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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31 19:52:37

페터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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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제1제국 제21대 차르
페터르 1세
파일:페터르 1세.jpg
이름 페터르 1세
(영어: Peter I, 불가리아어: Петър I)
출생 미상
사망 970년 1월 30일
직위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불가리아 제1제국 제21대 차르.

2. 생애

시메온 대제와 재상 게오르기 수르수불(Георги Сурсувул)의 여동생의 아들이다. 형으로 미하일이 있었는데, 부친이 미하일을 수도자가 되도록 했기 때문에 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927년 5월 27일 부친이 사망한 뒤 새 차르가 되었고, 즉위하자마자 트라키아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 황제 로마노스 1세는 결혼 동맹을 제안하는 한편 세르비아와의 동맹을 추진해 불가리아를 견제하려 했다. 페터르 1세는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익하다고 판단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로마노스 1세의 손녀 마리아와 결혼했다.

불가리아 제국 차르가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자칭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쟁의 소지가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지만 협상을 통해 일단 불가리아 제국과 동로마 제국 사이에는 현상 유지하는 형태의 40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후에 체결된 협정에 따라 불가리아 대주교는 공식적으로 불가리아 총대주교로 승격하였으며, 실리스트라 대주교가 최초의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되었다. 그리고 국경선은 897년과 904년에 체결된 조약에 따라 정해졌고, 동로마 제국의 연간 공물 지급이 갱신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평화를 반가워한 건 아니었다. 동로마 제국에 대한 강경책을 폈던 선제 시메온을 지지했던 이들은 페터르 1세의 평화 지향 정책에 반대했다. 928년, 페터르의 동생 요한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지만 발각되자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930년 시메온의 장남 미하일이 수도원을 탈출한 뒤 스트루마 일대에서 많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가서 병사했고, 페터르는 미하일의 잔당을 소탕했다.

931년, 세르비아의 통치자 차슬라프는 프레슬라프에서 탈출한 뒤 세르비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페터르는 반란 진압을 위해 토벌군을 잇달아 파견했으나 모조리 격파당하자 어쩔 수 없이 세르비아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여기에 마자르 족이 934년, 943년, 948년, 958년에 잇달아 불가리아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연전연패했다. 그는 그들에게 공물을 바칠 수밖에 없었고, 다뉴브 강 북쪽의 불가리아 영역에 정착하는 걸 허용했다.

이렇듯 제위 초기에는 내란에 시달렸고 후기에는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긴 했지만, 그의 재위 기간은 전반적으로 평화로웠다. 그는 역대 불가리아 제1제국 군주들 중에서 가장 긴 재위기간인 43년간 집권하면서 교회에 아낌없이 기부하는 등 정교회 진흥 정책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것이 역효과를 야기하여, 성직자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군림한 뒤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백성을 착취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민중은 이에 반감을 품었고, 많은 이가 이단으로 정죄된 보고밀파를 수용했다. 페터르는 이들을 강경하게 탄압하여 정교회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965년 초, 불가리아는 일찍이 제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제국의 공물을 받기 위해 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니키포로스 2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대사 앞에서 불가리아인들을 혐오스럽고 더러운 거지 민족이라고 비난하고 불가리아 왕은 짐승 가죽 옷이나 입는다고 욕한 뒤 내쫓았다. 그후 니키포로스는 군대를 일으켜 불가리아 변방으로 쳐들어가 국경 요새 몇 곳을 함락시켰다. 니키포로스 2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키예프 루스의 발칸 반도 진출을 용인했다. 이에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는 968~969년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벨키 플레슬라프까지 진격했다. 페터르 1세는 이들의 침략에 심한 압박을 받다가 970년 1월 30일 뇌졸중으로 급사했다. 차르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가리아는 무기력해졌고, 아들 보리스 2세는 키예프 루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