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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전(大仏殿, 다이부쓰덴) | 도다이지 대불. 청동 불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
영어 | Historic Monuments of Ancient Nara | |
일본어 | 古都奈良の文化財 | |
프랑스어 | Monuments historiques de l'ancienne Nara | |
국가·위치 | 일본 나라현 나라시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8년 | |
등재기준 | (ii)[1], (iii)[2], (iv)[3], (vi)[4] | |
지정번호 | 870 |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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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東, ruby=とう)][ruby(大, ruby=だい)][ruby(寺, ruby=じ)] / Tōdai-ji / 동대사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사찰이며, 일본 화엄종(華厳宗)의 대본산이다.
일본의 호국불교를 상징한다.[5] 한국에서는 '동대사'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일본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대불전(大仏殿/다이부쓰덴)과 최대의 청동 불상, 그리고 거대한 정문인 남대문(南大門/난다이몬)으로 이루어진다.[6] 그 밖에 자체 박물관과 대불전 뒤편과 동서편으로 이월당, 삼월당, 계단당 등 여러가지 부속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들도 대부분 국보나 중요문화재이고 일부는 특별한 기간이 아니면 공개하지 않는 곳이 있다. 크기에서 비견될 만한 건물로는 교토 히가시혼간지에 있는 고에이도가 있다.
1709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대불전을 재건한 뒤 약 200년 간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스페인의 메트로폴 파라솔(Metropol Parasol) #, 미국의 틸라묵 항공 박물관(Tillamook Air Museum) #, 노르웨이의 미에스토르네(Mjøstårnet) 빌딩 # 등 과거의 건축 기술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법당으로서는 대불전이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이다.[7] 8세기 도다이지 낙성식은 일본 승려들은 물론이고 신라, 발해, 당나라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온 승려들 뿐만 아니라 인도, 베트남 등 동남아 지역의 승려들까지 참석할 정도로 유명한 국제적인 행사였다.
나라현 공식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동대사 건축에 신라 출신 목수가 총감독을, 거대불상은 백제 출신이 디자인했다고 하며, 사자 석상의 경우 송나라 출신이 작업했다고 한다. 1300년전 바다를 건너온 문화는 일본 각 지역으로 퍼졌다.
2. 역사
창건 당시를 재현한 모형과 현재의 모습(아래)
도다이지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되었다는 긴쇼지(金鐘寺, 금종사)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크기로 유명한 대불전은 758년에 준공되었다. 최초로 세워진 대불전과 청동대불은 한국계 도래인[8]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기사
본래 도다이지는 쇼무 덴노가 구니(國)[9]마다 세운 고쿠분지(國分寺, 국분사)[10]의 수장으로 덴노 일족의 보살계를 수계하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고쿠분지로서의 위상을 잃고 기능이 축소되었다.
원래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의 양식이었으나[11] 후에 2개의 거대한 목탑 등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현재는 대불전과 이월당과 삼월당, 그리고 남대문 일대가 도다이지 경내이다. 과거의 위상은 다이부쓰덴 안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도다이지 모형에서 약간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대불전은 화재를 두 번 입어 파괴되었다. 첫 번째 화재는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1년 헤이시 정권이 난토(南都)의 승병들을 추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승병 진압을 띠고 난토로 파견된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1157 - 1185)가 한밤중에 기습을 앞두고 "불을 밝히라(횃불을 가져오라)"고 한 것을 부하가 "전부 불태워라"로 잘못 알아듣고 절에 불을 놓은 것이 그만 온 경내로 옮겨붙어 절이 통째로 불타 버렸다고 한다. 하필 불을 놓은 때가 음력 12월 겨울로 한창 건조할 때였으니 활활 타기 좋은 때였다. 화재가 있고 석 달 만에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했고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망한 뒤에 시게히라도 겐지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난토로 호송, 분노한 승병들에게 처형되었다. 두 번째 화재는 예전에는 센고쿠 시대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1567년에 일어났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미요시측의 키리시탄에 의한 방화라 말하고 있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실화에 의한 불이 도다이지 주위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대불전도 이 화재에 불타버렸다고 추측되고 있어 히사히데의 직접범행을 증명해주는 증거는 희박하다.화재 2번 모두 승병뿐 아니라 당시 다이부쓰덴 안으로 몰려든 승려와 피난민들도 2천여 명에 달했는데,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이들 모두 목숨을 잃었고 내부에 안치된 대불 또한 녹았다. 현재의 대불전은 1709년에 재건된 세 번째 금당이다.
현재의 대불전은 헤이안 시대의 정면 길이인 11칸에서 7칸으로 축소된 것으로, 재정이 부족한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때 대불전 가운데에 가라하후(唐破風)라는 반곡선 지붕을 만들어 헤이안 시대의 직선미가 훼손되었다.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면 57.01 m, 측면 50.48 m, 높이 48.74 m에 달한다.[12]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번째 도다이지 대불전을 본떠서 약간 더 큰 호코지(方広寺)[13] 대불전을 건립하였고, 이는 1592년에 이른바 '게이초 후시미 지진(慶長伏見地震)'으로 붕괴되었다. 불상도 가슴이 무너지고 왼손이 떨어지며 온몸에 금이 가는 대피해를 입었고, 히데요시가 "나라 지키라고 만들었더니 네 몸도 하나 못 지키느냐?"라고 외치며 불상의 미간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는 야사가[14] 있다. 이후 1610년에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재건하였으나, 1662년에 역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남대문과 대불전의 건축 양식은 <대불양식(다이부쓰요)>으로, 각 시대마다 형태와 구조가 좀 다르며, 일본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시도된 양식이다. 기본적으로 복잡한 구조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양식으로, 건물을 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량식 구조지만,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수많은 보와 포로 겹겹이 연결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심지어 후대에 건립된 대불전은 일반적인 동양 전통 건축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보를 대각선으로 설치하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15][16] 대불양식은 8세기에 지어진 도다이지가 불타 사라지고 다시 지은 12-13세기에 나타난 양식으로, 처음 지어졌을 때의 양식과는 다소 다르다.[17] 첫 번째 재건 당시 지어져 지금까지 남은 남대문과, 한 번 더 불타 사라지고 에도 시대에 2번째로 재건된 다이부츠덴 역시 이 양식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의 대불전은 1709년에 창건 이래 세 번째로 재건된 것이다. 이 세 번째 대불전은 과거의 대불전에 비해 크기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천 톤에 달하는 기와의 무게 때문에 지붕의 처마가 조금씩 계속 처져가면서 처마의 라인이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진다.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가 끝났지만, 그래도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다. 대불전 정도의 커다란 목조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가진 목수가 그 시대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도 실패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사진은 1904~1913년 사이 1차 복구가 끝난 뒤에 찍힌 사진이다. 그런데 버팀목을 바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전부 휘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였다. 결국 메이지 유신 이후 완전히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재정적 문제도 있었고 사진과 같이 버팀목을 바쳐놓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현대의 대불전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1974~1980년대에 재건 됐다.
해체 수리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많은 근대식 건축 재료와 공법이 사용되었다. 철골 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졌던 기둥들을 나무 여러 개를 합쳐 철물로 묶은 기둥으로 교체하여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기와의 수를 줄여 지붕의 무게를 12% 감소시켰다.
이에 몇몇 사람들은 그냥 현대에 잘 개조된 현대 건축물로 보기도 하나 유용한 신기술이 들어왔는데도 써먹지 않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기도 하고 고딕 성당처럼 지어진 지 수백 년이 넘은 건축물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리·개축 과정을 거치며 해당 시기의 유행 및 기술의 영향을 받았다.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2.1. 대불전 안의 볼거리
대불전 안에는 높이 14.9 8m에 무게 452 t인 청동 비로자나불이 있다. 청동 대불 역시 여러 번 화재 등으로 부분이 녹거나 파괴되어 다시 제작되었지만, 상당한 크기기 때문에 일부분은 남아 이어져 왔다.현재의 대불은 1691년에 완성된 것으로,[18] 불상의 하부는 처음 만들어졌던 부분이 남아있다고 한다. 특히 불상이 앉은 연꽃 대좌에는 창건 당시 법화경의 내용을 새긴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거대한 손바닥에는 성인 16명이 올라갈 정도라고 한다.
그 외에도 대불의 좌우에 허공장보살과 여의륜관음을, 대불 뒷편으로는 광목천왕상과 다문천왕상을 모셨다. 남대문에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만들어진 금강역사 입상이 2좌가 있다. 또 대불전의 명물로 구멍이 뚫린 기둥이 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1년치 액땜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다들 시도해보지만. 아이나 몸이 작은 여자가 아니면 힘들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약간 과체중의 성인 남성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조금 뚱뚱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짓말처럼 쑤욱 까진 아니고 조금 힘들게나마 빠져나오긴 한다. 보통 체격의 성인이 들어가면 들어가면서 다리가 움직일 여유의 공간이 사라지면서 팔 힘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따라서 팔 힘이 보통 이하라면 상대방이 반대편에 서서 팔을 당겨줘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다. 들어가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오기에는 체력이 받쳐 주지 않고서는 힘들다. 유튜브에서도 보면 반은 상대방이 반대편에 서서 팔을 당겨줘서 나온다. 참고로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대불전 앞마당에는 청동 등이 하나 서 있는데, 대개 모르고 지나가지만 국보다. 도다이지에서 몇 안 되는 나라 시대 창건 당시의 유물이다. 조각이 아름답고 글씨도 새겨져 있으니 유심히 보고 가자. 그 밖에 중문, 좌우 회랑, 대불전 좌우의 불상 모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 정창원
자세한 내용은 정창원 문서 참고하십시오.일본 황실의 보물 창고다.
4. 그 외
대불전 동쪽으로 올라가면 이월당(二月堂, 니가쓰도)와 삼월당(三月堂, 산가쓰도)가 나온다. 이월당은 대불의 개안공양이 이루어진 752년부터 창건되었고, 십일면관음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데 이 불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비불이다. 법화당(法華堂, 홋케도)이라고도 불리는 삼월당은 도다이지의 전신가람인 긴쇼지의 견색당(羂索院)으로, 불공견색관음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그 외에도 범천, 제석천 등 16개에 달하는 불상을 모시고 있었는데, 일부는 도다이지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옮겨졌다가 2014년에 공사가 완료되어 다시 삼월당으로 옮겨졌다.도다이지를 잘 모르는 방문자들은 대불전만 보고 나가버리는데, 이월당과 삼월당도 중요한 건물이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므로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특히 이월당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도다이지와 나라 시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전망대이기도 하다.
대불전 입장료는 600엔. 남대문 안에 있는 박물관과 통합 입장료는 1000엔. 박물관만 관람하려면 600엔. 이월당에 올라가 볼 수 있으며 따로 입장료는 없다. 삼월당은 2013년까지 공사중이어서 폐쇄되어 있었으나, 2014년 공사가 완료되었고 내부에 들어가 불상을 보려면 500엔을 내야 한다. 그 밖에 승려들이 계(戒)를 받던 계단원(戒壇院)도 따로 5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사천왕상이 있으나, 건물 자체는 별로 큰 가치가 없으므로 불상에 관심 있는 사람만 들어가 보자.
그리고 남대문 밖은 나라 공원으로 꽃사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사람을 그리 경계하지도 않아서, 만져도 그리 싫어하지도 않고, 심지어 몇몇 사슴들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하고 먹을 것을 받아가는 진기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한다. # 이 사슴들에게 줄 수 있는 센베를 파는 곳도 많은데 10개 정도를 200엔 내외에 구입할 수 있는데,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면서 한없이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쳐다보던 사슴들이 사람 뜯어먹는 몬스터로 변하는 지옥도를 체험할 수 있다.[19]
정말 신기하게도, 사슴 센베를 팔고 있는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다가 관광객이 센베를 사는 순간 주변에 있던 사슴들이 센베를 노리고 달려든다. 사슴들은 모여드는 속도가 빠르고, 빨리 안주면 사슴들이 화가 나서 뒤에서 뿔로 들이 받거나, 심지어 남성들한테는 바지를 깨물고 내려버린다. 그러므로 사슴들에게 센베를 주고 싶다면 바로바로 나눠주는것이 봉변을 당할 확률이 적다. 여름철에 뿔이 돋은 사슴이 삐져서 들이받으면 상당히 아프므로 적당히 알아서 도망치자. 사슴들이 많은 만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길 곳곳에 지뢰가 떨어져 있으니 신발에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알아서 잘 피해 걸어다녀야 한다. 수시로 치우고는 있으나 사슴의 수가 워낙 많아서 어쩔수가 없다. 당연한 소리지만 이로 인한 악취도 만만치 않다.
근처에 나라역과 킨테츠나라역이 있다. 거리상으로는 킨테츠나라역 쪽이 더 가깝다. 나라역을 이용할 경우 거리도 약 2.7 km로 제법 멀고 가는길에 오르막길이 조금 있어서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충분하거나 금전에 쪼들리는 상황이 아니라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요금은 약 1천 엔 정도. 킨테츠나라역을 이용할 경우엔 거리가 약 1.6 km 정도로 더 가까워 도보로 가는것도 가능하다. 이쪽은 택시를 이용할 경우 기본요금인 680엔이면 갈 수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일본의 불가사의로 나왔다.
2017년 8월 8일, 도다이지 법화당 쪽에서 한글 낙서가 발견되어 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도다이지 화당에 낙서 한글 같은 문자 현경 수사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시리즈 봉황편의 주무대로 나온다. 다만 여기서는 도다이지 불상과 절을 만들기 위해서 권력자들과 승려들이 백성들을 수탈하고 권력의 수단으로 변질된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5. 관련 문서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5]
한국은
백제의
미륵사와
정림사,
통일신라의
불국사와
석굴암,
발해의 영광탑이 호국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그리고
중국은
북위 시대에 만든
윈강석굴,
룽먼석굴이 호국불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6]
여기 있는 난다이몬이 일본 건축물들과 비교하면 자못 다른 느낌이 있는데, 이는 현재 남아 있는 도다이지의 건물 중 유일하게 중국
송나라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유일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전체가 송나라 양식을 본떠 만든 건물이었지만, 목조건물이다 보니 전쟁과 화재로 전소되어 남대문만 남았다.
[7]
참고로 세계 최대의 석굴 법당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의령군의 일붕사 법당이다.
[8]
주로 백제계 도래인들. 쇼무 천황의 명으로 도다이지 대불을 조영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재력을 시주받는 역할인 권진(勸進)으로 임명된 사람이 백제계 도래인으로
왕인의 후손을 자처한 교기(行基) 스님이었고, 도다이지 불상에 입힐
금을 처음으로 일본 땅에서 찾아내고 조정에 바친 사람은 당시 무츠노카미(陸奥守)를 맡던 구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百濟王慶福)와 그이가 거느린 백제계 주금 장인들이었다(그때까지 일본은 금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가 금을 발견한 것은 일본 최초의 금 발견이기도 하다).
[9]
한자는 '나라 국'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행정구역 단위로도 사용했다.
[10]
야마토 왕권 초기에
불교의 힘을 빌어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국립 사찰들
[11]
한국도 비슷한
통일신라 시기에는
사천왕사나
불국사 등 2탑식이 유행하였다.
[12]
높이가 46.4 m라는 자료도 있는데, 아마도
메이지 유신 이전에 치미(지붕 제일 위의 양 끝에 붙어 있는 큰 기와)가 낮았을 때의 높이로 추정된다. 예전 사진을 보면 지금 대불전의 치미가 금색의 높은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13]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이른바 '호코지 종명 사건'의 무대가 맞다.
[14]
야사는 아니고 당시 구교들의 일기 및 예수회 선교사의 편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거기서는 그냥 불상을 산산이 부숴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15]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이따금 볼 수 있는 방법. 애초에 도다이지 재건을 발원한 인물이
송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던 조겐(重源)이라는 승려로, 조겐이 중국에서 초청해온 진화경(陳和卿)이라는 장인이 대불전 건립과 대불 복원에 크게 일조했다고 한다.
[16]
여담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무사시보 벤케이의 일화로 유명한 권진장(勧進帳)이 이때 도다이지 중건을 목적으로 시주를 하러 다니는 권진(勧進) 일행으로 위장해 히라이즈미로 도망 중이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
[17]
이는 대불전 내부에 전시된 헤이안 시대 도다이지 가람과 그 이후 2차례 재건된 대불전 모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18]
다만 몸과 손 등의 제작시기가 다르며, 1691년에 완성된 것은 머리 부분이 다시 제작되어 나머지 부분과 합쳐진 시기이다.
[19]
실제로 음식이 아닌 것도 주면 먹는다. 그래서 관광객이 주는 휴지 등을 먹거나 해서 병들어 죽는 사슴들이 꽤 있다고. 사실 안 줘도 종이류가 눈에 보이면 먹으려고 먼저 달려드는데, 예를 들면
자전거 바구니에 있는 나라 관광지도 같은 것도 빼앗아 먹는다. 참고로 이 사슴들은
지폐도 보이면 먹으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