하라 마사토시의 만화 수라의 문 또한 이 대회를 오마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토너먼트의 참가선수들은 그레이시측의 지명으로 결정되었고 대진 또한 호리온이 결정했는데 호이스에게 상당히 유리한 대진이었다. 즉, 덩치가 크고 그래플링을 어느정도 아는 상성상 불리한 툴리를 일단 제외하고 그래플링이 약한 타격가 제라드 고르도하고 싸우려고 했으나, 일본 기자들한테 고르도에 대해서 듣고 고르도까지 툴리에게 붙이고 호이스는 복서인 짐머슨과 대결해서 1차전을 거저 먹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래플링에 무지한 복서라는 제일 상대하기 쉬운 케이스였는데, 짐머슨이 승패와 관련없이 2만달러 상당의 금액을 지급받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43] 결승에서 만난 고르도는 툴리와의 싸움에서 발에는 툴리의 이빨이 박혀부상을 당한 상태로 싸워 패배하였고 링 닥터가 고르도의 부상에 대해 호리온에게 알려줬다고 하여 당시의 불합리함을 강하게 어필하기도 했다. 이는 수라의 문에서도 오마쥬 했다. 또한 켄 샴락 같이 거구의 레슬러가 마운트 상태에서 장기전을 들고 나오면 방법이 없고[44] 그레이시 가문에서 주짓수의 강함을 홍보하기 위해 연 대회이기 때문에 지금 봐도 대진표가 호이스에게 유리하다.

제라드 고르도는 UFC 1때 스모선수 테일라 툴리와 붙었는데, 결국 고르도는 결승전에서 주먹골절, 발에는 툴리의 이빨 박힌 상태에서 호이스와 악 좋건에서 싸우게 된다. 반면 호이스는 부상없이 결승전에 올라왔다. 고르도는 호이스의 그래플링 기술들을 여러 차례 막았지만 체력이 떨어지면 부상으로 호이스의 그라운드로 끌려 갈 수 밖에 없는 구조다.[45] 만약 호이스와 툴리가 붙었다면 훨씬 불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해외에서도 있다. 호이스와 1회전에서 대전했던 권투선수 아트 짐머슨은 대전료가 지거나 이기거나 UFC 1 상금의 40%라서 박치기한다고 바로 항복해서 말이 많다. 1회전 UFC 1 아트 짐머슨(권투), UFC 2 이치하라 미노키(가라데), UFC 3 키모 레오폴도(태권도), UFC 4 론 반 클리프(가라데) 1943년생 영화배우. 어쨌거나 이들의 격투기반을 보고 대진표를 짠거같은데 미노키는 유파가 대도숙 공도이고, 키모는 태권도 대표로 나왔지만 사실 대학에서 레슬링 선수로도 활동했다. 호이스가 미노키에게는 고전했고, 키모에게는 키모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결국 암락으로 이겼으나 탈진해서 다음 경기를 포기할 정도 였다. 사실상 호리온 입장에선 미노키는 낚인 것이고, 키모는 함정 수준이었다. 가장 황당한건 나이가 한참많은 가라데 수련자 영화배우와 대전이다. 호이스가 태클을 걸고 풀마운트 상태에서 상대가 저항하니 파운딩하려다가 노인학대라고 생각했는지 조르기로 탭을 받아낸다. 해설가도 호이스가 아버지뻘이라 배려해준 것이라고 웃으면서 언급한다. 결국 선수들이 점점 주짓수를 배우니 호이스도 결국 UFC를 이탈했었다. 어쨌거나 주짓수의 강함을 홍보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결과적으로는 성공이다. 호이스가 깔려도 케이지쪽으로 이동해서 케이지를 이용해서 스윕하는 것은 상대들에게도 생소했을 것이다. 당시 발리투도도 케이지 형식이 아니었다. UFC의 인기로 현재나 바뀐 것이지.

다만 이와 관계없이 호이스가 그라운드에서 강했다던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편이다. 주짓수 검은띠라고 호이스 처럼 그라운드에서 강했던건 아니다. 유도/주짓수 검은띠 렘코 팔도엘은 스탠딩 상태에서 무에타이 선수에게 백을 내주면서 그라운드로 가는데 이건 유도에서도 양날의 검이다. 매치기를 실패했을 경우 초크로 패배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수직엘보우로 백을 잡은 선수 안면을 공격해 이기긴 한다. 결국 또 호이스에게 백을 내주면서 그라운드로 가는데 결국 깃초크로 패배한다. 가라데 기반이지만 주짓수 검은띠도 있는 해롤드 하워드도 타격으로 인한 섭미션 3연패로 은퇴한다. 마운트에 깔리면 탈출을 못한다. 이들은 호이스 보다도 체격이 좋았다. 당시 호이스의 기량은 원매치 방식으로는 모든 참가자들에게 그라운드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토너먼트의 특성상 보다 확실하게 우승하기 위해 편법을 동원한 것이다. 키모처럼 체격이 큰 레슬러 상대로 키모의 머리털을 쥐어 뜯으며 암락으로 이겼긴 하나 결국 탈진으로 경우 중간에 포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2차전에서 샴락이라는 최강의 난적을 스스로 제압했고, 고르도전 역시 부상의 덕을 보긴 했으나 애초에 주짓수에 대해 모르는 타격가인 고르도가 이길 승산은 크지 않았으나 의외로 고르도는 레슬링과 유도를 배워서 호이스의 태클과 언더훅도 스크롤과 오버훅으로 저지했다. 호이스는 결국 붕대로 다친쪽 다리에 발을 걸어서 그라운드로 끌고가긴 했다. 여담으로 고르도는 호이스의 귀를 깨물었다고 한다. [46][47]

발리 투도형 무규칙룰의 신봉자로 룰에 의해 스포츠화 되어가는 현대 격투기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하다. 또한 격투기들이 실전성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Inside BJJ에서 한 인터뷰에서는 "격투기들을 가장 망치는 건 스포츠화야. 상대를 두들겨 패는 법보단 점수를 얻는 법을 가르치지. 요즘엔 그냥 살짝 톡 치고 점수를 얻는 식이라고. 태권도는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 아닌데 말이지. 태권도는 정권공격으로 상대의 가슴에 구멍을 뚫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무술이었어. 가라테랑 유도도 마찬가지다. 유도는 메치기로 상대의 머리를 바닥에 꽂아 말 그대로 '끝내' 버리는 무술이었지. 그런데 이제는 그러면 안돼요. 부드럽게 메쳐야 해. 이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이야. 실전에서는 점수 따위 없다고"라고 대답할 정도. 더불어 주짓수 대회에서도 점차 점수벌기식의 플레이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좀 그렇다고.

UF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있다. 2004년 UFC 45에서 과거의 숙적이었던 켄 샴락과 함께 시상을 받으며 주위를 훈훈하게 했다.

다른 그레이시 파이터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비공식 전적을 보유하고 있다.

2011년 3월 12일자 기사 #에서 UFC 복귀가능성 언급이 나왔다.

UFC 초창기를 빛냈던 전설이었고 계약할 가능성도 있긴하다. 헨조 그레이시도 UFC에서 경기를 치른 적이 있고... 하지만 호이스의 체격을 감안할 때 UFC웰터급을 뛰어야 하는데 UFC내에서도 웰터급쪽은 레슬게이들의 경연장인 체급이다. 전성기때 당시 레슬러들과 비교해도 레슬링 실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전성기를 한참 넘긴 호이스가 이런 레슬게이들을 상대해 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고 라이트급으로 가기에는 감량의 고통도 크고 호이스의 나이 때문에 그걸 배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냥 전설의 귀환이란 컨셉으로 데이나 화이트가 떡밥매치용으로 계약하는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제임스 토니와 비슷한 형태가 될듯

그러나 2016년 실제 복귀한 곳은 UFC가 아닌 Bellator MMA였다. 첫 상대는 켄 샴락.

5.1. 논란

몇년간 세금을 탈루한 혐의로 미 국세청에 고발당한 적이 있다. 해외에서 번돈을 해외은행 계좌에 이전하고 기업매출을 개인소득으로 속이고 허위서류까지 작성했다. 재판 끝에 56만 3787달러를 미 국세청에 납부하는 것으로 합의봤다.

6. 관련 문서



[1] Had an amateur JuJitsu Record of 51-3. 이라고 적혀있는데, 최신 반영이 안되어있는지 사실 1패가 더 있어서 4패다. [2] 1997년생. 전적이 벨라토르에서 4전 2승 2패로 전적이 좋지 않은 편. 최근 경기도 니킥 맞고 펀치 세레로 TKO패 했다. [3] 1993년 UFC 1에서 소개할때 world light heavy weight jiu-jitsu champion라는데, 정작 세계 주짓수 대회는 1996년에 생겼다. 호이스의 그래플링 기록들은 지금은 사라진 이름만 같은 작은 대회인듯하다. 호이스가 UFC 1에 참여할 당시 주짓수가 대중에게 생소해서 호이스외에 초창기 UFC에 참여한 주짓수 유단자가 몇 없었다. 또한 지금 있는 대부분의 주짓수 대회들은 존재 하지 않았다. 엘리오 그레이시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구아나바라 주짓수 협회(Jiu-Jitsu Federation of Guanabara)에서 개최한 대회가 있긴 하나 우승자 중 홀스 그레이시가 있다. [4] 최초의 동양인 UFC 입성선수이다. [5] 1984년 브라질 경기. 오스발두 아우비스(Osvaldo Alves)의 제자. 호이스는 검은띠 받고 그래플링 데뷔했으나 1라운드만에 패배 [6] 델 라 히바가드의 창시자다. 호이스외에도 호일러 그레이시를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다. # [7] 브라질 경기 Copa Company [8] 1998년 브라질 경기 Oscar de JJ 클락 초크로 패배 [9] 그러나, 호이스가 자기보다 윗 체급의 선수들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이 강조되다보니 자주 잊히는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윗 체급 사람들에 비해 작았다는 거지 그 또한 키 183cm에 몸무게 80kg 리치는 194cm 이다. [10] 당시 IBF 크루저급 랭킹 10위이자. 1983년 내셔널 골든 글로브 미들급 우승 [11] 그래플링 상황에서 권투글러브를 낀건 불리하고 권투글러브 자체는 방어에도 도움이 되긴한다. 그래서 반만 착용한걸로 보인다. [12] 짐머슨은 호이스에게 사이드 마운트를 당할때 하프 가드를 해야한다는걸 몰랐다. [13] 이와 반대로 다른 선수들은 피투성이에 골절, 탈진, 기절되어가면서 최선을 다해 싸운다. 호이스 조차도 30분 넘게 UFC 5에서 샴락에게 마운트로 깔린 상태에서 박치기를 계속 허용했고 경기후 얼굴이 퉁퉁 부어있다. 짐머슨은 어차피 자기 종목도 아니라서 패배해도 별 상관 없어서 대충 했던 것으로 보인다. [14] 선수들마다 대전료가 다르다. 아마도 권투선수가 대전료가 높기 때문으로 보인다. [15] 달라 붙으려는 툴리를 밀자 뒤로 미끄러진 툴리를 걷어찼는데, 툴리의 이빨이 부러지면서 1개는 해설가 앞에, 2개는 고르도의 발에 박혔다. 그리고 손목에도 골절이 있었다고 한다. [16] 고르도는 테이크 다운 당할때 주짓수를 안배웠기에(유도는 배웠다.) 가드 포지션을 몰랐으므로 아예 풀마운트 포지션에 깔린채 상대의 머리를 팔목으로 잡아서 막는다. [17] 종합 초창기에 타격가들의 그래플링 지식이 얕았기에 가능 했던 실수다. 발로 상대를 묶지 못하는 하위의 풀마운트 상태에선 길로틴 초크를 해도 아무 의미 없다. 결국 탈출하기 마련이다. 이후 UFC 2, UFC 3에서 패트릭 스미스, 키모 레오폴도는 레슬링의 브릿지를 사용 한다. 키모의 경우는 탈출해서 상위로 가기도 한다. [18] 호이스는 경기를 기권하기 전에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어서 케이지의 기둥에 엎드리고 있었다. 탈진이 와서 어지러웠던 듯하다. 결국 호이스 쪽에서 대전하기 전에 타월을 던지며 기권한다. [19] 헤럴드 하워드는 가라테 수련자로 나왔지만, 동시에 주짓수 검은띠 유단자이기도 했다. [20] 토너먼트 특성상 체력도 문제지만, 치고 박고 꺾고 싸우기에 부상을 입을 수 밖에 없다. 다음 상대가 멀쩡하다면 질 확률이 높다. [21] 당시 호이스와 샴락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으나 정작 둘다 토너먼트 경기 중 부상때문에 기권했기에 서로 붙질 못했었다. [22] 2차전은 기록상으로는 무승부였으나 호이스가 다소 유리한 공방이었다. [23] 호이스의 가드 포지션에 들어가지 않고, 허리에 멘 주짓수 띠를 잡아당겨 호이스를 끌어온 뒤 파운딩을 쳤다. [24] 심판 시야에서는 호이스의 안면이 보이지 않아 의식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최소한 팔을 들었다 내리는 등의 바디체크를 했어야 하는데, 요시다의 어필만 듣고 경기를 끝내버린 것이다. [25] 근데 실제 순간 기절하고 나서 쵸크를 풀었을 때, 벌떡 일어나는 경우는 이전에도 종종 있었고, 지금도 있다. 본인의 형인 힉슨 그레이시의 마지막 경기였던 후나키 마사카츠 전에서도 리어 네이키드 쵸크를 걸었고, 후나키가 탭을 치지 않고 버티다 실신하자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는데, 후나키가 바로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나키는 명백하게 쵸크를 당한 것도 알고 있었고, 본인 의지로 탭을 거부했기 때문에 판정 후에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패배를 인정하며 은퇴 선언을 했다. [26] 요상한 판정인 것은 분명하지만 한 번 내려진 승패선언이 번복된다는 것 또한 레프리의 기량과 단체의 공신력이 땅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다. PRIDE가 원래 좀 이런 경향이 있었다. [27] 자신만 도복을 착용하지 않은 점, 요시다의 낭심을 기회가 될 때마다 가격한 점, 팔꿈치로 척추를 가격한 점 등 [28] 이미 유도계에서 활약한지라 Pride 관점에서는 데뷔 초가 전성기다. [29] 토코로는 Rings의 후신인 ZST를 통해 격투기에 데뷔한 케이스였다. 마에다 아키라가 히어로즈 슈퍼바이저로 취임하면서 토코로에게 기회를 줬던 것. 토코로는 ZST에서 예전 Rings의 룰로 그라운드 공방하는데 익숙했기에, 기존과 다른 그라운드 운영이 나왔던 것이었고, 자국 격투기 팬들에게 옛 향수를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에게도 어필을 했다. 토코로도 요시다처럼 격투가로서 기대만큼 성장하진 못 했지만, 재밌는 경기를 하는 선수라는 이미지와 청소부 출신이라는 스토리, 의외로 방송에서 예능감도 있어 간간히 방송에 출연 중이다. [30] 다만 이는 그레이시 일족이 정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것 또한 한몫했다. 호이스는 복싱같이 기존에 잘 알려진 다른 무술을 분석하고 철저하게 공략했지만 다른 무술들은 주짓수를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짓수를 이미 배운 소수가 UFC 초창기에 참가했었다. 하지만 같은 검은띠라도 호이스만큼 잘 하진 못했다. 이건 현재도 마찬가지다. [31] 사실 호이스가 당시 사용하던 유술 기술들은 현대의 올림픽 유도를 통해서도 이미 알려진 기술들이었다. 암바, 삼각조르기, 깃초크, 발뒤축걸기(小外掛), 안다리후리기(大内刈), 맨손조르기 등. 또한 프로레슬링, 캐치 레슬링을 통해서도 바디 시저(클로즈드가드), 초크, 언더훅, 오버훅, 스프롤, 태클이나 상하체관절기가 알려졌었다. 당연히 보기만 한 것 과 오랫 동안 직접 수련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MMA 초창기이기에 타격과 그래플링 둘다 어느정도 하는 선수들이 별로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아무래도 선수들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당시에는 출전 선수들의 본업이 MMA가 아니었고 입식 아니면 그래플러였고 부족한 부분 훈련해서 오는 형식이었다. 초창기에는 지금 처럼 타격과 그래플링 둘다 고루 잘 하는 선수는 켄 샴락, 마르코 후아스 정도다. 지금도 UFC 여성부는 이종격투기에 가깝다. [32] 태클 실패하면 언더훅으로 달라 붙어 발뒤축걸기(小外掛) 또는 안다리후리기(大内刈)로 그라운드로 끌고 갔다. 압도적으로 체급 차이나는 키모의 경우는 언더훅을 방어하니 호이스가 대놓고 니킥으로 로블로를 한다.(...) [33] 대표적으로 키모 레오폴도에게 그런식으로 그라운드로 끌고갔다. UFC 2 부터는 해설가들도 로블로 해도 언급도 안한다. 언급해도 심판이 제지를 안하기 때문에 포기한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로블로는 반칙인데 이때는 존 매카시 심판이 제지를 안한다. [34] 스미스는 호이스를 언더훅 상태에서 레슬링 처럼 매치려고 하지만 호이스는 무게중심을 이용해 스미스를 뒤에서 밀다가 스미스가 하위에 깔린다. 주짓수/유도 파이터 렘코 팔도엘도 호이스에게 유도식 허벅다리걸기 하려다가 무게중심을 이용해서 뒤에서 미는 호이스에게 엎어져 마운트 파운딩으로 어이없게 진다. 켄 섐락이 체급으로 먼저 상위 포지션 차지했지만 제대로 안잡힌 힐훅을 시도하려고(종아리를 겨드랑이에 끼운 상태) 누웠다가 오히려 호이스가 달라 붙어 하위에 깔리고 돌다가 백까지 잡히게 된다. 이처럼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었다. 현대에는 일어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35] 초창기에도 그래플링을 어느정도 아는 선수들은 태클과 언더훅은 방어했으나 그라운드에서 조르기와 관절기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이 전략이 먹혔다. 현재는 선수들의 그래플링이 상향평준화되어서 그라운드로 끌고가도 유리한게 없고 달라붙으려다가 무에타이의 넥 클린치에서 팔꿈치, 니킥으로 KO 당할 수 있다. [36] 초창기 호이스 조차도 그래플링을 어느 정도 아는 타격가 키스 해크니에게 달라 붙으려하자 오히려 붙잡혀서 쥐어터진적도 있다. 대학에서 레슬링 선수로 활동한 키모를 그라운드로 끌고갔더니 오히려 계속 하위에 깔리고 압도당해서 키모의 머리털을 쥐어뜯고 관절기로 겨우 이기고 탈진해서 다음 경기를 기권하기도 했다. [37] 샴락 1차전에서는 샴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그립을 성공시켰다. 도복은 질기고 튼튼하기 때문에 일단 상대를 잡기만 하면 소매를 넣어 초크를 완성시키는 것이 수월하다. 땀을 흡수하여 미끄러움을 없애주는 효과도 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도복을 잡으려고 한다면 그 느낌을 통해서 상대방의 손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키모에게 백마운트 포지션으로 깔렸을때 도복 상의가 앞으로 흘러내려서 머리가 안보이니 초크를 걸지 못하는 모습도 보인다. 호이스가 도복을 입고 출전하기로 한 것은 단순히 주짓수의 전통적인 복장을 착용하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선택이었던 것. [38] 이때 호이스가 누워 있어서 키모는 그냥 스탬핑하면 되는데, 하지 않았다. 몇몇 선수를 제외하고는 비인간적인 기술들을 자발적으로 봉인하고 있었다. [39] UFC 1에서 호이스가 아트 짐머슨에게 박치기를, UFC 2에서 조니 로즈 vs 데이비드 레비키에서 비슷한 장면이 나왔었다. 레비키가 가드 상태를 한 상태에서 조니로즈가 박치기를 해서 이겼다. [40] 이전에는 마운트 상태에서 상대가 가드패스 하려고 점점 위로 올라가거나, 일어서려고 하면 삼각조르기에서 암바를 연계했지만 자신의 손을 숨기고 가드패스를 하려고하질 않으니 호이스도 할수있는게 없다. 엄청난 체급차는 덤이다. 샴락 정도의 그래플러면 위에서 누르는 힘만으로도 숨쉬기도 힘들다. [41] 스스로가 초크를 완성시키기에도 좋지만 상대방이 잡기에도 좋다. [42] 스탠딩과 그라운드에서 싸워야하기 때문에 타격가는 그래플링을, 그래플러는 타격을 보완했다. [43] 우승 상금인 5만 달러의 40%이다. [44] G&P전략을 사용했다. [45] 반대로 호이스가 입식으로 고르도와 붙는다면 매우 불리하다. [46] 인터뷰에서 호이스가 물렸다고 말하긴 하는데, 영상으로는 정확히 확인이 불가능하다. 웃긴게 이때 룰이 깨물기, 눈찌르기, 로블로만 금지였는데 심판이 이에 대한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47] 입식으로만 따진다면 제라드 고르도는 전설적인 파이터였다. 유럽의 입식 무대에서 거의 무적의 포스를 자랑했고 일본에서도 고정팬이 많았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일본에서 경기할 때 나카이 유키라는 일본 선수의 눈을 고의적으로 계속 찔러서 실명시킨 적도 있다. 그런데 정작 경기에선 스탬핑을 여러번 하던중 나가이 유키에게 힐 훅으로 패배했다. 하지만 입식으로만 경력을 쌓은 탓에 그라운드는 당연히 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걸 가지고 그를 저평가할 순 없다. 스모 출신인 테일라 툴리를 잔인하게 걷어차서 이빨 두 개가 그의 발에 박히고 나머지 한 대는 중계석 쪽으로 날라간 끔찍한 동영상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