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토론토의 역사는
17세기부터 시작되지만, 사실 이전부터 토론토를 비롯한 온타리오 남부 지역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의 지명인 토론토 역시
아메리카 원주민 토착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유력한 어원은
이로쿼이 연맹의
모호크 족 어휘 '트카론토(Tkaronto)'이다. 트카론토는 '물 속에 서 있는 나무'(Trees standing in the water)라는 뜻으로, 오늘날 토론토 북부의 쿠치칭 호(Lake Couchiching)와 심코 호(Lake Simcoe) 사이의 좁은 물길을 부르는 단어였다. 일각에서는 휴런 족(Huron)의 단어인 '토론톤(Toronton),' 곧 '만남의 장소'가 토론토의 어원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수 세기 동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정착지였던 토론토 일대는, 프랑스인 탐험가 에틴 브룰리(Etienne Brule)가 지금의 토론토 땅에 발을 딛으며 외부인들에게 알려진다. 브룰리는
퀘벡의 개척자였던 사무엘 드 샹플랭(Samuel De Champlain)의 지시로
1615년 배를 타고
오대호 일대를 돌아보던 중 우연히 토론토 지역을 밟게 되고, 당시 원주민들이 지역을 부르던 이름인 '트카론토'를 자신의 일지에 기록한다.[1] 브룰리의 방문 이후
이로쿼이 원주민들에 의해 마을 몇 개가 더 세워지지만,
1701년 앨곤퀸 족(Algonquin)의 일부인 애니쉬나비 족(Anishinaabe) 사람들이 토론토 일대를 침략하며 이로쿼이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빼앗는다.
한편 토론토의 존재를 알게 된
프랑스는
1750년 상인들을 통해 루이 요새(Fort Rouillé)라는 이름의 모피 교역소를 세우지만, 얼마 가지 않아
7년 전쟁이 터지며 파괴된다. 7년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결국 토론토 일대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기 영국에게 할양된
퀘벡 주와 함께 영국령 캐나다의 일부가 된다. 영국인들은 당시 토착민들이었던 애니쉬나비 족과 협상을 통해 토론토 일대의 영토를 가져왔으며, 항상 그래왔듯이 지역에 '요크'(York)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요크는 미국에서 쫓기듯 도망쳐 온 10만 명의 영국계 충성파(Loyalists)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고,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기 시작한다.
1793년 영국령 캐나다 총독 존 심코(John Simcoe)는
미영전쟁의 전운을 감지하고, 행정 기능을 보호하기 위해 캐나다의 수도를 본래의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 on the Lake)에서 요크로 옮긴다. 곧이어 발발한 미영전쟁은 요크마저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지만, 머지않아 토론토 주교였던 존 스트라찬(John Strachan)이
미군과 협상에 성공하며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1834년 캐나다는 요크의 이름을 원주민들의 언어에서 따 온 토론토(Toronto)로 바꾸었으며,
영국계,
아일랜드계[2],
아프리카계[3]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867년에 캐나다 연방이 성립되며 정식으로 수도를 지정할 필요가 생겼고, 당연히 그때까지 영국령 캐나다의 수도였던 토론토가 유력 후보에 오른다. 당시 수도 선정 과정에서
프랑스계
인구가 많이 사는
몬트리올과
영국계
인구가 많이 사는 토론토[4]가 옥신각신했지만, 연방정부는 국가 균형 발전을 위해 중간에 위치한 마을 하나에 깃발을 꽂고 수도라고 선언해버린다. 새 수도는 인구 2만이 채 될까말까 한 작은 마을이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예산을 들이부으며
심시티를 벌인 덕에 금세 버젓한 도시가 되었다. 이게 지금의
오타와다.[5] 나름
지못미 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영-불 갈등 이외에도 오타와 강의 상류 깊숙한 곳에 위치한
오타와가 미국의 공격에 대한 방어에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빅토리아 여왕의 전략적 판단도 한 몫을 했다.[6]
<colbgcolor=#1c4595> 1858년 토론토 유니언 역의 승강장
산업혁명이 불러온 산업화의 바람은 온타리오 호와 맞닿아 수운에 유리했던 토론토를 공업 도시로 발전시켰고, 19세기 후반 개정된 이민법과 함께 토론토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에
1825년 완공된 이리 운하(Erie Canal)와
1858년 그랜드 트렁크 레일웨이(Grand Trunk Railway) 및 노던 레일웨이 오브 캐나다(Northern Railway of Canada)의 합작으로 지어진
유니언 역은 번성하던 토론토에
날개를 달아준다.
운하와
철도는 이주민들과 물자가 토론토로 유입되는 속도를 훨씬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20세기 초 토론토는 이미
독일,
프랑스 등 서유럽계 이주민들과
러시아,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 이주민들, 거기에
동유럽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과
태평양을 건너 온
중국인들까지, 그야말로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이민자들로 북적이는 다문화 도시가 되었으며,
몬트리올에 이어 캐나다 제2의 도시로 부상한다. 당시 성장세가 어느 정도였냐면,
1834년 1만명이 채 되지 못했던 인구가 100년만에 100만명을 찍었을 정도.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토론토도 성장 과정에서 인근 행정구역을 흡수한다. 그중에서도
1998년의 행정구역 대개편이 가장 유명하다. 당시 토론토는 광역 토론토(Metropolitan Toronto)라는 이름 아래 5개의 다른 도시와 같은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토론토를 포함한 6개 도시 모두 사실상 한 도시처럼 기능했지만, 법적인 행정구역이 분리된 상태였기에 주요 행정 업무가 파편화되어 불필요한 예산 소모가 너무 많았다. 보다 못한
온타리오 주지사 마이크 해리스(Mike Harris)에 의해 행정구역 개편안이 제시되었고,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7] 광역 토론토 하위 행정구역을 하나의 도시로 통합한다. 당시 토론토로 편입된 도시는 이토비코(Etobicoke), 요크(York), 노스 요크(North York), 이스트 요크(East York) 그리고 스카버러(Scarborough)로, 편입 이후 토론토의 구(區)로 전환된다.
무시무시한 팽창에도 한동안
몬트리올에 밀려
콩라인을 벗어나지 못하던 토론토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자인
몬트리올의 자멸과 함께 캐나다의 종주도시가 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토론토행 이민자들의 수를 늘려 줄 뿐이었고, 전후 호황과 함께 토론토 및 캐나다의 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거기에
20세기 중후반 몬트리올이 온갖 삽질을 반복하며[8] 침체기에 접어들자
어부지리 격으로 역전에 성공해 마침내 캐나다 내 최대 도시 자리에 올라섰다. 이후 꾸준히 성장을 거듭한 결과 1990년대 이후로는 이견 없는 캐나다의 얼굴로 변신했다.
[1]
브룰리 일행은 트카론토를 'Lac Taronto'로 기록했었고, 이걸 영어로 음차하면서 'Lake Toronto'로 바뀌게 되었다.
[2]
동시기
아일랜드 대기근이 찾아오며 고향 땅을 떠나 북아메리카로 향한 아일랜드인들이 정말 많았다.
[3]
대부분 노예 출신이었으며, 영국계 충성파들도 드물게 찾아볼 수 있었다.
[4]
프랑스어 사용자는 토론토 인구의 1.5%에 불과하다. 참고로 몬트리올의 영어 사용 인구는 18.5%
[5]
시드니와
멜버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캔버라를 세운
호주과도 유사하다. 아니
캔버라가
오타와를 본받았다고 보아야 할 듯.
[6]
미국 독립전쟁과 영미전쟁 당시
토론토와
몬트리올이 공격받은 경험도 있었고, 사실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캐나다의
주적은 다름아닌
미국이었다. 심지어 캐나다군의 작계상에서는
영일동맹을 근거로 일본-캐나다-호주-영국이 미국을 상대로
세계대전을 벌이는 시나리오가 엄연히 존재했다. 이건
미군도 마찬가지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캐나다 침공 계획이 폐기되지 않았다고 한다.
[7]
당시 주민 투표 결과 찬:반 비율이 거의 1:3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캐나다 정치 구조상 주민 투표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고, 해리스는 반대 세력을 무시한 채(...) 통합을 강행한다.
[8]
캐나다 그 자체라고 불리던 몬트리올은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의 실패, 그보다 좀 이전인 1960년대
영어 금지령 이후 대다수 대기업들의 탈출 등 연달아 자살골을 넣은 이후 토론토에 밀려나 버렸다. 심지어는 몬트리올 은행(BMO, Bank of Montreal)의 본사마저 법적으로만 몬트리올에 있을뿐 사실상 토론토로 이전한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