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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22 20:55:38

손성필



1. 개요2. 생애3. 여담4. 참고문헌

1. 개요

孫聖弼

북한의 정치인, 외교관.

2. 생애

1927년 11월 22일에 황해남도 송화에서 태어난 걸로 알려져있다. 양정고보를 졸업한 이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을 다녔으나 중퇴하고 귀국 후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 및 모스크바대학을 다닌 것으로 알려져있다. 귀국 후 1954년 중앙당학교 교원으로 일하기 시작, 1964년 11월 중앙당학교 부장까지 올라갔다.

인민경제대학의 전신인 정치아카데미 교수, 1961년 맑스레닌주의학원 학과장을 지냈으며 1968년 인민경제대학 부학장, 1969년 8월 인민경제대학 총장을 지냈다. 1970년 7월, 내각 고등교육상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71년 8월 북한 적십자회 중앙위원장에 임명,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모로코, 오스트리아, 프랑스, 페루,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을 방문하였으며 적십자회 대표단장으로 필리핀, 중국, 한국 등을 방문했다. 1972년 12월, 리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3년 5월, 정무원 고등교육부장에 임명되었다. 1975년 5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 1977년 11월에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실수를 저지른 것인지 1978년 6월 다시 인민경제대학 총장으로 내려갔고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당했다. 하지만 숙청이나 경질까진 아니라서 여러 외교업무에 동원되었고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의원에 재선, 4월에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4월 최고인민회의 7기 2차 회의에서 려연구와 함께 상설회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2월,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86년 4월, 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상설회의 부의장에 재선되었다. 1989년 4월에 김일성훈장을 또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1990년 2월, 권희경의 뒤를 이어 주소 대사로 부임하였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 대사로 이임하였다. 1994년에 투르메니스탄 대사를 겸하였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6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8년 2월 그루지야 대사도 겸하였으나 1998년 4월에 모두 해임, 박의춘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하였다. 사후 묘비 직함을 볼 때 다시 인민경제대학 총장을 맡았던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서 탈락하였다.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05년에 조국통일상을 받았으며 2014년, 애국렬사릉에 인민경제대학 총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이미 1998년 시점에서 은퇴단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주북 러시아 대사관에서 공개한 묘비에 따르면 2014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3. 여담

안기부가 작성한 김정일 문건에 따르면, 여동생 손희림이 있는데, 손희림이 32세이던 시절부터 김정일이 손희림을 가지고 놀면서 딸 둘을 낳았으나 1991년에 버려지면서 정신이상증세를 보여서 딸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사실상 추방되어 거기서 치료를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4.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