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토레스 2007-2011 |
|
|
|
▲ 2007년 계약 당시 | |
소속팀 | <colbgcolor=#ffffff,#191919> 리버풀 FC ( 프리미어 리그) |
등번호 | 9 |
기록 | |
102경기
65득점 11도움 |
|
24경기
8득점 1도움 |
|
6경기
4득점 |
|
7경기
1득점 2도움 |
|
3경기
3득점 |
|
합산 성적 | |
142경기
81득점 14도움 |
[clearfix]
1. 개요
|
Liverpool No.9 [1] |
2. 이적
리버풀 최고 이적료를 경신하였다. 2008년 3월에 리버풀 감독인 같은 스페인 출신의 라파엘 베니테스는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약 2,000만 파운드의 이적료가 들었다고 밝혔다.[2]3. 2007-08 시즌
|
1R 아스톤 빌라 FC와의 경기에서 EPL 데뷔전을 치렀다. 79분동안 경기를 소화하였고 교체되었으나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는 못했다.
|
토레스 EPL 데뷔골 |
EFL컵 3라운드 레딩 FC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27R 미들즈브러 FC와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으로 3:2 승리를 이끈 뒤 2R 순연된 웨스트햄과의 홈경기에서도 연달아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
|
데뷔 시즌부터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리그와 챔스에서 고루 활약하면서 도합 33골을 기록했고 챔스에서만 6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의 마이클 오언이 보유하고 있던 팀 내 챔스 최다 골을 경신했다. 또한 안필드에서 8경기 연속 리그 골을 기록하며 로저 헌트의 기록과 동률이 되었다.
결국 07-08 시즌의 활약과 UEFA 유로 2008에서 고국의 우승을 이끈 점을 인정받아 FIFA FIFPro 월드 XI과 UEFA 올해의 팀에 선정된 것은 물론,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에 이어 발롱도르 및 FIFA 올해의 선수상 3위를 차지하게 된다.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
프리미어 리그 | 33 | 29 | 4 | 24 | 3 | |
UEFA 챔피언스 리그 | 본선 | 10 | 10 | 0 | 6 | 0 |
예선 | 1 | 0 | 1 | 0 | 0 | |
FA컵 | 1 | 1 | 0 | 0 | 1 | |
칼링컵 | 1 | 1 | 0 | 3 | 0 | |
합계 | 46 | 41 | 5 | 33 | 4 |
4. 2008-09 시즌
|
저번 시즌의 활약을 보여주듯 리그 첫 경기인 선덜랜드 AFC 전부터 골을 기록하며 이번 시즌도 좋은 시작을 알렸다.
7라운드까지 리그에서 5골을 기록하며 아주 산뜻한 출발을 하고 있었지만 근육 부상을 당하며 4경기를 결장하면서 10월을 통으로 날렸다. 이때 친정 팀이던 아틀레티코와의 3, 4차전이 있었으나 부상으로 인해 토레스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토레스의 잔부상이 시작되었다.
12R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 전에서 교체 출전하면서 다시 복귀를 하면서 차츰 출전 시간을 늘려가고 14R 풀럼 FC 전에서 다시 선발 출전하면서 풀타임을 소화했으나 다시 부상을 당하면서 12월도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1월 중순 다시 복귀하면서 폼을 차츰 끌어올렸다.
안필드에서 무득점을 기록하고 있다가 24R 첼시전에서 경기 막판 두 골을 넣어 2:0 승리로 이끌었고 25R 포츠머스 FC 원정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역전골로 3:2 승리를 이끌었다.
08-09 시즌 레알과의 챔스 16강에서 발목 부상으로 인해 진통제를 맞으면서 뛰었는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선제골을 넣으며 제라드와 함께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
|
시즌 동안 잔부상으로 고생하면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지만 출전시에는 괜찮은 활약을 보이며 좋은 모습을 보였으나 팀은 무승부를 많이 기록하며 맨유와의 우승 경쟁에서 밀려나며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
프리미어 리그 | 24 | 20 | 4 | 14 | 3 | |
UEFA 챔피언스 리그 | 본선 | 7 | 7 | 0 | 2 | 1 |
예선 | 2 | 2 | 0 | 0 | 0 | |
FA컵 | 3 | 2 | 1 | 1 | 1 | |
칼링컵 | 2 | 1 | 1 | 0 | 0 | |
합계 | 38 | 32 | 6 | 17 | 5 |
5. 2009-10 시즌
|
리그 7라운드 헐 시티 AFC와의 홈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7라운드 동안 8골을 기록하면서 지난 시즌보다 더욱더 좋은 괴물 같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시즌 초반 좋은 폼을 보였다. 그러나 잠시 부상으로 이탈한 사이 리버풀은 챔스와 리그를 포함 모든 대회 4연패 수렁에 빠졌는데 10R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라이벌전에서 교체투입돼 결승골을 득점하며 2:0 승리를 이끌고 연패에서 탈출시켰다. 그러나 11R 풀럼 원정에서 리그 10골에 선착했으나 부상으로 교체되어 한 달 정도 결장하게 됐다.
리그 30라운드 포츠머스 FC와의 홈 경기에선 2득점 2도움을 기록하면서 모든 골에 기여하였고 팀은 4:1 대승을 거두었다.
09-10 시즌 챔스에서 4경기 출전, 1도움을 했지만 팀은 조별 리그에서 떨어져 UEFA 유로파 리그로 내려갔고, 준결승까지 4경기 출전 4골을 득점했지만 준결승에서 자신의 친정 팀인 아틀레티코에게 져서 탈락.
EFL컵은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였고 FA컵은 레딩 FC과 1, 2차전 모두 출전했지만 합계 스코어 3:2로 탈락.
토레스는 09-10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 리버풀에서 총 84경기 50골(리그 57경기 38골)을 득점했으며 리그 38골, 챔스 8골, 리그컵 3골, FA컵 1골을 득점했다. 09-10 시즌에는 아스톤 빌라 FC와의 리그 20라운드 경기에서 골을 넣음으로써 리버풀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내에 50골(72경기)을 득점한 선수가 되었다.[3] 토레스의 이 기록은 앤디 콜의 65경기, 앨런 시어러의 66경기, 뤼트 판니스텔로이의 68경기에 이은 4위 기록이었다.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프리미어 리그 | 22 | 20 | 2 | 18 | 3 |
UEFA 챔피언스 리그 | 4 | 3 | 1 | 0 | 0 |
UEFA 유로파 리그 | 4 | 4 | 0 | 4 | 0 |
FA컵 | 2 | 2 | 0 | 0 | 0 |
합계 | 32 | 29 | 3 | 22 | 3 |
6. 2010-11 시즌
|
시즌 시작 전 토레스가 팀을 떠날 것이라는 루머들이 많이 나돌았으나 당사자 본인이 이적설을 일축하며 이번 시즌도 리버풀에서 뛰고 싶다면서 이적설을 일축했다. 하지만 지난 시즌 마지막에 일어났던 부상 여파와 무리해서 나간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문인지 토레스의 폼은 많이 떨어졌고, 예전과는 다른 경기력을 보였다.
|
|
그래도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전 다시 2골을 기록하면서 후반기 리버풀에서 다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올릴 거라고 팬들은 기대했었다.
대회 | 경기 | 선발 | 교체 | 득점 | 도움 | |
프리미어 리그 | 23 | 21 | 2 | 9 | 2 | |
UEFA 유로파 리그 | 본선 | 1 | 1 | 0 | 0 | 0 |
예선 | 1 | 0 | 1 | 0 | 0 | |
FA컵 | 1 | 1 | 0 | 0 | 0 | |
합계 | 26 | 23 | 3 | 9 | 2 |
6.1. 이적 사가
국대 동료 샤비 알론소가 레알로 팔려나간 후 리버풀은 상당히 기울었는데, 밑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남아공 월드컵에서 토레스는 무득점에 그쳤다. 그렇지만 그래도 클래스는 어디 가지 않기에 다른 팀들, 특히 첼시에서 정말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전부터 토레스를 틈틈이 노려온 데다가 첼시가 정말 토레스에게 많이 당했기에[4] 당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과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도 토레스에 대한 관심을 표하였었다.첼시만이 아니라 FC 바르셀로나에서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토레스가 나가겠다고 하면 구단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팔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토레스는 남아공 월드컵에서 우승할 때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리버풀의 응원 수건을 두른 모습으로 들어올리면서 이러한 이적설을 일축시켰다.
하지만 토레스가 본래 리버풀로 온 이유는 오직 우승이었고, 특히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하고 싶어하였기에 앞날은 모르는 것이었다.[5] 그래도 구단이 인수되어서 안정이 되었기에 무조건 떠난다고 볼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2011년 1월 29일에 토레스는 서면으로 정식 이적 신청을 했지만, 구단의 뜻에 의해 기각되었다. 성적 부진과 루이스 수아레스의 영입으로 팀을 옮길 결심을 했다는 추측이 대부분. 어떻게 되든 리버풀에게는 향후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1월 30일, 케니 달글리시 감독이 토레스의 이적에 동의했다는 기사가 떴으며, # 링크1 곧이어 리버풀도 이적에 동의했다. # 링크2 요구 이적료는 4,000~5,000만 파운드에 니콜라 아넬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첼시의 선택이다. 덤으로 언론은 토레스의 행보에 잔뜩 주목하고 있다. 리버풀에서 토레스를 까는 익명의 선수 인터뷰가 올라왔다.
토레스의 이적 때문에 잉글랜드 이적 시장은 하루만에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에 빠져들었다. 리버풀이 토레스가 빠진 공격진 보강을 위해 앤디 캐롤을 3,500만에 사고 블랙풀 FC의 찰리 아담을 1,400만에 비드를 넣었다.[6] 그리고 캐롤을 보낸 뉴캐슬에선 볼튼 원더러스의 요한 엘만더를 찌르고 볼튼은 첼시에게 다니엘 스터리지를 임대, 이에 토트넘 홋스퍼 FC은 주세페 로시에게 35m이라는 거액의 비드를 넣었다. 기자의 반응은 The world's gone mad.
결국 리버풀은 트위터로 토레스가 떠났음을 밝혔다. 남은 것은 메디컬 테스트뿐이라고 한다. 이적료는 5,000만 파운드. 그리고 리버풀 팬들은 토레스의 유니폼을 태워버렸다. 리버풀은 이전에도 성골 중의 성골인 마이클 오언에게 통수를 맞았고, 반년 전에도 마스체라노의 태업으로 맨체스터 시티 FC 원정을 말아먹는 등 이미 겪어본 트라우마가 있었으며 이후 여러 기라성 같은 선수들에게 수 차례 통수를 맞지만, 유스 출신 성골도 아니고 3년 반밖에 안 뛴 토레스에게 배신당한 충격은 토레스가 은퇴한 지금까지도 리버풀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리버풀 팬들은 진심으로 토레스를 사랑했다.
리버풀 팬들이 토레스에게 느끼는 감정은 수많은 콥들의 희망에서 제라드의 소중한 동료에 이르기까지 매우 깊고 넓은 것이었고 훗날의 수아레스와 라힘 스털링은 뻑하면 징징대느라 언젠가는 떠날 놈이라는 인식이 모두에게 팽배해있었지만, 토레스에 대해서는 리버풀을 응원하는 그 누구도 2011년 1월 이전까지는 그렇게 떠날 거라 생각한 이가 없었다.
토레스가 처음 이적을 요구한 것은 2010년 여름이다. 즉, 저기 위에서 리버풀 머플러 걸고 사진 찍은 지 얼마 안 돼서 이적을 요구한 것이다. 첼시가 3,500만 파운드를 오퍼했고 챔피언스 리그에도 출전하지 못하는 리버풀의 상황때문에 토레스는 첼시로의 이적을 원했으나 보드진은 클럽의 미래가 걸려있다며 클럽에게 존경심을 보이라고 요구하며 투자를 약속하는 한편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 진출 실패시 5,000만 파운드의 바이아웃 조항을 설정해 재계약을 했다. 10-11 시즌 리버풀의 성적은 더욱 참담했고 첼시가 1월 이적 시장에서 다시 오퍼를 해 오자 토레스는 이적 요청서를 제출했다.
애초에 본인이 사랑하던 아틀레티코를 떠나 리버풀로 온 것도 우승 타이틀 때문이니 이해를 못 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이적 요구를 하는 한편 안 떠날 거라고 인터뷰로 장담했던 것이라 좀 이상한 모양새다. 게다가 리버풀에 있던 시절 여러 차례 인터뷰를 통해 리버풀에 대한 사랑을 표출하고 충성 맹세를 했기 때문에 토레스를 멘탈갑으로 생각하던 팬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적하면서, 그리고 완전 이적 후에 인터뷰로 리버풀에 문제가 많았다거나 자기는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는 폭탄 발언을 하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좋은 이미지마저도 스스로 깎아먹는 모습을 보였다.[7]
한편으로 2012년 9월 발간된 제라드의 두 번째 자서전에서 토레스가 제라드에게 이적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제라드가 몹시도 마음 아파했다는 이야기가 공개되었다. 케니 달글리시 당시 감독이 당시 왜 그리도 격분했는지 잘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토레스가 은퇴한 현 시점에서는 리버풀 팬들이 토레스를 그때만큼이나 미워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당시 리버풀의 상황이 토레스라는 슈퍼 스타를 데리고 갈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지도 않았고[8] 토레스가 기대하는 대우를 보드진이 충족시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팀을 떠나면서 5,000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팀에 안겨줬고 리버풀은 그 돈으로 앤디 캐롤과 루이스 수아레스를 영입했고 토레스는 커리어를 잘 쌓았기 때문에 윈윈한 셈이다. 물론 캐롤은 대폭망했지만 싸게 데려온 수아레스가 오히려 대성하며 리버풀의 클래스를 한 계단 올려주었다. 토레스 또한 은퇴 이후까지도 제라드와의 그 시절을 단 5분만이라도 돌아가고 싶다면서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리고 있기에 희석된 감이 있다.
이것은 당대 리버풀의 팬들이 토레스 개인의 얼빠에서 시작해 팬이 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의 기적을 비롯해 이전의 리버풀 팬들에게도 토레스는 아프면서 아름다운 기억이지만 토레스 개인의 팬에서 시작한 팬들에게는 그 시대를 대표하는 존재와도 같다.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토레스는 흔히 말하는 세계 최고의 선수는커녕 월드 클래스에 도달했냐는 질문에도 쉽게 긍정하기 어려운 선수임에도 힘들었던 리버풀의 슈퍼 스타이자 외모, 유니폼 등의 외적 요소까지 더해져 간지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해외 축구에 대한 특별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때 활약한 선수라 더 화려하게 기억된다. 때문에 각종 리버풀 팬 커뮤니티나 SNS, 팟캐스트, 칼럼 등지에서는 이 기억을 실연에 비유하면서 알론소와의 이별은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며 아름답게 후회없이 이별한 오랜 애인에 비유하지만 토레스와의 이별은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충동적으로 헤어져서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되고 안쓰럽고 그리워지는 첫사랑에 비유하곤 한다. 더욱이 리버풀 팬들은 토레스 이후로도 루이스 수아레스, 라힘 스털링, 필리페 쿠티뉴처럼 지독한 실연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리버풀을 떠날 때 이적 과정과 이후에 계속해서 나오는 인성 논란 등으로 토레스 개인을 싫어하는 팬들도 많다.
7. 총평
|
자타 공인 토레스의 황금기. 커리어 면에서가 아니라 토레스의 폼이 선수 생활 중에서 가장 뛰어났을 시기이다. 다만 아이러니한 점으론 토레스는 본인의 폼이 한창 전성기를 보내던 리버풀에서는 정작 메이저 대회 우승을 하지 못했고, 폼이 나락으로 빠져 먹튀 소리를 듣던 첼시에서는 반대로 우승 커리어의 절정기였다는 것이다.
[1]
이 사진은 레알 마드리드를 4-0으로 털어버리던
2008-09 챔스 16강 2차전 첫 골을 넣은 후의 셀레브레이션이다. 원정팬 응원석, 그러니까 레알 팬들이 바라보는 바로 앞에서 리버풀의 No.9로서의 위엄을 뽐낸 명장면이었으며, 이 해부터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한 토레스의 잔부상으로 인해 리버풀과의 조별 리그에서 친정 방문이 좌절된 것을 아쉬워했던 아틀레티코 팬들에게도 통쾌함을 선사했다.
[2]
하지만 리버풀은 토레스를 데려오기 위한 이적료를 마련하기 위해
크레이그 벨라미,
지브릴 시세,
마크 곤살레스,
루이스 가르시아, 플로랑 시나마퐁골 등 주전급 자원 여러 명을 이적시켜야 했고, 이는 팀의 스쿼드 두께가 얇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3]
이전 기록은 리버풀과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레전드
로저 헌트 경이 가지고 있던 기록이었다.(78경기)
[4]
특별히 강팀에 강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유독 첼시에게 강했다. EPL 데뷔 시즌에서도 첼시 전에서 상대 수비수
탈 벤 하임을 완벽하게 농락하며 멋진 골을 넣었고, 심지어 폼이 떨어질 대로 떨어져 있었던 10-11 시즌, 그러니까 첼시로 이적한 그 시즌 리버풀 소속일 때도 한창 부진하다가 첼시를 만나 2골을 넣으며 부활했다는 평가를 받았었다. 거기에 그 2골도 정말 멋진 골이었다.
[5]
야망 있는 선수들이 우승 커리어를 위해 이적하는 건 일반적인 일이지만,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이적을 위해 출전 거부하고 징징거린 것 때문에 까이는 것처럼 토레스도 이적 마감일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이적 신청하고 라이벌 팀으로 떠나 리버풀 팬들에게 비판받았다.
사비 알론소나
알바로 아르벨로아 같이 곱게 떠난 선수들은 단순히 이적했다고 해서 리버풀 팬덤에서 안 까인다.
[6]
다만, 아담은 이 시즌에 이적하지 않고 블랙풀이 강등당한 그 다음 시즌에 오게 된다.
[7]
리버풀 엠블럼에 키스하는 세레머니가 캡쳐 사진으로 나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오직 아틀레티코의 팬이기 때문에 리버풀 엠블럼에 키스한 적 없다고 밝히거나, 아틀레티코에서 뛸 때도 주장 완장에 YNWA을 써 놓은 리버풀 팬스러운 모습을 보였으면서 자신은 리버풀 팬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 때문에 그나마 토레스가 리버풀을 떠난 것을 이해한다고 했던 팬들까지도 많이 돌아섰다.
[8]
리버풀의 암흑기로 불리는 시기였다. 지금도 조롱이 되는 수많은 명짤들이 나오기도 했고 챔스는커녕 유로파에 겨우 진출할까 말까 할 수준이었다. 그만큼 좋지 않았던 시기라 당시 토레스가 가진 네임드에 비해 리버풀은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9]
엄밀히 따지면 알론소는 수비형 미드필더 임으로 오히려 위치상으로는 수비진이지 공격진이 아니지만 당시 리버풀에게 있어서는 공격을 전개하고 골을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기에 공격진의 일부로 볼 여지가 있다.
[10]
이전 기록은
네덜란드의
뤼트 판니스텔루이였으며, 나중에
이집트의
모하메드 살라에 의해 경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