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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12:34:29

카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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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카를 융
Carl Jung
파일:71086305_1343657825758159_5480055494313771008_n.jpg
본명 카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출생 1875년 7월 26일
스위스 투르가우주 케스빌
사망 1961년 6월 6일 (향년 85세)
스위스 취리히주 퀴스나흐트
국적
[[스위스|
파일:스위스 국기.svg
스위스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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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직업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수상 명예박사 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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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 대학교 (1909)
포덤 대학교 (1912)
하버드 대학교 (1936)
알라하바드 대학교 (1937)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 (1937)
캘커타 대학교 (1938)
옥스퍼드 대학교 (1938)
제네바 대학교 (1945)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1955)
취리히 시 문학상 (1932)
RSM 명예회원 (1939)
SAP 회장임명 (1946)
퀴스나흐트 명예시민 (1960)
배우자 에마 융 (1903년 ~ 1955년, 사별)[1]
자녀 5명
종교 개신교
서명 파일:Carl_Jung_signature.svg.png

1. 개요2. 프로이트와의 관계3. 말년4. 의의, 한계와 영향5. 융의 이론들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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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큰 줄기를 만든 학자이다. 프로이트의 수제자라 불릴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결국엔 아들러의 사상을 받아들여[2]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창시해냈다. 콤플렉스 심리학 그리고 분석심리학의 선구자이다. 또한 서양 지식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얻고 있는 영성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인간의 영혼(정신)이란 각각 대극, 대립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요소들은 대립이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는 이야기이다. 건전한 정신이란 조화와 균형을 이룬 상태의 영혼이라는 말. 또한 집단무의식, 콤플렉스, 그림자, 페르소나, 아니마 아니무스 등의 개념을 도입하였다.

신경증 환자가 그 나름의 법칙을 갖고 있다는 통찰을 입증하기 위해, 융 자신이 치료경험이나 그 당시 심리학에서 무관한 신화, 종교, 연금술, 신비주의 등 여러 분야를 끌고 와서 이론을 만들었기 때문에 문제의 여지를 보인다는 주장이 있다.

융은 동양사상에 대응하는 서구사상의 원류[3] 연금술을 재발견하였다. 연금술을 물질의 변화가 아닌 영혼의 연성으로 해석하였으며, 상징들이 가진 의미를 추적하고 해석하였다. 이러한 상징들에 대한 해석은 꿈이나 환자에게서 채집할 수 있는 인간 무의식에서 나타나는 상징들과 연결되어 사례 해석의 뒷받침이 되었다.

동양의 최고수준의 정신문화에도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일례로 전문적인 수행자들이 주로 읽는 전진교의 조사 여동빈의 태을금화종지를 번역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이 책을 <황금 꽃의 비밀 The Secret of the Golden Flower>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어 영성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2. 프로이트와의 관계

처음엔 프로이트와는 나이 차이가 꽤 났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친밀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 관련 논문[4]을 읽고 융은 크게 감명을 받아 공식적으로 프로이트를 지지하였다.[5] 그러자 학계에서 명망있는 유명인과 학자들은 융에게 협박편지를 보내고 일갈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융은 모두 거절한 뒤 프로이트를 만나러 갔다. 둘은 만나자마자 13시간이나 대화를 나누었고 이후 편지도 자주 나눴다. 자연스레 뒷사정을 안 프로이트는 융에게 고마운 감정을 가졌을 것이고 프로이트에게 융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6]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하고 제2인자로 융을 아들처럼 아끼고 늘 옆에 데리고 다녔다.[7] 미국 여행도 같이 갔었다. 하지만 미국 여행 이후에 사이가 나빠져서[8][9], 서로 연락도 안 하더니 융이 프로이트를 무시하기 시작했다.[10] 그러다 결국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되었다.[11]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융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부정한다.[12]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더 넓은 의미로서의 이론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융은 분석심리학을 창시했다. 프로이트를 비판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인데, 첫째는 프로이트가 자신의 이론을 교조화하려 했고 그걸 융에게 암시적으로 부탁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는 것이었다. 이미 정신분석학의 최고 권위자였던 프로이트가 융에게 후계자를 내외적으로 표했던 일화를 보면 당연한 사건이다. 둘째는 오로지 성(性)만으로 인간정신을 해명한다는 것이 융에게 있어서 불합리하게 여겨졌다는 것이었다.[13]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이론을 자기 학파의 핵심 이론으로 지켜야 한다 주장했으나, 융은 아니라고 보았고 결국 둘은 견해 차이로 결별하게 된다.[14]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 산하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많이 갈라섰다. 말년에 프로이트는 융을 살짝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화

3. 말년

중년 이후 자신을 위한 집을 스스로 짓기 시작했다. 조금씩 지어가며 마음가는 대로 덧붙이고 하는 공사여서 깔끔하지는 않으나 완결은 지은 듯 하다. 내부는 스스로 그린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하며 자신의 저서 레드북[19]과 마찬가지로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이 집에 관한 일화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소설인 1Q84에서 언급되어 있는데 집의 입구에 '차가워도 차갑지 않아도 신은 여기에 있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내용이다. 이 글귀의 영문 번역은 'Cold or Not, God is Present'인데 카를 융의 집에 새겨져 있는 실제 문구는 'Called or Uncalled, God is present'(실제 문구는 라틴어 Vocatus atqua non vocatus deus aderit.) (“불리었든 불리지 않았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로 번역되며 영어 번역의 발음이 비슷할 뿐 뜻은 상이하다.

말년에는 언동이 지리멸렬해진 탓에 정신분열증을 앓은 것은 아닌가하는 의혹이 있는데 검증된 바는 없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만한 사항은 아니다. 83세 당시 특집으로 기획된 BBC 인터뷰에 정정한 모습이 영상으로 남아있다. # 인터뷰 내용은 결코 정신분열증인 사람이 말할 수 없는 통찰력 있는 내용이다. 말년에 그는 깊은 통찰력과 분석을 통한 사회비평으로 명성을 날렸다.[20]

4. 의의, 한계와 영향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은 현대 철학이나 (문화)인류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물론 그의 무의식 개념이 그대로 쓰인 것은 아니며, 같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신화, 설화, 상징 등에 내포된 의미를 분석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는 질베르 뒤랑, 조지프 캠벨,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저작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현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에 융의 영향력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재검증을 거쳐서 융의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데, 이는 융의 이론이 현대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심리학과는 차이가 많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도 현대엔 문제점이 많이 발견되어 대부분이 사장되었지만, 그래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서의 업적을 인정하여 융보다는 훨씬 많이 다룬다. 개론서에선 융에 관한 내용이 한 줄 정도 나오는 것도 길게 나오는 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21]

더군다나 융의 저작은 프로이트의 저작에 비해 진입 장벽이 높다. 프로이트의 저작은 정신의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끔 쓰인 데다 문장이 예술적이지만, 융의 저작은 정신의학, 종교, 신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일 뿐더러 독일 철학서들만큼이나 문체가 난잡하기로 악명이 높다. 현재 한국 융 연구원이 융의 저작들을 일부 번역한 것이 놀라울 지경이다.

많은 사람들이 칼 융의 이론과 분석이 허무맹랑한 오컬트에 속한다고 치부하지만, 이는 융의 저서를 잘못 읽었거나 몇몇 개념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착각이다. 실상 그의 인격 통찰과 이론을 본다면 결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진실을 담고 있다. 즉 오컬트 및 특정 단체[22]가 칼 융의 극악무도한 글 솜씨에 의해 이해를 못하고 혼용하거나 맥락과 상관없이 빌려다 쓴 것이다. 흔히 떠도는 낭만적 낙관주의, 리비도와 육체의 오묘한 이치들은 칼 융이 말하고자 한 바가 아니다.

그는 오로지 개인의 인격(personality)에 초점을 맞춘 프로이트의 한계를 극복하여, 개인 너머에 존재하는 집단 무의식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인물이다. 즉, 칼 융은 비과학적이라고 방치되었던 신화와 역사, 비의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세계를 밝히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인간학에서는 인간의 합리적 생각은 물론이고 비합리적 미신마저 이해해야 한다.

5. 융의 이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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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1] 혼전 성씨는 '라우셴바흐(Rauschenbach)'. [2] 융이 직접 말하길 프로이트 성이론과 아들러의 이론 모두 긍정한다. [3] 일종의 신토불이. 당시 불교 사상이 지식인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융도 티베트 사자의 서 같은 번역서에 서문을 쓰기도 했다. [4] 1900년 <꿈의 해석>, 1901년 '일상 생활의 병태 심리', 1905년 '성 이론에 관한 세 논문'과 '위트와 무의식과의 관계' [5] 당시 프로이트의 평판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20세기 큰 획을 그은 위인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 조촐한 유대 집안 출신이였으며 학계에서 따돌림 당하는 외톨이 신세였다. "정신병은 여자만의 병이 아닌 인간의 병으로서 남자도 걸릴 수 있다"라고 발언 후 학계에서 파문 당하고 생활고에 빠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주류 의사와 동료학자들은 그를 업신여겼다. [6] 프로이트(1856)와 칼 융(1875)의 나이차이는 19살이고 미국 여행 이전 그 둘을 알던 사람들은 부자관계와 같이 친밀했다고 알려져있다. [7] 융의 친아버지는 융이 바젤 대학교에 입학 한 후 얼마있다 별세했다. 그래서 융에게 있어 프로이트는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실제로 둘은 부자관계처럼 보일 정도로 친밀했다고 전해진다. [8] 프로이트는 자신의 권위를 무너트리고 1인자의 지위를 빼앗아 갈 거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며 암시적으로 융을 경계했다. 융은 그 당시 프로이트는 자기 이론의 권력화에 몰두한 나머지 자기 이론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본인을 동일시하였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평소에 융에게 아버지로서 대접을 받았던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융)에게 당할 (권력)살해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9] 융이 프로이트의 꿈을 해석하려던 중, 그에게 사생활을 얘기해달라고 말하자 프로이트는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 없어!"라고 거절했다. 융은 그 순간 프로이트가 그 말을 하며 스스로 권위를 상실했다고 말했다. (칼 융 기억 꿈 사상 자서전 295p) [10] 미국여행을 갈 때 두 사람은 '우리가 미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게 할 거다!'며 갔는데 스승이었던 프로이트는 일반석에 제자였던 융은 귀족층이 타는 1등석에 타고 갔다고 한다. [11] 제드 레벤펠드의 소설 살인의 해석에서 미국 여행을 온 지그문트와 카를 융이 왜 사이가 틀어졌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뤘다. [12] 융의 자서전을 참고하면 프로이트를 완전히 부정하진 않았다고 한다. [13] 자서전 중 "내가 프로이트의 성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일반에 널리 잘못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로 성은 내 심리학에서 정신 전체의 본질적인(유일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표현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주요한 관심은 성의 개인적인 의미와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서서 그것의 정신적인 측면과 신성체험적인 의미를 탐구하고 설명하는데 있다." [14]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만의 진리에의 열망이 만들어낸 일이다. 융은 학자로서 권위와 명성보다는 진리를 추구했다. 물론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말이다. [15] 융이 말하길 "촉매에 의한 외면화 현상의 한 가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러자 프로이트는 "헛소리 하지마시오!"라고 말했다. 융이 다시 답하길 "잠시 후 또 폭음이 나리라는 것을 지금 예고합니다."라고 하며 프로이트의 두 눈을 계속 응시했다고 전해진다. (자서전(영문판) 289p) [16] '유령'이라는 단어가 유치하기 때문에 우스운 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융에게는 진지한 체험으로서 ' 동시성 현상'이라는 논문까지 만들었다. [17] 정신분석학을 과학의 영역으로 포섭시키기 위해 프로이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실 그의 과학적 이론화는 정신분석학의 사활이 달린 문제였기에 이런 사건들이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얼마나 황당하고 소름이 돋는 얘기일지 짐작할 수 있다. [18] 융은 권위 찬탈의 두려움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임을 알 수 있다고 서술했다. 또한 그 발언으로부터 프로이트 자신 스스로의 권위를 상실하게 했다고 서술했다. (기억 꿈 사상 295p) [19] RED BOOK. 카를 융이 말년에 지은 저서로, 원래 제목은 새로운 책이라는 뜻의 Liver Novus였으나 붉은 표지를 염두에 둔 카를 융이 별칭으로 레드 북이라고 부르던 것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해당 책에 포함된 삽화도 모두 카를 융 본인이 그렀다. 다만 미완성으로 남았으며 원고는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다 2001년에 심리학자들에 한해서 공개되었으며 2009년에 들어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공개되었다. [20] 융의 말년엔 이미 프로이트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위인으로 세손가락 안에 뽑히고 철학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겼으니 그와 중요한 관계였던 융도 더 유명해졌다. 인텔리층에서의 윗어른으로 모시는 분위기가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21] 사실 일반적으로 개론서의 성격 파트에선 한 단락으로 짚어보고 넘어가는데, MBTI를 설명하기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 흔히 프로이트의 성적 발달 이론을 소개하면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같이 소개하는데, 여기서 엘렉트라 컴플렉스는 융이 만든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남성 중심으로 설명한다. [22] 신비주의 단체, 히피, 사이비 종교 분파 [23] 비유를 하자면 프로이트는 꿈이 일종의 가면의 역할을 하여 진실된 내용을 왜곡한다고 주장했고, 그에 반해 융의 꿈은 때로는 가면 역할과 예시(豫示) 역할, 보충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4] 이는 『아이온』, 『기억 꿈 사상』에서 언급된다. 가령 선한 하나님에 집착한 인간은 '악'을 만든 하나님이라는 모순을 타락천사, 적그리스도 등의 개념으로 대극의 평행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이런 균형 메커니즘은 종교계에서 파문당한 바뤼흐 스피노자가 실제로 사회비평을 할 때도 사용된다. [25] 나는 많은 남자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배신했다. 나는 많은 여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날 배신하지 않았다. [26] 이 말이 <우먼센스>라는 한 여성 잡지에 그 내용이 실렸고, 이계인이 우연찮게 그 여성 잡지에서 이 내용을 읽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디씨에서 해당 사실을 언급한 글 [27] 프로이트가 반대했다고 한다. [28] -저서 <꿈 기억 사상> [29] 눈이 빨리 녹아버려 스키를 탈 수 없었고, 시간을 때우려고 그곳에서 열리는 무료 강연을 들으러 갔는데 그게 융의 강연이었다고 한다. [30] 궁지에 몰리면 자살할 것이라고 얘기했는데, 정확히 들어맞았다.