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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시대 | 사건 | 주동 세력 |
1950년 | 김일성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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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재령군 봉기* (황해도 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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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광복회 (김화경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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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 창평 정치범수용소 학살 사건* | 창평 관리소 수감자 | ||
1992년 |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파 쿠데타 모의 사건* |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유학생 | ||
1995년 | 김정일 시대 |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 | 북한군 제6군단 | |
2017년 | 김정은 시대 | 김성일 사건* | 비밀결사 조직원 | |
2024년 | 2021년 북한 내 반체제 정당 조직 적발 사건* | 비밀결사 조직원 | ||
2024년 북한 내 반체제 세력 출현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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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 | }}}}}}}}} |
1. 개요
1992년에 북한에서 벌어졌던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유학생들의 쿠데타 모의 사건.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생의 쿠데타 모의 사건2. 과정
2.1. 배경
냉전 시절 북한은 공산권의 지도국가 소련에 수많은 유학생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대체로 북한에서도 상위계층 출신이었고 김일성의 관심도 남달라서 거액의 장학금을 받는 등 많은 지원을 받았다. 한편 소련도 북한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북한 유학생들을 상당히 우대하였고 이 중에서 일부는 KGB가 연일 백인 미녀들과 술을 대 주면서 자신들의 정보원으로 포섭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소련 유학생들은 이런 양쪽의 지원에 힘입어서 상당히 여유로운 생활을 했고 수완이 좋은 일부는 장사에도 손을 대서 꽤 많은 돈을 만졌다고 한다.KGB에 포섭된 소련 유학생들은 현지 정보기관과 결탁해 북한 내부 정보를 유출했고 소련은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생기면 이들을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은 단계별로 돈을 지불했고 이를 거부하면 낙제생으로 만들고 테러 조직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씌워 재판정에 세웠다.
한편 소련에서 유복한 삶을 살던 엘리트 유학파 장교들은 북한에 돌아와 매우 열악한 처우를 받게 되었고[1] 이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면서 자기들끼리는 러시아어로만 대화하는 등 소련 유학파 출신들이 모이는 일종의 이너 서클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1950~ 1960년대 소련에서 유학했던 1세대 유학파들부터 20대 젊은 층까지 있었다고 한다.
1991년에 김일성이 김정일에게 최고사령관 직을 물려주자 사회주의 체제에서 유례없는 권력 세습에 크게 반발한 이들은 쿠데타를 준비했는데 1993년 김정일을 제거하고 김일성을 국가의 상징으로 내세운 다음에 주체사상으로 왜곡된 북한의 사회주의 노선을 정통 사회주의로 개조한 후 남한을 침공할 계획이었다고 한다.[2]
2.2. 시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군사정변 모의는 최룡해의 매부였던 홍계성이 이끌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홍계성에게 1992년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 김정일이 직접 상장의 견장( 계급장)을 달아 주었다.홍계성과 함께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었던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도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었고 여기에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프룬제 군사대학에 유학한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과 전투훈련국장 안종호도 합세했다.
그들은 조선인민군 창군 60주년이 되던 1992년 4월 25일 열병식 주석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탱크로 제거하는 계획을 세웠으며 프룬제 유학파 출신의 사단장 5명이 거느린 부대도 쿠데타 계획에 합류했다. 열병식에 동원된 전차는 프룬제 유학파 출신 김일훈 소장이 관할하는 평양방어사령부 탱크사단 소속이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고종사촌인 인민무력부 국장 박기서가 평양방어사령부의 탱크를 동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고 대신 인민무력부 직할부대의 탱크가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초기 쿠데타 계획은 실패했다.
2.3. 진압
러시아는 소련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을 통해 이런 사실을 미리 파악했다. 첫 쿠데타 음모가 실패하자 기존 KGB의 한 간부였던 사람이 당시 러시아 대사였던 손성필에게 쿠데타 모의를 고발했다. 김정일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 출신들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분노하면서 조선인민군의 방첩기관인 인민군 보위국[3]에 이들을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에서 중대회의가 있다는 연락을 받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들이 도착하자 인민군 보위국 국장 원응희가 지휘하는 작전조를 투입했다. 총참모장 최광과 보위국장 원응희가 주최한 이날 회의에서 최룡해의 매부였던 인민군 부총참모장 홍계성 상장과 인민군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중장,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 등 장령급 지휘관 7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때부터 1998년까지 5년간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유학생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과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각 군단, 사단, 여단의 모든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모두 조사를 받았고 모스크바 주재 북한대사관 무관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었던 최수연 대좌도 1997년에 체포되었으며 1993년 말 김책공군대학에서 재직하던 유학생 17명은 평양역 부근에서 크게 저항해 인민군 보위국 1개 중대가 동원되어 겨우 제압했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보위국은 북한의 주요 도시들을 검열했는데 1998년 량강도 혜산시에서만 2백여 명의 당, 행정, 사법기관 간부들을 공개처형하거나 비공개로 살해했다. 당시 량강도 보안국 리성훈 수사처장은 망치로 살해당했다.
2.4. 이후
조선인민군 보위국은 이 사건과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을 신속히 처리하고 군부 내의 반김정일 세력을 뿌리뽑은 공로로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었으며 보위국장이었던 원응희는 보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중장에서 단숨에 대장으로 진급했다.[4]이 사건으로 장령 30여 명과 좌급 군관 100여 명, 위급 군관 70여 명 등 프룬제 군사대학 유학생 출신 도합 200여 명이 총살되었으며 살아남은 일부 유학생들은 군복을 벗은 채 지금도 북한 당국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북한은 외국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있다.
3. 여담
- 2011년 초에 프룬제 출신 장교 한 명이 유학 당시 2000달러를 받은 사실을 숨겨 오다가 결국 자살을 택했는데, 북한 핵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진 도상록의 친척이었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개방·개혁 의식을 가진 군 장교들은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고 한다.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도 프룬제 출신이지만 전혀 다른 노선으로 김정일 일가에 충성하여 살아남았다.
- 2020년 9월 주성하 기자는 프룬제 쿠데타설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를 유튜브 채널로 밝혔다( 영상).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로는 소련 붕괴 후 북한으로 모두 소환된 이들이 자신들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터트렸는데 소련으로 유학을 갈 수 있을 만큼 고위층 출신들이라 불만을 공공연하게 표출했고 이에 김정일이 이들을 숙청한 것이라고 한다. 즉 구체적인 실행의도나 계획은 없었지만 안 그래도 감시체제가 철저한 북한에서 이들이 자기들끼리 술자리를 갖고 거기에서 대놓고 처우나 세습문제 등을 비판하며 불만을 터트림을 보고받고 김정일이 이들에게 쿠데타 모의 누명을 씌우며 미리 싹을 잘랐다는 것이다. 이후 여론이 안 좋아지자 김정일의 숙청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던 이봉원 대장을 남쪽의 간첩이라며 처형했다고 한다.
- 일단 이 사건에 대해 여러가지 증언을 검증해보면 쿠데타의 유무를 떠나서, 이 시점에서 러시아 유학파 장교들을 보위부에서 연일 잡아서 죽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보위부 운전병으로 근무했던 탈북자 구대명도 자신이 프룬제 유학파 장교들을 실어나른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前 노동신문 기자 김길선도 "우리 아버지가 군 보위사령부 출신이었고 나도 그 때 평양에 있어서 그 사건의 경위를 잘 알고 있다. 그 사건은 김정일을 향한 쿠데타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군대 내부에서 외화벌이를 위한 이권싸움에서 패배하고 숙청된 것에 불과하다." 라고 증언하였다. #
-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가 들어서면서 프룬제 군사대학은 러시아 합동군사지휘참모대학교로 변경되었고 외국군 위탁교육을 동맹국가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확대했는데 현재는 북한군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군 장교들도 교육을 받는다. 만점 사례가 종종 나오므로 우수하게 인정받는 듯하다. 방공 분야 만점 졸업 사례 1, 사례 2, 잠수함 분야 최우수 졸업 사례[5]
4. 관련 문서
[1]
소련과 북한은 같은 공산권 국가였지만 사회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소련은 사회주의 독재 체제가 아무리 극에 달해도 북한급으로 폐쇄적이지는 않았고 암암리에 서방제 물품들이 들어올 정도였지만 북한은 1970년대부터 이미
김일성 유일 지배체제가 공고화되면서 사회 분위기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2]
물론
고난의 행군이 있었던 90년대 북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예상 가능한 결과는 당연히 북한의 멸망밖에 없다. 대외적 여건을 봐도 이미 동유럽 공산 정권은 무너진 지 오래였으며 소련마저도 1991년 12월
붕괴됐다. 중국도 1992년 한중수교를 앞둔 시점이었으므로 대한민국을 굳이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3]
남한으로 치면
군부독재 정권 시절
국군보안사령부 정도에 해당한다.
국가안전보위부와는 다른 기관이다.
[4]
북한군에는
중장 다음이
대장이 아니라 상장이라는 계급이다. 마찬가지로 상장 다음이
대장. 따라서 중장이 대장이 되었다는 것은 북한군에게는 두
계급이 오른 것이다.
[5]
이는 단지 프룬제 뿐만 아니라 소련 붕괴 이후 2010년대초까지 계속되었던 화해 무드 이후로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모습이 되었는데, 일례로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에서도 베트남군 출신 생도가 유학하는 경우가 있다.
진해 군항제 문서의 사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