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해군 장교들과 특수위안시설협회 여성들.
1. 개요
特 殊 慰 安 施 設 /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패전 후 일본에서 만들어진 일본 점령군 전용 매춘부(팡팡걸)가 있는 위안소를 가리키는 말. 줄여서 RAA라고 부르기도 한다.
2. 상세
당시 특수위안시설협회에서 일하던 여성들은 사실상 주일미군 전용 일본인 위안부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주일미군(용) 일본인 위안부'들을 양빵이라고도 불렀다. 당연하게도 일본인 상대의 일본인 매춘부는 이렇게 불리지 않았다. # 영어 명칭과 한자 이름이 꽤 차이가 많은데 이는 위안이라는 단어가 일본군에서 갖는 의미와 미군에서 갖는 의미가 서로 달라 미군에서 군 위안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의 '위문공연'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처음엔 미군도 그렇게 알았다가 그 실체를 알고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물론 처음에만 당황하고 얼마 안 가서 바로 애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동양에 대한 판타지가 어느 정도 있었기 때문에 성인용 포르노 시장에 일본 여성을 소재로 한 작품이 서부를 중심으로 많이 나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드디어 현실이 된 것이다! 당연히 일본군 군사용어에서의 위안은 매춘 그 자체를 가리킨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결(정확하게는 전투정지 발령)로부터 3일 후인 1945년 8월 18일 조만간 해산될 것임에도 아직 군정을 맡을 미군이 진주하지 않아 일본 제국의 본토를 다스리는 내무성이 도도부현청의 경찰부장(警察部長)과 현지사(縣知事)에게 포고문[1]을 전달하면서 점령군 대책의 일환으로서 위안시설의 설립을 준비할 것을 지시해 26일에 정식으로 발족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미군이 강요했다는 속설이 일부 나돌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국의 내무성이 자주적으로 만든 것을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받아들인 것이다.
일단 기본적인 발상은 전시 일본군 위안부와 같지만 약간 다르다.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위안부 모집처럼 중개업자를 통하지 않고 "일본 여성을 위한 방파제를 쌓자!"는 슬로건을 내세워서 아예 일반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본 정부가 공개 모집한 것이다. 즉, 건장하고 난폭한 미군의 성욕으로 연약한 동양 여성인 일본 여성들이 무차별적으로 강간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군의 성욕을 비교적 건전한(?) 방향으로 돌려 연약한 일본 여성들을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흔히들 알려진 것처럼 대놓고 성노예화 하는 것은 아니었고 엄격히 따지자면 호스티스로서 모집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는 미군이 대놓고 '윤락업소'를 만드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당초에는 전문적인 윤락여성 및 외국어 구사가 가능한 게이샤들을 대량 고용할 예정이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일본인 윤락녀가 위안부로 동원되어 충분한 숫자를 모을 수 없었다. 이에 특수위안시설협회는 협회 명의로 <신(新) 일본 여성[2]을 구함. 숙소, 의복, 식료 모두 지급> 같은 내용의 공고문을 도쿄 및 미군 진주가 예상되는 주요 도시의 번화가에 설치하는 한편 신문 광고를 내서 일반인 여성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 드러난 협잡질이 그대로 재현되었는데 채용 목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광고에 기재되지 않았고 이를 보고 온 여성의 상당수는 윤락업 및 접객업 종사 경험이 없었다. 그나마 대부분은 일의 내용을 듣고 취업을 포기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비해 그나마 자국민이라고 '강제 납치'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당장 생활력이 없는 전쟁 과부 입장에서는 마땅히 일자리를 얻을 수도 없었고 일본 사창문화 특성상 가족이 딸을 파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결국 1945년 9월 미군 진주를 전후해서 1,300명 남짓한 인원이 협회의 '접대부'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이들은 9월 미군 진주 이후 1946년 1월까지 약 4개월간 미군 장병들을 상대로 영업, 즉 접대 및 매춘에 나섰다.
1946년 1월 21일 전직 퍼스트레이디이자 인권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던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이 이야기를 듣고 격분했다.
사실 이런 업소들은 미군이 주둔한 곳이라면 전세계 어디든지 있었지만 패전국 정부 차원에서 미리 시설을 만들어 미군을 대접한 것은 일본이 유일했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가 이 문제에 격분한 것은 본인이 여성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던 인물인 것과 더불어 이렇게 정부 차원에서 윤락업소를 운영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탓이 컸다. 여기에 특수위안시설협회 소속의 접대부들 상당수가 일반인이어서 성 지식이 부족한 데다 공창 또는 사창처럼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 2차 중심의 업소여서 성병이 만연한 것도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 점령군 사령부에 의해서 '특수위안시설협회'는 폐지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더 터졌다. 정부에서 모집한 주제에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해산되면서 일자리를 잃은 여성 대다수는 배운 게 이것뿐이라고 결국 기존의 특수위안시설협회 위안소 근처 술집과 업소들에 다시 취업해 다시금 주일미군 장병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웃기는 얘기지만 이때가 차라리 더 대우가 좋았다고 한다. 협회에 속해 있을 때는 상대 미군에게 개인적으로 받는 팁도 협회에 모두 바쳐야만 했지만 오히려 사창에 들어가고 나서는 그게 다 개인 소득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 특수위안시설협회 소속 접대부들이 현대 일본 호스티스의 원조다.
또 이 일과 관련해서 미군은 결국 1947년 1월 15일 일본 정부에 압력을 넣어 포츠담명령[3] 중 칙령 제9호 <부녀에게 매음을 시킨 자 등의 처벌에 대한 칙령>이라는 명령을 자그마치 일본 천황의 이름으로 내리게 만들었다.
이는 성 구매자는 처벌하지 않으면서 성 판매자와 포주를 동시에 처벌하는 현대 일본 사창 금지 및 인신매매 금지법의 배경이다. 어느 나라건 윤락업 종사 여성은 인신매매를 당한 것으로 간주할 여지가 많은데 일본에서는 이것이 1870년대부터 수 차례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금지되었음에도 항상 유명무실화되었고 심지어 법령으로 해외 진출까지 금지하는 판에도 버젓이 해외 진출, 일본의 주된 외화 수입원이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칙령 제9호 이후로 최소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는 이전까지의 인신매매 금지령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이후 이 빵빵걸들은 1946년에는 전국에서 7만에서 8만명, 6.25 전쟁이 격화된 1952년에는 10만명 가까이가 있었다고 여겨지며 1956년(쇼와 31년)의 '매춘 방지법' 시행 이후에는 격감했지만 베트남 전쟁이 격화한 1960년대 후반에도 미군 기지 주변에는 항상 존재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빵빵걸'들은 전후 일본의 외화벌이에 큰 도움이 되었었는데 일본의 1952년 획득 외화 중 무려 1.5억 달러가 이들 빵빵걸들의 주일미군 상대 매춘으로 인한 '외화벌이'였던 걸로 추정될 만큼 이 '빵빵걸'들로 인한 외화벌이는 당시 일본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즉, 당초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소속 점령군 장병들의 성범죄를 막기 위한 일명 「육체의 방파제」란 처음의 목적과는 다르게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의 외화벌이'로 그 설립 목적이 완전히 변질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출처
3. 여담
전후 사회파 추리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린 마쓰모토 세이초가 조선의 전라북도 정읍에서 패전을 맞이할 때 "일본 주둔군 당국이 미군 진주군을 위해, 일본 거류민 중에서 부녀자들을 뽑아서 '이런 조직'을 만들려고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물론 정읍에 무장 해제차 들어온 미군들은 '이런 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정신대 실록 <분노의 벽>을 집필한 허문순은 자신의 작품의 후속작으로 바로 이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다루려고 했다.
대망의 원작자 야마오카 소하치가 이런 '특수위안시설협회'를 긍정하는 글을 쓴 바 있다. 60~70년대 주한미군을 접대하는 한국의 양공주를 관리하면서 한국 정부의 높으신 분들은 일본의 이 특수위안시설협회를 긍정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었다.
일본의 핑크무비 <육체의 문>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잘 그려내고 있다. 위에 나온 마츠모토 세이초의 소설인 '제로의 초점'(한국 정발명: 제로 포커스)에서도 RAA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작품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
미즈류 케이는 함대 컬렉션 설정을 차용해서 '특수위안시설협회'를 배경으로 한 동인지를 그린 전적이 있다.
4. 번외편( 가라유키상)
특수위안시설협회와 형태는 다르지만 똑같이 일본 여성들을 성적인 목적으로 이용했던 과거가 일본에는 이미 있었다. 바로 외화벌이 용도로 일본인 여성들을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해외에 성매매 여성으로 대거 보냈을 때 그들을 가리키던 단어 가라유키상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이들을 낭자군(娘子軍)이라고 칭송하였는데 서구 열강에 막 나라의 문을 열었을 때 일본은 해외에 수출을 할 상품이 제대로 없다 보니 가라유키상을 해외로 보내고 그녀들이 매춘으로 버는 수익을 정부 재정에 쓰려고 했기 때문에 가라유키상을 무려 애국자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심지어 근대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인 후쿠자와 유키치도 "매춘부의 해외 수출은 적극 장려해야 하며, 막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만큼 가라유키상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가라유키상이 가장 많았던 1910년 무렵 일본 전체 수출 금액의 10%가 가라유키상들이 해외로 나가 매춘을 해서 벌어들여 일본 본국에 송금하는 돈이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4] 이들은 해외에서 정보수집 등의 활동도 함께 수행하였다고 한다.[5] 링크1, 링크2, 링크3, 링크4, 링크5
5. 관련 문서
[1]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서의 위안시설 설치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
[2]
신여성, 즉 당시의 자유연애론자 여성을 가리킨다. 이런 조건이 붙은 데는 '신여성'을 '성적으로 방탕하다'고 여긴 당시 일본 군부 및
일본 정부 사람들의 편향된 의식이 작용했다.
[3]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라 미군의 명령을 받아
일본 정부가 내리는 행정명령.
[4]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해외로 나간
가라유키상들의 수는 대략 30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일설에 의하면 이렇게 가라유키상들이 매춘을 통해 벌어오는 수익으로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치를 전비를 마련했다고도 한다.(…)
[5]
Jamie Bisher (2006). White Terror: Cossack Warlords of the Trans-Siberian. Routledge. p. 59. ISBN 978-1135765958. Retrieved May 17,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