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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1:23:04

피델 카스트로/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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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평가,( 긍정적 평가 · 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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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동생 라울 카스트로 · 배우자 빌마 에스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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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암살 관련3. 기타

1. 개요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암살 관련

미국의 골칫덩어리였기 때문에 많은 암살 시도가 있었는데, 그의 생애 중 무려 638건의 카스트로 암살 계획이 있었고 수십번의 암살 시도가 있었다. 암살 방법도 시가에 독 바르기, 연설을 하는 연단 아래에 폭탄 설치하기, 취미 중 하나였던 스쿠버 다이빙 수트에 세균 집어 넣기, 미인계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전부 실패했다. 그래서 별명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이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암살이 시도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하며, 그 스스로도 암살 피하기가 올림픽 종목에 있다면 자신이 금메달을 땄을 거란 농담을 남겼다.

쿠바혁명으로 쿠바 카지노를 잃고 막대한 손해를 본 마피아들도 CIA와 공모해서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고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시카고 아웃핏의 보스였던 샘 지앙카나는 카스트로의 음식에 독을 타서 암살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 중 미인계가 실패한 이유가 놀라운데, CIA에서 암살자로 보낸 여자가 피델한테 진짜로 반해서 실패했다. 이 여자는 마리타 로렌츠(Marita Lorenz)라는 독일인으로, 피델 카스트로와 사귄 적이 있는 사이였다. 피델의 아이까지 임신했으나 어느 날 기절했다 깨어난 뒤 유산을 하게 되었고, 피델이 아이를 낙태시키고 차 버린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피델에 대한 원한으로 마리타는 CIA 요원들과 접촉하여 그의 암살 계획에 협조하기로 한다. 마리타는 피델 카스트로와 내연관계를 유지하다가 적당할 때 암살할 계획이었다는데, 마리타가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한 이야기에 따르면 피델이 그녀가 암살자인 것을 눈치채서 한동안 대피했다가 다시 피델에게 돌아갔는데, 권총을 겨누자 그가 한다는 말이 "날 쏠 수 없을걸. 넌 나를 사랑하니까"라며 되레 자기 가슴을 권총 앞에 들이밀자 옛 감정이 되살아난 그녀가 쏘기를 포기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의 배후로도 지목되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한 리 하비 오즈월드가 친(親) 쿠바 성향의 인물이었다는 증거가 나오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증거가 굉장히 희박하다. 애초에 오즈월드란 인물 자체가 지극히 모순적이었고, 쿠바 성향 유인물 배포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차라리 위에도 나오는 피그스 만 침공 시기에 미국 대통령이 케네디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지만, 케네디가 아무리 봐도 매파라기보다는 비둘기파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훗날을 가늠할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수없이 많은 케네디 암살자 후보에서 피델 카스트로의 순위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또 여러 정황으로 봐도 최강대국인 미국의 바로 밑에 있는 나라로서 그 나라의 대통령을 암살하는 짓은 정권유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양대진영 중 소련이 주축인 상황에서 그쪽과의 상의도 없어 반대쪽 맹주의 수장을 죽이는 짓은 정치인이 아니라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도 미친짓일 따름이다. 당장 대한민국으로 비유하자면 한창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박정희가 미국과 상의도 없이 소련 서기장이나 중국 마오쩌둥을 암살했다는 것인데 이는 예로부터 상대국의 국가 원수를 죽이는 행위는 전쟁 명분으로 충분한 것이기에 약소국이 초강대국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는 건 자살 행위에 가깝다. 당장 사라예보 사건의 세르비아가 비슷한데 세르비아는 분노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얻어터졌고, 전후에도 승전국이지만 힘을 못 쓰고 유고슬라비아로 통합되었으며 그마저도 통제력이 한계에 달하자 결국 가장 처참한 방법으로 분열되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를 접견하고 있던 미국인의 증언에 의하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황하며 우려하는 반응을 보였다고도 한다.

3. 기타

어린 시절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워낙 영어가 서툴러서 문법도 엉망이었다. 편지 내용은 대략 이랬다. 원본
산티아고 데 쿠바, 1940년 11월 6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나의 좋은 친구, 루스벨트 씨. 나는 영어 잘 몰라도 당신에게 편지 쓸 정도로 영어 알아요. 난 라디오 듣는 게 좋아요. 라디오에서 당신이 새로운 시대에 대통령이 될 거란 소식 듣고 매우 기분 좋았어요.

난 열두 살이에요. 나는 소년이지만 생각 많이 해요. 하지만 내가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 쓰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어요. 괜찮다면 답장에 10달러짜리 미국 지폐도 보내줘요. 10달러 미국 돈 한 번도 못 봤어요. 갖고 싶어요... (중략) ...난 영어 잘 모르지만 스페인어는 잘 해요. 당신은 스페인어 잘 못해도 영어는 잘 하겠죠. 당신은 미국 사람이고 난 미국 사람이 아니니까요... (하략)

그리고 연설 덕후로도 유명하다. 196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행한 4시간 29분짜리 '간단한' 연설은 지금도 정상급 인사의 연설 중 유엔 역사상 최장시간 연설로 기록되어 있다. 피그스 만 침공 사건 이후에도 분노+희열에 가득 차서 라디오로 몇 시간이고 연설했다. 주된 내용은 다시는 쿠바를 무시하지 마라였다.

파일:external/api.ning.com/castro.jpg

1969년 유엔 대회의장에서.

본인 스스로 연설을 하다 보면 기가 충전되는 느낌이라고 하는 등 연설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라 주제만 생기면 뭐든지 연설 주제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문제는 자국에서는 기본 5시간–6시간씩 야외연설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청중들이 땡볕 아래에서 버티지 못하고 일사병, 열사병으로 픽픽 쓰러지기 일수였다고 한다.

온갖 기행을 벌이면서 미국을 곧잘 조롱하곤 했다. 예를 들어 소련과 함께 UN 총회에 참석했는데 양복이 아니라 페인트 냄새날법한 작업복을 입고 미국으로 찾아온 것이 있다. 이후의 행적이 더 가관인데 미국에서 최고급 호텔과 경비원들을 제공하자 카펫과 이불을 담배로 태워 버리고 닭을 잡은 뒤 정리를 안 하고 방에서 나갔으며 그 길로 곧장 UN 사무총장에게 쳐들어가 '미국이 제공한 호텔의 불편함'을 주제로 1시간 짜리 연설을 한 뒤 대답을 듣기도 전에 뛰쳐나가 할렘가의 낡아빠진 호텔인 <테레사 호텔>로 거처를 옮겨 버렸다. 이후 테레사 호텔 관계자들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자 그 망할 작자가 한시간에 천달러씩 내도 그놈을 받느니 호텔을 폐업해 버리겠다고 카스트로를 향해 욕을 퍼부어댔다.

UN 총회가 시작된 뒤에는 흐루쇼프가 발언할 때 쿠바나 카스트로라는 단어만 나와도 벌떡 일어나 최대한 시끄럽게 박수를 쳐대기도 했으며 1시간 짜리 간단한 연설을 하겠다고 한 뒤 위에 나온 4시간 29분 짜리 연설을 행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졸지 않고 버텨낸 사람이 흐루쇼프 뿐이었다고 한다. 2005년 이냐시오 라모네와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본인의 긴 연설들이 상기되자 "조금 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말은 적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게 결론입니다."라고 했다.

야구선수 출신이다. 대학생 시절에 대학팀 대표로 미국에 와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문을 두들겼다. 이때 뉴욕 양키스와 워싱턴 세너터스(현재 미네소타 트윈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입단에는 실패. 만약 이때 입단에 성공했다면 냉전 시기 쿠바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만 하고 본건 아니고 축구도 같이 즐겨 봐서 1970년대에 아스널 팬이었고 1980년대 중반 이후로 마라도나와 친하게 지냈고 2014년 월드컵 때는 아예 메시 찬양글을 올리기도 했다. 여담으로 카스트로는 마라도나가 마약을 끊는데 도움을 준 적이 있다.

야구광이었기 때문에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결승전을 시청한 모양이며 0점대 방어율로 대회를 지배한 한국팀의 왼손괴물투수를 호평했다.[1] 한편 '다른 팀은 돈을 위해 뛰지만, 쿠바팀은 애국심을 위해 뛴다'고 하며, 은메달에 그친 쿠바팀을 위로하기도 했다. 출처

191cm의 장신답게 축구 야구 뿐만 아니라 농구도 엄청 잘했고 권력을 쥔 이후 개인적으로 가장 즐겨 참여했던 스포츠는 농구였다고 한다. 그것도 재미로 대충 한게 아니라 선수들과 같이 트릭이나 스텝 등 농구 기술을 창안하고 연구해서 전파하는 수준이어서 일설에 의하면 카스트로가 당시 개발한 스텝이 유로스텝의 원조라는 주장이 있다. 체게바라는 자신의 일기에서 카스트로가 혁명보다 농구에만 정신이 팔려있다고 툴툴대기도 했다.

음치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한국 언론에서 나오던 기사에 의하면 목욕하면서 부르던 콧노래를 듣던 어느 친구가 "지금 어디 아프냐?"고 놀라면서 물어볼 정도였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쿠바인답게 시가를 좋아했다. 한때는 미국이 시가에 폭탄을 넣어서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하지만 노년에는 금연에 성공하여 시가를 멀리하였다. 오죽하면 담배 한 상자로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일은 그것을 적에게 선물하는 것이라는 발언까지 남겼다.

소련은 자발적 공산혁명이 일어난 얼마 안 된 나라였던 쿠바를 매우 좋아해서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해주었는데 그 일환으로 피델에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수여하고[2] 쿠바에 대해 대규모의 경제 원조를 실시했다.

특이하게도 전차장으로도 활동했다. 피그만 침공 당시에 크게 분노하며 전차를 몰고가서 반란군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고 싶어했기에 침공 마지막날에 아예 T-34-85를 타고 최선봉에 앞장섰다.

젊었을 때는 당당한 체구와 잘생긴 얼굴, 간지나는 수염에 강한 카리스마와 열정적 태도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마성의 남자였고 실제로 여성편력도 매우 화려하다.

마찬가지로 장신에 미남으로 인기가 높은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가 카스트로와 매우 닮았는데 트뤼도의 아버지가 카스트로의 열성적인 팬으로 부부가 결혼 직후 같이 쿠바를 여러차례 방문해서 카스트로를 만난 사실과 결부시켜 생부가 사실은 카스트로 아니냐는 음모론이 존재한다.

카스트로의 수염은 매우 유명해서 카스트로나 쿠바혁명의 상징이나 마찬가지 였고 이를 소재로한 한국 문학평론가, 작가인 이어령의 '장군의 수염'이라는 단편소설도 있을 정도. 카스트로의 상징은 수염, 시가 담배, 그리고 군용 모자. 혁명동지인 체 게바라의 상징은 베레모 AK-47, 그리고 M1 카빈.[3]

파일:external/www.latinamericanstudies.org/senile.jpg

추리닝을 즐겨 입었다. 그것도 아디다스 추리닝만 입었다. 퓨마 추리닝도 종종 입었던 듯하다. 미국 브랜드라서 안 입을듯 하지만 나이키도 아주 가끔 입었다. 앞의 두 브랜드는 독일제다.

파일:iambored-pro-liam-neeson-and-fidel-castro-lookalike-iambored-pro.jpg

코 때문인지 묘하게 배우 리암 니슨을 닮았다.

생존 당시에는 워낙 고령이라서 눈치채기 어렵지만 상당한 거구이고 장신이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키가 191cm. 젊었을 적 찍힌 사진이나 영상들을 보면 키가 큰 편이다. 1972년 동독을 방문했을 당시 영상을 보면 당시 동독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와 비교해도 확연히 키가 차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1986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영상을 봐도 알 수 있는데, 그와 만난 김일성의 체구도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큰 편인 175cm인데 피델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파일:nixoncastro.jpg

1959년 쿠바 혁명 직후 방미 때 당시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과 만난 적이 있다. 당시에는 혁명 직후라 미국이 아직 쿠바와 수교하던 상태였으며 양국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성사된 만남으로 보인다. 1961년 중단된 양국 간 수교는 2014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때 재개되지만 이땐 이미 피델이 너무 고령이었고 권력에서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와 만났다. 피델과 만난 적이 있는 미국 대통령은 닉슨과 지미 카터 둘 뿐으로, 물론 둘 다 대통령직에 있을 때는 만나지 못했다.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와는 매우 돈독한 관계였다. 차베스가 카스트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데다가 이미 차베스가 감옥에서 2년간 복역하다가 출소한 이후부터 카스트로랑 직접 친분을 쌓았고, 차베스가 대통령직에 오른후부터 교육과 의료수준을 높여야 된다며[4] 쿠바로부터 교육용 교재와 의사를 대량으로 수입(?)하고 그 대가로 쿠바에게 연간 쿠바에서 사용하는 석유량의 약 두 배인 3000만 배럴가량의 석유를 저가에 원조해줬다. 덕분에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경제난에 허덕이던 쿠바를 회생시켰다. 또한 차베스가 2002년에 쿠데타로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직접 차베스의 딸과 직접 통화해서 쿠데타 시도를 무위로 돌리기도 했다. 그래서 거의 아버지와 아들급으로 친한 관계였다. 후임인 니콜라스 마두로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쿠바의 경제가 나아졌다고 해도 1인당 GDP 1만 달러를 달성한것도 아니고 재정이 크게 넉넉한 것도 아닌지라 때문에 일부 자재나 식품등을 지원해주는 걸 제외하면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처지라서 미묘하다.

그리고 니카라과의 대통령인 다니엘 오르테가하고도 1970년대 소모사 정권 시절부터 절친한 관계를 맺어서 다니엘 오르테가가 타 정파와 힘을 합쳐서 소모사 일당을 몰아냈을 때 대대적인 지원을 내보냈으며 1980년대 콘트라 내전에 벌어졌을 당시에도 니카라과에 물자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이후로는 쿠바의 사정이 영 안 좋아졌고 다니엘 오르테가가 선거에서 패하며 야당인사가 되었기에 니카라과에 대한 지원은 없어졌으나 개인적인 친분관계는 계속해서 이어갔으며 2006년에 선거로 재집권 한 이후로도 의료인력과 교육인력을 대거 보내서 니카라과의 의료와 교육 인프라를 정비시키는데 도움을 줬다. 물론 따지고보면 우고 차베스나 다니엘 오르테가나 사실 피델 카스트로와는 스타일이 상당히 다른 정치인이지만[5] 아무튼 뭐 그렇다. 그 이외에도 브라질의 룰라 등 중도좌파로 분류되는 지도자나 디에고 마라도나와도 어느정도 인연이 있는 편이다.

1973년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생기고, 바티칸에 남미 출신 교황이 생기면 미국이 우리와 대화할 것"[6]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으로 선출되어 카스트로가 말한 두 조건이 충족된 후 1년이 지나 2014년 쿠바와 미국이 수교했다. 링크

한국은 쿠바와 미수교국이기 때문에 그와 인연이 없지만, 예외적으로 1981년 9월 아바나에서 열린 국제의회연맹(IPU) 총회 참석차 쿠바를 방문한 국회의원단이 리셉션에서 15분 정도 스포츠 얘기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 #, 2001년 4월 2일에 이만섭 한국 국회의장과 아바나에서 만나 회담을 열기도 했다. 7월에는 김장환 목사가 침례교세계연맹(BWA) 회장으로서 그를 만났고, 2006년에는 야디라 민바스 기초산업부 장관을 데리고 현대중공업의 쿠바 전력설비공사 현장을 찾았다. 그의 사망 이후로는 외교적 움직임이 조금씩 보였고, 2024년에 한국-쿠바 수교로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파일:카스트로 롤렉스.png

카스트로는 쿠바의 사회주의 지도자였지만 아이러니하게 그가 착용했던 시계는[7] 롤렉스였는데, 특이하게도 두 개를 착용했다고 한다. 다만 권력 승계 이후에는 롤렉스도 착용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일례로 권력승계 이후 당 대회 참석 시에는 아디다스 운동복에 카시오사의 전자시계를 착용했다고 한다.

1994년 프랑스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옥에 떨어져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만나게 될 것이다. 지옥에서 당할 뜨거움 같은 것은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계속 기다려온 고통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에는 '빵'을 찾아 떠나는 미국행 난민 행렬에 대해서도 "가난한 인민이 부자 나라로 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8]

외교관 출신 탈북자인 고영환이 카스트로의 사저에서 카스트로가 몸소 만든 저녁을 대접 받았다고 한다. 김영남을 수행하여 쿠바를 방문하였을 때, 카스트로가 저녁 만찬에 초대를 하였기에 큰 기대를 하였는데 막상 가보니 카스트로가 자기 집에서 가정부 아줌마와 함께 둘이서 만든 요리들을 내오더라는 것이다. 이때 고영환은 카스트로의 사저에서의 저녁식탁을 보며 주석궁에서의 호화로운 연회가 오버랩되어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9]

IRA에게 우호적이어서 북아일랜드 분쟁 당시 IRA를 지원해줬다고 한다.


[1]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에서 류현진이 8⅓이닝, 정대현이 ⅔이닝을 막았으므로 피델이 말한 한국팀의 왼손투수는 당연히 류현진이다. [2] 소련영웅은 외국인에게 쉽게 수여되진 않았지만 그렇게 드물었던 것도 아니었다. [3] 두 총기 중엔 M1 카빈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혁명군은 M1 카빈이나 도미니카제 복제품인 산크리스토발 카빈을 애용했다. [4] 사실 말 자체는 맞는 말인데 사실 쿠바의 높은 의료수준이 외국인에게 한정된다는 얘기가 많고 교육도 별볼일없다는 얘기가 많지만 그럼에도 당대 여타 남미 국가들에 비하면 그래도 나은 수준인 건 확실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이들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는데 비해서 당시 중남미의 경제사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교육예산은 못 늘렸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교육에 대해 무슨 투자를 하기 불가능한 사람들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대엔 교사들 월급도 제때 못주는 중남미 국가들이 한두곳이 아니었다. 거기다 IMF같은데서 사회복지예산을 축소하라 닥달하니 의료예산도 제대로 주기 힘들었다. 베네수엘라도 비슷하게 저유가와 외채문제로 인해 한창 경제가 힘들었을 시절이어서 교육예산을 늘리기 힘들고 저소득층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걸 포기해버리니 교육이 막장화되었던 것이었다. 90년대 중후반 당시에 중등교육 이수율이 20%대에 불과했을 정도이니 말다한 셈이다. 즉, 당시 쿠바도 사정이 악화되기는 했지만 다른 중남미 국가들의 사회복지가 막장을 달리다보니 그나마 양반인 수준인 셈. [5] 애초에 야당이 참여하는 선거가 치러지는 베네수엘라, 니카라과와 공산당 출마 인사와 일부 무소속만이 참여할수있는 선거만 치러지는 쿠바와는 체제가 다르다. [6] 발언 시기상 아주 먼 미래의 일이라고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흑인은 투표권을 가진지 10년도 안 되었고 교황은 400년 이상 동안 이탈리아인들이었기 때문. [7] 착용한 것으로 알려진 모델은 데이트저스트와 GMT. [8] 북한의 독재자이던 김정일과 카스트로를 비교하고 있다. [9] 근데 반전은 카스트로 또한 김씨 부자 못지않은 사치스러운 사생활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 즉 보여주기식 쇼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