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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02:24:38

평강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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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부왕 양원왕
태자 영양왕 · 왕자 영류왕 · 왕자 대양왕 · 왕녀 평강공주
사위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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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차산성에 있는 온달과 평강공주상

平岡公主
(? ~ ?)

1. 개요2. 일생3. 의문점?4. 기타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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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공주. 평원왕의 딸이자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의 누이.[1]

'평강공주'에서 '평강'은 이름 혹은 봉호가 아니다. 단지 평원왕(평강상호왕)의 딸이라 하여 평강공주라 불린 것이다. 그 유명한 온달 설화의 주인공으로, 평양성에서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살았던 온달과 결혼, 고구려 유명 장수로 만든 일화가 유명하다. 왕족 집안 출신이니 성은 아마도 횡성 고씨였을 것이다.

2. 일생

평강공주는 어린시절 툭하면 우는 울보였다. 아버지인 평원왕은 딸이 울 때마다 "넌 너무 울어서 탈이니 귀족의 내실(정실부인)은 못되겠다. 아무래도 바보 온달[2]온달로, 이때 우()는 어리석은 우라고 보통 해석하지만, 우직, 어리숙, 고지식, 온순, 착한 정도의 의미도 내포할 수 있다고 한다.]한테 시집 보내야겠구나" 하며 놀리곤 했는데, 공주는 바보 온달 얘기만 나오면 울음을 뚝 그쳤다고 한다.

후에 평강공주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평원왕은 공주를 상부(上部) 고씨(高氏)에게 시집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평강공주는 예전에 평원왕에게 들었던 농담을 들먹이며 온달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왕은 기가 막혀서 공주를 말렸지만 오히려 공주는 "보통 사람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대왕께서 거짓말을 하신다면 누가 왕명을 따르오리까."라며 되려 왕을 나무랐다.

공주가 고집을 꺾지 않자 화가 난 평원왕은 공주를 궁 밖으로 내쫓았는데, 이때 공주는 금팔찌 등의 패물을 잔뜩 가지고 나와 온달에게 시집가게 된다.[3] 평강공주는 궁에서 나와 온달 집에 갔는데, 거기서 눈 먼 온달의 모친을 발견했고 모친의 소개로 온달과 만나 혼인하자고 고백했는데 사실 혼인은 모친도 처음부터 신분차 때문에 반대했고, 온달 역시 자신은 가난하고 보잘 것 없다며 난색을 표했는데 이때 평강공주는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바느질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단지 마음만 맞으면 되지 어찌 꼭 부귀한 다음에라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말빨로 혼인에 성공한다. 물론 평강공주는 이상만 앞선 여자는 아니었는지, 궁에서 나올 때 가져온 패물을 팔아서 온달 집안을 실제로 일으켜 세웠으며, 온달에게 무술과 병법을 가르쳐 일자무식했던 바보 온달을 뛰어난 무장으로 성장시킨다.

한편 평강공주는 비루먹은 말을 한 마리 사와서는 잘 먹이고 보살펴 명마로 탈바꿈시켰다.[4][5] 온달은 이 말을 타고 사냥대회[6]에 나가 많은 산짐승을 잡아 우승을 하였다. 평원왕은 평강공주가 시집 갔다던 온달이 엄청나게 성장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이후 온달은 중국 후주( 북주)의 침략을 받았을 당시에 이산(肄山)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대형(大兄) 벼슬을 받았으며, 비로소 평원왕으로부터 사위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 때에 온달은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 이서(以西) 땅[7]을 찾아오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신라군과 격전을 벌이던 중에 아단성(阿旦城)[8]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고 말았다.

영양왕과 고구려인들은 온달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시신을 거두어 장사 지내려고 하였는데 시신을 담은 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평강공주가 와서는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삶과 죽음은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편안히 가시옵소서."라고 애원하자 그제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평강공주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의하면 북한 학계에서는 평양시 역포구역에 있는 동명왕릉 둘레 진파리무덤떼(고분군) 제4호무덤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무덤으로 비정하고 있다.

3. 의문점?

삼국사기의 온달 열전에 기록된 온달 설화에 따르면, 평강공주는 귀족 영식들은 마다한 채 대신 한미하고 가난한 온달을 택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온달이 정말 하층민 출신이라면 평원왕이 온달의 존재를 아는 것부터가 의문이 들 수 있다. 국왕이 가난한 백성 신상까지 알고 있는 것은 얼핏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부분은 설화에서도 이미 온달이 평양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어 가능성의 영역일 뿐 왕이 모른다고 확정하기도 어려운 건 사실이다.

오히려 일국의 왕이 공주가 우는 것을 달랜답시고 바보한테 시집 보낸다고 어릴 적 장난 삼아 말한 것을 다 큰 공주가 진심으로 듣고 시집 간다는 것이 현실성은 더 떨어지는 얘기다. 다만 스톡홀름 증후군 등처럼 사람의 심리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묘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지속적인 일종의 가스라이팅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불가능한 얘기도 아니긴 하다.[9]

오늘날 몇몇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약간 다른 차원으로 해석해서, 평원왕이 귀족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10] 한미한 집안 출신들을 등용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딸을 유력한 신흥세력 인물에게 시집 보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다만 이 신흥세력이 말 그대로 하급 귀족 출신인지, 아니면 지위 자체는 높지만 기존 세력과 대립하던 마이너 세력인지 등도 주장이 분분하다. 온달이 가난하고 한미한 인물로 기록된 것은 떠오르는 신흥세력이었던 온달을 견제하기 위해 당대의 고구려 고위 귀족들이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과 기록들이 후대에 그대로 전해진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다만 학계 일각에서 거론된다고 마치 사실인냥 확정지어 말하는 네티즌들도 있는데, 이것도 명확한 물증은 없는 가설 중 하나일 뿐이다. 기타 내용은 온달 문서도 참조.

만약 온달이 실제 설화처럼 가난하고 한미한 출신의 배운 거 없는 순박하기만 한 청년이었다고 가정할 경우, 나중에 전장에서 이름을 떨치게 해준 무예와 전술은 평강공주가 체득하게 해준 것이 된다.[11] 만약 그렇다면 여성인지라 권력 핵심에 가기 어려운 평강공주가 자신과 뜻을 같이 할 남편감으로 뒷배경이 없는 온달을 고른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는 앞서 말한 온달과 왕권과의 관계와도 연관이 있게 된다.

재야사학자이자 소설가인 박영규는 영양왕-평강공주 남매의 생모가 죽은 후 평원왕이 맞아들인 계비가 의붓자식들과 사이가 안 좋고, 이 과정에서 계비가 평원왕의 귀를 막아 평원왕과 평강공주 부녀가 갈등하자 평강공주가 부왕과 계모를 엿먹이려는 심산으로 하급 귀족의 후손 온달과 결혼하겠다고 시위를 한 것이 설화로 전해져 온 것이라는 추측성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4. 기타

5. 대중매체에서



[1] 생년월일이 불분명해서 영양왕의 누나인지 여동생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 온달은 당시 평양성에 살던 인물로, 집안이 가난하여 늘 남루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에게 구걸하러 다녔기에 바보 온달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삼국사기에 적힌 정확한 표현은 바보 온달이 아닌 [3] 흔히 자식이 말을 안 듣고 고집부리면 '이럴 거면 그냥 나가서 살아.'라고 엄포를 놓는 부모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강공주도 독이 올라서 진짜로 나가버렸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 그녀는 그냥 나간 것이 아니라 재산으로 쓸 패물을 챙기는 등 미래를 대비하는 등의 준비를 미리하였다. [4] 다른 일화에서는 비쩍골은 말 한 마리를 보았는데 혀에 가시가 있어서 밥을 잘 못먹었던 것이였고, 그 말이 명마의 후손임을 알게 된 평강이 사와서 혀를 치료해주고 잘 먹여 본연의 모습을 드러냈다는 말이 있다. [5] 재밌는 점은 후자의 이야기가 훗날 고려시대에 쓰여진 이규보의 '동명왕편'에 나오는 주몽의 이야기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동명왕편에 나오는 주몽은 명마의 혀에 직접 가시를 꽂아 말이 여위게 한 뒤 보잘 것 없는 말인 것처럼 속여서 말을 얻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6]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매년 3월 3일마다 왕이 주관하는 사냥 대회를 열었으며, 이때 잡은 짐승의 고기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7] 죽령은 현재 행정구역 상 충청북도 단양군 경상북도 영주시에 걸쳐 있다. [8] 오늘날 학계에서 이곳의 위치에 대한 설은 서울의 아차산성과 충북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양분되어 있다. [9] 심지어 평강공주는 궁을 나올때 패물을 챙겨와 딱히 현실적인 생계 문제가 혼인의 걸림돌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온달이 훈남 아니었을까라는 가정도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공주 입장에선 많이 내려놓는 것이긴 했겠지만. 심지어 고구려는 데릴사위제가 보편화된 나라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평강공주는 일반 풍속과는 반대로 눈 먼 홀어머니를 모시는 온달 집에 시집살이를 자처한 것이다. [10] 고구려는 23대 안원왕 이후 귀족들의 세력이 이전보다 강해졌다고 추정된다. 특히 안원왕 말엽의 왕위 계승 분쟁 이후 귀족 연립 정권이 세워진 이후로는 왕권까지 위협할 정도였다. [11] 온달, 평강공주 이야기엔 평강공주가 제대로 먹지 못하여 헐값에 구입한 말을 우수한 준마로 키워내 온달이 타고 활약할 수 있게 해줬다는 내용도 전해지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평강공주는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명마를 고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 물론 현대사회에선 본인이 직접 성공할 수도 있긴 하다. 아님 남녀 둘 다 성공하던지. [13] 영주인 평원의 딸이다. 평원 역시 평원왕에서 왕명만 따온 이름. 어쩌다 평씨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