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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20:11:50

펑밍민

<colbgcolor=#00A24A><colcolor=#ffffff> 彭明敏
펑밍민 | Peng Ming-min
한국식 독음 팽명민
출생일 1923년 8월 15일
출생지 일본령 타이완 타이중
사망일 2022년 4월 8일 (향년 98세)
사망지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도쿄제국대학 (법학 , 정치학 / 학사)
국립타이완대학 (법학 / 학사)
맥길 대학교 (법학 / 석사)
파리 대학교 (법학 / 박사)
소속정당
경력 국립타이완대학 정치학과 교수 (1957~1962)
국립타이완대학 정치학과 학과장 (1961~1962)
중화민국 총통부 선임고문 (2000~2008)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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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만의 법학자, 정치학자, 변호사, 정치인. 타이완 독립운동의 1세대 쯤 되는 위치에 있다.

2. 생애

대만일치시기 타이중에서 태어났다. 1942년에 도쿄제국대학에 합격해 법학을 수학하였으나, 1945년 소개령으로 인해 나가사키로 피난하던 도중 미군의 폭격을 맞아 왼쪽 팔을 잃었다. 나가사키에 머물면서 원폭 투하를 직접 눈으로 보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대만으로 귀환해 국립타이완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나, 2.28 사건을 겪었다. 그는 직접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의사인 아버지가 2.28 사건 시위대의 요구사항을 국민정부에 전달하는 2.28 사건 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탓에 사건이 유혈 진압으로 끝나자 아버지가 체포당하여 고초를 겪은 바 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자기가 아는 사람들 중 그 때 잡혀가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후 국립타이완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맥길대학교 법학 석사, 파리 대학교 법학 박사를 취득했다. 전공은 항공법. 그리고 1957년에 대만에 돌아와 국립타이완대학 교수를 했다. 그는 화려한 경력으로 장제스와 대만(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주목을 받아 UN 주재 중화민국 대사 고문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대만 정치계에서 대놓고 외성인이 우대되고 본성인이 차별당한 것을 고려할 때 본성인인 펑밍민의 대사 고문 발탁은 이례적이었다. 장제스는 대만 통치를 위해 본성인 협력자를 찾기 시작했고 그 일환으로 펑밍민을 눈여겨보아 그에게 국민당 입당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펑밍민은 거절하였다.

1964년 그는 정치적 동지들과 함께 대만자구운동선언(台灣自救運動宣言)을 저술했다. 그 내용은 대만 민주화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으로써, 장제스의 비현실적인 대륙 수복 노산을 비판하고 국민정부는 대만 인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대만에 국민정부가 유지되는 이유는 그저 미국이 국민정부를 지지하기 때문이며, 미국은 결국 힘의 논리에 따라 중국 공산당 정부로 기울 것이고, 정권 후계자이자 청년 시절 소련에 봉사한 장징궈가 고립에 절망하여 대만을 대륙에 팔아넘길 것이라고 주장했다.

선언 인쇄를 의뢰받은 인쇄소 주인은 국민당 독재가 공고한 그 시점에 국민당과 국민정부의 존재의의를 대놓고 부정하는 선언 내용을 보고 공포에 빠져 펑밍민을 경찰에 밀고했고, 이에 체포되어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미 국제적 명성이 높았던 덕에 국외의 압력이 들어와, 1968년에 석방되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그리고 앰네스티와 그의 스웨덴 친구의 도움으로 위조여권을 사용해 1970년에 홍콩으로 탈출했고, 스웨덴으로 가게 된다. 출처

그는 스웨덴을 거쳐 미국으로 향하고자 했다. 국민정부는 미국에 펑밍민의 입국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그애게 비자를 내줬고, 펑밍민은 미국 입국에 성공해 미시간 대학교 교수로 활동한다. 그러면서 그는 대만 민주화와 대만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만은 민주화되어갔고, 리덩후이 총통은 그 일환으로 정치범들을 대거 사면하였다. 이에 맞춰 펑밍민은 1992년에 대만으로 귀국하였고, 1995년에 민주진보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1996년에 치러진 첫 대만 총통 직접선거에서 민진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는 선거기간 동안 대만 독립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제3차 대만 해협 위기에서 중국의 군사 협박에 강경하게 맞선 리덩후이로 표가 몰리면서 54:21이라는 압도적 차이로 패배했다. 그의 패배 이후 강경한 대만 독립 노선을 견지하던 민진당은 좀 더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 점진적 독립으로 노선을 전환하게 된다.

2000년에 천수이볜이 총통에 취임하면서 그는 천수이볜 총통의 선임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그 뒤로는 정치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으나 마잉주 총통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같은 당이긴 하나 자신에 비해 훨씬 온건한 대만 독립 성향인 차이잉원의 정책 노선에도 반감을 나타내며 2020년 총통선거 재출마를 포기하라고 요구한 바 있다.

2022년 4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