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892년 4월 12일 ~ 1973년 4월 13일헨리 조셉 다거 주니어(Henry joseph Darger jr.) 는 미국의 은둔 예술가이자 작가이자 화가이자 청소부였다. 아웃사이더 예술의 대표 예시로 평가된다.
2. 생애
1892년 4월 12일 미국 시카고 24번가 350번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헨리 시니어인데, 독일에서 이민을 온 재단사였다. 다거가 태어났을 때 그는 이미 52세였다. 어머니인 로사는 위스콘신출신으로 30살 이었다. 1896년 4월 1일, 3살 때 로사는 여아를 출산하던 중 감염증으로 사망했다. 이후 그 여아는 입양되었다. 다거는 먼 훗날, 자전적 글에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으며, 여동생의 얼굴과 이름도 전부 전혀 모른다고 기록하였다.그 이후 다거는 아버지 시니어와 함께 애덤스 거리 서부 165번지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했다고 한다. 다거의 아버지는 다거가 학교에 진학하기 이전부터 읽고 쓰는 방법을 가르쳤다. 근처의 가톨릭계열 성 패트릭 성당의 부속 초등학교에 입학한 다거는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서 3학년으로 월반했다고 한다. 입학하기 이전부터 그는 신문을 읽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8살 때 아버지는 아파서 요양원인 "성 어거스틴 홈"에 들어갔으며 다거는 아버지의 보호에서 떠나 "자비로운 성모의 전도회"에서 살게 되었다. 이곳은 가톨릭계열의 고아원이었다. 미국의 독립기념일이나 크리스마스에는 아버지가 다거를 찾아왔다고 한다.
다거는 고아원에서 살면서 스키너 공립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거는 머리가 좋았으며 미국 남북 전쟁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각지의 전투에서의 사상자 숫자를 놓고 교사와 갑론을박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서서히 입과 코에서 이상한 강박적인 소리를 내는 증세를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크레이지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의학적인 검사 결과 그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소견을 받게 되어 1900년 보호시설로 보내지게 되었다.
1904년 다거가 11살 시절, " 링컨 정신박약아 시설"로 보내졌다. 이 시설에서는 무려 1200명에 달하는 아동을 수용했으며 대다수가 심한 정신지체상태였다. 다거는 지적 능력이 꽤 높았기 때문에 부지 시설 내부의 학교에 통학했다. 그러나 다거는 그곳의 규칙적인 생활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여름이면 농사를 했다고 한다. 1908년 3월 1일 1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해 8월에 다거는 시설을 탈출하려 시도했다. 두 번의 실패 이후에 탈출에 성공한 그는 일리노이 중앙부 디케이터에서 100km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시카고로 돌아왔다. 농장에서 일을 시킨 것에 대한 분노로 탈출한 것도 있었겠지만, 이후의 삶에서 다거는 시설을 탈출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후 가톨릭 대부모[1]의 도움으로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으며 가톨릭 병원인 성 요셉병원에서 일하며 기거하기 시작했다. 이 이후로 다거는 54년에 걸쳐 3개의 병원을 전전하며 청소와 설거지, 포대 감기 등의 저임금 노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즈음 그는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시설에 있었던 것"과 "크레이지라는 별명이 있었다는 것"을 들키게 되었다.
1922년에는 성 요셉 병원에서 나와 그랜트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다거는 성 요셉 병원의 기숙사를 나와 웹스터 거리 1035번지에서 독일이민자 부부가 운영하는 독신자용 하숙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병원 청소부로 일하며 사람들과 별 접촉도 하지 않으며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2년에는 같은 웹스터 거리의 851번지 3층에 있는 셋방으로 옮겨서 남은 40여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이 방은 20제곱미터, 1.5칸 짜리 작은 방이었다. 그는 33세 시절, 가톨릭측에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계속 신청했다고 한다. 73세 때 그는 원치않게 청소부 일을 그만두게 되어서 남는 시간에 자신의 자서전을 집필했다. 그의 생애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부가 이 자서전에 의존하고 있다.
이후 그는 늙고 노쇠하여 계단을 오르내리기조차 버거워지게 되자, 집주인인 네이선 러너에게 가톨릭계열 노인 보호 시설에 자신을 넣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져서 그는 1972년 11월 말 경에 아버지가 있었던 곳인 성 어거스틴 홈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973년 4월 13일 81세의 나이로 조용히 사망했다. 이후 다거의 방에서 그가 만든 방대한 분량의 작품들이 발견되었고, 세상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인물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나 자폐증이라는 식의 내용이 퍼져 있으나, 사실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그에게 말을 걸면 언제나 날씨에 관한 이야기만 짤막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의 관심사가 대체로 좁은 분야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매일 거의 같은 패턴의 일상을 보냈으며, 일하고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 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작품 활동에 쏟아부었다.
이웃 사람들에 의하면 다거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행색이 초라했었다고 한다. 금이 간 안경을 반창고로 고정하여 착용했으며 복숭아뼈까지 내려오는 긴 군용 코트를 입고 다녔다. 간혹 쓰레기를 뒤지기도 했다. 아주 간혹 그가 말을 할 때에도 날씨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집주인 네이선의 말에 따르면, 많은 그의 이웃들은 다거를 내쫓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네이선은 그럴 때마다 "그를 가만히 놔둬라"고 했다고 한다.
3. 작품
<비현실의 왕국에서>(In the Realms of Unreal)는 15,145페이지에 달하는 글, 그림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정식 제목은 <비비안 걸즈 이야기: 어린이 노예 반란으로 시작된 글란데코-엔젤리니언 전쟁의 폭풍 속 비현실의 왕국>(The Story of the Vivian Girls, in What Is Known as the Realms of the Unreal, of the Glandeco-Angelinian War Storm, Caused by the Child Slave Rebellion)이다. 로버트 비비안(Robert Vivian)의 딸들, 아비애니아의 일곱 공주가 글랜델리니아 왕국의 어린이 노예들의 반란을 돕는 내용이며, 이외에도 지구를 위성으로 하는 거대 행성이나 가상의 생명체 같은 기이한 판타지적 내용이 담겨 있다. 다거는 이를 수백 편에 달하는 스케치와 수채화로 표현했다. 아이들은 내장이 적출당하고 목이 졸리는 등 잔인하게 죽고 고문당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누드화가 많이 나오는 것도 특징이다.다거는 엘시 파로베크(Elsie Paroubek)라는 체코계 미국인 아이가 납치살해당한 것을 신문으로 접했고, 이 사건에 집착하다가 영감을 얻어 <비현실의 왕국에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 전체에 걸쳐서 날씨에 대한 집착이나 가톨릭적인 색채가 짙게 드러나는 것이 특징이다. 삽화를 보면 여자아이의 그림에 남자아이의 성기를 그려넣는 등 특이한 모습들도 많이 발견된다. 다거는 300점이 넘는 삽화를 실제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그림이나 사진을 오려서 재활용하거나 트레이싱을 하는 방식으로 제작했다.
2001년에는 모든 글과 삽화 26점이 소장됨에 따라서 아메리칸 포크 아트 미술관에 헨리 다거 연구 센터가 설립되어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2년에는 뉴욕 근대 미술관과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에 여러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현재 그의 작품은 경매에서 7억원 이상의 가격에 거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