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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 칼리지 런던/역사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킹스 칼리지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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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1800년대2.2. 1900년대2.3. 2000년대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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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킹스 칼리지 런던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상세

2.1. 1800년대

파일:The Dual Day - Battersea Fields 결투_1829년.png
파일:800px-King's_College,_Strand,_London._Engraving_by_J._C._Carter._Wellcome_V0013842.jpg
파일:King's College Hospital in Portugal Street_1839년_Coloured.png
파일:King's College London Prize-Giving Day_1841년.png
<rowcolor=black,white> 배터시 필드 결투(1829)[1] 킹스 빌딩(1831) 킹스 칼리지 병원(1839) 교내 시상식(1841)
파일:Opening of the King George III Museum, King's College London, by Albert, Prince Consort on 1 July 1843.png
파일:제임스 클러크 맥스웰_킹스 칼리지 런던에서_1861년.png
파일:플로렌스 나이팅게일_제자들과 함께_1886년.jpg
파일:조지프 리스터_킹스 칼리지 병원에서_1890년.png
<rowcolor=black,white> 킹 조지 3세 박물관
개관식(1843)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KCL에서(1861)
나이팅게일과 제자들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1886)
조지프 리스터
킹스 칼리지 병원에서(1890)
파일:KCL_조지 4세의 왕실 헌장.png
파일:킹스 칼리지 런던 왕실 헌장.jpg
조지 4세의 왕실 헌장(1829)
파일:Portrait photograph of Charles Wheatstone [1870].jpg
KCL 재직 당시의
찰스 휘트스톤(1870)

1826년 개신교도와 유대인들에 의한 공리주의 및 세속주의에 근간을 둔 런던 대학교[2](London University)의 설립 과정에서 불거진 신학적 갈등이 KCL의 설립 배경이다. 이 갈등으로 인해 런던 대학교대응격의 정체성을 가진 고등교육기관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나라의 수도인 런던에 설립되는 최초의 대학이 국교인 성공회를 기반으로 설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당시 왕족과 성공회 교도들의 심기를 거슬렸던 것이다. 이에 1829년 8월 14일, 당시 국왕이었던 조지 4세가 수여한 왕실 헌장(Royal Charter)에 따라 당시 총리였던 웰링턴 공작 아서 웰즐리의 주도로 성공회를 신학적 기반으로 하는 대학이 설립되었다.[3] 대학의 이름은 설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조지 4세의 후원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킹스 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이라 명명되었다. 설립 후 2년 뒤인 1831년, 킹스 빌딩(King's Building)의 건축이 완료되었고, 동년 10월 8일 성직자 윌리엄 오터(William Otter)를 첫 이사(Principal & President)로 선임하며 공식적인 첫 수업을 시작하였다.[4]

KCL 정식 설립까지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1829년 3월 21일에 벌어진 배터시 필드 결투(The Duel in Battersea Fields)가 바로 그것이다.[5] 당시 영국 총리였던 아서 웰즐리는 성공회 주도의 KCL 설립과 로마 가톨릭 구호법(Roman Catholic Relief Act 1829)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구호법은 그 당시 윈칠시 백작과 그 지지자들[6]의 강력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는데, 왜냐하면 영국내 가톨릭 신자들에게 아무런 제제없이 거의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게 하는 법이었다. 윈칠시 백작과 그의 지지자들은 KCL 옥스퍼드 대학교처럼 성공회 교도만 교육받을 수 있는 대학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7] 그들은 아서 웰즐리가 로마 가톨릭 구호법을 포기하지 않으면 KCL 설립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성공회 중심의 설립은 찬성 하지만 Test Act[8]에 기반한 KCL 설립은 아서 웰즐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감정싸움을 주고 받던 둘은 결국 1829년 3월 21일 배터시 필드(Battersea Fields)에서 결투를 벌이게 된다.[9] 애초에 서로 죽일 마음은 없었기에 총은 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결과는 아서 웰즐리가 승리. 결국 그가 원하는 방향대로 KCL이 동년 8월 14일 정식 설립된다. 단 교수를 포함한 교직원들에 대한 종교 성향 시험(Religious Test)은 개교 이래 쭉 시행되어 왔는데, 1903년 신학부를 제외하고 완전 폐지된다. 이 둘의 대결은 Duel day라 불리며 KCL의 재학생 또는 졸업생들이 배터시 공원에서 3월 21일 즈음에 재현 행사를 개최하기도 한다.[10]

설립이 한창 논의될 당시, 학교 부지 선정에서도 꽤 애를 먹었다. 초기엔 버킹엄 궁전에 설립하는걸 아주 잠깐 논의하기도 했으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판단 하에 다른 지역을 물색한다. 그 다음 후보지로 거론된 곳이 리젠트 파크(Regent's Park)였는데 런던 상류층들의 거주지가 밀집된 곳에 대학교가 들어선다고 하니 상류층들의 반발이 심했다.[11] 그리하여 위치하게 된 곳이 지금의 스트랜드다. 당시 스트랜드는 서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가 지금의 모습으로 완공되기 전 이었으며, 상대적으로 땅값이 쌌다고 한다. 그리하여 짓게된 첫 건물이 스트랜드 캠퍼스에 위치한 대학의 메인 빌딩인 킹스 빌딩이다.[12] 또한 1829년 설립 당시 우리나라의 중·고등학생 나이대의 학생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Junior Department도 스트랜드 캠퍼스에 함께 설립되었다. 1897년 이 Junior Department는 윔블던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고, 몇년 후 KCL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이 학교가 현재 영국내 명문 퍼블릭 스쿨 중 하나인 킹스 칼리지 스쿨(King's College School)이다.

1834년엔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전기 공학자 겸 발명가이자 입체경(Stereoscope)의 창안자인 찰스 휘트스톤KCL의 교수로 임용된다. 휘트스톤은 그가 사망하는 1875년까지 KCL의 교수로 재직했으며, 대학의 위상을 격상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일평생 작성한 연구 노트와 발명품 모두를 KCL에 기증했으며, 이는 대학은 물론 영국의 중요 과학 유산으로 남아 특별 관리되고 있다.[13]

1836년엔 UCL[14]과 함께 런던 대학교(University of London)를 창설하게 되며, 1840년엔 링컨 인 필드(Lincoln's Inn Fields) 근처의 포르투갈 가(Portugal Street)에 킹스 칼리지 병원을 설립하게 된다.[15] 이후 늘어나는 환자의 수를 충당하기 위해 더 큰 병원을 신축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1909년 지금의 덴마크 힐(Denmark Hill)로 병원을 옮기게 된다. 여담으로 킹스 칼리지 병원의 역사를 얘기할때 조지프 리스터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1877년 그를 임상의학과 교수로 선임한 것은 신의 한수로 평가된다. 그가 킹스 칼리지 병원에 재직할 당시 도입한 무균 수술법(Antiseptic System)은 이후 킹스 칼리지 병원이 국제적 명성을 얻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리스터 이외에도 수많은 저명한 의료인 및 의학자들에 의해 KCL은 유럽 최대의 의학 교육기관으로 성장한다.[16]

1843년엔 찰스 배비지 같은 19세기의 저명한 과학자들 소유의 과학기기 컬렉션과 조지 3세 개인 소유의 컬렉션을 전시한 킹 조지 3세 박물관(King George III Museum)이 대학의 메인 빌딩인 킹스 빌딩에 개관했다. 이후 대학의 규모가 커짐에 따른 공간부족 현상으로 인해 1927년 폐쇄되었으며, 전시했던 과학기기들은 현재 KCL의 아카이브와 런던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 London)에 나누어 보관 중이다.[17] 1845년엔 영국 육군과 동인도 회사에서 활동할 전문 장교를 육성하기 위한 군사 학부(Military Department)를 설립했다. 이듬해인 1846년엔 성공회 사제들을 육성하기 위해 신학부(Theological Department)를 설립했으며, 1855년엔 런던에서 처음으로 야간수업을 도입하였다.

1860년엔 KCL의 역사에 있어서 두가지 기념비적인 일이 발생하는데, 첫째는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 중 한명으로 꼽히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KCL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과의 학장으로 임용된 일이며, 둘째는 세계 최초의 간호대학인 現 Florence Nightingale Faculty of Nursing and Midwifery가 1860년 7월 9일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의해 세워진 일이다. 특히 King's years라 불리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재임 기간 5년은 그의 커리어의 전성기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별개의 대상이라 여겨졌던 전기장과 자기장의 통합을 이룬 맥스웰의 방정식이 그의 재임 기간동안 유도 되었다.[18] 그의 업적에 영향을 받아 KCL의 물리학과엔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교수의 제안에 의해 1935년 설립된 Maxwell Society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19]

KCL은 1878부터 근대 여성들의 교육을 위한 강의를 개설해 운영해 왔으며, 1885년에 정식으로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 학부(Ladies' Department)를 설립했다. 의식의 흐름기법으로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도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이 학부에서 수학하며 릴리언 페이스풀 같은 당대 여성계 유명인사들과 교류한다.[20] 이 학부는 이후 1902년에 Women's Department로 이름을 바꿔 달게 된다.

2.2. 1900년대

파일:Battersea Fields 결투 100주년 기념 재연 행사_KCL_1929년.png
파일:폭격으로 파괴된 쿼드_1940년 10월 8일.png
파일:데즈먼드 투투 at KCL_17th Nov 1984.jpg
<rowcolor=black,white> 배터시 필드 결투
100주년 재연행사(1929)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폭격으로 파괴된 쿼드(1940)
KCL 강연회에 참석중인
데즈먼드 투투(1984)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 40주년
기념행사(1993)[21]

1910년엔 King's College London(Transfer) Act 1908에 의거하여 법률적 독립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는 KCL이 표면적으론 런던 대학교 그룹내에서 독립된 주체로서의 활동은 가능하지만, KCL의 자체적인 단독 학위수여가 법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또한 1885년 설립됐던 KCL의 여성 학부에도 이즈음 변화가 생기게 된다. 1915년에 KCL의 여성 학부는 캠든 힐 로드(Campden Hill Road)에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게 되었는데, 이때 여성 학부 산하 사회과학 계열을 제외한 나머지 학과들이 KCL의 스트랜드 캠퍼스로 강의 장소를 옮기면서 본의 아니게 한 학부가 두개의 다른 장소로 쪼개지게 되었다. 이후 캠든 힐 로드에 남아있던 사회과학 계열 학과들이 1928년 자율성을 요구하며 King's College of Household and Social Science로 이름을 바꾸며 KCL의 여성 학부 산하가 아닌 독립된 교육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했다.[22] 1953년 마침내 퀸 엘리자베스 대학(Queen Elizabeth College)이란 교명으로 왕실 헌장을 받으며 정부로부터 대학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게됨과 동시에 KCL에서 공식적으로 분리 독립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동안엔 스트랜드 캠퍼스의 대학 건물 전체가 예비 소방서(Auxiliary Fire Service)로 활용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에 지금의 스트랜드 캠퍼스 쿼드(Quadrangle)와 학교 부속 예배당을 포함한 킹스 빌딩의 일부분이 폭격에 의해 소실되었다.[23] 이 기간동안 KCL학생들은 브리스톨 대학교로 피신을 가 그 곳에서 학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전후, 소실된 건물들의 복구작업이 진행됐으며, 1952년에 물리학부와 전자공학부가 설립되었다.
KCL에서 수행된 가장 유명한 과학 연구 중 하나는 바로 1953년 모리스 윌킨스 로잘린드 프랭클린 레이먼드 고슬링(Raymond Gosling) 및 KCL 산하 랜달 연구소(Randall Centre for Cell & Molecular Biophysics)의 연구원들과 함께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일일 것이다. 이 연구로 모리스 윌킨스는 1962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하게 된다.[24]

19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런던내 다른 고등교육기관들과의 합병을 추진하게 된다. 1985년에 첼시 과학기술대학(Chelsea College of Science and Technology)과 KCL 여성 학부에서 분리 독립했던 퀸 엘리자베스 대학을 합병하였고, 1997년엔 Institute of Psychiatry, 1998년엔 UMDS[25]를 합병하는데 성공한다.

2.3. 2000년대 – 현재

파일:설립 175주년 기념 행사_KCL_2004.png
설립 175주년 기념행사(2004)

2004년엔 KCL 설립 17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전술한 배터시 필드 결투(The Duel in Battersea Fields)를 재연하였다.[26]

2006년엔 지난 1910년에 상실했던 KCL 단독 학위 수여(Degree-awarding power)에 대한 법적 권한을 되찾았으며, 2008년 졸업생부터 KCL 단독 이름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다.[27] 2010년 10월엔 대학 모금 캠페인인 World questions | King's answers를 前 영국 총리 존 메이저와 함께 시작하게 된다.[28] 당초 목표 금액은 2015년까지 £500m 달성이었으나, 조기 달성하며 £600m으로 목표를 상향 조정하였다. 최종 £610m으로 기한내 초과 달성에 성공하며 굉장히 성공적인 모금 캠페인으로 평가받게 된다.[29]

2011년엔 지난 2003년 문을 닫았던 화학과(Chemistry Department)를 다시 설립했으며, 2012년엔 킹스 빌딩과 너무 가까워 갈등을 일으키던 서머셋 하우스의 East Wing을 KCL의 스트랜드 캠퍼스 부속 건물로 편입하였다.[30] 2013년엔 피터 힉스 교수가 물리학상을, 마이클 레빗 교수가 화학상을 수상하며 한해에 두 명의 KCL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한다.[31] 2014년엔 KCL 부속 식스폼(Sixth Form)인 King's Maths School을 런던의 람베스(Lambeth)에 설립하였고, 이듬해인 2015년엔 알드위치 쿼터(Aldwych Quarter)의 상징적 건물인 부시 하우스(Bush House)와 그 부속 건물들의 소유권을 향후 50년간 임대하는데 성공하며 현재와 같은 형태와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2020년엔 KCL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던 마이클 호턴 교수가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1] 좌측이 윈칠시 백작, 그리고 우측이 아서 웰즐리 [2]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

UCL의 설립 당시 교명이 런던 대학교(London University)다. 지금의 런던 대학교(University of London)는 1836년 KCL과 UCL의 주도로 설립된 여러 대학들의 연합체다. 혼동하지 말것.

1836년 런던 대학교의 설립 이후 UCL은 지금의 University College, London으로 교명을 변경한다.
[3] 이 신학적 갈등으로 인한 탄생 배경이 KCL과 UCL 두 대학 간 Rivalry의 시작이다.
KCL-UCL Rivalry

이 Rivalry는 KCL과 UCL간 매년 진행하는 London Varsity의 형태로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는 두 학교간 공동 세미나 이벤트를 종종 개최하며 건설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4] King's College 역사

다만 KCL의 공식 개교 행사는 설립 연도인 1829년을 기준으로 한다.
[5] King's Collections
Pistols at dawn 참고
[6] 15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7] 그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는 Test Act에 기반하여 성공회 교도만 수업 및 졸업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비 성공회 교도들도 수업은 들을 수 있었지만 졸업할 권리는 없었다. [8] 간단하게 얘기해서 가톨릭 교도와 개신교도들의 기본권을 탄압하는 제도다. [9] 지금도 런던에 있는 그 Battersea Park에서 벌어진 일이다. 현재는 배터시 공원(Battersea Park)이라 불리지만 1846년 전까지는 배터시 필드(Battersea Fields)라 불렸다. # [10] 참고 자료:
Duel Day
KCLSU - King's Duel Day Event
[11] 학생들의 이동 및 결집으로 인한 소음이 그들의 반대 이유였다. [12] Ten interesting facts about King's 참고 [13] 참고 1, 참고 2 [14] 당시 UCL의 교명은 London University. [15] Lincoln's Inn Fields 참고 [16] 참고 자료:
King's Collections - King's College Hospital
King's Biomedical Heroes
Innovation in surgery - how far have we come?
[17] 단 이 모든 과학기기들은 KCL의 소유다. 현재 과학박물관에 전시된 기기들은 과학박물관 측에서 임대 형식으로 KCL에 돈을 지불하고 빌린 것이다. [18] KCL엔 맥스웰 방정식 탄생을 기념하는 IEEE 명판이 위치해 있다. [19] 참고 자료:
King's People - James Clerk Maxwell
KCL - Why James Clerk Maxwell should be the new face of the £50 note
myScience - 1861: James Clerk Maxwell’s greatest year
The Victorian Web - A Biography with Reference to His Time at King's College, London
[20] King's People - Virginia Woolf 참고 [21] 좌측부터 레이먼드 고슬링, 허버트 윌슨, 모리스 윌킨스, 알렉산더 스톡스. 모두 KCL 랜달 연구소 소속으로 DNA 이중나선 구조 발견에 기여했다.
이 중 레이먼드 고슬링은 DNA 구조 연구 당시 KCL에서 박사과정 학생이었으며, 로잘린드 프랭클린 모리스 윌킨스가 그의 지도교수였다.
[22] 실질적으론 이름을 바꾼 1928년부터 독립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다만 독립에 대한 정식 허가(왕실 헌장)를 1953년에 받게된다. [23] King's Collections, History of the Quad 참고 [24] King's People - Maurice Wilkins
KCL - Wilkins and Franklin
Ray Gosling on DNA research
Maurice Wilkins & DNA
[25] Guy's Hospital Medical School과 St Thomas's Hospital Medical School, 그리고 Royal Dental Hospital of London의 연합체 [26] King's College London 175th Anniversary Duel Day Re-Enactment - Part 1
King's College London 175th Anniversary Duel Day Re-Enactment - Part 2
King's College London 175th Anniversary Duel Day Re-Enactment - Part 3
175th Anniversary of the College
[27] King's College London - Lions on the catwalk 참고 [28] Major campaign aims to put King’s among the fundraising elite

2013년 11월 12일 KCL 존 메이저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KCL - Sir John Major receives honorary doctorate
[29] YouTube - World questions | King's answers
KCL - World questions | King's answers campaign
[30] 현재 KCL의 The Dickson Poon School of Law로 사용중이다.

다른 단과대 이름과는 달리 Dickson Poon이라는 사람 이름이 붙어있는데, 홍콩 재벌 반적생潘迪生(영화배우 양자경의 전 남편)의 영어식 이름이다. 반적생이 개인으로는 이 대학 사상 최대의 기부금을 냈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는 뜻에서 법학부 이름을 변경했다. 참고
[31] KCL News - Double Nobel Prize success in N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